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일,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아일랜드의 랜스 달리(Lance Daly) 감독의 영화 'Black 47'(블랙 47, 2018)을 보았다. 영국인들의 잔혹한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강인한 아일랜드인을 그린 영화다. 우리나라도 제국주의 일본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를 받았기에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감상했다.
영화 제목 'Black 47'은 '절망적인 1847년'을 가리킨다. 1842년부터 북미에 돌고 있던 감자 역병이 유럽에 상륙하면서 유럽 전역에 대규모 감자 흉작이 들었다. 감자 흉작으로 일어난 대규모 기근이 저 유명한 1847년의 아일랜드 대기근이다. 이 대기근으로 인해 당시 아일랜드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굶어죽거나 스코틀랜드, 미국 등 세계 곳곳으로 이주하였다. 감자 역병은 스코틀랜드에도 대기근을 일으켰다. 스코틀랜드는 대기근을 피해 건너온 아일랜드인들로 인해 인구가 급증하면서 이중고를 겪어야만 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감자 역병으로 큰 영향을 받았지만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대흉작으로 유럽 전역의 식료품 가격이 대폭 인상되면서 폭발한 노동자 등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불만은 당대 혁명적인 사상가들과 결합되어 세계 역사를 뒤바꿔 놓았다. 1848년 군주제를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시민혁명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영화 '블랙 47'을 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영국(UK, United Kingdom)의 역사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만 한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윌리엄 1세로 등극하면서 노르만 왕조를 개창했다. 게르만이나 노르만은 다 바이킹의 후손들이다. 영국은 바이킹 왕조의 잉글랜드가 주변 지역을 강점, 병합해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잉글랜드는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를 병탄한 뒤 연합왕국(UK, United Kingdom)을 선포했다.
잉글랜드는 나라만 빼앗은 것이 아니라 일제가 한글 말살 정책을 폈던 것처럼 고유 민족언어도 탄압했다. 잉글랜드는 웨일스어(Cymraeg), 아일랜드어(Gaeilge), 스코틀랜드어(Scots)를 억압하고 영어를 지배 언어로 만드는 정책을 썼다. 그 결과 오늘날 웨일즈어를 할 수 있는 웨일즈인은 전체 웨일즈 인구의 20%밖에 되지 않는다.
아일랜드는 1171년 잉글랜드 헨리 2세의 군대가 침략하면서 저항의 역사가 시작된다. 1534년 헨리 8세 때부터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완전한 식민지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1937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할 때까지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인들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렸다. 잉글랜드의 최초 침공부터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약 8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아일랜드인들은 저항의 역사라고 부른다.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아일랜드의 종교 탄압도 심해진다. 카톨릭 국가였던 아일랜드에 잉글랜드의 신교 세력이 이주함에 따라 종교간 갈등이 발생했다. 신교 세력은 점령국의 이점을 이용하여 점차 아일랜드에서 지배 세력이 되어갔다. 특히 신교 세력은 먼저 이주한 북아일랜드를 장악했다. 이는 후에 북아일랜드가 아일랜드에서 분리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북아일랜드는 아직도 영국에 빼앗긴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잉글랜드인에 대한 아일랜드인과 북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웨일즈인의 감정은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멜 깁슨(Mel Gibson)이 감독하고 주연한 '브레이브하트(Braveheart, 1995)'가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 영화라고 할 수 있다면, '블랙 47'은 잉글랜드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저항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도 있었던 스코틀랜드의 독립 움직임과 북아일랜드의 무장 독립투쟁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돌아가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47년은 1845년~1852년까지 계속됐던 아일랜드 대기근 시기였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다. 감자는 아일랜드인의 주식이었다. 그런데, 감자 역병으로 인해 대흉작이 발생해서 아일랜드인들이 아사 위기에 직면했는데도, 잉글랜드 지주들은 가혹하게 착취한 감자 등의 식량을 영국 본토로 실어날랐다. 식민지 통치자들의 무자비한 탄압과 지주들의 거렴주구로 1846년~1847년 겨울 동안 아일랜드인 100만 명이 아사하고, 100만 명이 외국으로 떠나갔다. 대기근 시대에 아일랜드는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겪었다. 영화 제목 '블랙 47'은 바로 이러한 아일랜드의 시대적 상황을 상징한다.
'브레이브 하트'에서 스코틀랜드의 독립 영웅 윌리엄 월리스(멜 깁슨 분)는 아내의 죽음을 목격하고 대영국 저항에 나선다. 마찬가지로 '블랙 47'에서 피니는 얼어죽은 형수와 조카를 보고 복수에 나선다. 피니의 행동은 개인적인 복수 차원에서 나아가 대영국 투쟁이라는 의미와 상징성을 가진다. 아일랜드가 직면한 비극적인 모순의 근본적인 근원이 바로 제국주의 침략자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반역자가 된 피니를 잉글랜드인 포프 경감(프레디 폭스 분)과 그의 아일랜드인 부하 해나 경위(휴고 위빙 분)가 뒤쫓는다. 해나는 일제시대 일본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인과 비슷한 캐릭터다. 하지만 해나는 수프 한 그릇이라도 먹고 싶으면 개종하라는 신교도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마침내 그는 아일랜드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영국 식민지 지배자들과 지주, 그리고 그 하수인들을 바라보면서 민족적 자각을 하게 된다.
피니가 호텔에 묵고 있는 영국의 악질 지주 킬 마이클 경(짐 브로드벤트 분)을 암살하려다가 함정에 빠져 체포되는 순간 해나는 그가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피니는 킬 마이클을 납치해서 호텔을 빠져나간다. 이로 인해 해나는 체포되어 처형의 위기에 처한다. 해나가 처형장으로 끌려나가 총살되려는 순간 사람이 탄 말 한 마리가 달려온다. 포프 경감은 그가 피니라고 생각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나 그가 사살한 사람은 다름아닌 악덕 지주 킬 마이클이었다. 피니가 킬 마이클의 몸을 결박하고 입을 틀어막아 자신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
피니가 영국군의 손을 빌어서 악덕 지주를 처형한 것도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처형될 사람은 피니나 해나가 아니라 바로 킬 마이클 같은 악덕 지주라는 것을 시사한다. 나아가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은 영국 제국주의자들이라는 것을.....
해나는 피니의 탈출을 막으려는 포프 경감에게 총상을 입힌다. 사형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피니와 해나는 혼란을 이용해서 사형장을 탈출한다. 하지만 피니는 포프 경감의 총을 맞고 중태에 빠진다. 피니는 숨을 거두면서 해나에게 '저들에게 대항하지 말고 미국으로 떠나라'고 권한다. 피니는 해나가 자신처럼 비참하게 살다가 희생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일랜드에 남아서 영국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낼 때까지 싸우라는 강력한 반어적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엔딩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총상을 입은 포프 경감은 말을 탄 채 축 늘어진 모습으로 패잔병처럼 본토로 돌아간다. 이 장면은 바로 언젠가 영국 제국주의자들도 바로 저런 모습으로 아일랜드에서 축출되리라는 것을 상징한다.
Black 47 - Official Trailer
해나는 삼거리에서 잠시 망설인다. 한쪽은 포프 경감이 앞서간 그 길, 외국으로 떠나는 길이다. 그건 도피의 길이다. 하지만 해나는 아일랜드 민중을 따라간다. 아일랜드에 남은 해나의 후예들은 먼 훗날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Irish Republican Army)이 되어 영국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2021. 1. 3. 林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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