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예술 영화 오딧세이

[EIDF 2020] 아카사, 마이홈 - 한 집시 가족의 루마니아 생존기

林 山 2020. 8. 25. 17:29

제17회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 2020) 8월 18일(화요일) 25시 45분에는 루마니아의 라두 치오르니치우크(Radu Ciorniciuc) 감독의 'Acasa, My Home'(아카사, 마이 홈, 2020)이 방영되었다. EIDF 경쟁 부문 출품작이다. '아카사, 마이 홈'은 선댄스 영화제와 월드시네마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 수상작이기도 하다. '더 할리우드' 리포터는 이 다큐 영화에 대해 '서정적이고 도발적이다.'라고 평했다.   

 

라두 치오르니치우크 감독

에나케 가족은 지난 20년 동안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Bucharest) 도심 속 야생 동물들이 희귀하고 거대한 녹색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삼각지에서 살아왔다. 감독은 에나케 가족에 대해 인종을 밝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다큐를 끝까지 보면 에나케 가족이 집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치오르니치우크 감독은 찢어지게 가난한 에나케 가족의 일상적인 삶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러니까 이 다큐는 한 집시 가족의 루마니아 생존기라고 할 수 있겠다. 

 

'Acasa'(아카사)'는 무슨 뜻일까? 'acasă(아카서)'는 루마니아어로 '집에서, 집으로'의 뜻이다. 그러니까 다큐 제목 'Acasa, My Home'은 루마니아어 'Acasa'(아카서)를 영어 'My Home(마이 홈)'으로 풀이해 놓은 것이다.  

 

에나케 가족은 부부와 아홉 명의 자녀가 갈대가 우거진 섬의 작은 움막집에서 살아간다. 장남 발리는 16세다. 발리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 한 까닭에 까막눈이다. 에나케 가족은 장남 발리와 그의 동생들이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팔아서 생계를 꾸려 나간다. 이들은 움막에서 돼지, 오리, 닭, 개 등 가축도 키운다. 가장 에나케는 일도 하지 않고 빈둥대기만 한다. 그는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기만 할 뿐이다. 그래도 에나케 가족은 비록 지독하게 가난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아카사, 마이홈'의 한 장면

어느 날 호수 일대가 생태공원으로 지정이 된다. 부쿠레슈티 생태공원은 루마니아 총리와 환경기후부 장관이 다녀가고,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방문하는 등 국제적인 관심을 끈다. 문제는 에나케 가족의 삶의 근거지이자 터전인 움막이다. 루마니아 관료들에게는 에나케 가족의 움막은 한갓 철거의 대상일 뿐이다.  

 

에나케 가족은 시에서 마련해준 부쿠레슈티 도심으로 이주한다. 도심으로 이주하면서 섬에서 살던 때의 평화로운 삶도 끝장이 나고 만다. 에나케 가족은 문맹이라 부쿠레슈티 도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장남 발리는 동생들과 함께 생계를 위해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경찰에 붙잡힌다. 호수가 생태공원으로 지정됐기 때문에 어로 행위는 불법이다. 물고기를 잡지 못하게 하면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없다.  

 

'아카사, 마이홈'의 한 장면

부쿠레슈티 공무원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로 행위를 단속하기 전에 에나케 가족에게 생계대책을 세워줘야 할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에나케 가족은 고물과 파지를 주워다 파는 일을 한다. 고물과 파지를 주워 11식구의 입에 풀칠을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이들의 삶은 위태위태하기만 하다. 

 

16살 장남 발리는 15살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소녀는 임신을 하게 된다. 소녀는 아기를 낳자고 하고, 발리는 낙태를 종용한다. 발리는 가난한 소년 가장이 되기가 두려운 것이다. 왜 안 그럴까? 

 

'아카사, 마이홈'의 한 장면

어느 날 집주인이 들렀다. 주인은 집안이 엉망인데다가 화장실도 더럽고 변기 뚜껑마저 고장났다며 에나케 가족에게 집을 비우고 나가라고 통고한다. 어린아이들이 많으니 집안이 어질러져 있고, 화장실이 더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주인은 이런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다. 

 

결국 에나케 가족은 시에서 마련해준 임시 거처로 옮긴다. 임시 거처는 냄새가 진동하고 심지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에나케와 발리의 바로 아래 동생은 예전에 살던 섬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한다. 사회의 규칙에 맞춰 살아가기보다는 차라리 섬으로 돌아가 문명과는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발리의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임시 거처에 남겠다고 선언한다. 섬에서 살아봐야 희망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의 이별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다. 소녀와 가정을 이룬 장남 발리는 독립을 선택한다.

 

'아카사, 마이홈'의 한 장면

다큐 감독은 여기서 카메라를 끈다. 에나케 가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 사정이 더 나아질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가족이 해체될지도 모른다. 에나케 가족이 직면한 문제는 어쩌면 동유럽 집시들 전체의 문제일 수도 있다. 

 

에나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매우 답답함을 느꼈다. 그가 문명을 거부한 것은 철학이나 사상에 따른 선택이 아니다. 문명 세계에서의 생존경쟁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립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아홉 명의 자녀들에게 자신의 방식을 따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발리처럼 하나 둘 무능한 가장 에나케에게 반기를 들 것이다. 아버지 에나케에게는 희망도 비젼도 없기 때문이다. 가족 해체는 필연적이다. 

 

2020. 8. 25. 林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