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고대-샹(商) 시대의 임씨(林氏) 계보(系譜)
중국 고대에서 샹(商)에 이르는 임씨(林氏)의 상계보(上系譜)는 다음과 같다. 여우슝궈(有熊國)의 임금 샤오디엔(少典)-화샤족(華夏族)의 시조 황띠(黃帝) 쉬안위안(軒轅)-샤오하오(少昊) 진티엔씨(金天氏)-쟈오지(蟜極)-띠쿠(帝嚳) 까오신씨(高辛氏)
허난성(河南省) 쩡저우시(鄭州市)에는 황띠(黃帝) 쉬안위안(軒轅)의 유적이 있다. 지수이(姬水)는 황띠의 탄생지이다. 지수이는 지금의 샨시성(陕西省) 신쩡시(新郑市) 웨이수이(渭水)로 추정된다. 고대 슝궈(熊国)의 지수이(姬水)일 가능성도 있다. 싀주산(始祖山)은 황띠가 거처하면서 나라를 다스린 곳이다. 싀주산은 지금의 주치산(具茨山)이다. 주치산은 중국의 중악(中岳) 숭산(嵩山)의 지맥에 있다. 황띠 탄신제는 매년 음력 3월 3일 주치산에서 봉행된다.
신쩡시 쉬안위안로(轩辕路)에는 황띠꾸리징취(黄帝故里景区)가 있다. 황띠꾸리징취에는 황띠를 비롯해서 여우차오씨(有巢氏), 푸시씨(伏羲氏), 셴눙씨(神农氏)를 모신 렌원추주디엔(人文初祖殿), 황띠쉬안위안석상(黃帝軒轅石像) 등이 있다.
산시성(陝西省) 옌안시(延安市) 황링현(黄陵县) 쉬안위안대도(轩辕大道)에는 황띠릉(黄帝陵)이 있다. 황띠 제향(祭享)은 매년 춘제(春祭)와 추제(秋祭)를 지낸다.
시엔샹(先商) 시대, 띠쿠의 아들, 샹(商) 시조 시에(契, 卨)-2대 짜오밍(昭明)-3대 샹투(相土, 子相土)-4대 창뤄(昌若)-5대 차오(曹)-6대 밍(冥. 子冥)-7대 까오주(高祖, 묘호) 왕하이(王亥, 子亥)-8대 왕헝(王恒, 子恒)-9대 샹쟈웨이(上甲微, 子微)-10대 빠오이(報乙)-11대 빠오빙(報丙)-12대 빠오띵(報丁)-13대 싀렌(示壬)-14대 쿠이쭝(夔宗, 묘호) 싀구이(示癸)
자오샹(早商) 시대 1대 타이주(太祖) 타이우왕(太武王), 탕(湯), 즈뤼(子履)-2대 아이왕(哀王) 즈셩(子勝)-3대 이왕(懿王) 즈용(子庸)-4대 타이중(太宗, 묘호) 원왕(文王, 시호) 즈쯔(子至)-5대 짜오왕(昭王) 즈쉬안(子絢)-6대 쉬안왕(宣王) 즈비엔(子辯)-7대 징왕(敬王) 즈까오(子高)-8대 위안왕(元王) 즈미(子密)-9대 쭝종(中宗) 징왕(景王) 즈쩌우(子伷)-10대 샤오청왕(孝成王) 즈쫭(子莊)-11대 쓰왕(思王) 즈파(子發)-12대 치엔핑왕(前平王) 즈쩡(子整)-13대 무왕(穆王) 즈텅(子滕)-14대 환왕(桓王) 즈단(子旦)-15대 시왕(僖王) 즈위(子踰)-16대 쫭왕(莊王) 즈신(子新)-17대 칭왕(頃王) 즈긍(子更)-18대 따오왕(悼王) 즈허(子和)
완샹(晩商) 시대 19대 싀주(世祖) 원청왕(文成王) 즈쉰(子旬)-20대 짱왕(章王) 즈숭(子頌)-21대 후이왕(惠王) 즈리엔(子斂)-22대 까오종(高宗) 샹왕(襄王) 즈짜오(子昭)-23대 허우핑왕(後平王) 즈위에(子躍)-24대 싀중(世宗) 띵왕(定王) 즈짜이(子載)-25대 쟈중(甲宗) 꿍왕(共王) 즈시엔(子先)-26대 캉주(康祖) 안왕(安王) 즈샤오(子囂)-27대 우주(武祖) 리에왕(烈王) 즈취(子瞿)-28대 쾅왕(匡王) 즈투어(子托)-임씨(林氏) 태시조(太始祖) 삐간(比干)-임씨(林氏) 시조(始祖) 린지엔(林堅)
2. 임씨(林氏) 태시조(太始祖) 삐간(比干)
임씨(林氏)가 샹(商)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은 삐간(比干)이다. 바로 삐간으로부터 임씨(林氏)가 발원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삐(比)이고, 간(干)이라는 나라에 봉(封)해져 삐간(比干)이라고 불린다. 삐간은 샹 28대 쾅왕(匡王) 타이딩(太丁)의 둘째 아들로서 저우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사람됨이 곧고 강직하여 저우왕의 폭정(暴政)을 바로잡기 위해 간언(諫言)하다가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삐간은 웨이즈(微子), 지즈(箕子)와 함께 샹 말기 세 명의 어진 사람을 가리키는 산렌(三仁)으로 꼽힌다. 중국의 민간(民間)에서 산렌은 충신(忠臣)의 전형(典型)으로 존경을 받으며, 글과 재물(文財)을 관장하는 원취성(文曲星, 九星 가운데 넷째 별)의 화신(化身)으로 숭앙(崇仰)되었다.
샹의 마지막 왕인 저우왕(紂王)은 총명하고 용맹했지만, 자신의 재능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신하의 간언(諫言)을 불필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가 등용한 페이중(費中)은 아첨을 잘하고 사리사욕(私利私慾)만 채웠기 때문에 샹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그를 멀리하였다. 또, 동남방 화이허(淮河) 유역의 둥이족(东夷族) 국가 렌팡(人方)에 대한 장기간 원정에 힘을 쏟으면서 샹의 국력은 점점 쇠약해졌다.
샹의 국력이 기울자 백성들과 제후(諸侯)들은 저우왕(紂王)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시바이허우(西白侯) 지창(姬昌, 周文王)의 세력이 점차 강성(强盛)해졌다. 삐간은 저우왕에게 이러한 정세를 충간(忠諫)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바이허우 지창이 죽고 그의 아들 지파(姫發, 周武王)가 동쪽 정벌에 나서 멍진(盟津)에 이르자 그를 따르는 제후가 800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저우왕이 충간하는 신하들을 처형하고 폭정(暴政)을 멈추지 않자 웨이즈(微子) 등은 샹을 떠났다. 하지만 삐간은 조정의 샤오싀(少師)로서 “신하는 죽더라도 임금께 충간해야 한다”면서 계속 저우왕에게 간언하였다. 그러자 저우왕은 화를 내며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라며 삐간의 충심(忠心)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를 해부하여 심장을 꺼내도록 하였다.
3. 임씨(林氏) 득성시조(得姓始祖) 1세 린지엔(林堅)
삐간이 잔인하게 살해되자 지즈(箕子)는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하다가 저우왕(紂王)에게 사로잡혀 갇혔다. 샹나라의 타이싀(太師), 샤오싀(少師)는 샹의 제기(祭器)와 악기(樂器)들을 들고 쩌우(周)로 달아났다. 삐간의 부인 첸씨(陳氏)는 임신 3개월에 저우왕의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여종 4명을 거느리고 창린산(長林山) 석굴(石窟, 長林石室)로 피신하여 살았다. BC 1029년에 첸씨는 사내아이를 낳아 이름을 취안(泉)이라 하였다.
쩌우(周)의 지파(姫發)는 충신(忠臣)을 잔인하게 살해한 저우왕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제후들을 규합하여 샹을 공격하였으며, 무예(牧野)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샹을 멸망시켰다. 무예의 전투에서 패한 저우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파(姫發)는 쩌우(周)의 우왕(武王)으로 즉위한 뒤 삐간묘(比干墓)를 찾아 봉분을 새로 쌓고, 구리로 주조한 통판밍(銅盤銘)의 표를 세웠다. 그리고, 삐간의 후사를 찾으니 첸씨 부인이 3살인 아들 취안(泉)을 안고 우왕을 뵈었다. 우왕은 취안(泉)이 창린산(長林山) 석실(石室)에서 태어났다 하여 린씨(林氏) 성과 지엔(堅)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우왕은 또 린지엔(林堅)을 꽁쥐에(公爵)로 봉하고, 보링(博陵)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임씨(林氏) 족보에는 득성(得姓) 연대가 BC 1121년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샹이 멸망한 해는 BC 1046년이다. 샹이 멸망하고, 지파(姫發)가 쩌우(周)의 우왕(武王)으로 즉위한 뒤에 취안(泉)에게 린씨(林氏) 성과 지엔(堅)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득성 연대는 BC 1046년 이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보링(博陵)은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안핑현(安平縣)이다. 보링은 임씨(林氏)의 발상지이며, 린지엔은 임씨(林氏) 일세조(一世祖), 삐간은 태시조(太始祖)가 된다. 삐간의 묘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웨이후이시(衛輝市)에 있다. 일찍이 콩즈(孔子)도 직접 삐간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삐간의 탄생제는 매년 음력 4월 4일에 지낸다.
린지엔은 BC 966년 63세에 죽었다. 린지엔 초상은 칭(淸)나라 때 수보한 푸젠후이안시허린씨족보(福建惠安西河林氏族谱)에 있는 것이다. 이 족보에는 린지엔의 모친이 첸씨(陳氏)가 아니라 꾸이씨(妫氏)라고 나와 있다. 린지엔의 출생지는 창린(长林)이라고 했다. 창린(长林)은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웨이후이시(卫辉市) 서북쪽 25km 떨어진 싀바오터우샹(狮豹头乡) 룽어춘(龙卧村)이다. 룽어촌 북쪽 허난성 안양시에는 현급시(县级市)인 린저우시(林州市)가 있고, 그 북쪽 허베이성(河北省) 한단시(邯郸市) 서현(涉县)에는 창린산(长林山)이 있다.
4. 창린석실(長林石室) 임성발원(林姓發源) 상계보(上系譜)
쩌우대(周代, BC 1046~BC 256) 1세 칭허군공(清河郡公) 린지엔(林堅), BC 1121년 득성, 임성시조(林姓始祖), 시허당 시조(西河堂始祖), 칭허군(清河郡)은 세칭 보링군(博陵郡)-2세 린추어(林磋)-3세 린쩬(林珍)-4세 린지엔(林建)-5세 린샹(林相)-6세 린칭(林傾)-7세 린쉬안(林玄)-8세 린펑(林鳳)-9세 린탄(林檀)-10세 린이(林翊)-11세 린카이(林開)-12세 린창(林萇)-13세 린차이(林材)-14세 린렌(林壬)-15세 린쩬(林貞)-16세 린후이(林回)-17세 린추이(林萃)-18세 린푸(林復)-19세 린바오(林保)-20세 린훙(林宏)-21세 린뱌오(林標)-22세 린셩(林聖)-23세 린팡(林放)-24세 린퉁(林通)-25세 린부뉴(林不狃)-26세 린푸(林撫)-27세 린슈(林修)-28세 린신(林欣)-29세 린루안(林鸞)-30세 린싀위안(林士元)-31세 린보(林伯)-32세 린쉬안(林宣)-33세 린웨이(林微)-34세 린팡(林芳)-35세 린보거(林伯葛)-36세 린인(林尹)
친대(秦代, 嬴政 BC 247~BC 221, 秦帝國 BC 221~BC 206) 37세 린웨이(林瑋) BC 241-38세 린자오(林昭) BC 224
시한대(西漢代)-치엔한대(前漢代, BC 202~AD 8) 39세 린쫜(林纂) BC 205-40세 린쥐(林鞠)-41세 린비에(林別) BC 179-42세 린까오(林告) BC 167-43세 린슈(林述), 칭난탕(淸南堂) BC 156-44세 린량(林良) BC 139-45세 린궁(林功) BC 104-46세 린츠(林車) BC 85-47세 린핑(林憑) BC 73-48세 린가오(林高) BC 37
둥한대(東漢代)-허우한대(後漢代, 25~220) 49세 린먀오(林苗)-50세 린지우(林就)-51세 린펑(林封) AD 58-52세 린눙(林農) AD 88-53세 린즈(林祗) AD 106-54세 린후(林湖) AD 125-55세 린탄(林譚) AD 146-56세 린위(林豫) AD 166-57세 린다오구(林道固) AD 189-58세 린관(林冠) AD 214-59세 린위(林玉) AD 229-60세 린펑쉰(林逢勳) AD 260-61세 린시엔(林顯) AD 280-62세 린리(林禮) AD 307-63세 린잉(林潁) AD 315
둥진대(東晉代)-웨이진난베이차오시대(魏晉南北朝時代, 220~589) 64세 린루(林祿) 진안탕(晉安堂) 민린시조(閩林始祖) AD 274~357(西晋泰始十年~东晋穆帝永和十二年)-65세 린징(林景)-66세 린환(林緩)-67세 린거(林格)-68세 린징즈(林靖之) AD 423-69세 린쉬즈(林遂之) AD 454-70세 린둔민(林遯民) AD 484-71세 린위젠(林玉珍)-72세 린위안치(林元次)-73세 린마오(林茂)-74세 린샤오바오(林孝寶)-75세 린원지(林文濟)-76세 린궈더우(林國都)-77세 린쉬안타이(林玄泰). 71~77세는 년대 불명으로 왕조를 특정할 수 없음. 1세를 30~40년으로 잡으면 75~76세 이후는 탕대(唐代)로 추정됨
탕대(唐代, AD 618~907) 78세 린완총(林萬寵) AD 720-79세 린피(林披) AD 752-80세 린윈(林蘊) 지우무리우팡(九牧六方) AD 788-81세 린위안(林愿) 탕시엔종(唐憲宗) AD 807-82세 린융(林邕)-83세 린원판(林文範)-84세 린빠지(林八及) 한국임씨(韓國林氏) 도시조(都始祖, 1세조) AD 850년.
79세 린피(林披)는 린웨이(林苇), 린자오(林藻), 린주(林著), 린지엔(林荐), 린예(林晔), 린윈(林蕴), 린멍(林蒙), 린마이(林迈), 린지(林蔇) 등 9명의 아들을 두었다. 린피의 아들 9명은 모두 치싀(刺史)를 지냈다. 그래서 이들 9명을 세상에서 지우무린쟈(九牧林家)라고 일컬었다. 린윈은 린피의 6남이었기 때문에 지우무리우팡(九牧六方)이라고 한다. 치싀는 한(漢), 탕(唐) 시대 주(州)의 장관이다. 후세에는 지방장관의 호칭이 되었고, 칭(清) 때에는 즈저우(知州)의 존칭으로 되었다.
기록에 따른 임성(林姓) 발상지(發祥地)와 세거지(世居地),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다. 득성시조 린지엔은 창린석실(長林石室)에서 태어났다. 창린석실은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허비시(鶴壁市) 치현(淇县, 옛 朝歌) 황둥향(黄洞乡) 위취안촌(魚泉村) 타이항산(太行山) 산맥 끝에 있는 시엔렌티(仙人梯) 린지엔동(林堅洞)이다. 창린석실에는 삐간(比干)과 첸씨부인(陳氏婦人), 린지엔(林堅)과 두 아들 린지에(林嗟), 린짜이(林載)의 좌상(坐像)이 있다.
허비시(鶴壁市) 치현(淇县)에는 짜이싱대(摘星台) 공원이 있고, 짜이싱대 공원 안에는 짜이신추(摘心處)와 산렌사(三仁祠)가 있다. 짜이신추는 저우왕이 짜이신대는 삐간(比干)의 심장을 꺼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산렌사는 샹 말기 삐간과 웨이즈(微子), 지즈(箕子) 등 충신 세 사람을 모신 사당이다.
허비시(鶴壁市) 치현(淇县) 바로 북쪽 안양시(安陽市)에는 샹(商)나라 옛 도읍인 인쉬(殷墟)가 있다. 샹은 도읍을 옌스(偃師)에서 안양으로 옮겨 궁궐을 조성했다. 인쉬는 샹나라 도읍 궁궐터다. 인쉬의 기둥과 벽에는 지금도 상형문자(象形文字)와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있다.
안양시 네이황현(內黃县) 량좡진(梁庄鎮)에는 황띠(黃帝)의 증손자인 띠쿠(帝嚳) 까오신씨(高辛氏)의 능(陵)이 있다. 허비시 치현 바로 남서쪽에는 쩌우(周) 우왕(武王)이 인(殷) 저우(紂)의 군대를 무찌른 무예(牧野)가 있다. 지금의 신샹시(新乡市) 무예구(牧野区)이다. 삐간묘(比干墓)는 치현 바로 남서쪽의 허난성 웨이후이시(卫辉市) 삐간대도(比干大道)에 있다.
삐간의 아들 취안(泉)은 쩌우(周) 우왕(武王)으로부터 창린산(長林山) 석실(石室)에서 태어났다 하여 린씨(林氏) 성과 지엔(堅)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우왕은 린지엔(林堅)을 꽁쥐에(公爵)로 봉하고, 보링(博陵)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보링은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바오딩시(保定市) 리현(蠡县) 리우진(蠡吾镇) 남쪽에 있다. 린지엔은 식솔들을 이끌고 황허(黃河)를 건너 보링으로 이주했다. 보링은 임씨(林氏) 발상지이다. 보링군은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안핑현(安平县) 일대라고도 한다. 바오딩시와 안핑현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샨시성(山西省) 윈청시(运城市) 위안취현(垣曲县) 시허(西河)에는 임씨(林氏) 조상이 많이 살았으며 시허당(西河堂)의 시초가 된다. 시허는 또 띠슌(帝舜)의 고향이기도 하다.
'린싀쩡종위안류주푸쉬(林氏正宗源流族谱序)'에 따르면 린지엔과 그 후손들을 시허당(西河堂) 린씨(林氏)라고 한다. 시허당은 또 시허군(西河郡)이라고도 한다. 시허당 또는 시허군은 임씨(林氏)의 군망당호(郡望堂号)와 통용된다. 군망당호란 그 군에서 가장 명망 있는 가문을 말한다. 시허당 임씨는 임씨의 군망당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쩌우(周) 우왕(武王)은 린지엔에게 칭허군(清河郡)을 식읍으로 주었다. 칭허군은 또한 보링군(博陵郡)이라고도 한다. 린지엔의 작위는 보링후(博陵侯), 관직은 타이즈싼지엔(太子三监), 봉호(封户)는 이천 호(户)였다. 작위는 자손 대대로 세습하게 했다. 보링군은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안핑현(安平县) 일대이다. 안핑현은 치수(淇水)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시허군이라고 했다. 린씨는 바로 이 시허군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가문이었다.
린빠지(林八及)의 조상은 보링에서 지난(濟南)으로 이주했다. 지난은 샨둥성(山東省)의 성도(省都)이다. 산둥성 지닝(济宁) 취푸시(曲阜市)에는 콩쯔묘(孔子廟)가 있다. 콩쯔묘에는 득성 시조 린지엔(林堅)으로부터 23세손인 린팡(林妨)이 종사(從祀)되었다.
린빠지의 조상은 지난(濟南)에서 쑤이닝(睢宁) 샤피(下邳)로 이주했다. 샤피는 장쑤성(江蘇省) 쉬저우시(徐州市) 쑤이닝현(睢宁县) 북쪽에 있다. 지금의 장쑤성 북단에 있는 피저우시(邳州市)다. 샤피는 린지엔(林堅)으로부터 64세이자 민린(闽林) 시조 진안당(晉安堂) 린루(林祿, 274~357, 西晋泰始十年~东晋穆帝永和十二年)가 태어난 곳이다. 민(闽)은 푸젠성(福建省)의 다른 이름이다.
린빠지(林八及)의 조상은 샤피에서 다시 남하하여 푸젠성(福建省) 중부 해안에 있는 푸톈(莆田)에 정착했다. 린빠지는 바로 푸톈에서 출생했다. 푸톈시(莆田市) 시톈웨이진(西天尾镇) 룽샨촌(龙山村) 우싀(乌石)에는 지우무주사(九牧祖祠)가 있다. 우싀는 옛 렌더리(仁德里) 청주촌(澄渚村)에 속했다. 룽샨촌은 탕(唐)나라 지우무린씨(九牧林氏) 발상지이다.
지우무린씨(九牧林氏)의 연원은 길고 오래되었다. 둥진(东晋) 초 진안린씨(晋安林氏) 시조 린루(林禄)가 민(闽)으로 이주하였다. 린루의 자는 싀인(世荫)으로 둥진(东晋)의 쟝링(将领)이었다. 오호(五胡)가 중원 대륙을 어지럽힐 때 린루는 칙령을 받들어 진안군(晋安郡)을 지켰으며, 식솔들을 데리고 진안으로 이주하여 민린의 시조가 되었다. 진안군은 지금의 푸젠성(福建省) 푸저우시(福州市) 꾸러우구(鼓楼区)이다. 린루는 진(晋)나라 왕실을 받들어 전쟁에 수차례 출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자오위안(招远)의 장군과 산치창싀(散骑常侍), 황먼싀랑(黄门侍郎)을 역임했다. 그는 진(晋) 위안띠(元帝), 밍띠(明帝), 청띠(成帝), 캉띠(康帝), 무띠(穆帝)를 차례로 모셔 오조원로(五朝元老)라 일컬어졌다. 린루가 죽자 진안군왕(晋安郡王)이 추증되었으며, 원링(温陵)의 언덕에 묻혔다. 원링은 지금의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시(泉州市) 취안강구(泉港区) 투링진(涂岭镇) 칭메이촌(清美村) 지우룽강(九龙岗)이다.
린루(林禄)의 10세손 린마오(林茂)는 수이(隋)나라의 여우청(右丞)이 되었다. 린마오는 진안에서 푸톈(莆田) 베이루어촌(北螺村)으로 이주하였다. 또한 5세손 린완총(林万宠)은 탕(唐)나라 카이위안(开元) 연간에 까오핑태수(高平太守)에 임명되었다. 까오핑은 산시성(山西省)에 있다. 린완총은 린타오(林韬), 린피(林披), 린찰(林昌) 등 세 아들을 두었다. 린타오의 손자 린짠(林欑)은 효성이 지극하여 탕나라 더종(德宗)이 쌍궐(双阙)을 세워 주었으므로 당시 '취에샤린쟈(阙下林家)'라 불렸다. 취에샤린쟈의 후손 린지(林伋)는 싱화진사(兴化进士)가 되었으며, 관직은 진쟝현위(晋江县尉)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린치(林杞, 1076~1140)는 난숭(南宋)의 톈셩진사(天圣进士)가 되었으며, 캉저우(康州)와 즈저우(淄州), 야저우(雅州), 타이저우(泰州)의 즈저우(知州, 주의 장관)를 차례로 지냈다. 린치는 린징위안(林景渊), 린징여우(林景佑), 린징무(林景默), 린징후이(林景辉), 린징타이(林景泰), 린징뤼(林景瑞), 린징위안(林景元), 린징젠(林景贞), 린징헝(林景亨) 등 9명의 아들을 두었다. 9명의 아들 모두 즈저우(知州)를 지냈기 때문에 세상에서 지우무린씨(九牧林氏)라 일컬었다. 또한 이들은 푸즈싀즈저우(父子十知州), 숭지우무(宋九牧), 취안저우지우무(泉州九牧)라고도 일컬어졌다.
린윈(林蘊)의 후손 린빠지(林八及)는 탕조(唐朝)에서 한린쉬에싀(翰林學士, 한림학사), 빙부싀랑(兵部侍郞, 병부시랑)을 지냈다. 간신배의 모함과 참소(讒訴)를 당한 린빠지는 쉬에렌징(薛仁敬), 쉬쭝(許重), 숭쿠이(宋奎), 쿠이후(崔冱), 리우취안(劉筌), 취안즈치(權之奇), 콩더푸(孔德符) 등 7학사와 함께 푸젠성 취안저우시(泉州市) 후이안현(惠安縣) 둥링진(東嶺鎭) 펑청촌(彭城村)을 출발하여 황해(黃海)를 건너와 팽성(彭城) 용주방(龍珠坊) 또는 용포리(龍浦里)에 도착 세거(世居)했다. 용주방 또는 용포리는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평택시(平澤市) 퍙성읍(彭城邑) 안정리 산 21-2번지이다. 신라(新羅) 왕실에서는 린빠지에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제수하였다. 린빠지가 세상을 떠나자 시호(諡號) 충절공(忠節公), 팽성군(彭城君)을 내려 주었다. 린빠지는 한국(韓國) 임씨(林氏)의 도시조가 되었다. 린빠지의 후손은 20여 관파(貫派) 약 100만 명의 종인(宗人)이 있다.
2021. 2. 22. 林鍾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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