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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흑인해방운동 실화 '프리즌 이스케이프'

林 山 2021. 1. 1. 20:11

20201년 1월 1일 들어서 감상한 첫 영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흑인해방운동의 실화를 다룬 '프리즌 이스케이프'다. 'Prison Escape'는 직역하면 '교도소 탈출'이라는 아주 스포일러 가득한 제목이다. 하지만 원제는 '이스케이프 프롬 프리토리아(Escape from Pretoria)'다. '프리토리아로부터의 탈출' 정도의 뜻이 되겠다.

 

영화 '프리즌 이스케이프' 포스터

'프리즌 이스케이프(Escape from Pretoria)'는 2020년 개봉한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합작의 탈옥 실화 스릴러(thriller)이다. 영국의 프란시스 애낸(Francis Annan)이 감독한 이 영화는 실제 남아공의 천재 탈옥범으로 유명한 팀 젠킨(Tim Jenkin)의 자서전 '인사이드 아웃: 프리토리아 감옥으로부터의 탈출(Inside Out: Escape from Pretoria Prison)'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영화 '해리 포터(Harry Potter)'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영국의 대니얼 래드클리프(Daniel Radcliffe, 팀 젠킨 역), 호주의 대니얼 웨버(Daniel Webber, 스티븐 리 역), 영국의 이언 하트(Ian Hart, 데니스 골드버그 역), 호주의 마크 레너드 윈터(Mark Leonard Winter, 레너드 폰테인 역) 등이 출연한다. 프로필에는 래드클리프의 키가 165cm로 나와 있다.  

 

프리토리아는 남아공의 행정수도이며 가우텡(Gauteng) 주의 주도이자, 양심수와 정치범을 수용하는 교도소가 있던 곳이다. 당시 프리토리아 교도소에는 1960년에 있었던 저 유명한 리보니아 재판(The Rivonia Trial)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의장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2013)와 ANC 부의장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 1912~2003)와 함께 종신형을 선고받은 반아파르트헤이트(Anti-Apartheid Movement) 투사 데니스 골드버그(Denis Goldberg, 1933~2020)가 수감되어 있었다.  

 

반아파르트헤이트 전단지를 살포하다 체포된 팀 젠킨과 스티븐 리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과거 남아공 백인 정권의 악명높은 인종분리주의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이해해야 한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 백인 정권에 의해 1948년에 법률로 공식화된 인종분리 즉, 남아공 백인 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 정책을 말한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남아공 사람을 인종 등급으로 나누어 백인, 흑인, 컬러드(Coloured, 백인과 흑인 또는 백인과 말레이 제도에서 온 이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인도인 등으로 분류하였다. 백인 정권은 인종별로 거주지 분리, 통혼 금지, 출입구역 분리 등의 정책으로 사상 유례 없는 노골적인 백인지상주의 국가를 지향하였다. 

 

국제 사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남아공에 대해 FIFA 월드컵과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대회의 참가를 금지시켰다. 아프리카 주변 국가들도 인종분리 정책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영공을 개방하지 않았다. 이에 남아프리카 항공이 ETOPS 규정에 크게 제약을 받게 되면서 에어버스 A340 기종을 많이 운용하는 근거가 됐다. 

 

팀 젠킨과  흑인 여자친구 대프니가 만나는 장면

이후 ANC의 저항으로 아파르트헤이트는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됐다. 1990년~1993년까지 벌인 남아공 백인 정부와 흑인 대표인 ANC 의장 넬슨 만델라 간의 협상 끝에 아파르트헤이트는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민주적 선거에 의해 백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아공 대통령으로 당선된 넬슨 만델라는 1994년 4월 27일 아파르트헤이트의 완전 폐지를 선언하였다.

 

영화는 1973년 대학교 졸업생인 백인 팀 젠킨(대니얼 래드클리프 분)과 그의 친구 스티븐 리(대니얼 웨버 분)가 흑인과 유색인의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반아파르트헤이트 전단지를 폭발물을 이용해 거리에 뿌리면서 시작된다. 이들이 대단하게 보이는 것은 백인이면서도 흑인 등 유색인종들의 인권과 자유, 평등을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백인 정권에 대한 이들의 저항은 소수 백인 기득권층을 향한 통렬한 비판이었지만 극우 파시스트 판사의 눈에는 남아공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비쳐진다.

 

원로 정치범 데니스 골드버그와 팀 젠킨이 식당에서 만나는 장면

법정에서 극우 파시스트 판사의 무자비하고 부당한 판결로 폭탄을 제조한 젠킨은 12년, 리는 8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는다. 대기실에서 팀은 흑인 여자친구 대프니(라티조 맘보 분)가 몰래 양말 속에 넣어준 돈을 시거통에 담아 항문에 찔러넣는다. 둘은 프리토리아 소재 백인 전용 교도소로 이송되어 각각 독방에 수감된다. 

 

젠킨은 리와 함께 수감된 날부터 탈옥을 계획한다. 젠킨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감옥 안에서 고군분투한다. 그는 감옥의 벽을 뚫는 것이 아니라 강철문을 따고 탈옥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자유가 기다리는 감옥 밖의 세상으로 탈출하려면 수십 개의 강철문을 따야 한다. 

 

젠킨과 리가 식당에서 원로 정치범 골드버그와 만나는 장면

젠킨은 종이와 연필로 열쇠구멍의 구조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그는 간수들이 차고 다니는 열쇠 꾸러미를 자세히 관찰한 뒤 나무로 수십 개에 이르는 열쇠를 만드는 작업에 몰두한다. 이 과정에서 젠킨은 간수들에게 여러 차례 발각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젠킨을 공황 상태로까지 몰고간다. 래드클리프는 극중에서 감옥이라는 고립되고 폐쇄적인 상황에 처한 내면의 불안한 심리를 훌륭하게 연기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해리 포터'에서 보여주었던 모범생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했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원로 정치범 데니스 골드버그는 젠킨의 탈옥 계획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젠킨과 리의 탈옥 계획에 먼저 수감되어 있던 레너드 폰테인(마크 레너드 윈터 분)도 가담한다. 그는 이미 20년이나 수감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남은 형기는 까마득하게 남아 있다. 가족들과의 면회는 1년에 단 한 번, 그것도 겨우 30분만 허용된다. 면회가 허용된 바로 그날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면회를 온다. 하지만 악질 간수는 레너드가 떠들었다고 30분도 안 되었는데 강제로 면회를 종료시킨다. 아들을 만날 수 없다는 죄책감과 절망감, 그리고 분노로 레너드는 젠킨과 리의 탈옥 계획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레너드의 면회 장면을 통해서 남아공 백인 정권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인종분리 정책을 폭로한 것이다.

 

젠킨과 리가 탈옥을 준비하는 장면

젠킨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탈옥에 필요한 수십 개의 열쇠를 완성한다. 탈옥하는 날 젠킨과 리는 원로 정치범 골드버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함께 탈옥하자고 권유한다. 하지만 골드버그는 젠킨 일행을 따라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탈옥을 시도하지 않는 민델라와 시술루, 골드버그를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 소극적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골드버그는 나무가 열매(자유)를 맺으려면 씨를 뿌리고 거름(희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젠킨 일행을 따라나서지 않은 것은 이미 자신들은 열매를 위해 땅에 뿌려진 거름이라는 의미다. 어쩌면 감옥에서 평생을 보낸 골드버그에게 이곳은 그의 삶의 일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좀 다른 생각이지만 젠킨과 리의 비판은 ANC 지도자들의 고차원적인 투쟁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민델라와 시술루, 골드버그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것 자체가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상징이었다.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감옥에 갇혔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생각해보라!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한국의 민주화 운동 진영은 더욱 단결해서 가열차게 민주화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정권을 끝장내고 민주적 정권을 들어설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바로 김대중의 투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화 촬영 중 대니얼 래드클리프(좌)와 마크 레너드 윈터(중), 대니얼 웨버(우)

드디어 젠킨과 리, 레너드는 준비한 나무 열쇠를 갖고 탈옥을 감행한다. 그때 이들의 탈옥이 뚱보 간수에게 발각된 위기의 순간이 닥친다. 그러나, 골드버그가 감방의 전구를 깨뜨려 합선이 되게 하자 위층의 전기가 모두 나간다. 그가 간수를 소리쳐 부르자 뚱보 간수가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위기를 모면한다. 

 

젠킨 일행은 전기문을 지나서 드디어 마지막 강철문에 이른다. 그런데 만들어 둔 나무 열쇠를 다 넣고 돌려봐도 맞는 것이 없다. 절망한 젠킨과 리가 탈옥을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레너드가 드라이버로 문틈을 찍기 시작한다. 소리 때문에 발각되면 끝장이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숨막히는 긴장감과 공포가 몰아치는 가운데 마침내 문틈을 다 파내서 걸쇠를 풀고 강철문을 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교도소 출입문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교도소 출입문만 나가면 자유다. 레너드가 강철문을 뛰어나가려고 하는 순간 젠킨이 그를 잡는다. 담장 위에 배치된 저격수가 젠킨 일행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격수가 반대편으로 가는 걸 확인한 세 사람은 열려 있는 출입문 밖 도로로 걸어 나온다. 셋은 침착하게 도로를 벗어나 택시를 타고 마침내 탈옥에 성공한다. 


프란시스 애낸 감독과 출연 배우들

젠킨 일행은 보츠와나로 탈출해서 짐바브웨를 거쳐 영국으로 망명했다. 런던으로 간 팀 젠킨은 ANC에 다시 가담해서 활동했으며, 1991년에 사면되었다. 데니스 골드버그는 1985년에야 석방되었다.

 

'프리즌 이스케이프'는 과거 남아공 백인 정권에 의해 자행되었던 잔혹한 아파르트헤이트를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다시는 이런 비인도적인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꼭 한번 볼 만한 영화다. 

 

2021. 1. 1. 林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