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長興林氏)

임씨(林氏) 발원(發源) 샹(商) 역사

林 山 2021. 2. 7. 02:22

샹(商)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최초의 중궈(中國) 왕조다. 샹은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다. 샹 20대 왕 판긍(盤庚, 盘庚, BC 1290년~1263년)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인(殷)이었기 때문에 인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쩌우(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인(殷)으로 부른 탓에 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라를 세운 샹(商) 부족과 백성들은 국명을 샹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국명을 샹으로 통일해 부른다. 

 

19세기 말까지 샹은 전설상 왕조로만 다루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인쉬(殷墟)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면서 샹은 실재하는 왕조였음이 증명되었다. 인쉬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갑골문자(甲骨文字)를 해독함으로써 샹의 존재가 해명되기에 이르렀다.

 

1. 시엔샹(先商) 시대 

 

시엔샹(先商) 시대는 1대 시에(契, 子契)로부터 2대 짜오밍(昭明)-3대 샹투(相土, 子相土)-4대 창뤄(昌若)-5대 차오위(曹圉)-6대 밍(冥. 子冥)-7대 까오주(高祖, 묘호) 왕하이(王亥, 子亥)-8대 왕헝(王恒, 子恒)-9대 샹쟈웨이(上甲微, 子微)-10대 빠오이(報乙)-11대 빠오빙(報丙)-12대 빠오띵(報丁)-13대 싀렌(示壬)-14대 쿠이쭝(夔宗, 묘호) 싀구이(示癸)로 이어진다. 시에부터 싀구이까지를 시엔샹(先商) 시대라고 한다. 

 

(商) 왕조의 시조는 시에(契)로 알려져 있다. 시에는 샹 지역 사람이다. 샹은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샹치우시(商丘市)이다. 시에를 치엔(乾), 사에(卨), 으바이(閼伯)라고도 한다, 여우숭쉬(有娀氏)의 딸이자 띠쿠(帝嚳)의 차비(次妃)인 지엔디(簡狄)가 연못에서 목욕을 하다가 검은 새(玄鳥)의 알을 삼키고 시에를 낳았다. 그래서 시에를 쉬안왕(玄王)이라고도 한다. 시에는 팅야오(唐堯)의 이복동생이기도 하다.

 

황띠 (黃帝)  쉬안위안씨(軒轅氏)

황띠(黃帝) 쉬안위안씨(軒轅氏)는 여우슝궈(有熊國)의 임금 샤오디엔(少典)의 아들이다. 후세 사람들은 황띠를 한족(漢族)의 전신인 화샤족(華夏族)의 시조로 숭상하고 있다. 그는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린 오제(五帝)의 첫번째 왕이다. 황띠(黃帝)라는 이름은 재위 기간 중 황룡(黃龍)이 나타나 토덕(土德)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 삼황은 신화 속의 인물들로 간주되지만, 황띠 등 오제(五帝)는 실존한 제왕들로서 추앙되었다. 황띠는 중국 문명의 시조로서 쫜쉬(顓頊), 띠쿠(帝嚳), 탕야오(唐堯), 위쉰(虞舜) 등 사제(四帝)와 샤(夏)-샹(商)-쩌우(周) 3대 왕조의 공통 시조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도교(道敎)의 시조로 추앙되기도 한다.

 

황띠는 치여우(蚩尤)를 물리치고 셴눙(神農)에 이어 제왕이 되었다. 그는 100년 동안 재위하면서 의복, 수레, 문자, 60갑자 등을 발명하고, 한의학을 창시하였다고 전한다. 또, 그는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랜 의학서인 '황띠네이징수원(黄帝内經素問)', '황띠네이징링수(黄帝内經靈樞)'와 가장 오래된 방중술 저작인 '수뉘징(素女經)'을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칭(淸)나라 말기 캉여우웨이(康有爲), 구지에강(顾颉刚)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띠와 오제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짠궈시대(戰國時代)~웨이진난베이차오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각색된 신화로 판정하였다. 일본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치무라 산지로(市村瓉次郎), 이이지마 타다오(飯島忠夫) 등도 황제의 실존을 부정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띠쿠 (帝嚳)  까오신씨(高辛氏)

띠쿠(帝嚳) 까오신씨(高辛氏)의 성은 지(姬)이고, 이름은 쥔(俊), 호는 쿠(嚳)이다. 중국 고대 부족장이자 제왕으로 중국인의 시조라 불리는 황띠(黃帝)의 증손자다. 황띠에서 장남 샤오하오(少昊) 진티엔씨(金天氏) 쉬안샤오(玄囂)-쟈오지(蟜極)-띠쿠로 이어진다. 띠쿠의 부친은 쟈오지, 모친은 워퍼우(握裒)이다. 쫜쉬는 띠쿠의 백부이다.

 

띠쿠(帝嚳)는 모친이 거인의 족적을 밟고 잉태하여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쓰마치엔(司馬遷)의 '싀지(史記)' 우띠뻔지(五帝本紀)에는 띠쿠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등 천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5세 때 백부 쉬안띠(玄帝) 쫜쉬(顓頊)의 조수로 공을 세우자 신허우(辛侯)에 봉해졌다. 쫜쉬가 죽자 조카 까오신(高辛)이 30세에 즉위하니 그가 곧 띠쿠이다. 

 

띠쿠(帝嚳)는 보(亳)에서 여덟 개의 작은 씨족으로 구성된 부락을 이끌었다. 보(亳)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덩펑시(封市)이다. 그는 쫜쉬(顓頊)를 이어 꿍꿍씨(共工氏)와의 세력 쟁탈전에서 두 번이나 꿍꿍씨를 물리쳤다. 즉위 후 어진 정치를 펼치니 천하의 백성이 그에게 복종했다. 그는 해와 달, 별을 관장하면서 백성을 이롭게 했고, 토지의 산물을 아껴서 사용했다. 또 시세의 운행을 잘 살피고 기운을 잘 다스려 농업생산을 발전시키는데도 공헌했다. 특히 홍수를 잘 막아서 태평성대를 누렸다. 재위 70년에 105세까지 살았으며, 죽어서는 쫜쉬와 마찬가지로 푸양(濮阳) 뚠치우청(頓丘城) 밖 남쪽의 타이인예(臺陰野)에 묻혔다. 지금의 허난성 푸양현(濮阳) 부근이다.  

 

샹 (商)  왕조의 시조 시에(契)

시에(契)는 위(虞)나라의 치수(治水)를 도운 공을 세웠다. 쉰(舜)은 시에에게 스투(司徒) 벼슬을 주고, 샹(商)에 봉했으며, 즈(子)씨 성(姓)을 하사했다. 탕야오(唐堯) 때도 시에는 스투 벼슬을 지냈다. 그의 무덤을 샹치우(商丘)라 했으며, 여기서 지금의 허난성 샹치우시의 지명이 유래했다. 샹 까오주(高祖) 탕(湯)의 선조라고 하여 시에쉬안왕(契玄王)으로 봉해졌다. 이후 시에의 자손은 대대로 샤(夏)나라를 섬겼다. 

 

1대 시에(契)는 처음 보(亳)에 도읍을 정했다가 후에 판(蕃)으로 옮겼다보(亳)는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동북부에서 랴오닝성(辽宁省) 서부에 이르는 일대, 또는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阳) 옌스시(偃师市) 스샹거우 유적(尸乡沟遺跡)으로 추정되고 있다. 판은 현재 베이징시(北京市), 허베이성 북부 지둥 평원(冀東平原) 일대로 비정(比定)된다.  

 

2대 짜오밍(昭明)은 띠싀(砥石)에 도읍을 정했다가 샹(商)으로 도읍을 옮겼다. 띠싀는 현재 허베이성 스자좡(石家庄) 이남에서 허베이성 싱타이시(邢台市) 이북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샹은 일설에 현재의 짱허(漳河) 일대, 또는 산시성(山西省) 샹뤄시(商洛市) 샹저우구(香洲区)라고 한다.   

 

3대 샹투(相土)는 도읍을 샹치우(商丘)에서 타이샨(泰山) 아래로 옮겼다가 다시 샹치우로 되돌아왔다. 샹치우는 일설에 허베이성 중부에서 허난성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라고 한다. 타이샨은 일설에 타이항샨(太行山) 기슭이다. 

 

4대 창뤄(昌若)는 아버지가 샹투(相土, 아들이 차오위(曹圉)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5대 차오위(曹圉)는 이름을 량위(糧圉)라고도 했다. 창뤄(昌若)의 아들, 밍(冥)의 아버지며, 샹탕(商湯)의 9대조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6대 밍(冥. 子冥)은 차오위(曹圉)의 아들로 샤(夏)나라에서 벼슬하여 스쿵(司空)이 되었다. 밍의 아들은 왕하이(王亥)와 왕헝(王恒, 子恒)이다. 그는 나랏일에 정성을 다했고, 물가에서 죽었다. 인(殷)나라 사람들이 교제사(郊祭祠)를 지내주었다. 쓰마치엔(司馬遷)의 '싀지(史記)' 인뻔지(殷本紀)에는 밍이 죽은 뒤에 아들 쩬(振)이 즉위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갑골문에는 왕하이(王亥)로 되어 있다. 갑골문이 '싀지'보다 사료적 가치가 훨씬 높다. 

 

7대 까오주(高祖, 묘호) 왕하이(王亥)는 도읍을 인(殷)으로 옮겼다. 인의 위치는 현재 불명이다. 8대 왕헝(王恒, 子恒)은 왕하이의 동생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9대 샹쟈웨이(上甲微)는 도읍을 예(鄴)로 옮겼다. 예에서의 도읍 기간은 망(芒) 33년~콩쟈(孔甲) 9년이다. 예는 현재 허베이성 한단시(邯郸市) 린장현(临漳县) 짱허(漳河) 유역으로 확인되었다. 

 

10대 빠오이(報乙)는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 알려진 것이 없다. '이(乙)'는 이일(乙日)에 태어나서 붙인 것이다. 11대 빠오빙(報丙)은 빠오이의 아들이다. '빙(丙)'은 빙일(丙日)에 태어나서 붙인 것이다. 그외 알려진 것이 없다. 12대 빠오띵(報丁)은 빠오빙의 아들이다. '띵(丁)'은 띵일(丁日)에 태어나서 붙인 것이다. 그외 자세한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13대 싀렌(示壬)의 행적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콩쟈 9년에서 지에(桀) 15년 간 샹허우(商侯)는 도읍을 다시 샹치우(商丘)로 옮겼다. 샹허우는 탕(湯) 바로 직전이니 14대 쿠이쭝(夔宗) 싀구이(示癸)다. 이처럼 시엔샹(先商) 시대에는 도읍을 8차례나 옮겼다. 

 

2. 자오샹(早商) 시대

 

쿠이쭝(夔宗) 싀구이(示癸)의 아들 (湯)은 거북 등딱지에 쓰인 예언대로 샤(夏)의 포악한 군주 지에(桀)에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켰다. 탕은 명신 이인(伊尹), 페이창(費昌) 등의 보좌를 받아 BC 1600년경 샤 왕조의 마지막 왕 지에를 밍탸오(鳴條)에서 격파하여 멸망시키고 샹(商) 왕조를 열었다. 지에는 포학한 정치를 해 민심이 샤를 떠났다. '수징(書經)'에는 지에를 멸할 때 제후들을 향해 연설했다고 여겨지는 '탕수(湯誓)' 편이 있다. 탕은 후세에 샤의 위(禹), 위(虞)의 순(舜), 저우(周)의 원왕(文王), 우왕(武王)과 함께 성군(聖君)으로서 숭상되었다.

 

샹(商) 건국자  탕 (湯)

1대 탕왕부터 18대 다오왕(悼王) 때까지를 자오샹(早商) 시대라고 한다. 1대 타이주(太祖, 묘호) 타이우왕(太武王, 시호, 재위 BC 1600~1589)의 이름은 즈뤼(子履)이다. 쓰마치엔(司馬遷)의 '싀지(史記)'명은 (湯), 갑골문자명(甲骨文字名)은 (湯), 따이(大乙)이다. 별칭으로는 티엔이(天乙), 타이이(太乙), 청탕(成湯, 成唐) 등이 있다. 탕은 도읍을 보(亳)에 정했다. 보는 현재 허난성 정저우시(郑州市) 샹청 유적지(商城遗址)로 추정된다. 

 

탕은 온후하고 관대해서 가뭄이 들자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기도 전에 비가 내렸고, 탕은 목숨을 건졌다. 그는 9척(2.7m) 장신이었으며, 흰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르고, 뾰족한 머리와 여섯 마디의 팔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대 아이왕(哀王, 재위 BC 1588~1587)의 이름은 즈셩(子勝)이다. 싀지명은 와이빙(外丙), 갑골문자명은 부빙(卜丙)이다. '싀지'에 따르면 형 타이딩(太丁)이 요절했기 때문에 아버지 탕의 뒤를 이어 샹의 2대 군주가 되었다. 을해(乙亥)년에 즉위한 와이빙은 이인(伊尹)을 재상으로 삼았고, 수도를 보(亳)로 정했다. 그는 재위 2년 만에 죽었으며, 와이빙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인쉬(殷墟)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따르면 와이빙은 샹의 4대 군주였고, 타이딩(太丁)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가 죽자 부빙(卜丙)이라는 시호가 주어졌고, 타이긍(太庚)이 뒤를 이었다고 적혀 있다.

 

3대 이왕(懿王, 재위 BC 1586~1583)의 이름은 즈용(子庸), '싀지'명은 쭝렌(仲壬)이다. 쭝렌은 와이빙(外丙)의 동생이다. 재위 기간은 3년이다. '싀지'에 따르면 아버지 탕과 형 와이빙의 뒤를 이어 샹의 3대 군주가 되었다. 정축(丁丑)년에 왕위에 올랐고, 이인(伊尹)을 재상, 보(亳)를 수도로 삼았다. 재위 4년 만에 죽자 쭝렌이라는 시호가 주어졌고, 조카인 타이쟈(太甲)가 뒤를 이었다. 최근의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쭝렌의 존재가 의심받고 있다. 인쉬 갑골문에는 샹나라 군주의 한 사람으로서 쭝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4대 타이중(太宗, 재위 BC 1582~1571) 원왕(文王)의 이름은 즈쯔(子至)이다. '싀지'명은 타이쟈(太甲), 갑골문자명은 따쟈(大甲)이다. 타이쟈는 탕의 손자, 쭝렌(仲壬)의 조카다. 탕의 뒤를 바로 이었다는 설도 있다. '멍쯔(孟子)'나 '싀지'에는 타이쟈의 즉위시에 이인(伊尹)이 '이쉰(伊訓)', '쓰밍(肆命)', '추허우(徂后)'라는 글을 지어 교훈으로 삼게 했다. 타이쟈는 포학했다. 이인은 타이쟈를 즉위 3년 만에 통공(桐宫)으로 추방했다. 통공은 지금의 허난성 옌스시(偃師市) 남서쪽이다. 타이쟈는 통공에서 3년을 보내며 반성했고, 이인에게 용서를 받아 다시 제위에 올랐다. 이때 이인은 '타이쟈쉰(太甲訓)'을 지어 주었다. 그후 타이쟈는 덕을 쌓아 제후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주수지니엔(竹書紀年)'에는 쭝렌(仲壬)의 사후에 이인(伊尹)이 타이쟈를 동쪽으로 추방하고 스스로 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7년 후 타이쟈는 이인을 죽이고 다시 천자가 되었다. 터이쟈는 이인의 아들 이즈(伊陟), 이펀(伊奮)에게 가문을 잇게 했다. 이들 역사서는 모두 타이쟈가 12년 동안 재위했고, 아들 워딩(沃丁)이 뒤를 이었다고 적고 있다.

 

인쉬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따르면 타이쟈(太甲)는 아버지 타이딩(太丁)의 뒤를 이은 샹의 3대 군주였다. 그의 시호는 따쟈(大甲)였으며, 아들 부빙(卜丙)이 뒤를 이었다고 되어 있다.    

 

5대 짜오왕(昭王, 재위 BC 1570~1542)의 이름은 즈쉬안(子絢)이다. '싀지'명은 워딩(沃丁)이다. '싀지'에는 아버지인 타이쟈(太甲)의 뒤를 이은 샹의 5대 군주라고 적혀 있다. 계사(癸巳)년에 왕위에 올랐고, 칭싀(卿士)를 재상, 보(亳)를 수도로 삼았다. 재위 8년에 재상 이인(伊尹)을 기념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재위 19년(어떤 곳에는 29년)만에 죽었다. 워딩이라는 시호가 주어졌고, 동생인 타이긍(太庚)이 뒤를 이었다. 최근의 고고학적인 증거에서는 짜오왕의 존재가 의심받고 있다. 인쉬 갑골문의 샹 군주 명단에는 워딩의 이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6대 쉬안왕(宣王, 재위 BC 1541~1517)의 이름은 즈비엔(子辯)이다. '싀지'명은 타이긍(太庚), 갑골문자명은 따긍(大庚)이다. '싀지'에 쉬안왕은 형 워딩(沃丁)의 뒤를 이은 샹의 6대 군주이다. 25년 동안 재위에 있었으며(주수지니엔에는 5년) 타이긍이라는 시호가 주어졌고, 아들 샤오쟈(小甲)가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타이긍은 삼촌 부빙(卜丙)의 뒤를 이어 샹의 5대 군주가 되었다. 그가 죽자 따긍이라는 시호가 주어졌으며, 샤오쟈가 뒤를 이었다고 한다.

 

7대 징왕(敬王, 재위 BC 1516~1500)의 이름은 즈까오(子高)이다. '싀지'명은 샤오쟈(小甲)이다. '싀지'에 의하면 형 타이캉(太康)의 뒤를 이어 샹의 7대 군주가 되었다. 정사(丁巳)년에 즉위하였고, 보(亳)를 수도로 삼았다. 17년간 통치하였고, 샤오쟈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동생 융지(雍己)가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샤오쟈는 따긍(大庚)의 뒤를 이어 샹의 6대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조카인 짜우(大戊)가 뒤를 이었다.

 

8대 위안왕(元王, 재위 BC 1499~1487)의 이름은 즈미(子密)이다. '싀지'명은 융지(雍己)이다. '싀지'에 따르면 형 타이긍(太庚)의 뒤를 이은 샹의 8대 군주였다. 갑술(甲戌)년에 즉위하였고, 보(亳)를 수도로 삼았다. 12년간 통치하였고, 융지라는 시호가 주어졌으며, 동생 타이우(太戊)가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융지는 형 따우(大戊)에 이은 샹의 8대 군주였고, 조카 쭝딩(仲丁)이 뒤를 이었다.  

 

9대 쭝종(中宗, 묘호) 징왕(景王, 시호, BC 1486~1422)의 이름은 즈쩌우(子伷)이다. '싀지'명은 타이우(太戊), 갑골문자명은 따우(大戊)이다. '싀지'에 의하면 형 융지(雍己)에 이은 샹의 9대 군주였다. 현인 이즈(伊陟)를 재상으로 삼아 샹을 부흥시켰다. 샹이 부흥하자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제후들도 입궐하게 되었다고 한다. 75년간 통치하였고, 아들 쭝딩(仲丁)이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삼촌 샤오쟈(小甲)에 이어 샹의 7대 군주가 되었다. 그가 죽자 따우(大戊)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동생 융지가 뒤를 이었다.

 

10대 샤오청왕(孝成王, 재위 BC 1421~1401)의 이름은 즈쫭(子莊)이다. '싀지'명과 갑골문자명은 쭝딩(中丁)이다. '싀지'에 의하면 아버지 타이우(太戊)에 이어 샹의 10대 군주가 되었다. 신축(辛丑)년에 즉위하였고, 보(亳)를 수도로 삼았다가 즉위 첫 해에 아오(隞)로 옮겼다. 아오는 현재 허난성 싱양시(荥阳市) 동북쪽 아오창(敖倉) 혹은 아오샨(敖山), 샨둥성(山東省) 이멍샨구(沂蒙山区), 허난성 정저우시(鄭州市) 샹청 유적지(商城遗址) 등지로 추정되고 있다. 

 

쭝딩(中丁)은 즉위 6년째에 란이(蓝夷)의 공격을 받았다. 란이는 샨둥반도(山東半島)에 거주하던 둥이족(东夷族)의 일파였다. 쭝딩은 즉위한 지 11년(어떤 사료에는 9년)만에 죽었다. 사후에 쭝딩이라는 시호가 주어졌고, 동생 와이렌(外壬)이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삼촌 융지(雍己)에 이어 샹의 9대 군주가 되었고, 싼주딩(三祖丁)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동생 부렌(卜壬)이 뒤를 이었다.

 

11대 쓰왕(思王, 재위 BC 1400~1386)의 이름은 즈파(子發)이다. '싀지'명은 와이렌(外壬), 갑골문자명은 부렌(卜壬)이다. '싀지'에 의하면 형 쭝딩(中丁)에 이어 샹의 11대 군주가 되었다. 경술(庚戌)년에 즉위하였고, 아오(隞)를 수도로 삼았다. 재위 기간에 샹의 봉신인 피(邳)와 셴(侁)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재위 15년(주수지니엔에는 10년)만에 죽었다. 와이렌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허단쟈(河亶甲)가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샹의 10대 군주로 부렌(卜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 지엔치엔(戔錢)이 뒤를 이었다.

 

12대 치엔핑왕(前平王, 재위 BC 1385~1377)의 이름은 즈쩡(子整)이다. '싀지'명은 허단쟈(河亶甲), 갑골문자명은 지엔쟈(戔甲)이다. '싀지'에 의하면 아버지 와이렌(外壬)에 이어 샹의 12대 군주가 되었다. 경신(庚申)년에 즉위하였고, 아오(隞)를 수도로 삼았으나 즉위 첫 해에 샹(相)으로 옮겼다. 샹은 허난성 안양시(安阳市) 네이황현(内黄县) 동남쪽으로 추정된다. 즉위 3년째에 이랑(議郎) 펑보(彭伯)가 와이렌(外壬) 때부터 저항하던 피(邳)를 정복하였다. 즉위 4년째에 란이(蓝夷)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즉위 5년째에 셴인(侁人)이 빤팡(班方)을 차지하였으나 펑보(彭伯)와 웨이보(韦伯)에게 격퇴되자 샹에 사절을 보냈다. 즉위 9년째에 죽었다. 시호는 허단쟈이고, 아들 주이(祖乙)가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는 샹의 11대 군주로 지엔치엔(戔錢)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동생 주이가 뒤를 이었다고 한다.

 

13대 무왕(穆王, 재위 BC 1376~1358)의 이름은 즈텅(子滕)이다. '싀지'명은 주이(祖乙), 갑골문자명은 쥐이(且乙)이다. '싀지'에 의하면 아버지 허단쟈(河亶甲)에 이어 샹의 13대 군주가 되었다. 기사(己巳)년에 즉위하였고, 샹(相)을 수도로 삼았으나 즉위 첫 해에 껑(耿)으로 옮겼다. 이듬해에 수도를 삐(庇)로 옮겼고 6년 후에 궁궐이 완성되었다. 삐(庇)는 현재 샨둥성(山東省) 윈청현(鄆城县) 북쪽으로 추정된다. 무왕 즉위 3년에 재상 우시엔(巫贤), 15년에 봉신 까오위(高圉)와 같은 현신(賢臣)을 둔 덕분에 샹은 부강해졌다. 즉위한 지 19년 만에 죽었다. 시호는 주이이고, 아들 주신(祖辛)이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 의하면 샹의 12대 군주로 지엔치엔(戔錢)의 뒤를 이었고, 샤이(下乙)라는 시호를 받았다.

 

14대 환왕(桓王, 재위 BC 1357~1342)의 이름은 즈단(子旦)이다. '싀지'명은 주신(祖辛), 갑골문자명은 쥐신(且辛)이다. '싀지'에 의하면 아버지 주이(祖乙)에 이어 샹의 14대 군주가 되었다. 무자(戊子)년에 즉위하였고, 삐(庇)를 수도로 삼았다. 재위 16년(주수지니엔에는 14년)만에 죽었다. 주신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동생인 워쟈(沃甲)가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샹의 13대 군주였다.

 

15대 시왕(僖王, 재위 BC 1341~1337)의 이름은 즈위(子踰)이다. '싀지'명은 위쟈(沃甲), 갑골문자명은 챵쟈(羌甲)이다. '싀지'에 의하면 형 주신(祖辛)에 이어 샹의 15대 군주가 되었다. 임인(壬寅)년에 즉위하였고, 삐(庇)를 수도로 삼았다. 재위 25년(주수지니엔에는 20년)만에 죽었다. 위쟈라는 시호를 받았고, 조카 주딩(祖丁)이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샹의 14대 군주였고, 챵쟈라는 시호를 받았다.

 

16대 쫭왕(莊王, 재위 BC 1336~1328)의 이름은 즈신(子新)이다. '싀지'명은 주딩(祖丁), 갑골문자명은 쥐딩(且丁)이다. '싀지'에 의하면 삼촌 위쟈(沃甲)에 이어 샹의 16대 군주가 되었다. 정미(丁未)년에 즉위하였고, 삐(庇)를 수도로 삼았다. 재위 32년 만에 죽었다. 주딩 시호를 받았고, 종형제 난긍(南庚)이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샹의 15대 군주이다.

 

17대 칭왕(頃王, 재위 BC 1327~1322)의 이름은 즈긍(子更)이다. '싀지'명은 난긍(南庚)이다. '싀지'에 의하면 삼촌 주딩(祖丁)에 이어 샹의 17대 군주가 되었다. 병진(丙辰)년에 즉위하였고, 삐(庇)를 수도로 삼았다가 재위 3년에 얀(奄)으로 천도하였다. 재위 29년 만에 죽었다. 난긍 시호를 받았고, 사촌 양쟈(陽甲)가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샹의 16대 군주이다.

 

18대 따오왕(悼王, 재위 BC 1321~1315)의 이름은 즈허(子和)이다. '싀지'명은 양쟈(陽甲), 갑골문자명은 샹쟈(象甲)이다. '싀지'에 의하면 삼촌 난긍(南庚)에 이어 샹의 18대 군주가 되었다. 임술(壬戌)년에 즉위하였고, 얀(奄)을 수도로 삼았다. 재위 3년에 야만인의 반란 진압을 위해 딴샨(丹山)에 군대를 보냈다. 재위 17년(어떤 사료에는 7년)만에 죽었다. 양쟈 시호를 받았고, 동생 판긍(盤庚)이 뒤를 이었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샹의 17대 군주로 샹쟈라는 시호를 받았다. 

 

3. 완샹(晩商) 시대

 

19대 싀주(世祖) 원청왕(文成王, 재위 BC 1314~1287)의 이름은 즈쉰(子旬)이다. '싀지'명과 갑골무자명은 판긍(盤庚)이다. 판긍은 수도를 인쉬로 옮겼다. 인쉬는 현재 허난성 안양시(安阳市) 서북쪽 인쉬유적(殷墟遗址)으로 확인되었다. 판긍 치세에 탕(湯) 시절의 선정을 회복해서 샹나라는 부흥하였다.

 

'싀지'에 의하면 형 양쟈(陽甲)에 이어 샹의 20대 군주가 되었다. 병인(丙寅)년에 즉위하였고, 얀(奄)을 수도로 삼았다. 재위 7년에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잉허우(应侯)가 찾아 왔다. 재위 14년에 베이멍(北蒙)으로 천도하였고, 인(殷)으로 개칭하였다. 이 때문에 샹을 인이라고도 부른다. 베이멍은 지금의 허난성 안양시 인두취(殷都区) 샤오툰춘(小屯村)에 있다.

 

판긍은 재위 15년에 새로운 수도에서 군대를 사열하였고, 재위 19년에 야유(亚圉)를 빈허우(邠侯)에 임명하였다. '싀지'와 '주수지니엔' 모두 28년간 재위에 있었고, 시호는 판긍(盤庚)이며, 동생 샤오신(小辛)이 뒤를 이었다고 적혀 있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판긍은 샹의 18대 군주이다.

 

20대 짱왕(章王, 재위 BC 1286~1252)의 이름은 즈숭(子頌)이다. '싀지'명은 샤오신(小辛)이고, 갑골문에는 그 이름이 없다. '싀지'에는 형 판긍(盤庚)의 뒤를 이어 샹의 20대 군주가 되었다. 갑오(甲午)년에 즉위하였고, 인(殷)을 수도로 삼았으며, 제위에 오른지 3년 만에 동생 샤오이(小乙)에게 양위하였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그는 샹의 19대 군주이다.  

 

21대 후이왕(惠王, 재위 BC 1251)의 이름은 즈리엔(子斂)이다. '싀지'명은 샤오이(小乙)이다. '싀지'에 의하면 형 샤오신(小辛)에 이어 샹의 21대 군주가 되었다. 수도인 인(殷)에서 즉위하였다. 재위 6년에 아들 우딩(武丁)을 허(河)에 살도록 하고, 명신 깐판(甘盘) 밑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재위 10년 만에 아들인 우딩(武丁)에게 양위하였다. 인쉬 갑골문에 따르면 그는 샹의 20대 군주이다.

 

22대 까오종(高宗왕(襄王, 재위 BC 1250~1192)의 이름은 즈짜오(子昭)이다. '싀지'명은 우딩(武丁)이다. 우딩(武丁)은 태자 시절부터 현인 깐판(甘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싀지'에는 우딩이 부왕 샤오이(小乙)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쇠약한 나라를 일으키고자 했다. 하지만 자신을 보좌해줄 적임자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우딩은 3년 동안 부왕의 빈소에서 '싀징(書經)' 우이편(無逸篇)을 새기면서 정치를 전적으로 대신들에게 맡긴 채 지냈다. 

 

하루는 꿈에 위에(說)라는 성인(聖人)을 만났다. 꿈에서 깬 우딩(武丁)은 위에를 찾아서 등용하려 했지만, 신하와 백관들 사이에는 아무도 그러한 인물이 없었다. 우딩은 사람을 시켜 위에를 찾게 한 끝에 죄를 짓고 푸시엔(傅險)에서 길을 닦는 노역에 종사하던 그를 찾아냈다. 우딩은 그가 자신이 찾던 성인임을 확신하고, 그에게 푸(傅)라는 성을 주어 푸위에(說)라 불렀다. 푸위에의 보좌로 샹은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 이민족 꾸이팡(鬼方)을 3년에 걸쳐 토벌한 뒤 인의 세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또 우딩의 왕비로서 제사장과 군사령관으로 임명된 푸하오(婦好) 또한 주변의 이민족을 정벌하는 등 샹의 안정을 가져왔다. 우딩이 죽고 아들 주긍(祖庚)이 왕위를 이었다. 

 

우딩의 무덤에서는 갑골문이 발견되었다. 그의 아들로 주지(祖己), 주긍(祖庚), 주쟈(祖甲)가 있었다. 복사(卜辞)에서는 이들이 순서대로 즉위한다고 했다. 하지만 '싀지' 등의 문헌에는 주지가 즉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23대 허우핑왕(後平王, 재위 BC 1191~1148)의 이름은 즈위에(子躍)이다. '싀지'명은 주긍(祖庚), 갑골문자명은 쥐긍(且庚)이다. 주긍은 우딩(武丁)의 아들이었고, 수도는 인(殷)이었다. '주수지니엔'에 의하면 11년간 재위했고, 사후에 동생인 주쟈(祖甲)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24대 싀중(世宗) 띵왕(定王, 재위 BC 1148)의 이름은 즈짜이(子載)이다. '싀지'명은 주쟈(祖甲), 갑골문자명은 쥐쟈(且甲)이다. 23대 주긍(祖庚)의 동생이다. 아들 린신(廪辛)이 왕위를 이었다. '주수지니엔'에 의하면 33년간 왕위에 있었다. 포학무도해 샹이 쇠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25대 쟈중(甲宗) 꿍왕(共王, 재위 1148)의 이름은 즈시엔(子先)이다. '싀지'명은 린신(廪辛)이다. 갑골문에 의하면 린신은 샹의 26대 군주이고, 24대 주쟈(祖甲)의 아들이다. '싀지'에는 6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경인년(庚寅年)에 즉위하였고, 수도는 인(殷)이었다. 죽은 뒤 동생 긍딩(庚丁)이 왕위를 이었다.

 

26대 캉주(康祖) 안왕(安王, 재위 BC 1148)의 이름은 즈샤오(子囂)이다. '싀지'명과 갑골문자명은 긍딩(庚丁)이다. 긍딩은 갑골문에 긍딩(康丁) 또는 긍주딩(康祖丁)으로 적혀 있다. 25대 린신(廪辛)의 동생이다. 갑오년(甲午年)에 즉위하였고, 수도는 인(殷)이었다. '주수지니엔'에 의하면 8년간 왕위에 있었고, 사후에 아들 우이(武乙)가 뒤를 이었다.

 

27대 우주(武祖) 리에왕(烈王, 재위 BC 1147~1113)의 이름은 즈취(子瞿)이다. '싀지'명은 우이(武乙)이다. 우이는 26대 긍딩(庚丁)이 죽자 즉위하였다. '싀지' 인뻔지(殷本記)에 따르면, 우이가 무도하여 우상을 만들어 티엔셴(天神)이라 이름 붙이고 함께 도박을 하는데, 사람을 시켜 심판을 보도록 하였다. 티엔셴이 지면 즉시 그 사람을 모욕하고 죽였다. 또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높은 기둥에다 매단 뒤, 활로 쏘았는데 이를 싀티엔(射天)이라 불렀다. 황허(黃河)와 웨이수이(渭水) 사이에 사냥을 하다가 갑자기 떨어진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주수지니엔'에 따르면, 쩌우(周)의 지리(季歷, ?~?)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입궐한 지리는 우이에게 토지와 말, 구슬 등을 받았다. 우이는 35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그가 죽자 아들 원딩(文丁)이 뒤를 이었다.

 

28대 쾅왕(匡王, 재위 BC 1112~1102)의 이름은 즈투어(子托)이다. '싀지'명은 타이딩(太丁), 갑골문자명은 원딩(文丁)이다. 원딩은 띠이(帝乙), 삐간(比干), 지즈(箕子)의 아버지이다. '주수지니엔'에 의하면 수도는 인(殷) 또는 즈메이(自沬)였다. 재위 2년에 쩌우(周)의 제후 지리(季歷)가 옌징(燕京)에서 족(戎族)을 공격했으나 패하였다. 재위 3년에 환수이(洹水)가 메말랐다. 재위 4년에 지리는 재차 룽족을 공격해 위모(余无)에서 승리하였다. 재위 7년에 지리는 후(呼)에서 룽족을 공격해 또다시 승리하였다. 7년 후에 지리는 룽족을 이투(翳徒)에서 격퇴하고, 세 명의 장수를 사로잡아 원딩에게 승리를 보고하였다. 그러나 쩌우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걱정하던 원딩은 지리에게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많은 보물을 하사하였고, 사이쿠(塞庫)로 그를 보냈다. 그후 원딩은 지리를 사이쿠에 감금해 죽였다.

 

29대 더왕(德王, 재위 BC 1101~1076)의 이름은 즈시엔(子羡)이다. '싀지'명은 띠이(帝乙)다. 띠이 때의 수도는 인(殷)이었다. '주수지니엔'에 의하면 재위 3년에 난중(南仲)에게 명하여 쿤이(昆夷)를 치도록 하였고, 전투에서 승리한 후 수어팡(朔方)이라는 도시를 세웠다. 자식은 첫째 웨이즈치(微子啓), 둘째 쭝얀(中衍), 막내 띠신(帝辛)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 막내 아들 띠신이 왕위를 이었다.

 

4. 샹(商)의 멸망과 임씨(林氏)의 득성

 

30대 저우왕(紂王, 재위 BC 1075~1046)의 이름은 즈셔우(子受)이다. '싀지'명은 띠신(帝辛)이다. 띠신은 저우신(紂辛)이라고도 불리며, 샹의 마지막 군주이다. 저우왕은 수도를 차오거(朝歌)로 옮겼다. 차오거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허비시(鹤壁市) 치현(淇县) 차오거진(朝歌镇)이다. 그는 시바이허우(西白侯) 지창(姬昌, 周文王)을 강제로 납치하여 감금하였다. 지창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지파(姬發, 周武王)는 이를 보복하기 위해 타이꿍왕(太公望) 뤼샹(呂尙) 등의 부하들과 함께 저우왕에 반역하였다. 반란군은 멍진(盟津)에서 저우왕과 대치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인쉬(殷墟) 남쪽의 무예(牧野)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 때는 저우왕을 패배시켰다.

 

샹(商) 마지막 왕  저우왕(紂王)

지파(姬發)의 군대는 샹의 도읍으로 들어갔지만 저우왕을 체포할 수 없었다. 무예(牧野)의 전투에서 패배한 저우왕은 누대에 올라가 자살하였고, 샹은 멸망했다. 실제 역사에서 저우왕은 실정(失政)보다는 동남방 화이허(淮河) 유역의 둥이족(东夷族) 국가 렌팡(人方)에 대한 장기간 원정에 힘을 쏟다가 지파의 반란으로 나라를 잃었다. 저우왕의 최후는 역사서마다 다르게 서술되어 있으며,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쩌우(周)나라의 성립 이후 띠신(帝辛)은 희대의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비공식 설화에 전해지는 그는 따지(妲己)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성격이 난폭하여 간언을 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으며, 궁궐이 초라하다고 해서 화려하게 만들고, 술로 채운 호수를 만드는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국가예산을 많이 낭비하였으며, 사람을 숯불에 태워 죽이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을 새로 제정하여 원성을 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저우왕(紂王)에 대한 비공식 설화는 갑골문 발견으로 날조임이 드러났다. 반란 정권인 쩌우(周)나라가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퍼뜨린 유언비어라는 것이다. 날조된 유언비어는 쓰마치엔의 '싀지'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저우왕의 상아젓가락(象箸玉杯)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어느 날 저우왕(紂王)은 나무젓가락을 버리고 상아젓가락을 쓰기 시작했다. 이를 본 저우왕의 삼촌 지즈(箕子)는 상아젓가락을 쓰면 흙그릇과는 어울리지 않으니 옥그릇을 찾게 될 것이고, 옥그릇은 채소와는 어울리지 않으니 미식을 찾게 될 것이며, 미식을 하면 거친 베옷이나 소박한 궁전이 싫어질 것이라고 예견한다. 예상대로 저우왕은 미식을 시작했고, 궁궐을 중건했다. 또, 화려한 치장을 하고, 진귀한 물건을 수집했다. 이에 지즈는 재앙을 예감하고 저우왕에게 간언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샹나라는 망했고, 지즈는 북쪽으로 가 지즈차오셴(箕子朝鮮)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상아젓가락 이야기는 엉성하게 날조된 흑색선전이다. 샹은 500년을 이어온 왕조로서 쩌우(周)보다 뛰어난 청동기 기술을 자랑하던 나라였다. 오랜 세월 쌓인 왕궁의 법도도 확고했다. 왕의 식기는 법도에 따라 제작된다. 상아젓가락 이야기는 샹보다 후진국 쩌우에서나 통할 법한 발상이었다. 지즈(箕子)를 주인공으로 삼아 저우왕을 희대의 폭군으로 만들기 위한 악의에 찬 유언비어였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은 왕과 신하가 술잔을 돌리며 담소를 나누던 곳의 샹나라식 이름이었다. 따라서 주지육림은 저우(紂王)이 만든 것이 아니라 궁정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시설이었다. 주지육림은 쩌우(周) 궁정에도 있었다. 친(秦), 한(漢), 수이(隨), 탕(唐) 제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저우왕(紂王)은 둥이족을 평정하여 샹나라의 국력을 신장시켰고, 내적으로는 하늘에 충실히 제사를 지내 만백성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는 저우왕이 제사를 게을리하고 폭정을 저질러 쫓겨났다는 '싀지'의 기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또, 갑골문에는 저우왕이 인신공양을 금지하여 백성을 지킨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갑골문이 발견되고 나서 저우왕에 대한 '싀지'의 평가는 완전히 날조된 것임이 드러났다.

 

'펑셴옌이(封神演义)'의 삐간 (比干, 왼쪽)

임씨(林氏)가 샹(商)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은 삐간(比干)이다. 바로 삐간으로부터 임씨(林氏)가 발원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삐(比)이고, 간(干)이라는 나라에 봉(封)해져 삐간(比干)이라고 불린다. 삐간은 샹 28대 쾅왕(匡王) 타이딩(太丁)의 둘째 아들로서 저우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사람됨이 곧고 강직하여 저우왕의 폭정(暴政)을 바로잡기 위해 간언(諫言)하다가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삐간은 웨이즈(微子), 지즈(箕子)와 함께 샹 말기 세 명의 어진 사람을 가리키는 산렌(三仁)으로 꼽힌다. 중국의 민간(民間)에서 산렌은 충신(忠臣)의 전형(典型)으로 존경을 받으며, 글과 재물(文財)을 관장하는 원취싱(文曲星, 九星 가운데 넷째 별)의 화신(化身)으로 숭앙(崇仰)되었다. 

 

샹의 마지막 왕인 저우왕(紂王)은 총명하고 용맹했지만, 자신의 재능을 지나치게 자신하여 신하의 간언(諫言)을 불필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가 등용한 페이중(費中)은 아첨을 잘하고 사리사욕(私利私慾)만 채웠기 때문에 샹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그를 멀리하였다. 또, 동남방 화이허(淮河) 유역의 둥이족(东夷族) 국가 렌팡(人方)에 대한 장기간 원정에 힘을 쏟으면서 샹의 국력은 점점 쇠약해졌다. 

 

샹의 국력이 기울자 백성들과 제후(諸侯)들은 저우왕(紂王)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시바이허우(西白侯) 지창(姬昌, 周文王)의 세력이 점차 강성(强盛)해졌다. 삐간은 저우왕에게 이러한 정세를 충간(忠諫)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바이허우 지창이 죽고 그의 아들 지파(姫發, 周武王)가 동쪽 정벌에 나서 멍진(盟津)에 이르자 그를 따르는 제후가 800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저우왕이 충간하는 신하들을 처형하고 폭정(暴政)을 멈추지 않자 웨이즈(微子) 등은 샹을 떠났다. 하지만 삐간은 조정의 샤오싀(少師)로서 “신하는 죽더라도 임금께 충간해야 한다”면서 계속 저우왕에게 간언하였다. 그러자 저우왕은 화를 내며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라며 삐간의 충심(忠心)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를 해부하여 심장을 꺼내도록 하였다. 

 

삐간이 잔인하게 살해되자 지즈(箕子)는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하다가 저우왕(紂王)에게 사로잡혀 갇혔다. 샹나라의 타이싀(太師), 샤오싀(少師)는 샹의 제기(祭器)와 악기(樂器)를 가지고 쩌우(周)로 달아났다. 삐간의 부인 첸씨(陳氏)는 임신 3개월에 저우왕의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여종 4명을 거느리고 창린산(長林山) 석굴(石窟)로 피신하여 살았다. BC 1029년에 첸씨는 사내아이를 낳아 이름을 취안(泉)이라 하였다. 

 

쩌우(周)의 지파(姫發)는 충신(忠臣)을 잔인하게 살해한 저우왕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제후들을 규합하여 샹을 공격하였으며, 무예(牧野)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샹을 멸망시켰다. 무예의 전투에서 패한 저우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임씨( 林氏)  득성(得姓) 시조(始祖)  린지엔(林 堅)

지파(姫發)는 쩌우(周)의 우왕(武王)으로 즉위한 뒤 삐간묘(比干墓)를 찾아 봉분을 새로 쌓고, 구리로 주조한 통판밍(銅盤銘)의 표를 세웠다. 그리고, 삐간의 후사를 찾으니 첸씨 부인이 3살인 아들 취안(泉)을 안고 우왕을 뵈었다. 우왕은 취안(泉)이 창린산(長林山) 석실(石室)에서 태어났다 하여 린씨(林氏) 성과 지엔(堅)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우왕은 또 린지엔(林堅)을 꽁쥐에(公爵)로 봉하고, 보링(博陵)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임씨(林氏) 족보에는 득성(得姓) 연대가 BC 1121년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샹이 멸망한 해는 BC 1046년이다. 샹이 멸망하고, 지파(姫發)가 쩌우(周)의 우왕(武王)으로 즉위한 뒤에 취안(泉)에게 린씨(林氏) 성과 지엔(堅)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득성 연대는 BC 1046년 이후가 되어야 할 것이다. 

 

허난성  웨이후이시  삐간묘에 세워진 삐간 조상( 雕像)

보링(博陵)은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안핑현(安平縣)이다. 보링은 임씨(林氏)의 발상지이며, 린지엔은 임씨(林氏) 일세조(一世祖), 삐간은 태시조(太始祖)가 된다. 삐간의 묘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웨이후이시(衛輝市)에 있다. 일찍이 콩즈(孔子)도 직접 삐간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린지엔은 BC 966년 63세에 죽었다. 린지엔 초상은 칭(淸)나라 때 수보한 푸젠후이안시허임씨족보(福建惠安西河林氏族谱)에 있는 것이다. 족보에는 린지엔의 모친이 첸씨(陳氏)가 아니라 꾸이씨(妫氏)라고 나와 있다. 린지엔은 또 창린(长林) 출신이라고 했다. 창린(长林)은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웨이후이시(卫辉市) 싀바오터우샹(狮豹头乡) 룽어춘(龙卧村)이다. 룽어촌 북쪽 허난성 안양시에는 현급시(县级市)인 린저우市(林州)가 있고, 그 북쪽 허베이성(河北省) 한단시(邯郸市) 서현(涉县)에는 창린산(长林山)이 있다. 린지엔이 태어난 그 창린산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5. 중국 고대-샹(商) 시대의 임씨(林氏) 계보(系譜)

 

위에서 실펴본 바와 같이 임씨(林氏)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여우슝궈(有熊國)의 임금 샤오디엔(少典)-화샤족(華夏族)의 시조 황띠(黃帝)-샤오하오(少昊) 진티엔씨(金天氏)-쟈오지(蟜極)-띠쿠(帝嚳) 까오신씨(高辛氏)-시엔샹(先商) 시대, 띠쿠의 아들, 샹(商) 시조 시에(契, 卨)-2대 짜오밍(昭明)-3대 샹투(相土, 子相土)-4대 창뤄(昌若)-5대 차오(曹)-6대 밍(冥. 子冥)-7대 까오주(高祖, 묘호) 왕하이(王亥, 子亥)-8대 왕헝(王恒, 子恒)-9대 샹쟈웨이(上甲微, 子微)-10대 빠오이(報乙)-11대 빠오빙(報丙)-12대 빠오띵(報丁)-13대 싀렌(示壬)-14대 쿠이쭝(夔宗, 묘호) 싀구이(示癸)-자오샹(早商) 시대 1대 타이주(太祖) 타이우왕(太武王), 탕(湯), 즈뤼(子履)-2대 아이왕(哀王) 즈셩(子勝)-3대 이왕(懿王) 즈용(子庸)-4대 타이중(太宗, 묘호) 원왕(文王, 시호) 즈쯔(子至)-5대 짜오왕(昭王) 즈쉬안(子絢)-6대 쉬안왕(宣王) 즈비엔(子辯)-7대 징왕(敬王) 즈까오(子高)-8대 위안왕(元王) 즈미(子密)-9대 쭝종(中宗) 징왕(景王) 즈쩌우(子伷)-10대 샤오청왕(孝成王) 즈쫭(子莊)-11대 쓰왕(思王) 즈파(子發)-12대 치엔핑왕(前平王) 즈쩡(子整)-13대 무왕(穆王) 즈텅(子滕)-14대 환왕(桓王) 즈단(子旦)-15대 시왕(僖王) 즈위(子踰)-16대 쫭왕(莊王) 즈신(子新)-17대 칭왕(頃王) 즈긍(子更)-18대 따오왕(悼王) 즈허(子和)-완샹(晩商) 시대 19대 싀주(世祖) 원청왕(文成王) 즈쉰(子旬)-20대 짱왕(章王) 즈숭(子頌)-21대 후이왕(惠王) 즈리엔(子斂)-22대 까오종(高宗) 샹왕(襄王) 즈짜오(子昭)-23대 허우핑왕(後平王) 즈위에(子躍)-24대 싀중(世宗) 띵왕(定王) 즈짜이(子載)-25대 쟈중(甲宗) 꿍왕(共王) 즈시엔(子先)-26대 캉주(康祖) 안왕(安王) 즈샤오(子囂)-27대 우주(武祖) 리에왕(烈王) 즈취(子瞿)-28대 쾅왕(匡王) 즈투어(子托)-임씨(林氏) 태시조(太始祖) 삐간(比干)-임씨(林氏) 시조(始祖) 린지엔(林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