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長興林氏)

삼송정기(三松亭記) - 박장호(朴章浩)

林 山 2021. 3. 19. 12:28

夫事有顯晦理有屈伸莫不有時與數存焉則不可專諉於天理而亦有責於人事者也. 林氏之先古有三松先生者卽牧使公諱雨所之令孫也. 光陵之世以文章氣節爲人所推而早年釋褐選入藝苑. 人以濟川霖雨之材期之而世與心違未能展布其所蘊沈於下位. 吁可惜哉. 當鴻山賊歸之日卜居於襄陽花嶺之下署其里曰栗里. 所居之傍山川明暟林樾茂美作亭數間以爲終老之計而名之曰三松. 蓋取義於陶靖節三逕之松也. 子孫世守肄業於斯講誦於斯而不幸中遭龍蛇之變隆棟彩甓擧入於兵燹之中所餘邱墟只爲兎葵鷰麥之場者厥惟久矣. 其爲後承之追感當何如哉. 歲丙午本孫老少合席竣議以圖重建而隨力出財相地於東山之上則取其密邇乎先齋也. 始役抄春而僉執事經紀有方. 輸材運瓦不煩民力而工告訖. 可謂肯構善述者也. 日林斯文致佐甫袖其記亭之文而責余以一言. 顧此寡陋惡敢當. 是寄而旋念念祖之誠不以親表有間則忝在外裔惡可以不文終辭已乎. 於乎先生之文雅標節略與陶彭澤相符則必有嘉言懿蹟之垂範後人者多矣. 而片言隻字不少槪見何哉. 其兵劫之餘滄桑往劫無人收拾而然歟抑未爾也. 先生播芬遺躅在乎斯亭而中間浸晦復顯於三百年之後者庸非數耶. 上天補祐不使君子之蹟終泯而本孫尊慕之所士林景仰之地其在斯亭歟.

 

赤馬(庚午) 小春節 外裔孫 務安 朴章浩 謹撰

 

무릇 일(事)에는 드러남과 가려짐이 있고, 이치(理)에는 굽혀짐과 펼쳐짐이 있어 시(時)와 수(數)가 있지 않음이 없으니, 천리(天理)에만 맡길 수 없으며 인사(人事)에도 책임이 있는 경우가 많다. 임씨(林氏)의 선대(先代)에 삼송선생(三松先生, 주1)이란 분이 계시니 목사공(牧使公) 휘(諱) 우소(雨所, 주2)의 영손(令孫)이다. 광릉(光陵, 世祖) 때에 문장(文章)과 기품(氣品)이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아 일찍이 문과에 급제(釋褐, 주3)하여 예원(藝苑, 주4)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냇물을 건너게 하는 다리, 만물을 적셔주는 단비 같은 재목으로 기대했으나, 세상이 마음과 어긋나 능히 그 뜻을 펼치지 못한 채 낮은 관직에 머물렀다. 아, 안타깝도다! 

 

당시 홍산(鴻山, 부여 홍산현)에서 양양(襄陽, 예천의 옛이름)으로 이주한 선생은 화령(花嶺, 꽃재) 아래 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하고 율리(栗里, 율현리)라 이름하였다. 사는 곳 주위 산천이 맑게 비추고, 숲이 아름답게 우거진 곳에 여생(餘生)을 보내실 작정으로 아담한 정자 두어 칸을 지어서 삼송정(三松亭)이라 하였다. 이는 대개 옛 도정절(陶靖節, 주5)의 삼경송(三逕松, 주6)에서 뜻을 따온 것이다.

 

자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업(業)을 배우고 학문을 익혔으나 불행하게도 중간에 용사의 변란(龍蛇之變, 임진년과 계사년의 왜란)을 당하여 집과 터, 높은 기둥과 아름다운 벽돌은 전화(戰火)에 타버리고, 남은 폐허는 토끼와 제비들의 놀이터로 변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니, 후손들의 추숭하는 느낌은 어떠하였으리요!

 

병오년(丙午年)에 본손(本孫) 노소(老少)의 사람들이 모여 삼송정을 중건하기로 논의하고, 능력에 따라 재물을 내어 동산(東山) 위에 자리를 살펴 잡았으니 이는 선재(先齋)에서 아주 가까움을 취한 것이다. 초봄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모든 집사(執事)와 경기(經紀, 경영)에 법도가 있었다. 재목을 옮기고 기와를 나름에 사람들의 노력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공사를 마쳤다. 가히 선대의 일을 잘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어느 날 임사문(林斯文, 儒學)이 좌보(佐甫, 주7)에게 보낸 정기(亭記)를 가져와 나에게 한마디를 요청하였다. 많이 부족한 내가 이 부탁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지만 조상을 생각하는 정성을 생각하고는 외종사촌(外從四寸, 親表)으로서 외예(外裔)에 들어 있으니 어찌 글을 끝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선생의 뛰어난 문장과 높은 절개는 팽택령(彭澤令)을 지낸 도정절과 서로 같으니 반드시 아름다운 말과 행적이 후인에게 모범이 될 만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편언척자(片言隻字, 짧은 말이나 글)는 개견(槪見, 대충 살펴봄)함이 적지 않았으니 왜인가? 병겁(兵劫, 전쟁)의 나머지 창상(滄桑, 滄桑之變, 桑田碧海)한 기나긴 시간에 수습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면 선생의 후손들이 이 정자에 남았으나 중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삼백년 뒤에 드러난 것은 어찌 운수가 아니겠는가?

 

하늘이 도와 군자의 자취를 끝내 사라지지 않도록 하여 본손(本孫)이 존모(尊慕)하는 자리, 사림(士林)이 경앙(景仰)하는 곳이 이 정자에 있는 것이로다!

 

적마(赤馬) 경오년(庚午年) 소춘절(小春節, 음력 10월) 외예손(外裔孫) 무안(務安) 박장호(朴章浩) 삼가 지음(謹撰)

 

삼송정

주1) 삼송선생(三松先生)은 임귀지(林貴枝, 1435~1508)이다. 임귀지는 경상북도 유천면 율현리 출신으로 호는 삼송(三松)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임우소(林雨所)의 손자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충남 부여에 있는 홍산현감(鴻山縣監)을 지냈는데, 백성을 사랑하고 정치를 잘하여 그곳 선비와 백성이 선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고 하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예천군 유천면 율현리로 와 숨어살면서 삼송정(三松亭)을 지었다.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며 선비들과 사겼다.

 

주2) 목사공(牧使公) 휘(諱) 우소(雨所)는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판관(尙州判官), 통정대부(通政大夫)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역임했다.

 

주3) 석갈(釋褐)은 천자(賤者)의 의복을 벗고 관복을 입는다는 말이다. 중국의 옛 제도에 전시(殿試)를 치른 뒤에 새 진사(進士)는 태학(太學)에 나아가 석갈(釋褐)을 하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며, 잠화(簪花)를 꽂은 다음 술을  마시고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을 하는 일을 이르던 말이다.

 

주4) 예원(藝苑)은 글을 저술하는 일을 담당하거나 서책을 간수하는 홍문관과 예문관 등을 가리킨다. 또는 국가의 문장을 짓는 곳으로 일정한 관청은 없고 지제교(知製敎)라는 관직만이 있었다.

 

주5) 도정절(陶靖節)은 연명(淵明) 도잠(陶潛)을 말한다. 정절(靖節)은 진(晉)의 처사(處士) 도잠의 시호(諡號)다. 그는 팽택령(彭澤令)이 된 지 80여일 만에 연말이 되어 상급인 군(郡)에서 감독하는 관리가 왔는데, 의관을 정돈하고 맞이하라 하자 “어찌 시골의 젊은 애들에게 허리를 굽히겠는가.” 하고는 그날 즉시 사임하였다. 

 

주6) 삼경송(三逕松)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온다. '귀거래사'에 '삼경(三逕)은 황무(荒蕪)하여졌으나, 솔과 국화는 오히려 있다.'고 하였다. 한(漢) 나라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대밭 속에 세 갈래 길을 내었으므로 은사(隱士)의 집에 삼경(三逕)이란 말을 쓴다. 

 

주7) 좌보(佐甫)는 조선 후기의 문인인 이익회(李翊會, 1767~1843)로 추정된다. 이익회의 호가 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