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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들숨, 너의 날숨 - 김인국

林 山 2020. 8. 4. 14:54

나의 들숨, 너의 날숨

 

사흘 만에 불쑥 나타나셨는데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누워계셨어야 할 분이 성큼성큼 걸어오셨으니 기절초풍할 일이었지만, 그분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역대급 스릴러였다. 단 하루의 ‘자가격리’조차 없이 사람들 가운데로 훅 하고 들어오신 것부터 문제였다. 기어코 돌아오신 이유가 고작 ‘신체접촉’을 위해서였는지 마스크도 쓰지 않고 길가는 제자들 “가까이 가시어 함께 걸으”(루카 24,21)시고 “함께 식탁에 앉으시고, 빵을 떼어 나눠주시고”(루카 24,30) “고기도 그렇게 주”(요한 21.13)셨다. 영화 ‘컨테이젼’을 본 사람이라면 기겁했을 일이다. 설마 흙 묻은 손으로 떼어 주거나 찢어 주지는 않으셨겠지. 그런데 몸에 난 상처들을 열어 보이기 전에 손세정제로 쓱쓱 문지르기라도 하셨을까. 생전에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마태 15,2)는 무리의 지도자였으니 이번에도 질병관리본부에서 내놓은 바이러스에 관한 정결례의 수칙을 간단히 무시했을지 모른다. 길에서 마주친 예수님이 “너희들 평안하냐?” 하셨을 때 감격한 여인들이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마태 28,9)지만 허겁지겁 거리를 두었을 것만 같다.

 

가장 뜨악할 대목은 인공호흡 장면(요한 20,22)이다. 하필 이런 판국에…. 창세기의 하느님은 아담의 코에다 숨을 불어넣으셨다. 예수님도 같은 자리에다 같은 모양으로 그러셨다면 천만다행으로 ‘마우스 투 마우스’는 아니었겠으나 그분 입에서 나온 수상쩍은 김이 호흡기를 통해 직방 폐로 들어갔을 테니 괜찮을까. 어쨌거나 무덤의 부패를 겪은 몸이 아니었던가. 이 정도면 기저질환이 없는 젊은이들이라도 일단 관할보건소에 들러보는 게 상책이다. 아니면 콜센터 1339에 전화라도.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아, 어리석은 자들아!”(루카 24,25) 하고 나무라기 전에 예수님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예방을 위한 국민수칙을 숙지하셨어야만 했다.

 

일상이 그립다

 

고요하고 심심할 것만 같았던 2월에 이어, 불현 듯 빈 대지에 꽃망울 터지는 3월 내내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을 읽어도 이런 싱거운 분심이 앞섰다. 학교와 성당은 텅 비었고 거리도 한적하다. 엎어진 김에 쉬어보자던 사람들마저 어서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미어터지는 만원버스와 시끌벅적한 시장, 참새들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까르르 웃는 아이들이 그립다. 멀쩡히 살아있는 우리가 이렇다면 죽음의 언덕 너머로 건너가셨던 분이야 오죽했으랴. 간지러운 하트나 주먹, 팔꿈치 인사 말고 마음껏 만지고 부비고 끌어안는 일상이여 어서 오라.

 

갑자기 근육통이 와서 병원에 가서 눕게 됐는데 마스크를 깜빡하였다. 아프리카에 다녀오느라 많은 공항을 전전했으므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늘게 숨을 쉬려고 애썼다. 나의 날숨이 누군가의 들숨을 타고 들어가 병을 일으킬까봐 두려웠고, 익명의 날숨이 혹시 나의 들숨을 타고 들어와 탈을 낼까봐 은근히 겁났다. 정신을 덜 차렸는지 그 다음날도 마스크 쓰는 일을 까먹고 갔다. “감염에서는 피해자일지 모르나 예방에서는 책임자여야 한다. 방심했다가는 가해자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소리가 귀에 쟁쟁거렸다.

 

어떻게 들이마시고 내쉴 것인가

 

요즘처럼 숨 쉬는 일이 조마조마한 시절이 언제 또 있었을까. 호흡은 우주의 에너지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일. 호呼는 내쉬는 숨, 흡吸은 들이마시는 숨이다. 호흡이란 자고로 심신수련의 기초였다. 옛 선비들은 몸의 에너지를 만들고 축적하는 기원을 호흡으로 꼽고 숨 쉬는 법부터 가르쳤다. “봄날 못 속의 물고기처럼 미미하게 숨을 내쉬며, 칩거한 온갖 벌레처럼 고요하게 숨을 들이쉰다. 고른 호흡이란 이런 것이다. 가늘고 길게, 고요하고 깊게, 그윽하게, 있는 듯 없는 듯이 숨을 내쉬니 온몸의 만 가지 구멍으로 기가 따라 나가고, 숨을 들이쉬니 온갖 구멍으로 기가 따라 들어온다. 이것이 늙은이를 젊게 하는 약이다.”(허균, 한정록)

 

구체적으로 어떻게 들이쉬고 내쉬란 말인가. 에어컨의 경우 뜨거운 바람은 밖으로 내보내고 시원한 공기는 안에 가둔다. 이런 식으로 독성을 배출하는 호흡법이 있다. 입으로 깊게 숨을 끌어들이고 다시 입으로 깊게 숨을 토하되, 탁하고 어둔 기운은 밖으로 내보내고 맑고 밝은 기운을 안으로 모시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자연스레 숨 쉬는 것만으로 독성을 배출해서 건강을 되찾을 수 있고, 무엇보다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거꾸로 하는 호흡법도 있다. 들숨으로는 세상의 고통을 내가 떠맡고, 날숨으로는 나의 행복을 세상에 내주는 것이다. 누구라도 청정한 기운은 내가 들이마시고, 몸 안의 불결한 것들을 밖으로 내쉬면서 자기를 정화하려고 하겠지만 그 반대다. 일체의 행복과 이익을 이웃에게 주고, 모든 손해와 좌절을 자신이 취하고자 하는 호흡이다. 그런데 나쁜 기운은 자기가 마시고 좋은 기운을 남에게 내주고 나면 그 몸이 어떻게 될까. 경험자들은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안에 맑고 좋은 기운이 가득 찬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자신부터 건강하고 남까지 건강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호흡이라고 자부한다. 들이쉴 때는 괴로움에 빠진 이의 고통이나 병들을 자비심으로 받아들이고, 내쉴 때는 그를 향해 온유와 사랑의 기운을 뿜어낸다. 모르긴 하지만 이 정도로 마음을 곱게 쓰는데 그 결과가 어찌 흉할 수 있겠는가.

 

호흡의 역사

 

숨의 역사는 실로 유구하다. 생물의 진화에 따르면, 아가미로 숨을 쉬던 바다의 생물들이 어느 날 육지에 올라오면서 허파로 숨 쉬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도 처음에는 자궁 속 양수에서 탯줄로 산소를 공급받다가 밖으로 나오면서부터 허파 숨으로 산소를 얻는다. 생물이 최초 30억년 가량 바다에서 살다가 땅으로 올라오게 된 진화 과정을 그런 식으로 ‘요점반복’하는 셈이다.

 

그런데 진정한 생명의 비약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벌어졌다. 사람으로 태어난 마당에 잉어나 곰처럼 숨을 쉬어서 되겠느냐.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숨 쉬자는 생각이 솟아났던 것이다. “이렇게 할딱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목숨은 참 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 쉬는 얼 생명이라야 참 생명이다. 코로 숨을 쉬지 않아도 끊어지지 않는 ‘얼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숨 안 쉬면 끊어지는 이 목숨은 가짜생명이다. 하느님의 성령인 ‘말숨’을 숨 쉬어야 사람이다.”(유영모) 새로운 숨쉬기의 창안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밥 먹고 숨 쉬면 땅을 일굴 기운이 생겨나듯 영을 모시고 숨을 쉬어야 하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흙으로 빚어진 몸은 허파 숨으로 족하지만 영으로 빚어진 몸이라면 영의 숨을 쉬어야 한다. 이런 전인미답의 경지를 두고 예수는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 혹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일”이라고 명명했다(요한 3,5-7 참조).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3) 성경은 무덤덤하게 적고 있지만 부활의 저녁 예수님이 해주신 일은 스핑크스의 그것처럼 제자들의 산산이 부서진 코를 새로 만들어 붙여준 엄청난 심폐소생술이었다. 그리하여 사람의 들숨으로 하느님이 숨 쉬고, 사람의 날숨으로 만물이 숨 쉬는 새로운 경지가 열렸다. 여태껏 나는 나, 너는 너, 각각이고 따로따로인 줄 알던 사람들이 자신의 들숨이 곧 상대의 날숨임을 깨닫고는 얼굴이 달라졌다.(경향잡지 4월호에 기고)

 

김인국 - 충주 연수성당 주임신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사족 - 김인국 신부가 경향잡지 4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김 신부는 경향잡지에 실리기 전에 이 글을 내게 보내왔다. 나는 김 신부가 내게 '우주 삼라만상이 자타불이(自他不二)다!'라는 화두를 던진 것으로 생각하고 이 글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