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長興林氏)

삼송정중건기(三松亭重建記) - 임영기(林永祈)

林 山 2021. 3. 20. 23:10

惟我先祖三松先生乃長興君諱世殷之后判書公諱得荑之曾孫也. 克趾先美承襲世訓忠孝之德行義之事爲人所推而早年登科任在鴻山. 聞端宗遜位因卽解緩賦歸于?濱池洞. 池洞卽先生之王考尙州公藏修之地也. 因居數世而復移寓於襄陽現山之西而隱居焉署其里曰栗里. 又作亭數間以爲終老捿息之計而扁其亭曰三松. 蓋取諸陶靖節三逕松猶存之義則彭澤鴻府符合千載也. 先生播芬遺躅在於斯亭而子孫世數春絃夏誦必肆業於斯以爲推遠感慕之所矣. 不意中偶然失火棟宇扁墨遺文舊跡盡入於灰燼之中. 抑有所門祚衰薄而然歟. 抑有子孫無祿而然歟. 文不可復徵也軒不可復輯也噫. 亭之興廢事之顯晦在於後承肯構善述之道而未遑重創者幾乎三百年于玆. 而先生之高標竣節湮沒於三百年之間豈不爲子孫感創之恨乎. 歲乙巳春諸老少咸集于永思齋峻發僉論以圖重建. 隨力出財始克設役而舊址則圮於風雨地甚陜不可復營乃移築於松谷蓮堂之上卽取其密邇乎先齋也. 越明年亭始成登斯觀之則山川爲之增彩雲物爲之改觀此吾先祖之播芬遺躅復在於斯亭豈非吾林之一大幸耶. 願余不肖無文何敢當發揮先蹟不揆僭忘略記萬一以寓追遠感慕之誠云爾.

 

勢丁巳一九一七仲春下浣 不肖后孫 中樞院講官 永祈 謹識

 

우리들의 조상 삼송선생(三松先生, 주1)은 장흥군(長興君) 휘(諱) 세은(世殷)의 후손인 판서공(判書公) 휘 득이(得荑, 주2)의 증손자다. 선대의 아름다운 덕을 이어받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교훈을 잘 간직했으며, 충효의 덕과 정의롭고 도리에 맞는 행동으로 뭇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산현감(鴻山縣監, 주3)에 임명되었다.

 

홍산현감 재임 중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사퇴하시고, 영빈(?濱, 주4) 지동(池洞, 못골)으로 돌아오셨다. 지동은 왕고(王考, 돌아가신 할아버지)이신 상주공(尙州公, 주5)의 장수지지(藏修之地, 주6)로 여러 해를 지내시다가 양양(襄陽, 예천) 현산(現山)의 서쪽에 은거하시니 이곳이 바로 율현(栗峴, 밤고개)이다.   

 

율현에 정자 몇 칸을 지으시고 소나무를 벗삼아 은거할 계획을 세우셨으니 이것이 곧 삼송정(三松亭, 주7)이다. 삼송정이라 이름함은 옛 도정절(陶靖節, 주8)의 삼경송(三逕松, 주9)에서 취한 것으로 팽택(彭澤, 도정절의 임지)과 홍부(鴻府, 홍산현)가 천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부합한다는 뜻이다. 선생의 문헌과 유물들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으니 자손들은 학문에 힘쓰고, 업(業)을 닦으며 추원감모(追遠感慕, 주10)의 회포(懷抱)가 솟아오른다.

 

불행하게도 우연히 일어난 불로 정자와 유물은 모두 타버렸다. 이는 우리 임씨(林氏) 문중의 복(福)이 쇠박(衰薄)해진 탓인가! 자손들의 녹(祿)이 없는 탓인가! 문헌은 다시 찾을 수 없고, 정자는 다시 마련할 수 없으니 슬프다! 정자의 흥폐(興廢)와 사리(事理)의 명암(明暗)은 후손들이 선조의 유업(遺嶪)을 잘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데 달려 있으나 정자를 중창(重創)할 겨를도 없이 300년이 지났다. 선생의 높으신 지표(指標)와 뛰어난 절개(節介)는 300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자손들에게 정자의 중창은 한이 되었다. 

 

기사년(己巳年) 봄에 노소(老少)가 영사재(永思齋, 주11)에 모여 정자를 중건(重建)하기로 뜻을 모았다. 능력에 따라 재물을 내고 힘을 합해 정자를 중건하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으나 옛터는 비바람에 무너진데다가 좁아서 송곡(松谷, 솔골) 연당(蓮塘, 연못) 위 재사(齋舍, 영사재)의 옆에 터를 잡았다. 역사를 시작한 지 1년 뒤에 준공을 보았으니 산천(山川)은 새로와지고 풍경은 더욱 빛나서 선조 삼송선생의 파분유촉(播芬遺躅, 남긴 아름다운 자취)이 다시 되살아나니 우리 임씨(林氏)의 크나큰 경사가 아니리오! 

 

불초(不肖, 주 12)가 배운 것도 부족하고, 글도 잘 못 쓰지만 선조의 유적(遺蹟) 일부와 간략한 기록의 극히 일부를 토대로 중건기를 씀으로써 추원감모(追遠感慕)의 정성을 다하기를 바라노라.     

 

정사년(丁巳年, 1917) 음력 2월(仲春) 하순(下浣)

불초후손(不肖后孫) 중추원강관(中樞院講官, 정4품) 영기(永祈) 삼가 기록함(謹識)

 

삼송정

주1) 삼송선생(三松先生)은 임귀지(林貴枝, 1435~1508)이다. 임귀지는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율현리 출신으로 호는 삼송(三松)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임우소(林雨所)의 손자다. 조선 세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홍산현감(鴻山縣監)을 지냈다. 백성을 사랑하고 정치를 잘하여 그곳 선비와 백성이 선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예천군 유천면 율현리로 와 숨어살면서 삼송정(三松亭)을 지었다.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며 선비들과 사겼다.

 

주2) 임득이(林得荑)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장흥임씨(長興林氏) 공조판서공파(工曹判書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주3) 홍산현(鴻山縣)은 삼국시대 백제의 대산현(大山縣)이었다. 757년(경덕왕 16) 한산(翰山)으로 고쳐 가림군(嘉林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홍산으로 고치고, 1175년(명종 5) 한산감무로 하여금 이를 겸하게 하였다. 1413년(조선 태종 13) 현감(종6품)이 파견되었고,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여군에 병합되어 홍산면이 되었다. 지명은 지세가 나는 기러기처럼 생긴 비홍산(飛鴻山)에서 유래하였다. 비홍함로(飛鴻含蘆)의 명당이 이곳에 있다 하였다. 동쪽의 숙홍역(宿鴻驛)도 본래 비웅(非熊)이었는데, 이 지역이 나는 기러기 형국이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고려 우왕 때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동서로 비인(庇仁)과 석성(石城), 남북으로 한산(韓山)과 청양(靑陽) 등으로 통하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만수산(萬壽山)에는 무량사(無量寺), 도솔암, 보현사가 있었다.

 

주4) 영빈(?濱)은 영빈(潁濱)의 오기가 아닌가 추정된다. '?'은 한자 자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영빈(潁濱)은 중국 북송의 문인으로 황문시랑(黃門侍郞)을 지낸 소철(蘇轍)을 가리킨다. 소철은 일찍이 영수(潁水) 부근에 은거하여 영빈유로(潁濱遺老)라고 칭하였다. 따라서 영빈은 은거의 의미가 있다.

 

주5) 상주공(尙州公)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상주목사(行尙州牧使)를 지낸 임우소(林雨所)를 말한다.

 

주6) 장수지지(藏修之地)는 산수가 수려하여 선비가 학문을 닦기에 알맞은 땅 이라는 뜻이다. 

 

주7) 삼송정(三松亭)은 예천군 유천면 율현리에 있다. 삼송정은 임귀지(林貴枝)가 건립한 정자인데, 1927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정자는 군부대 뒤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이다. 전면에는 반 칸의 툇간을 두고 계자각(鷄子脚)을 둘렀다. 삼송정이 있는 율현리는 유천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5㎞ 정도 떨어져 있다. 율현리는 밤고개(栗峴), 동산(東’山) 등의 자연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송정이 위치한 곳은 동산마을이다.

 

주8) 도정절(陶靖節)은 연명(淵明) 도잠(陶潛, 365~427)을 말한다. 정절(靖節)은 진(晉)의 처사(處士) 도잠의 시호(諡號)다. 그는 팽택령(彭澤令)이 된 지 80여일 만에 연말이 되어 상급인 군(郡)에서 감독하는 관리가 왔는데, 의관을 정돈하고 맞이하라 하자 “어찌 시골의 젊은 애들에게 허리를 굽히겠는가.” 하고는 그날 즉시 사임하였다.   

주9) 삼경송(三逕松)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온다. '귀거래사'에 '삼경(三逕)은 황무(荒蕪)하여졌으나, 솔과 국화는 오히려 있다.'고 하였다. 한(漢) 나라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대밭 속에 세 갈래 길을 내었으므로 은사(隱士)의 집에 삼경(三逕)이란 말을 쓴다.

 

주10) 추원감모(追遠感慕)는 후손들이 선조가 끼쳐준 은혜를 감사하고 사모하는 것이다. 선조에게 제사를 올릴 때에는 추원감모의 정성을 다한다.

 

주11) 영사재(永思齋)는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율현리에 있다. 삼송(三松) 임귀지(林貴枝)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주12) 불초(不肖)는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매우 어리석다'는 뜻이다. 자식이 부모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부르는 말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