조철현 감독의 영화 '나랏말싸미(The King’s Letters, 2018)'가 개봉되자마자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세종이 아닌 불교 승려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내용을 두고 역사 왜곡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까지는 세종 단독, 또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과 공동으로 한글을 창제했다는 설이 정설이었다.
영화 '나랏말싸미'의 한 장면
조철현 감독은 '나랏말싸미'에 신미대사를 등장시킨 이유를 '우리는 실존했지만 역사 속에 감춰져 있던 신미라는 인물을 발굴해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으로 조명하려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다. 세종대왕께서 혼자 한글을 만드셨다 하더라도 그 내면에서 벌어졌을 갈등과 고민을 드라마화하려면 이를 외면화하고 인격화한 영화적 인물이 필요한데, 마침 신미라는 실존 인물이 그런 조건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기에 채택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1443년 12월 30일 임금이 친히 새 문자를 만들었다는 기록 이전에 아무것도 없는,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의 역사적 공백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신미는 그 공백을 활용한 드라마 전개에서 세종대왕의 상대역으로 도입된 캐릭터다. 이 과정에서 신미는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했다. 신미가 범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능통했고 대장경을 깊이 공부했다고 언급한 실록 기사들까지 감안하면 1443년 12월 이전의 역사 공백을 개연성 있는 영화적 서사로 드라마화할 만한 근거는 되겠다고 판단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 그는 '세종대왕의 위대함이 어떤 희생을 딛고 나온 것인지, 그렇기에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인지 그리고자 했다. 진심을 전달하고자 하는 소통과 노력의 부족으로 이런 점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던 점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철현 감독이 '훈민정음 창제 신미대사 주도적 역할설'을 바탕으로 '나랏말싸미'를 만든 것은 한글로 된 최초의 불서(佛書)로 추정되는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각선종석보'는 1999년 입적한 일타(日陀) 스님이 중국에서 구해 가지고 온 책이다. 일타 스님은 제1권을 복사하여 려증동(呂增東) 전 경상대 교수에게 연구 자료로 기증했고, 대전보건대학 교수와 백불대학윈장을 역임한 노태조 교수가 다시 이를 복사하였다.
현재 학계에선 한글 불서의 상한선을 일반적으로 '석보상절(釋譜詳節)'이 완성된 세종 28년(1446년)으로 본다. 그런데, 일타 스님이 발견한 '원각선종석보'는 세종 20년(1438년) 천불사(天弗寺)에서 간행된 것이다. '월인천강지곡'보다 8년이나 앞선 것이다. 노태조 교수가 한국불교문화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공개한 '원각선종석보'는 아직까지 이 책의 이름이나 천불사라는 절을 언급하고 있는 문헌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진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검증이 필요하다. 진본이 확실하다면 한글 창제 시기는 기존의 세종 25년(1443년)에서 5년 이상 앞당겨지게 된다.
노태조 교수는 '한글 창제가 워낙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천불사 역시 실제 절 이름이라기보다 당시 궁중에 있던 내불당을 비밀리에 지칭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설명했다. '원각선종석보'는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석보(月印釋譜)' 등과 같이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일대기를 그린 석보계(釋譜系) 한글 불서로 전체 5권 분량이다. '원각선종석보' 제1권 끝머리에는 1436~1449년 사용된 명(明)나라 연호인 ‘정통(正統) 3년 천불사’라고 적혀 있어 1438년 개판·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노태조 교수는 '원각선종석보'가 "체제나 판형, 자형, 어휘, 문장, 방점, 한자에 동국정운식 음이 달려있는 것 등이 '석보상절'이나 '월인석보' 등과 비슷하여 15세기 초 문헌으로 손색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원각선종석보'는 '석보계 최초의 한글 불서로, 앞으로 관련 학계의 본격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교수는 '일타 스님이 입적한 지 3년이 지났기 때문에 유품이 정리되고 원본이 공개되면 진본 여부를 확실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원각선종석보'가 진본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기존의 한글 창제설은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신미대사의 본명은 김수성(金守省)이다. 아버지는 옥구진병마사 김훈(金訓)이고, 어머니 정경부인 이씨는 예문관 대제학 이행의 막내딸이었다. 동생은 유학자이면서 숭불(崇佛)을 주장한 김수온(金守溫)이다.
속리산의 복천사(福泉寺, 지금의 법주사)에 출가한 신미대사는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大藏經)과 율(律)을 배웠다. 세종 말년 왕이 두 왕자와 왕후를 잃고 불교에 마음을 두었을 때, 신미대사는 동생 김수온과 함께 세종을 도와 내원당(內願堂)을 짓고 법요(法要)를 주관했다. 또 복천사를 중수하고,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봉안했다. 이 공으로 문종 때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되었다.
1456년(세조 2) 도갑사(道岬寺)를 중수하여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3구(軀)를 봉안했다. 1458년에 조정의 요청으로 해인사(海印寺) 대장경을 인출할 때 이를 감독했고, 1461년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할 당시 이를 주관했다. 이때 언해된 불경이 '법화경(法華經)', '반야심경(般若心經)', '영가집(永嘉集)' 등이다. 1464년 왕이 속리산 복천사를 방문했을 때 사지(斯智),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의 승려와 함께 대설법회(大說法會)를 열었다. 이해 상원사(上院寺)로 옮겨간 신미대사는 왕에게 상원사의 중창을 건의했다.
신미대사는 범어(산스크리트어)와 인도어, 티베트어에 정통해 여러 승려의 법어를 번역, 해석하였다. 그는 기화(己和)의 '금강경설의(金剛經說誼)'를 교정하여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1책을 만들고, '선문영가집(禪門永嘉集)'의 여러 본을 모아 교정했으며, '증도가(證道歌)'의 주를 모아 책으로 간행했다. 그의 사후, 1450년(문종 1) 문종은 선왕인 세종의 뜻을 따라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
신미대사가 '동생 김수온과 함께 세종을 도와 내원당을 짓고 법요를 주관했다.'는 기록과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간경도감을 설치할 당시 이를 주관했다. 이때 언해된 불경이 법화경, 반야심경, 영가집 등이다.'라는 기록, '범어(산스크리트어)와 인도어, 티베트어에 정통해 여러 승려의 법어를 번역, 해석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그는 언어학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천재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신미대사는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승려였음이 확인된다. 궁중에 설치한 내원당이 천불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신미대사 같은 언어학의 천재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관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은가!
영화 '나랏말싸미'의 한 장면
서울대학교 박갑수 교수는 한글 창제의 배경에 대해 '한글 창제의 두드러진 동기의 하나는 민족 문자를 만들어야겠다는 민족적 자주정신(自主精神)이다. 이는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서 벗어나 문화적으로 독립을 해야겠다는 자주정신이 발로된 것이다.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던 몇몇 민족은 이미 이 문화권에서 벗어나고자 민족문자를 만든 바 있다. 요(遼) 나라를 세운 거란(契丹)은 한자에 대항하여 920년 대소(大小) 거란문자를 만들었고,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女眞)은 1119년 대소 여진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원(元)나라를 세운 몽고(蒙古)는 1269년 파스파문자를 제정, 반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는 전제하에 '한글 창제도 이러한 일련의 탈 한문화(脫漢文化)의 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한글 창제의 동기가 한자문화권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적 자주정신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박갑수 교수는 한글 창제자에 대해 '흔히는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참여하고, 세종을 보필한 것으로 일러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종대왕을 비롯한 동궁(東宮)과 진양대군(세조), 안평대군 등 왕자들이 참여하여 왕가사업(王家事業)으로 은밀히 진행되었다.'면서 '그러기에 세종실록(世宗實錄)에 한글 창제에 관한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세종 25년(1443) 12월 30일조에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是謂訓民正音"이란 기록이 보일 뿐이다. 이렇게 정음 창제가 은밀히 진행된 것은 최만리 등의 반대상소에 보이는 바와 같이 당시 수구파 문인들의 반발이 거세고, 명(明)나라와의 유대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염려한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이어 '집현전 학사들은 창제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관여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정음을 반포한 정음과 같은 이름의 책 "訓民正音" 해례본 제작에 참여한 것이다. 세종실록에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29일조에 "훈민정음성(訓民正音成)"이라 보이는 것이 이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정인지 서문에는 연기(年紀)가 "正統十一年 九月上澣"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한 것은 이 정인지의 서문에 따라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박갑수 교수는 기득권층인 사대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민족적 자주정신의 발로에 따라 세종이 주도적으로 한글을 창제했으며, 집현전 학사들은 단지 보조적 역할만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운 왕조 중심의 설명 그대로다.
백건우 작가는 박갑수 교수의 주장에 대해 '박갑수의 글에서 핵심은 기득권층인 사대부의 보수적인 생각을 대변한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해 그 시기의 기득권 세력은 당연히 반대를 했던 것이고, 세종대왕은 그런 기득권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쌍한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것이 대전제다.'라면서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왕조 중심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즉, 권력을 가진 자가 기록한 문서의 내용만을 가지고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매우 쉽고 편리한 방법이고, 또한 자료도 풍부해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크게 의심하지 않고 따르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백 작가는 이어 '하지만, 지배자 또는 기득권 세력이 백성이 단지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 것은 합리적 이유가 될 수 없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 말이 중국(한자)과 달라서 가여운 백성들이 글자를 읽고 쓸 수 없다는 것은 언뜻보면 백성들을 위한 말일 수 있지만, 지배자의 논리, 지배자의 언어로 포장된 껍질을 벗기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샘학원 정해랑 강사는 박갑수 교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중 중심적 시각에서 훈민정음 창제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한글 창제의 취지를 애민 사상의 구현에서 찾으면서 백성의 불편함 때문에 한글을 만들었다고만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해랑 강사는 고려시대 이후 사회의식, 정치의식이 성장한 민중들은 소멸한 향찰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갈망하고 있었는데, 한글은 이러한 민중의 요구와 세종의 필요가 맞물리면서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글은 본래부터 양반과 민중 모두가 쓰는 전국민의 문자가 아니라 상민과 천민들의 글이었고, 상민과 천민들을 지배 세력이 사상적으로 가르치고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통치 수단의 하나로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주장이다.
새는 한쪽 날개로만 날 수 없고, 좌우 양쪽 날개가 다 있어야지만 날 수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왕조나 지배층에 의해서만 굴러가지 않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조화로 굴러간다. 역사는 이긴 자가 쓰는 것이고, 역사의 해석은 바라보는 자의 몫이라는 말도 있다.
영화 '나랏말싸미'를 두고 '역사 왜곡이다, 아니다'라는 논쟁을 바라보면서 한글 창제의 배경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원각선종석보' 진본이 있다면 논란을 일거에 잠재울 것이다. 진본이 속히 발견되기를 바란다.
2019.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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