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興林氏世譜序
人之有譜譬如木之有本有末水之有源有流. 譜其族者觀於千枝萬派同出於一本一源卽末而求本沿流而溯源孰不有孝悌之心哉. 然枝分派別末繁流遠以至於親竭而服盡服盡而情殺則忽忘而不爲塗人者幾希譜可得巳乎. 是以吾東方譜學大盛古家世族莫不有世譜長興林氏之譜亦其一也. 林氏之先出自中國而皆胄於忠節公八及. 其後長興君爲八君之一而子孫因以爲貫平章事諱蕡卽其鼻祖也. 後承之散處嶺湖者旣蕃且顯八世而有諱雨所通判商州仍家焉. 三世而至鴻山公諱貴枝復徙于襄陽之有林自鴻山公始也. 間者襄居諸宗以來晜之不錄於舊譜者爲多謨所以重刊而續修之使林君魯運問序于不佞不佞何敢當. 然記曰禮不忘其祒樂樂其所自生. 林氏此擧出於尊祖敬宗之意而氣類合矣精神萃矣. 其不忘本而樂其所自出如此則安知林氏無復振之日乎. 蓋聞根深者未茂源大者流長吾將以是卜林氏之興也. 忠節公仕於唐爲兵部侍郞翰林學士以直節不容與七學士浮海而東文蹟無傳獨其一聯詩如崑山片玉遺落人間千載之下有足感唏者惜其咳唾寶墨脫出箱篋不入於舊譜成牒中而苟使子孫誦其詩法象其賢亦可謂無忝乎先德矣. 林氏尙勉乎哉. 是役也後孫正翹凞運翰周魯運顯運甫終始克相以底于成其勤敏可書也
上之二十二年辛巳六月下浣 生員聞韶 金羲壽 謹序
장흥임씨 세보 서문
사람에게 족보(族譜, 성씨를 기반으로 한 가문의 혈통을 본관이나 파에 따라 기록한 책)가 있음은 비유컨대 나무에 근본이 있고 끝이 있으며, 물에 근원이 있고 흐름이 있는 것과 같다. 그 겨레의 족보는 천 가지, 만 갈래가 한 근본, 한 근원에서 같이 나온 것이라 바로 끝에서 근본을 구하고, 흐름을 따라서 근원에 거슬러 올라감을 봄이니 누군들 효도하고 공순(恭順, 공손하고 온순함)하는 마음이 있지 아니하리요!
그러나, 가지가 나뉘어지고 물줄기가 갈라지며, 끝이 번창하고 흐름이 멀어져 친함(親)이 다하면 복(服, 周禮의 服制)이 다하고, 복이 다하면 정(情)이 감해져서 문득 잊어버려 길 가는 사람이 되지 아니한 자 거의 드무니 족보를 어찌 그만둘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우리 동방에 보학(譜學, 족보학)이 크게 번성하여 고가(古家, 유서 깊은 가문)나 세족(世族,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들이 세보(世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혈통과 집안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모아 엮은 책)를 두지 아니함이 없으니 장흥임씨의 족보도 그 가운데 하나다.
임씨의 선조가 중국으로부터 나왔으니 모두 충절공(忠節公) 팔급(八及, 빠지)의 자손이다. 그 뒤로 장흥군(長興君)은 팔군(八君) 가운데 한 분으로 자손들이 그대로 본관(本貫, 시조의 고향, 성씨의 발원지)을 삼으니 평장사(平章事, 고려시대 내사문하성의 정이품 벼슬) 휘(諱, 죽은 사람의 생전 이름) 분(蕡)은 그 바로 비조(鼻祖, 창시자)이시다.
후손들이 영남과 호남에 흩어져 거주한 사람들이 이미 번창하고 현달하였다. 팔세(八世)에 이르러 휘 우소(雨所)가 통판(通判, 판관, 고려와 조선시대 종5품 외관직)으로 상주(商州, 尙州)에 살게 되었고, 그후 삼세(三世) 때 홍산공(鴻山公) 휘 귀지(貴枝)에 이르러 다시 양양(襄陽, 경북 예천군의 옛 별호)으로 이사했다. 양양에 임씨가 있게 된 것은 바로 홍산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사이 양양에 살아온 제종(諸宗, 여러 종친)이 6대까지 내려오면서 구보(舊譜, 예전 족보)에 기록하지 아니한 자가 많아져 이에 족보를 다시 간행하고자 하여 속수(續修)함에 임노운(林魯運)을 시켜 서문을 불녕(不佞, 자신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에게 물으니 불녕이 어찌 감당하리요! 그러나 기(記)에 이르기를 예(禮)는 그 처음을 잊지 아니함이 즐겁다고 하였으니, 즐거움 그것은 자연히 생기는 것이다.
임씨의 이번 거사(擧事)는 조상을 높이고 종족(宗族, 성과 본이 같은 겨레붙이)을 공경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며, 기류(氣類,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가 합하고 정신이 모인 것이다.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하고, 그 나온 바를 즐거워함이 이와 같다면 어떻게 임씨가 다시 진흥(振興)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요! 무릇 들으니 뿌리가 깊은 자는 끝이 무성하고,근원이 큰 자는 흐름이 깊다고 하였으니 나는 장차 이로써 임씨의 흥성(興盛)하리라는 것을 예언할 수 있다.
충절공이 탕(唐)나라에 벼슬하여 병부시랑(兵部侍郞, 정4품 국방차관)과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어 직절(直節, 곧은 절개)로써 용납되지 아니함에 7명의 학사와 더불어 바다를 건너 동방으로 오니 문적(文蹟, 문서와 장부)의 전함이 없고, 홀로 그 1련시인 '곤륜산(崑崙山)의 한 조각 옥(玉)이 인간 세상으로 내던져지니, 천재(千載, 천 년의 세월)의 아래 족히 감동하여 슬피 울며 있으리' 같은 것은 그분이 해타(咳唾, 어른의 말)와 보묵(寶墨, 훌륭한 필적이나 귀한 법첩)이 상자 속에서 탈출하여 구보의 성첩(成牒, 문서에 관인을 찍음) 중에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 애석하며, 진실로 자손들이 그 시를 외우고 그 어짐을 본받게 하였으니 또한 가히 선조의 덕망에 욕됨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씨는 더욱 힘쓸지어다. 이 역사(役事)에 후손인 정교(正翹)와 희운(凞運), 한주(翰周), 노운(魯運), 현운(顯運)들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능히 도와서 성취함에 이르니 그들의 부지런하고 민첩함을 여기에 적노라.
1821년 신사년(순조 21년) 6월 하순 영남보(嶺南譜)
생원(生員) 문소(聞韶, 義城의 옛 이름) 김희수(金羲壽) 삼가 서문을 쓰다.
'장흥임씨(長興林氏)'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씨(林氏) 발원(發源) 샹(商) 역사 (0) | 2021.02.07 |
---|---|
임씨(林氏) 기원설(起源說) (0) | 2021.01.31 |
장흥임씨세보서(長興林氏世譜序) - 임봉흥(林鳳興) (0) | 2021.01.23 |
장흥임씨공조판서공파보(長興林氏工曹判書公派譜) 족보개간서(族譜開刊序) - 임진(林溍) (0) | 2021.01.23 |
장흥임씨공조판서공파보(長興林氏工曹判書公派譜) 족보개간서(族譜開刊序) - 임옥(林沃 밑에 土) (0) | 2021.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