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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2020] 499 - 스페인 침략자들이 멕시코에 남긴 해악 보고서

林 山 2020. 8. 26. 17:47

제17회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 2020) 경쟁 부문에는 다소 특이한 다큐 영화 한 편이 출품됐다. 바로 멕시코 로드리고 레예스(Rodrigo Reyes) 감독의 '499'이다. 레예스 감독은 499년 전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marqués del Valle de Oaxaca)와 함께 아스테카 제국(Azteca Empire)을 멸망시켰던 스페인 병사를 초현실적 기법으로 현대로 불러내 그들이 멕시코에 끼친 해악을 직접 목격하게 한다. 

 

로드리고 레예스 감독

1521년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는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했다. 코르테스는 병사 몇백 명과 수천 명의 원주민 동맹군을 이끌고 베라크루스(Veracruz) 해안에서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으로 진격했다.  

 

수천 명의 원주민은 왜 스페인 침략군에 가담했을까? 아스테카 제국의 가혹한 통치에 피지배 원주민들이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르테스가 이끌고 온 스페인군은 아스테카 제국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잔인하고 악랄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원주민의 90% 이상이 죽거나 학살당한 이후였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탐욕스러웠고, 인종차별이 심했다. 침략자들은 원주민의 내분을 조장하여 스스로 무너지도록 만들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다. 스페인 침략자들이 남미에서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을 생각하면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오르기 때문이다. 

 

사실 아스테카 제국은 스페인 침략자들보다 더 잔인했다. 전쟁에서 잡은 포로들을 인신공양의 희생물로 삼았으니까 말이다. 아스테카는 주변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과중한 수탈과 가혹한 억압으로 통치했다. 또 포로들의 인신공양은 피지배 부족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포로들의 인신공양은 피지배 부족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효과와 함께 아스테카 황제와 귀족들에게는 소름끼치도록 끔찍한 오락거리를 제공했다. 그런 점에서 아스테카는 백 번, 천 번 멸망을 당해도 싼 제국이었다. 코르테스가 아스테카 제국을 멸망시켰을 때 인신공양을 위해 붙잡혀 있던 전쟁포로는 약 1만 명이었다. 이들은 후에 스페인 침략자들의 동맹군이 되어 아스테카인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섰다. 아스테카 제국의 잔악한 지배에 신음하던 부족민들과 전쟁포로들은 아스테카인들을 보는 족족 학살했다. 아스테카인의 90%가 이때 죽었다. 그렇다고 스페인 침략자들의 원죄가 면제되거나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499'의 한 장면

중세 시대의 갑옷에 투구를 쓰고 칼을 찬 스페인 군인이 멕시코 동부의 항구 도시 베라크루스 해안으로 떠밀려온다. 그는 모래사장에 떨어진 플라스틱 컵과 해변을 달리는 사륜 바이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럴 수밖에! 16세기에 플라스틱이나 사륜 바이크는 발명되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스페인 군인은 499년 전 침략자 코르테스와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했다. 침략자들이 아스테카 제국에서 약탈한 부와 영예를 배 한가득 싣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던 길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폭풍으로 동료를 모두 잃고 그 혼자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기적의 힘으로 499년 후의 미래에 도착한 것이다. 다큐 제목 '499'는 바로 그런 의미다.  

 

스페인 군인은 기억을 더듬어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찾아간다. 길을 걷다 운이 좋으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그는 해변에서 음료수를 파는 노점에서 깡패처럼 돈도 안 내고 코코넛을 멋대로 들어서 마신다. 노점 주인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못 한다. 499년 전 원주민을 상대로 자행했던 정복군의 행동거지 그대로다. 

 

'499'의 한 장면

테노치티틀란을 향해 가면서 스페인 군인은 멕시코 보통사람들의 삶을 목격한다. 라스팔마스(Las Palmas) 도로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 도로에는 지금까지 가로등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 발전소로 가는 길이 어둡다. 밤에 제대로 켜지는 가로등도 몇 개 없다. 멕시코 정부의 무능을 꼬집는 듯하다.   

 

스페인 군인은 마약 카르텔(Kartell)이나 마피아 같은 조직폭력단(조폭)에 아버지를 잃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아버지는 기자이자 멕시코를 바꾸고 싶어 한 사회운동가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우리가 손 놓고 있으면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침묵을 지키면 모든 것은 제자리이다. 안전한 삶은 쟁취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려주곤 했다. 멕시코에서 기자나 사회운동가는 목숨을 위협받는 매우 위험한 직업이다. 

 

어느 날 차 다섯 대가 오더니 9~12명 정도 되는 조폭이 내렸다. 폭력배들은 검은 트럭에 그의 아버지를 강제로 싣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사건 현장에는 경찰보다 아들이 더 빨리 도착했다. 분명 집 근처에 형사들이 있었고, 경찰서까지는 고작 20분 거리에 있는데도 말이다. 경찰은 1~2시간이 지나서야 늑장 수색 작업을 시작했다. 범죄집단과 경찰의 결탁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그의 아버지는 20일 후에 발견되었다. 누군가 그의 아버지 시체를 토막내 자루에 담아 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가족 전체가 망가졌다. 아들 나아가 멕시코 국민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정의다. 

 

'499'의 한 장면

멕시코 정부는 힘없는 서민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서민들은 따로 도움을 청할 곳도 없다. 신문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기자와 시위자가 납치되고 살해됐다는 기사가 실린다. 하지만 정부는 꿈쩍도 안한다. 정부의 최고위층부터 말단까지 썩을대로 썩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부정부패는 스페인 식민지 통치시대부터 비롯되어 이어저 온 오래된 고질이다. 멕시코인들은 정부의 하급 관리에게 뇌물을 준다든지, 사소한 법규 위반 같은 경우 경찰에게 돈 몇 푼 쥐어주고 해결하는 등 대수롭지 않은 부정에 대해서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것이 보통이다. 멕시코에서는 교통법규 위반을 묵인해주는 대가로 뇌물을 요구하는 부패 경찰관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멕시코 정부의 권력자들과 고위층의 부정부패는 그 차원이 다르다. 멕시코 정부 고위층이 관련된 공공분야의 부정부패는 국민들에게 절망과 환멸을 안겨주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1990년대에 단행됐던 은행 민영화와 관련된 부패 스캔들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다. 

 

멕시코 경찰 등 공무원들이 마약 카르텔 같은 대형 범죄집단과 결탁하여 자행하는 뇌물과 범죄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멕시코 경찰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불법 마약 밀매를 눈감아주고 챙기는 거액의 뇌물 부정은 엄청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마약 밀매자들이 경찰 간부들에게 건네주는 뇌물은 매년 수백만 달러에 이른다. 불법 마약과 관련된 대형 부정부패는 멕시코의 사법체제를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멕시코 정부의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

 

멕시코 경찰의 부패는 아주 오래된 문제로 마약 밀매 행위가 있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스페인 침략자들의 식민지 통치시대부터 이어져 온 경찰의 부패는 이제 멕시코 정부가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499'의 한 장면

마약 밀매자들이 뿌리는 뇌물은 그 규모가 엄청나서 부정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기 어렵다. 그 결과 멕시코 경찰의 뇌물수수와 부정부패는 더욱 악화되어 왔다. 경찰보다는 덜하지만 멕시코 군부도 마약 밀매와 관련된 부패에 빠져 있다.

 

멕시코 부패 경찰과 범죄조직은 공생관계에 있어 왔다. 그런데, 막강한 마약 카르텔이 큰 세력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범법자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바로 전직 경찰, 군인, 전 마약 밀매 조직 관련자 등이다. 이들은 수없이 많다. 이들 신종 범죄자들은 폭력을 수단으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서 움직이고 있다. 신종 범죄집단은 법의 테두리 밖에서도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한 집단이다. 법을 잘 알고 이용할 줄 아는 전직 경찰, 군인 출신이기에 이들 범죄집단을 근절하기란 더욱 어렵다.  

 

멕시코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대대적인 경찰 개혁이 필요하다. 나아가 사법체제와 수형제도의 개혁도 필요하다. 또, 엄정한 법 집행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관도 설립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최근 실시된 멕시코 대선 결과를 보면 경찰 개혁 나아가 사회 개혁은 기대난망이다. 

 

레예스 감독은 현재 멕시코의 범죄와 부정부패는 스페인 침략자들의 식민지 통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믿는다. 현 멕시코 집권층은 바로 스페인 침략자들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의 시각은 분명하다. 감독은 스페인 침략자들이 원주민 동맹군과 결탁하여 아스테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듯이 현 멕시코 집권층도 마약 카르텔과 결탁하여 멕시코인들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존재라고 본다. 다큐 '499'는 멕시코의 현 상황이 499년 전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는 진실을 전하고 있다. 다큐 '499'가 우리에게 던지는 무거운 메시지다. 

 

정부 권력자와 고위층의 부정부패와 무능, 범죄집단과의 결탁 문제는 멕시코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미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일부 선진 민주국가들을 제외한 지구촌 전체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인간들이란..... 

 

2020. 8. 26. 林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