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長興林氏)

장흥임씨세보서(長興林氏世譜序) - 임봉흥(林鳳興)

林 山 2021. 1. 23. 23:10

長興林氏世譜序

 

我林氏系出長興舊有譜牒而多疎漏宗族之居靈光康津老未得係譜後孫之在此地者通輸世未及錄鳳興竊嘗病之. 歲甲戌墓奠日諸宗族謂余曰吾宗爲先事不爲不多惟是譜牒未遑屬余脩正余曰諾族譜何等重事而尙今遷延未就此吾平生所慨然者何敢以老病辭. 遂與五六人會于栗里齋舍隨處收單讐校斤正衰爲一帙出齋舍若干物貿白而令從侄옥(沃밑에土)寫出於是紀代之先後分派之遠近事蹟之巨細昭然可徵豈非吾門之徽典也哉. 嗚呼林姓之在東國者各略其貫若羅州平澤扶安恩津襄陽長興者甚衆而其礎則一. 鄭昆壽令公序扶安林氏族譜曰林氏出自中國懲箕子于宋世爲望族國朝鮮朝名將林慶業譜牒曰始祖八及之後有八大君各爲分派云吾長興之林正是八君中長興君後而無譜可稽後世以諱蕡爲始祖至于今二十一世九代同宗之人觀是詣而思一人之分講百代之誼. 敦睦篤愛疎而愈親遠而愈近世世無替則庶幾有補於麗敎. 而若莫剖劂則財力凋殘未易拮据姑存是譜以俟後之子孫云爾.

 

崇禎後再甲子乙亥孟春上澣 後孫 鳳興 謹識

 

장흥임씨(長興林氏) 세보(世譜) 서문(序文)

 

우리 임씨(林氏)는 장흥(長興)에서 계출(系出)하니 옛날에 보첩(譜牒, 족보)이 있었다. 그러나 소루(疎漏, 소홀해 빠진 것이나 실수가 있음)함이 많아 종족(宗族)이 전라도 영광(靈光)과 강진(康津)에서 사는데도 늙어서 계보(係譜)를 얻지 못하였다. 후손이 이곳에 거주하면서도 여러 세대를 통하여 기록하지 못하였으니 봉흥(鳳興)이 혼자 생각하면서 일찍이 근심하였다.

 

갑술년(甲戌年, 조선조 영조 30년, 1754년) 시제일(時祭日)에 여러 종족(宗族)께서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종중(宗中)이 먼저 해야 할 사업이 많으나 오직 이 보첩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면서 나에게 수정(脩正)하기를 위촉()함으로 내가 승락했다. 족보는 무엇보다 중요한 사업인데, 이제까지 천연(遷延, 일이나 날짜 등을 오래 끌어 미룸)되어 성취하지 못함이 나의 평생에 개탄하던 바이다. 그러니, 어찌 감히 노병(老病, 늙어 쇠약해져서 생기는 병)으로 사양하리요!   

 

드디어 5, 6명의 종친(宗親)들과 경북 예천군 유천면 율리(栗里, 율현리) 재사(齋舍, 조선시대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유생들이 기숙사로 쓰던 건물)에 모여 닿는 곳마다 수단(收單, 명단을 거두어들임)하여 수교(讐校, 서책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하고, 근정(斤正, 밝게 살펴 바로잡음)하여 한 질을 만들었다. 그리고, 재사의 얼마되지 않는 물건을 내어 없는 것을 사드리게 하고, 종질(從侄, 사촌형제의 아들)인 옥(沃밑에土)으로 하여금 사출(寫出, 그대로 베껴 냄)케 하니 이제야 기대(紀代)의 앞뒤, 분파(分派)의 멀고 가까움, 사적(事蹟)의 크고 작은 것이 명확하게 고징(考徵)되니 어찌 우리 문중의 휘전(徽典이 아니겠는가!  

 

아! 우리 임씨 성이 동국(東國, 조선)에 있는 자 각각 그 본관(本貫, 시조가 난 땅)을 간략하면 나주(羅州)와 평택(平澤), 부안(扶安), 은진(恩津), 양양(襄陽), 장흥(長興) 등 참으로 많으나 그 처음은 하나다. 정곤수(鄭昆壽) 영공(令公)께서 부안임씨 족보 서문에 이르기를 임씨가 중국으로부터 나왔으니 기자(箕子)가 숭(宋)나라에서 징소(徵召, 벼슬을 권유하면서 부름)하여 대대로 망족(望族, 명망이 있는 집안)이 되었으며, 조선조에 명장 임경업(林慶業) 보첩에 이르기를 시조 팔급(八及, 빠지)의 후손으로 팔대군(八大君)이 있어 각각 분파되었다고 하였다. 

 

우리 장흥임씨도 바로 이 팔군 중 장흥군(長興君)의 후예이나 족보에 가히 상고할 수 없으므로 후세에 휘(諱) 분(蕡)으로서 시조를 삼아 이제 21세에 이르니 9대 동종(同宗)의 사람들이 이 족보를 보고 한 사람의 나눔으로 100대의 정의(情誼)를 강(講)함을 생각할 것이로다. 돈목(敦睦)하고 독애(篤愛)하며, 소홀해질수록 더욱 친히 하고, 멀어질수록 더욱 가까이하여 대대로 변하지 않는다면 거의 여교(麗敎)에 도움이 있을 것이요, 만약 부궐(劂, 간행)할 수 없거나 재력이 조잔(凋殘, 말라서 쇠약하여 시듦)하여 쉽게 길거(拮据, 바쁘게 일함)하지 못한다면 아직은 이 족보를 보존하여 뒷 자손에게 기다리라 이를 것이다. 

 

숭정후재갑자을해(崇禎後再甲子乙亥, 1755년, 조선 영조 31년) 음력 정월(孟春) 상순(上澣) 후손 봉흥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