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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2020] 묻혀진 죽음 - 극우 파시즘의 부활에 대한 경고문

林 山 2020. 8. 20. 21:44

유럽에서 극우(Far-right politics, 極右) 파시스트(fascist) 세력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로즈 모티머(Roz Mortimer) 감독의 '묻혀진 죽음'(The Deathless Woman, 2019)은 부활하는 극우 파시즘에 대한 일종의 경고문이다. 모티머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숲 속에 생매장한 한 로마니(Romani) 집시(Gypsy, Rom) 여인의 혼령을 통해 1940년대에 자행되었던 집시의 학살부터 현재 신나치주의자(neo-Nazi)들의 증오범죄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로즈 모티머 감독

롬인(Rom)은 북부 인도에서 기원한 민족인데, 보통 집시란 이름으로 불린다. 롬인은 전통적으로 유랑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현대 롬인의 대다수는 유럽에 거주하고, 동유럽에 그 수가 많다. 이들은 롬어를 사용한다. 롬어 사용자는 200만 명 이상이다. 롬인들은 집시라는 용어를 대단히 모욕적으로 여긴다. 집시라는 말에는 역사적으로 롬인을 비하하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롬인-집시가 유럽에서 당한 박해의 역사는 아주 길다. 유럽에서 집시는 예로부터 출신 성분을 잘 알 수 없는 부랑아들로 인식되었다. 1933년~1945년 나치(Nazi) 독일(獨逸, Germany)이 자행한 홀로코스트(Holocaust, 대학살) 당시 집시들은 유태인과 함께 절멸의 대상이었다. 나치 독일의 가스 학살 및 강제 노역으로 인해 약 60만~80만 명의 집시가 학살되었다.

 

영화는 폴란드(Poland) 남부의 음산한 숲에 오랫동안 생매장당한 채 묻혀 있던 집시 여인의 혼령이 들려주는 독백으로 시작된다. 집시 여인은 죽었어도 결코 죽을 수 없었다. 자신들을 학살한 극우 파시스트들의 만행을 증언하고 고발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이 'The Deathless Woman'(죽을 수 없는 여인)인 것이다. '묻혀진 죽음'으로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담보하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집시 여인은 자신의 한많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호숫가에서 진실을 찾는 여자-주인공을 만난다. 헝가리에 살던 집시들은 이 호수에 수장됐다. 주인공은 이 호수에 엄청난 사건이 묻혀 있음을 직감한다. 생매장당한 집시 여인과 감독 로즈 모티머, 다큐멘터리 주인공은 사실 1인 3역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을 밝히려는 목적이 같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도서관에서 헝가리에 살던 집시들의 기록을 찾는다. 하지만 도서관에는 이들에 대한 기록이 없다.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던 주인공은 간신히 이름없는 무덤의 위치를 찾아낸다. 그리고, 20세기에 벌어진 참상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주인공

주인공이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기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무언가에 이끌린 것만은 확실하다. 주인공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진실에 눈뜨도록 이끈 존재는 바로 생매장당한 집시 여인의 혼령이었다. 집시 여인도 땅속에 묻힌 채 주인공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감독은 초현실적인 설정을 통해서 두 존재를 하나로 이어준다.

 

어느 날 주인공의 방문이 이유없이 열리고, 출입문 앞에 죽은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떨어져 있다. 영적 능력이 있는 주인공은 슬로바키아(Slovakia)와 접경지대인 폴란드 남부 마워폴스카 주(Województwo małopolskie, Lesser Poland Voivodeship, 소 폴란드 주) 타르누프(Tarnów)에서 날아온 개똥지빠귀임을 직감한다. 개똥지빠뒤는 이 다큐에서 주인공과 집시 여인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집시 여인도 주인공이 바르팔로타에서 비밀의 실마리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느낀다. 

 

다시 호수다. 이 호수에서 118명에 달하는 여성과 어린이가 학살당했다. 1945년만 해도 이곳은 호수가 아니었다. 방금 판 무덤이 가득한 눈 덮힌 벌판이었다. 대학살이 일어난 지 75년이 지난 지금 어디를 둘러봐도 추모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주인공은 진실을 찾으려고 호수에 가봤지만 처음에는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무엇을 보고,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주인공은 죽은 개똥지빠귀를 들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할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폴란드 남부 숲속에 살던 개똥지빠귀가 한여름 대서양을 가로질러 영국(United Kingdom) 런던(London)에 사는 주인공의 정원에 왜 왔던 것일까? 타르누프는 또 뭘까? 새에게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덕분에 알게 된 것은 타르누프라는 폴란드 남부의 작은 마을이다. 

 

런던에 살던 주인공은 충동적으로 타르누프 박물관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방문하겠다고 통고한다. 주인공이 타르누프에 도착하자 박물관장은 근처 마을에 있는 집단 무덤의 위치를 그린 지도를 건네준다. 지도에는 자브노(Żabno)보젱친(Bozengchin), 돌니슈추로바(Dolnishulova), 비엘차(Bielcha) 등이 표시돼 있었다. 소장은 '주거지와 수풀 사이에 있다. 땅에 표식이 있을 거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책에 폴란드어로 '미에이스체 그지에 치가노프 니엠치 쟈스트셸릴리'라고 적어 주었다. '집시가 학살당한 곳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뜻이었다. 

 

주인공

주인공은 무덤을 하나씩 찾아 나간다. 그는 보젱친에서 쥐 죽은 듯 괴괴한 숲을 발견한다. 75년 전 어느 토요일 14살 유제프(Józef )가 매부, 사촌과 함께 힘겹게 땅을 팠던 바로 그 숲이다. 그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집단 무덤을 만들었다. 폴란드 경찰이 시체를 실은 수레 두 대를 끌고 왔다. 경찰은 유제프에게 '집시처럼 죽기 싫으면 똑바로 하라'고 윽박질렀다.

 

주인공은 슈츠로바에 있는 묘지 한쪽에서 거미줄에 덮힌 작은 추모비 하나를 발견한다. 크리스티나(Krystyna)의 가족 93명이 묻혀 있는 곳이다. 크리스티나와 할머니만 빼고 모두 한밤중에 끌려갔다. 그리고 안나(Anna)는 1943년 그날 밤 몰래 묘지에 들어갔는데, 땅은 피에 젖어 있었고 파리가 들끓고 있었다. 주인공은 묘지에 오랫동안 머물며 거미줄을 찍는다. 

 

자브노의  묘지 한 구석에 방치된 추모비가 있었다. 묘지 밖에는 밀밭이 있었다. 묘지와 밀밭 사이에 있는 나무가 요동쳤다. 나무는 왜 요동쳤을까? 학살을 목격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야니나(Janina)는 '밀밭 아래에 집시 시체가 묻혀 있다.'고 증언했다. 야니나는 12살 때 집시 시체를 직접 묻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그 사실을 비밀로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비밀들을 털어놓은 다음에야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상처를 남겼는지 깨달았다. 

 

묘지는 평온해 보였지만 주인공에게는 뭔가 께름직했다. 폭력과 외상. 공포, 그리고 살려는 몸부림이 느껴졌다. 주인공은 마지막으로 비엘차에 갔다. 박물관 소장이 그려준 지도에 오류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도 집시 무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해가 질 무렵 타르누프로 돌아가기로 했다. 빨리 가려고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갔다. 1차선 도로를 계속 달려 깊은 숲속에 다다랐다. 도로가 막혀 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차를 돌려 마을로 돌아왔다. 

 

비엘차를 나가는 길은 네 가지다. 주인공은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도로공사 때문에 길이 막혀 갈 수 없었다. 주인공은 마을 어귀에 있는 교차로로 되돌아왔다. 나중에 알고보니 교차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시 여인의 무덤이 있었다. 

 

해는 완전히 졌다. 마치 뭔가가 주인공을 마을에 잡아 두려는 것 같았다. 뭔가가 떠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당시는 집시 여인의 무덤이 바로 근처에 있는 것도 몰랐다. 마을로 세 번이나 되돌아온 후 숲의 남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갔다. 드디어 큰길에 진입할 수 있었다. 타르누프에 돌아오니 안개가 자욱했다. 이대로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지도, 도로공사, 날씨 등..... 하지만 묶어서 생각하니 이상했다. 어두운 기운이 일상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주인공은 박물관 소장에게 다시 마을에 가겠다고 말한다. 뭔가가 주인공을 당겼기 때문이다. 소장은 비엘차에 가면 조피아(Zofia)가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조피아는 주인공을 숲속 공터에 있는 무덤으로 안내한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공터 바로 옆에 전날 계속 맴돌던 교차로가 있었다. 주인공을 마을에 붙잡아 두려던 존재가 기어코 무덤까지 데려운 것이다. 무덤을 보여주던 조피아는 안절부절못하며 움푹 들어간 땅을 가리켰다가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마을을 가리켰다. 

 

그때 주인공은 수풀 속에서 작은 새의 뼈를 발견한다. 순간 주인공은 현재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괴한 현상을 그냥 넘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조피아의 증언이다. 당시 코뮌(commune, 공동체)의 대표는 파외흐였고, 마을 이장은 미제라였다. 어느 날 마을에서 돼지가 사라졌다. 두 사람은 독일군에게 먹을 것이 없는 집시가 돼지를 훔친 것이 분명하다고 신고를 했다. 독일군은 고작 그걸 빌미로 집시들을 죽였다. 당시 집시 족장의 아내는 임신부였다. 부부는 근처 낡은 집에 살았다. 독일군이 집에 들이닥치더니 무방비 상태의 족장 부인에게 총을 난사했다. 부인은 쓰러져도 일어서서 독일인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독일인들은 산 채로 족장 부인을 땅속에 묻어 버렸다. 조피아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진절머리를 냈다. 

 

주인공은 살고자 저항하고 그를 무덤까지 부른 족장 부인에게 마음을 사로잡힌다. 주인공은 자신을 폴란드의 작은 마을로 이끈 사건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분노에 찼던 여인의 목소리를 글로 옮기기 시작한다. 그 여인은 어디에나 있었다. 비엘차나 바르팔로타의 호수는 물론 주인공의 사무실 지도에 표시된 모든 장소에 다 있었다. 

 

족장 부인의 혼령이다. 나는 분노에 찬 채 총을 든 놈들에게 저주를 걸었다. 분노는 내게 총알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총알이 내 몸을 관통하고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서 놈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난 죽지 않는 여자가 되었다. 놈들이 나를 시체 더미 위에 버리고 흙을 덮을 때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 바르팔로타의 구덩이에 내동댕이쳐졌던 유디트(Judyta)의 할머니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난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무덤에서 나와 나무 위를 날았다. 할머니가 다른 시체와 함께 구덩이로 떨어지는 걸 지켜봤다. 

 

바르팔로타의 구덩이는 그라블레르 호수가 되었다. 강요에 못이겨 구덩이를 판 집시 118명은 결국 구덩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조피아

마을 주민인 집시 여성의 증언이다. 그녀의 할머니는 총알을 여덟 발이나 맞았다. 엄마의 다섯 살 생일날이었다. 엄마는 다행히 총알을 맞지 않았다. 엄마, 아빠 두 사람은 시체를 짚고 구덩이에서 기어나와 근처 아카시아 숲으로 도망쳐 살아남았다. 그리고 먼 친척집에서 전쟁을 피했다. 머지않아 전쟁이 끝나고 1945년 4월 4일 해방이 됐다.  

 

주인공은 그라블레르 호수에 손을 담근다. 순간 물속에는 나뭇가지에 수많은 옷이 걸려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섬뜩하다. 바르팔로타 사람들은 신발과 외투를 걸어 누가 구덩이에 묻혔는지 표시했다.  

 

마을 주민인 집시 여인의 증언이다. 그라블레르 호수에 처음 갔을 때는 별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뒤엉켜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깊은 슬픔이 몰려왔다. 그라블레르 호수 아래에는 지금도 집시들이 묻혀 있다. 제대로 된 묘비조차 없다. 그러니 그 사람들의 영혼은 영원히 구천을 떠돌 것이다. 나는 가족도 없이 혼자 산다. 어머니 세대가 대량학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때 모두 끌려가서 죽었다. 과거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서 오늘날까지 고통받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무섭다. 나도 당연히 무섭다. 집시들에게 헝가리(Hungary)는 불안한 곳이다. 

 

족장 부인의 혼령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는 생사를 걸고 싸웠다. 싸움은 계속됐고, 결국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 것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번졌다. 하지만 난 잊지 않있다.  

 

한 청년이 숲에서 집시 학살을 기록한 책을 읽는다. 비가 올 참이다. 어두워지고 있다. 나뭇잎은 오래전에 나무에서 떨어졌다. 노인들의 기억만이 그들의 죽음을 추모할 뿐이다. 숲과 땅은 진실을 기억한다. 이 늙은이가 선언하리니 이곳에 집시들이 묻혀 있다. 이 땅을 건드리지 마라. 

 

다시 족장 부인의 혼령이다. 16년 동안 어둡고 축축한 무덤에 누워 있었다. 가족의 시체를 침대 삼아 지냈다. 몸 위로 나무가 자라고 연약한 뿌리는 천천히 나를 감쌌다. 내가 내린 저주 덕에 놈들은 하나, 둘 끔찍한 운명을 맞이했다. 자연은 내 편이었다.  

 

조피아의 증언이다. 집시 족장 부부가 여기 살 적에 아코디언을 즐겨 연주했는데 파외흐가 빼앗아갔다. 파외흐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마차에 목재 더미를 싣고 타고 가다가 스스로 총을 쐈다. 말이 날뛰자 실수로 쏜 것이다. 그렇게 아들만 남기고 떠났다. 그러자 소문이 퍼졌다. 족장 부인의 저주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마을 이장 미제라도 벼락을 맞고 죽었다.  

 

족장 부인의 혼령이다. 살아 있는 것은 전부 싫다. 하지만 생명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럼 힘을 모아 하늘을 날던 새를 떨어뜨린다. 활기찬 새를 보면 화가 나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처음으로 죽인 새는 울새다. 새들도 동료의 죽음을 애통해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재앙의 냄새가 강해진다. 차오르는 분노에서 힘을 얻어 무덤을 박차고 나온다. 비르케나우(Birkenau)에 있는 집시 수용소로 향한다. 지붕 채광창을 통해 숙소로 들어간다. 난 공기가 된다. 숙소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집시들을 위아래로 감싼다. 어둠이 깔리고 종이 울린다. 숙소에는 적막이 흐른다. 그때 놀랍도록 민첩한 기운이 느껴진다. 내 분노는 집시들에게 전염되고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된다. 보초가 와서는 성난 집시들을 보고 놀란다. 집시들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직접 만든 칼과 쇠파이프, 쇠지렛대와 돌을 들고 싸운다. 황홀하다. 집시들의 분노와 내 기쁨에 공기가 전율한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보초들은 한발 물러선다. 밤에는 가스실도 문을 닫는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조금 늦어지는 것뿐이다. 붉은 해가 떠오르자 수많은 집시의 절규가 울린다. 재로 변한 사람들..... 마치 자갈 같다. 물속에 서 있는 기분이다. 흐르는 물을 막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르케나우는 생소한 이름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Auschwitz concentration camp)의 세계유산 지정명칭은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 남부 마워폴스카 주 오시비엥침(Oświęcim)에 있었다. 오시비엥침은 바르샤바(Warszawa)에서 남쪽으로 약 300km, 크라쿠프(Kraków)에서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져 있다. 'Oświęcim'(오시비엥침)의 독일어 명칭이 'Auschwitz'(아우슈비츠)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3곳의 캠프가 있었다. '아우슈비츠 1' 수용소는 원래 폴란드 정치범들을 수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점차 다른 수용소들의 행정 본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1' 수용소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아우슈비츠 2' 수용소를 비르케나우 수용소라고 한다.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집단 학살 수용소였으며, 여기서 80만 명의 유태인과 수만 명의 집시들이 학살당했다. '아우슈비츠 3' 수용소를 모노비츠(Monowitz) 수용소라고 한다. 모노비츠 수용소는 특수 노동 수용소였다. 모노비츠 수용소에서는 I. G. 파르벤 합성 고무 공장과 석유 추출 공장에 강제 노역을 제공했다.

 

조피아의 증언이다. 1960년쯤이었다. 난 자식 둘과 함께 이 동네에 살았다. 소도 키웠다. 어느 날 삽을 든 사람들이 차를 타고 오더니 집시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의 유골이 12구 나오고 수많은 해골이 발견됐다. 시체 냄새도 났다. 

 

족장 부인의 혼령이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날 덮고 있던 땅 위로 올라서는 날이다. 사람들은 신중하게 내 주변을 파고 벌레가 신나게 파먹은 우리 가족의 뼈들을 들어낸다. 

 

조피아의 증언이다. 땅을 파고 뼈가 나오자 상자에 담았다. 12~15년 전에 묻힌 데다 땅이 축축해서 살점은 전부 분해된 상태였다. 집시 족장의 아내도 그때 수습됐다. 그 집시족 이름이 크베이크였을 것이다. 여인의 시체는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다. 한 남자가 시체를 들어 팔로 안자 머리카락이 무릎까지 늘어졌다. 여인은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족장 부인의 혼령이다. 내 몸에서 흙을 털던 사람들의 겁에 질린 탄성 소리가 꽤나 듣기 좋았다. 죽던 날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다시 이 세상에 왔다. 남자가 날 안고 지나가자 수군대던 동네 사람들은 조용히 길을 비켜 주었다. 원피스가 늘어졌고 남자가 걸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바닥을 쓸었다. 가족들의 뼈는 수레에 담아 옮겼다. 남자는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날 묘지로 데려갔고 그곳에는 새 무덤이 준비돼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들 묘지를 무서워한다. 혹시 모르니까. 새로 마련된 대량학살 희생자들의 묘지에 집시 후손들이 모여 추모제를 지낸다.   

 

족장 부인의 혼령이다. 사람들은 날 보러 온다. 혼자서 오거나 위령의 날에 오기도 하고 집시 목사와 함께 무리지어 와서는 상석에 초를 밝히고 불붙인 담배를 둔다. 난 아직도 화가 난다. 가끔 힘을 모아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눈을 감고 온힘을 다하면 마른 잎이 깔린 숲에 타다 만 담뱃불을 날려 바람 한줌에 활활 타게 만들 수 있다. 숲이 새까맣게 그을리면 난 다시 땅속에서 쉴 수 있다. 눈을 붙인다. 오랜 잠을 청한다. 그러다 연기가 피어올라 문득 잠에서 깬다. 이건 내 분노가 숲을 태워서 피어나는 연기가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불을 질렀다. 내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 땅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다. 집이 타는 연기와 공포의 냄새가 매캐하게 풍긴다. 누구의 공포일까? 증오의 기운이 느껴진다. 누구의 증오일까? 이곳에서 피어난 감정이 아닌 이곳을 향한 감정이다. 난 새로운 세상을 찾았다. 가상의 세계로 영적인 존재인 나도 들어갈 수 있다. 

 

뉴스다. 지난 화요일 헝가리 법원은 아이를 포함해 집시 여섯을 죽인 네 명의 남성에 대해 징역형을 선고했다. 2008년과 2009년에 자행된 집시 가족 학살 행위는 집시 사회를 큰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들은 14개월에 걸쳐 화염병, 총과 수류탄을 사용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집시를 살해했으며 특히 29살 아빠와 4살짜리 아들 로버트가 불이 난 집을 탈출하다 총을 맞고 사망한 사건으로 전국민이 충격에 휩싸였다. 만연한 차별과 가난에 시달리던 집시 사회에는 현재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 

 

주인공이 멀한다. 모든것이 바뀌었다. 전부 제자리로 돌아왔다. 명단을 하나 찾았다. 과거가 아닌 현대에 작성된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방화, 폭탄, 수류탄, 총격..... 사람들이 죽고 집이 불타고..... 검은셔츠단(camicie nere, CCNN)이 등장했다. 비르케나우에 살던 집시 남성의 분노와 무시무시한 불길, 진정한 공포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심장이 요동쳐서 얼어붙을 것만 같고 숨이 가빠 멎을 것만 같다. 혈압이 치솟았다 곤두박질친다. 부자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검은셔츠단의 원조는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1919년 3월에 결성한 이탈리아 왕국 국가 파시스트당의 준군사조직인 국가안보의용민병대(Milizia Volontaria per la Sicurezza Nazionale, MVSN)이다. 이들은 유니폼으로 검은 셔츠를 입고 다녔기 때문에 검은셔츠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룰 막론하고 테러를 자행해서 1920년말까지 수백 명을 살해했다. 1922년 10월 24일 나폴리에서 열린 파시스트 대표자회의를 구실삼아 전국에서 모인 무장 검은셔츠단은 그 유명한 로마 진군을 감행하여 무솔리니를 권좌에 앉혔다. 1923년 2월 1일 사조직이던 검은셔츠단은 공조직인 파시스트 민병대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1943년 무솔리니의 실각과 함께 검은셔츠단도  몰락과 동시에 해체되었다. 이후 검은 셔츠와 검은셔츠단은 혐오스럽고 치욕스런 존재로 전락했다.    

 

아들과 손자를 잃은 여인의 증언이다. 저녁에 아들과 함께 있었다. 밤 11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아들은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바로 옆에 살았다. 막 자려고 하는데, 총성 세 발이 울렸다. 남편을 깨우고 총소리가 났다고 했다. 난 바로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문을 열었는데 아들 집이 불타고 있었다. 며느리가 막내 손주를 안고 있길래 큰 손주는 어디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우리집에 있잖느냐고 되물었다. 난 무슨 소리냐며 아니라고 했고, 안으로 들어가 아들과 손주를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불길이 치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관이 아닌 숲 뒤로 돌아갔는데, 아들이 바닥에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깨워봤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손주 시체는 다른 아들이 찾았다. 사실 손주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난 충격에 빠진 나머지 보지도 못했다. 아들을 찾고 20분쯤 후에 손주를 찾았다. 지금도 여전히 무섭다. 여전히 사는 게 지옥 같다. 가족이 그냥 죽는 것과 다르다. 그런 경우 시간이 지나고 잊으려고 하면 그리운 마음이 조금씩 옅어지지만 우리가 겪은 일은 차원이 다르다. 절대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슬플 것이다. 정말 비통하다. 잊을 수가 없다. 

 

주인공의 말이다. 난 헛물을 켰다. 기록보관소에서 시간을 낭비했다. 집시 여인은 내게 현실을 보여줬다. 난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남동쪽으로 65㎞ 떨어진 곳에 있는 타타르센트죄르지에서 길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비포장도로를 따라 마을 끝까지 다다르니 한 집이 나왔다. 그곳에서 아들과 손자를 보낸 어머니는 여잔히 슬픔에 빠진 채 살고 있었다. 

 

족장 부인의 혼령이다. 혼령이 늘어나고 무덤도 늘어났다. 우리의 죽음은 그들의 죽음이며 우리의 기억은 모두의 기억이다. 시간 감각을 모두 잃었다. ..... 이곳은 시끄럽고 더럽다.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난 오래전 길을 잃었다. 땅속 무덤으로 돌아가는 법을 모르겠다. 미로 안에서 꼼짝도 못 하겠다. 이정표가 되어줄 호수나 숲도 없다. 폭력적이고 증오로 가득 찬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도덕성을 상실한 목소리와 말이 가득하다.  

 

개똥지빠귀

노트북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갈고리 십자가, 나치의 상징)에 오줌이나 갈길 거야. 젠장, 살러시(Szálasi)라고 썼네. 그만둬, 알렉스. 문제없을 겁니다. 아이들과 가족까지 전부 데리고 죈죄슈퍼터(헝가리 북동부 지역)를 떠날 거예요. 두 달 동안이나 위협을 당했잖아요. 

 

하켄크로이츠는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제정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國家社會主義獨逸勞動者黨,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SDAP)의 당기이다. 1935년 9월 15일에 하켄크로이츠는 독일 국기로 제정되었다. 

 

살러시는 아마도 살러시 페렌츠(Szálasi Ferenc)인 듯하다. 살러시는 헝가리 왕국의 독재자로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바탕을 둔 파시스트 정당인 화살십자당(Nyilaskeresztes Part)의 설립자다. 그는 유대인 음모론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스스로를 훌륭한 기독교인이라고 믿었다. 그는 반유대주의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 주장했고, 유대인들을 몰아내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믿었다. 2차대전 말기인 1944년 10월 15일 살러시는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헝가리의 명목상 지도자가 된 살러시는 독일군에게 철저히 협력했고 1945년 4월 독일군이 헝가리를 떠날 때까지 화살십자당원을 시켜 10,000명~15,000명의 유대인과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탈영병들을 암살했다. 그는 독일에서 미군에게 붙잡혀 헝가리로 압송되어 인민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주인공이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역사에도 채 기록되지 않았다. ..... 두 세상이 서로를 모방하고 있다. 과거는 현재에 되풀이되고 있다. 시간이 무너졌다. 말은 무기가 됐다. 가상의 무기이자 진짜 무기다. 1943년 유제프는 앞날을 내다봤다. 

 

유제프는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 유제프 클레멘스 피우수트스키(Józef Klemens Piłsudski) 폴란드 전 총리를 말하는 것일까? 1970년 12월7일 오전 7시,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서독 총리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한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애도를 표하다 갑자기 차가운 대리석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과거 나치 독일에 상처받은 폴란드 국민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위령탑이 세워진 곳은 1943년 4월19일 바르샤바 게토에 거주하던 7만 명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저항하다가 5만6천 명이 사살되거나 체포된 장소였다. 유제프 총리는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던 차 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그리고 그는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라고 말했다. 

 

마을 주민 남성의 증언이다. 독일군은 작은 언덕 뒤 도로에서 40m 떨어진 곳에 집시들을 모아놓고 누우라고 했다. 하지만 한 명이 도망쳤고, 나이 든 독일군이 총을 쐈지만 잡을 수 없었다. 폴란드 경찰에게 쏘라고 했는데 경찰 둘이 한 발씩 쏘니 총알이 다 떨어졌다. 독일군은 폴란드 경찰에게 총알을 많이 안줬다. 그렇게 그 사람은 탈출했다. 

 

족장 부인의 혼령이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두렵다. 사람들은 표적을 향해 총을 겨눈다. 집시 소년이 숲을 헤치며 힘도 무기도 없이 조용히 달려간다. 사람들은 표적을 소탕하며 포인트를 모은다. 난 새로운 공포에 몸서리친다. 

 

집시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에 사로잡힌 말들이다. 더럽다. 냄새난다. 범죄자. 추잡하다. 해충. 쓰레기. 역겹다. 혐오스럽다. 기생충. 혐오와 편견으로 얼룩진 불쾌한 단어들이다. 헝가리, 폴란드,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체코,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영국,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 등지에서 집시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존재한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 여자 말대로 우린 나서야 한다. 

 

독일의 AfD와 국가민주당(NDPD, 네오 나치), 프랑스의 국민전선(Front National), 헝가리의 피데츠당(Fidesz), 영국 독립당(UK Independence Party), 그리스 황금새벽당(Golden Dawn) 등은 유럽의 극우 파시스트 정당들이다. 특히, 헝가리는 극우 파시스트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an)이 총리에 오를 만큼 극우파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르반은 언론 자유 탄압과 민주주의와 법치 훼손, 난민 분산수용 정책 거부 등으로 세계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그의 별명은 ‘유럽의 트럼프’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도 돈독한 관계다. 폴란드도 극우파가 강세다. 프랑스는 2007, 2012년에 극우파의 세력이 크게 위축됐으나 이후 지방선거에서 득세했다. 

 

족장 부인의 혼령이다. 피곤하다. 내 일은 모두 끝났다. 새로운 목격자들이 모이는 게 느껴진다. 난 이 세계에 남을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나를 대신할 것이다. 1942년 폴란드 비엘차..... 내가 보여줄 건 여기까지다. 그들이 오고 있다. 

 

'The Deathless Woman'(죽을 수 없는 여인)은 인간에 의한 인간 대학살을 다루고 있기에 마음을 무겁게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나치 독일의 파시스트들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한 집시 족장 부인의 혼령은 우리들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집시 족장 부인의 혼령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구상에서 다시는 나치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 같은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된다. 역사가 우리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우리는 인종  차별과 인권 탄압을 당하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해서도 안 된다. 이웃의 불행을 외면하다가는 언젠가 그 일이 내게 닥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The Deathless Woman'(죽을 수 없는 여인)을 만든 영국의 로즈 모티머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2020.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