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는 한국의 국화(國花)이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도 하다. 대통령 휘장부터 국회의원 배지, 법원 휘장, 경찰관과 교도관의 계급장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상징은 무궁화이다. 하지만 강효백은 자신의 저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이런 무궁화의 위상을 정면으로 배척한다. 무궁화가 우리 고서(古書)에서 거의 ‘피어본 적이 없는’ 꽃이며 오히려 ‘일본의 꽃’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조현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서 이 주장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박정희 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조현래는 주장한다. 두 사람의 논쟁이 국민들로 하여금 무궁화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林 山>
[두 얼굴의 무궁화] "참을 수 없이 낭자한 벌레들이 무궁화를 장식하고 꽃 속에 그득한 벌레 소리는 피리와 퉁소를 섞은 것 같다. 무궁화는 천박한 자질 활기 없어 빈골짜기에 버려지리(不禁狼藉蟲飾腹 薄質消沈委空谷) -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다산 정약용이 무궁화의 정체를 간파한 듯한 이 시를 쓴 장소는 남양주가 아니라 유배지 강진이었다. 당시 남양주는 무궁화 재배가 불가능한 지역으로, 구한말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무궁화 재배 가능지는 차령이남 지역이었다.
《fact check(1)》 : 강진(유배지)에서 지은 시라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 다산 정약용은 1818년 유배지에서 풀려난 이후 그의 고향 마재마을(현 남양주 소재)에서 기거했다. 유배지에서뿐만 아니라 풀려난 이후에도 그의 구제를 위해 애를 쓴 윤영희(尹永僖, 1761~1828)와 자주 교류하였다. 언급된 부분의 일부 정약용의 시는 송파수작(松坡酬酢)의 연작으로 1820년대 중반에서 윤영희가 죽은 1828년까지 사이에 윤영희와 교류하면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전서』중 『다산시문집』6권에 실려 있다. 이때 언급된 '松翁'(송옹)과 '淞翁'(송옹)은 윤영희를 일컫는 것이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심경호, 「다산시집 해제」,『한국문집총간해제』, 고전번역원(2012)
▷ 무궁화를 일제가 의도적으로 지역을 넓혀 한반도에 재배가 가능하도록 했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산 정약용이 시를 지은 때와 장소를 근거없이 임의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전라도 강진이 아니라 남양주에서 시가 지어졌으며, 1820년대에도 경기도에서 무궁화가 재배되고 있었다.
《fact check(2)》 : 시는 (일부는) 정약용이 지은 것도, 무궁화를 비하한 시도 아니다.
▷ 시의 전반부는 그의 친구 윤영희가 지은 시구이고, 뒤는 정약용이 지은 시가 맞지만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일부의 문구만을 따와서 둘을 섞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마치 정약용이 무궁화를 비하한 것처럼 보이도록 해 놓았다.
▷ 송파수작(松坡酬酢)의 연작시 중에서 무궁화를 노래한 정약용의 시가 무궁화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악평을 내리고 있다'라는 주장 또한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이후 다시 살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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