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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무역 분쟁과 한일기본조약(韓日基本條約, 한일협정)의 추억

林 山 2019. 7. 21. 10:52

일본의 산업과 무역을 관장하는 경제산업성이 7월 1일 대한민국(한국)을 플루오린 폴리이미드(flurinated polymides)와 리지스트(Resist), 에칭가스(Hydrogen fluoride, 불화수소) 등 세 가지 품목에 대한 포괄적 수출 허가 대상에서 제외(수출 규제)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한일간 무역전쟁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일본이 수출 규제라는 경제보복 카드를 꺼내든 것은 한국의 일본군 성노예 희생자 배상 문제와 강제징용자 배상 문제 등 대일청구권 요구를 말소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일본은 1965년 6월 22일 한국과 '어업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 4개 협정과 25개 문서로 작성된 조약인 '대한민국(大韓民國)과 일본국(日本國)간의 기본관계(基本關係)에 관한 조약(條約)' 또는 '한일기본조약(韓日基本條約, 한일협정)' 체결로 대일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강제징용 피해자, 그리고 이들의 가족과 유가족, 대일청구권을 요구하는 시민운동단체 등은 한일협정의 문제점을 들어 피해당사자에 대한 개별적인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굴욕적인 한일협정(韓日協定)은 제2의 을사늑약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8일 미국의 주도로 연합국과 일본은 동맹국을 지향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군정기를 끝내고 주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아시아 각국은 이 조약에 반발했다. 피해국에 대한 일본의 전후 보상 문제나 아시아 각국과 일본 간의 국교 정상화 같은 문제는 덮어둔 채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전승국으로 인정받지 못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한국(남한)은 강화조약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고, 소련이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구권 국가들은 조약 자체를 거부하였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들은 강화조약과 별도로 보상 협상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향후 외교적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미국이 아시아 각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을 강행한 것은 한국전쟁으로 본격화된 냉전에서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를 견제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일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믿었던 장제스(蔣介石) 국민당군이 마오쩌둥(毛泽东)이 이끄는 중국인민해방군에 패퇴하여 타이완으로 쫓겨가자 차선책으로 일본을 선택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일본으로부터 침략 피해을 입은 대부분의 나라들이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회에서 조약 비준이 부결된 인도네시아, 배상청구권을 포기하지 않은 필리핀과 남베트남, 조약에 초대조차 받지 못한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남북한 등과의 협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오늘날 한일 관계가 이 지경이 된 것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은 1955~1959년에 걸쳐 버마(현 미얀마) 2억 달러, 인도네시아 2억2300만 달러, 필리핀 5억5000만 달러, 베트남 베트남 3900만 달러 등 침략 피해 국가들에 대해 배상금을 지급하였다. 일본이 정식으로 침략 피해에 대해 배상한 나라는 이들 네 나라뿐이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경제 원조나 무상 경제 협력을 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한일협정을 통해 경제원조를 하는 것으로 퉁치려 하였다.


미국은 구 소련과의 대결이 본격화되자 전략적 가치가 큰 일본과 남한을 묶는 정치, 경제, 군사적인 블록화를 시도하였다. 미국은 1950년 1월 26일 한미군사원조협정을 체결한 뒤, 1951년 9월 8일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여 한미일 동맹체제를 구축하였다. 미국은 한국전쟁 중에 미 국방성의 특별조달령으로 일본의 무기 제조를 허가하였고, 1954년 자위대 창설로 일본은 재무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원했다. 1951년 10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외교국장 시볼트는 재일조선인의 법적지위를 한국과 협상하도록 일본에 지시했다. 1951년 10월 21일 한국과 일본은 예비회담을 거쳐 이듬해 2월 15일부터 제1차 회담을 시작했지만 재산청구권 문제와 어업문제에 관한 의견대립으로 4월 21일 중단되었다. 반일 성향이 강했던 이승만 정부는 1952년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발표하고 영해를 침범하는 일본 선박을 나포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배상 요구액이 클 것을 우려한 일본은 오히려 한국이 식민지 시대 일본인의 사유재산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는 이른바 역청구권을 주장하였다. 


제2차 회담은 1953년 4월 15일부터 열렸으나 평화선 문제, 재일교포의 강제퇴거 문제 등으로 다시 결렬되었다. 그해 10월 열린 제3차 회담에서는 일본측 수석대표인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郎)가 '일본의 35년간의 식민지배가 한국 근대화에 유익한 것이었으며, 포츠담 선언은 연합국의 히스테리적인 반응'이라는 망언으로 국교정상화 논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5년 후 열린 제4차 회담은 1957년말에 예비회담을 거쳐 1958년 4월 15일에 시작되었는데, 재일교포 북송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다 1960년 4.19 민주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중단되었다. 같은 해 10월 25일부터 윤보선 정부에 의해 열린 제5차 회담은 5·16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쿠데타로 다시 유산되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박정희가 민간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자 당시 일본 총리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는 즉각 한국의 신정부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1961년 11월 22일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는 이케다를 만나 한국의 경제 재건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 1962년11월 12일 박정희 군사정권의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는 제6차 회담을 열고 대일청구권(對日請求權) 문제와 평화선, 재일동포 법적지위 문제 등을 타협한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합의하였다. 


'김종필-오히라 메모'에서 합의된 사항은 '첫째, 일본은 무상공여로 3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한을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천5백73만 달러는 3억 달러 중에서 상쇄한다. 둘째, 일본은 대외 협력 기금 차관(정부 차관)으로 2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 연리 3푼 5리로 20년 분할 상환한다. 셋째,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민간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 등 세 가지다. 


한일협상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대일청구권 문제였다.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 전쟁 한국인 희생자 등 피해당사자 들 개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배상을 주장했다. 일본의 주장은 정부간 협정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 피해당사자들이 배상 청구 소송을 걸어올 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피해당사자에 대한 직접적인 배상을 거부하고 개인이 받아야 할 몫까지 정부가 받도록 했다. 한국은 그 대신 대일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일본에 써줬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바로 '대일청구권 포기각서(抛棄覺書)'였던 것이다. '포기'란 피해당사자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배상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대일청구권 포기각서'라는 굴욕적인 내용이 알려지지면서 야당과 재야세력은1964년 3월부터 ‘대일저자세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회담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한일회담 즉각 중지를 요구하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대광고 등의 대규모 학생 시위는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한일협정반대운동(韓日協定反對運動)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반정부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기 시작했다. 전국 31개 대학 학생회는 ‘난국타개 학생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각 대학별로 ‘난국타개 궐기대회’를 가졌다. 한일협정반대운동은 6월 3일 절정에 달했다. 이후 이를 6·3항쟁이라 부른다.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 하야, 악덕재벌 처단, 학원사찰 중지, 여야 정객의 반성 촉구, 부정부패 원흉 처단'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렇게 되자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동의를 얻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학원과 언론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에 이어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위수령 이후 김홍일 등 예비역 장성들이 구속되었고, 교수 21명이 ‘정치교수’로 학원에서 추방되었다. 또 학생 서클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해체되고, 중앙정보부는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학생 11명을 구속 기소하고 6명을 수배했다. 그 결과 한일협정반대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1965년 6월 22일 박정희 정권의 수석전권대표 이동원(李東元) 외무부장관, 한일회담 수석대표 김동조(金東祚)와 일본 정부 수석전권대표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 수석대표 다카스키 신이치(高衫晋一) 사이에 한일협정이 조인되었다. 


한일협정의 주요 내용은 양국간에 외교·영사 관계를 개설하고, 대사급의 외교사절을 교환한다(제1조),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 등은 모두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제2조), 한국은 국제연합(UN) 총회 결의 제195조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제3조), 양국은 상호의 관계에서 UN헌장의 원칙을 지침으로 삼는다(제4조), 무역·해운, 그밖의 통상관계에 관한 조약 등의 체결을 위해 조속히 교섭을 시작한다(제5·6조) 등이다. 


'어업협정'에서는 양국 연안 12해리의 어업전관수역을 설정하고, 어업자원의 지속적 생산성을 확보하기 위한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했다. 일본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기존의 평화선이 무력화되고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으며, 기선저인망 어구의 사용이 허용되어 어자원의 남획이 방치되었다. 특히 독도 인근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한 것은 굴욕적인 것이었다. 독도 인근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함으로써 이후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어로 구획은 이후에도 계속 한일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어왔다. 1995년 일본이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1998년 잠정공동수역안이 체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에 의해 53만 명에 이르는 재일 한국인이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47년 5월2일 일본제국헌법 마지막 칙령으로 발포된 외국인등록령에서는 옛 식민지 출신으로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동포는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에 따라 재일교포는 일괄적으로 '조선'을 국적으로 하게 되었다. '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식민지 이전 시대의 조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1965년 이후 재일교포의 상당수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으나 다른 한 편에서는 분단된 남과 북 어느 한쪽도 선택할 수 없다는 생각에 조선 국적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일제가 35년간 강탈해간 한국의 문화재를 일본의 소유물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실제 조약문에는 일본이 강탈해간 문화재의 반환이 아닌 인도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돌려받은 문화재도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 녹유골호(부석제외함, 국보 제125호), 경주 노서동 금팔찌(보물 제454호)와 금목걸이(보물 제456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보물 제455호) 등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같은 국보급 문화재 상당수는 아직 일본에 남아 있다.


한일협정이 안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청구권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청구권 협정'에서는 일본이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장기저리 정부차관 및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공여하기로 합의했다.한일협정에 따라 일본은 박정희 군사정부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를 공여하기로 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전승국으로서 배상을 받은 데 비해 한국은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공여를 받았다. 또 한일협정문에 일제강점기의 죄악상에 대해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는 단 한마디도 들어 있지 않았다.   


1966~75년에 걸쳐 도입된 5억 달러의 대일 청구권 자금은 한편으로 포항제철 건립과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등 사회간접자본(SOC)에 투자되어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점은 어느 정도 인정되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부도덕하게도 일본이 피해당사자에게 개인별 보상을 하라고 공여한 돈으로 인프라 투자에 유용한 것을 국민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한국 국민을 속인 박정희 정권으로 인해 대일청구권을 놓고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일본의 커다란 견해 차이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배상 청구에 관한 견해 차이는 이후 한일 관계에 두고두고 화근을 남기게 된다.


'청구권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2조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중략.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일본은 위 조문을 근거로 오늘날까지도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개인적 피해 배상은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주장은 일면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일협상 진행 과정에서 일본은 피해당사자들에 대한 개별적 배상을 해주겠다고 주장했음에도 박정희 정권과 김종필은 이를 끝까지 반대하고 포괄적 배상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자 배상책임 일본에게만 있는가?


문제는 박정희 정권과 김종필에게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과 김종필은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받고 일제 식민지 치하 36년 동안 한반도에서 일본이 수탈해 간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모든 책임에 대해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한일협정에 따르면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대일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들에게는 통한의 한일협정이었다. 한일협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제강점기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가 단 한마디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가 강탈한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을 일본의 소유물로 인정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이처럼 한일협정은 이완용과 을사오적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으면서 맺은 을사늑약(乙巳勒約)과도 같은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1975~1977년까지 강제징용 피해자들 가운데 사망자 8,552명에 한해서만 1인당 30만원씩 총 25억7천만원을 배상하였다. 이는 일본에서 받은 배상금의 10% 정도밖에 안되는 돈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피해당사자들이 받아야 할 배상금 90%를 한국 정부가 받아서 가로챈 것이다.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피묻은 돈을 가로챈 박정희 정권은 그야말로 파렴치한 횡령범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제대로 된 나라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일협정 추진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과 일본 정부 사이에 별도의 독도밀약을 맺었음이 KBS 취재로 드러났다. 하지만 한일 양국 정부는 모두 독도밀약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 내부자료에 따르면 정일권-고노 이치로(河野一郎)의 '미해결의 해결' 이라는 대원칙 아래 1965년 1월 11일 서울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한국의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의 우노 소스케(宇野宗佑) 자유민주당 의원이 한일정상회담에서 한일협정 체결 과정 중 큰 문제였던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의하였다. 독도밀약은 다음날 박정희에게 재가를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김종필의 친형인 당시 한일은행 전무 김종락이었다. 


독도밀약은 한일협정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대원칙 아래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등 4개 부속조항으로 되어 있었다.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항은 일본 정부와 시마네 현이 독도(일본명 竹島, 다케시마)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민족문화연구소가 공개한 미국 중앙정보국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19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현 자유한국당) 총예산의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김종필은 일본에 쌀을 수출하는 과정에서 재일 한국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독도를 팔아먹은 독도밀약의 댓가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 정부와 법원의 방해로 고국에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 피해당사자들은 일본 또는 일본 기업을 상대로 개별적인 피해 배상 소송을 내기 시작했다. 2018년 10월 30일 대한민국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고(故) 여운택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 2차 대전 이전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재상고심 선고 공판을 열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1940년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생사를 넘나들며 고통을 당한 피해자 4명은 일본 기업에 배상 책임으로 물을 수 있게 됐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012년 대법관 4명(김능환, 이인복, 안대희, 박병대)으로 이뤄진 소부 판단을 그대로 인정했다. 당시 대법원 1부는 원고 패소 판결한 1·2심을 뒤집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고, 당시 신일본제철이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1부는 일본의 확정판결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강제동원 자체가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가치와 정면충돌해 국내에서 효력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됐다고 볼 수 없으며, 일본제철과 신일본제철의 법적 동일성이 인정된다고 봤다. 이에 따라 파기환송 후 항소심은 대법원 취지대로 고(故) 여운택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게 각 1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 판결은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 또는 일본 기업으로부터 피해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림을 의미했다. 하지만 대법원 승소 판결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배상을 받기까지는 험난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의 압력을 받고 일본 기업들이 배상을 거부한다면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이 배상 의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승소한 원고 4명은 법원 집행관을 통해 우리나라에 있는 일본 기업의 재산을 강제집행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일본에 있는 재산은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이 우리 대법원 판결과 달라 압류가 불가능하다. 신일철주금의 경우 포스코에 투자한 지분이 있지만 재산 관할권은 미국이 갖고 있다. 이를 찾으려면 미국에서 또다시 긴 소송을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될 경우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되었다. 한일협정은 박정희 정권이 일본의 식민 통치와 그 과정의 불법행위를 문제삼지 않겠다고 써준 각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박근혜 정권 당시 법원의 고의성 재판 지연으로 인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났다는 것도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최종 판결이 나오자 일본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2019년 7월 1일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라는 강력한 경제보복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에 한국 국민들은 세븐일레븐과 유니클로 등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하면서 수출 규제를 철회하라고 일본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일본 상품 불매운동은 사실상 일본 자본인 롯데 그룹에게도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니클로 한국법인의 지분을 49% 보유하고 있는 롯데쇼핑은 주가가 11.8%나 주저앉았다.


만약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자 피해자들이 일본 또는 일본 기업으로부터 배상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책임은 개인별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못하도록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은 민주공화당(현 자유한국당) 박정희 정권과 그 심복 김종필에게 있다. 그리고, 온갖 방해와 고의적인 재판지연으로 배상청구 기간을 놓치게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박근혜 정권에게도 책임이 있다.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자 피해자들은 박정희, 김종필에게는 손해배상금 횡령죄, 박근혜에게는 손해배상 청구 방해죄를 물어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국민들의 반대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일본과 체결한 한일협정은 무효로 해야 한다. 일본이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나라라면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희생자들에게 마땅히 손해배상을 해주어야 한다. 일본이 한일협정을 근거로 일제 식민지 지배 36년을 퉁치려고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의 강력한 응징에 직면할 것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이 있다.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는 답이 아니다.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위해서라도 일본은 대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중국과 북한은 대일청구권을 어떻게 행사했을까? 중국은 전쟁배상권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경제협력(ODA)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중국은 이후 40년 동안 일본으로부터 무려 3조6500억엔(현재 환율로 330억 달러)을 받아냈다. 대국답게 체면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방식으로 대일청구권을 행사했다.


북한은 북일 수교와 대일청구권 행사를 서두르지 않고 있다. 졸속 수교 추진으로 체결한 남한의 굴욕적인 한일협정 내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급한 쪽은 일본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대일 청구권으로 300억 달러를 일본에 제시했다는 설이 있다. 2002년 북일 평화선언 당시 일본은 100억 달러를 제시했다는 설도 있다. 100억 달러를 16년 전 소비자 물가를 고려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00억 달러에 달한다. 200억 달러가 북한에 유입되면 낙후된 경제를 빠른 시간에 재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나라의 정부는 그 나라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부가 들어설 수밖에 없다. 국민이 깨어 있지 않으면 독재정권이 들어서기 마련이다. 외세와 독재정권에 의해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는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 국민들을 고통의 늪에 빠트리고 있다. 


2019.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