齋以思名何居焉. 書曰奉先思孝, 詩曰孝思攸則思之時義遠矣哉. 昔甄氏亭名蓋出於孝而陳后山所命則今之林氏之齋果無讓於甑氏之亭耶. 余嘗聞林氏先祖鴻山公自長興來寓襄陽于今數百年云子孫繁衍比屋連檐孝友之風敦睦之誼雖張公藝九世同居亦不過此. 鴻山公以下丘隴皆在東山村後麓宿草荒原偏起雲仍霜露之感以十月丁日常時祀且於壬寅春諸宗合謨齊聲經始齋舍於先塋之下家廟之後棟樑堅實塗墍完厚不僭不侈有如私室而其制也. 一架四間左右附夾房各二間軒䡿通豁地勢平穩可容百餘人蓬科馬鬛短碣床石皆人於顧眄指點之間. 慕先之心追遠之誠自不覺油然而生矣. 春秋祭祀時蘋藻供於斯罇爵滌於斯上墓焚香情禮俱盡退齋飮福. 老少和同諄諄慻慻勉之以毋忽兢兢業業戒之以毋怠推近及遠而永其思豈不休哉. 時或群賢畢至冠童咸集講誦之音吟咏之聲盈鎰乎席上亦可謂奬進後學也. 不知甄氏之亭又有如是事否也. 是齋也上挹松楸下臨桑梓此仁人孝子之所感處而不佞之所深興者也. 老友萬重甫請記于余余不敢辭略叙梗槪以備後觀. 荒詞蕪說雖不及陳后山補世敎之意而後之覽者亦將有感於斯文.
歲壬寅春 將仕郞莊陵參奉 南陽 洪萬績 謹撰
재(齋)를 사(思)로 이름지은 것이 무엇 때문인가? 서(書)에 이르기를 '선조(先祖)를 모시면서 효(孝)를 생각하라'고 했고, 시(詩)에 이르기를 '효를 생각하는 법은 생각할수록 그 뜻이 깊고 먼 것이다'라고 하였다. 옛 견씨(甄氏)의 정자(亭子)는 효에서 나온 것으로 진후산(陳后山, 주1)의 '사정기(思亭記)'를 생각하면 임씨(林氏)의 재사(齋舍)도 또한 이러한 것이다.
일찍이 듣건대 임씨(林氏)의 조상인 홍산공(鴻山公, 주2)이 전라남도 장흥(長興)에서 양양(襄陽, 주3)으로 오신 지 지금부터 수백년, 자손이 번창하고 집들이 처마를 맞대면서 효성과 우애의 풍습과 화목한 정분은 비록 장공예(張公藝, 주4)가 아홉 세대를 동거하였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비하지 못할 것이다.
홍산공 이하 묘소가 모두 동산촌(東山村)에 있고, 자손들이 구름같이 흥성하는 느낌이 있으며, 항상 10월 정일(丁日)에 제사를 모신다. 임인년(壬寅年) 봄에 종족(宗族)이 모두 모여서 재사(齋舍)를 선산(先山)의 밑 가묘 뒤에 세우기로 합의하여 기둥을 튼튼히 하고, 도기(塗墍, 주5)는 견실하게 교만하지 않고 사치스럽지 않은 개인의 집처럼 꾸몄도다.
한 채 네 칸(四間)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두 칸식(二間式) 협방(夾房, 주6)을 꾸며서 가히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강당(講堂)은 넓고 자세(地勢)는 평온하며, 사방의 풍경이 매우 가까이 있도다. 선조를 숭배하고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스스로 저절로 생기도다.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제물(祭物)을 바치고, 제주(祭酒)를 따르며 정성껏 분향(焚香)하고 음복(飮福)을 빠짐없이 나누도다.
노소(老少)가 화합하여 순순히 힘쓰고 생업에 정진하도록 부탁하는 것이 그 멀리를 생각하여 그가 직함을 염려하는 영사(永思)의 뜻이 아니겠는가! 때때로 노인들이 오시고 아이들이 모여서 글을 읽고, 시를 읊는 소리가 넘쳐 흐르니 이곳이 자손들이 학문에 힘쓰는 곳이다. 견씨(甄氏)의 정자는 모르지만 이러한 일을 하는 곳이 아니겠는가! 재사(齋舍)의 위에는 소나무와 호두나무, 아래에는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심는 것은 어진 사람과 효자를 상징하는 것이며, 교만하지 않고 속되지 않는 깊은 고려(考慮)에서 나온 것이다.
옛 친우인 만중형(萬重兄)이 나에게 기사(記事)를 청함으로 사양하지 않고 그 줄거리를 써서 후일의 참고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부족한 글로 비록 진후산이 지은 세교(世敎)의 서(序)에는 못미치겠으나 훗날의 도움이 될 것을 바라노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은 혹 감동이 있을진져!
임인년(歲壬寅, 1722년) 봄(春) 장사랑장릉참봉(將仕郞莊陵參奉) 남양(南陽) 홍만적(洪萬績, 주7) 삼가 지음(謹撰)
주1) 진후산(陳后山)은 북송의 시인 진사도(陳師道, 1053~1101)를 말한다. 진사도의 자(字)는 이상(履常), 무기(無己)다. 호(號)는 후산거사(後山居士)다. 그래서 진후산이라고 한다. 진후산이 지은 '사정기(思亭記)'가 있다. '사정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견씨(甄氏, 중국어 발음은 젠씨)는 원래 쉬저우(徐州)의 부호였다. 견군(甄君)의 대에 이르러 비로소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여 사람들을 가르쳤다. 향리에서는 선인(善人)으로 불렸으나 집안은 갈수록 가난해져서 부모 형제가 죽어도 십여 년이 지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장례 비용을 빌려 부모와 형제들의 여러 영구를 함께 장사지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딱하게 여겨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다. 장례를 끝내자 무덤 앞에 나무를 심어 묘표(墓表)로 삼고, 무덤 옆에 집을 지은 다음 그 집의 이름을 무엇으로 했으면 좋은가를 내게 물어왔다. 내가 대답하기를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달라진다. 방패와 창을 보면 싸움을 생각하게 되고, 칼이나 톱 같은 형구를 보면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제사를 모시는 묘(廟)나 사(社)를 보면 공경하는 마음이 일고, 훌륭한 집을 보면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무릇 사람들이 좋다, 밉다, 기쁘다, 두렵다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외물에서부터 감정을 일으키기 때문인데, 그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제 높은 곳에 올라가 무덤 사이에 서있는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바라보고 언덕을 내려와 오래된 무덤 사이를 지나다가 가시덤불이 무성하고 새로 난 여우와 토끼 발자국을 보게 되면 그 누가 어버이의 생각을 아니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런 것을 생각하여 사정(思亭)이라 이름을 붙이고 싶다. 어버이는 자식된 자로서 잊을 수 없는 분이니 군자는 더욱 삼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멀리 교외에 어버이의 무덤을 만들되 봉분을 만들고 무덤가에 도랑을 판다. 집에는 사당을 짓고서 여름에는 체제(禘祭)를, 가을에는 상제(嘗祭)를 지내며 상복을 입고 기제(忌祭)를 지내며 그를 슬퍼하는 것은 어버이에 대한 생각이 남아있기 때문인데,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버이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 상복을 입지 않은 현손(玄孫)에 이르게 된다. 상복을 입지 않게 되면 정도 끝나는 것이며, 정이 끝나면 그를 잊게 되는 것이다. 나의 어버이로부터 시작하여 그분을 잊게 되는 것은 관계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이 정자를 짓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무릇 이 정자에 오르게 될 진군의 자손 중에 어찌 조상을 잊을 자가 있겠는가?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 생각을 넓혀 간다면 효심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는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후에 어찌 없겠는가? 무덤 위의 나무를 바라보고 그것으로 재목을 삼으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개암나무와 가시나무를 보고 그것으로 땔나무를 삼으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분묘 위에 올라가 부장품을 도굴하려고 생각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 나는 그대를 위해 사정기를 쓰고 그대의 자손들로 하여금 이 글을 외우게 함으로써 훌륭한 것을 보고 더욱 잘하려고 힘쓰고 나쁜 것을 보면 경계하도록 하려 함이다. 그리하면 앞에서 말한 일들을 면할 수 있게 되리라. 마침내 이 때문에 이 글을 쓰는 바이다.
주2) 홍산공(鴻山公) 임귀지(林貴枝, 1435~1508)는 경상북도 유천면 율현리 출신이다. 호는 삼송(三松)이다. 본관은 장흥이고, 임우소(林雨所)의 손자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충남 부여에 있는 홍산현감을 지냈는데, 백성을 사랑하고 정치를 잘하여 그곳 선비와 백성이 선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고 하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율현리로 낙향하여 숨어 살면서 삼송정(三松亭)을 지었다.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선비들과 사귀었다. 상덕사(尙德祠)에 배형(配亨)되었다.
주3) 양양(襄陽)은 경상북도 예천(醴泉)의 고호(古號)이다. 예천은 역사적으로 수주(水酒), 보주(甫州), 기양(基陽), 보천(甫川), 청하(淸河), 양양(襄陽) 등으로 불린 적이 있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부터 고려초까지는 예천이라고 했다. 고려 때는 보주(甫州), 양양(襄陽)이라고 했다가 조선 태종 16년(1416) 이후부터 예천으로 불렸다. 예천의 지명은 관문 역할을 하던 서본리 지(주, 쥐)고개 밑의 박샘(酒泉)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된다. 샘물의 맛과 수질이 매우 좋아서 '단술예(醴), 샘천(泉)'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을이름 '예(醴)'자로 볼 때는 '샘골'이다.
주4) 장공예(張公藝)는 당(唐) 나라 사람이다. 장공예의 집은 9세(九世)의 친족(親族)이 한 집에 동거(同居)하였다. 당 고종(高宗)이 그 소문을 듣고 일찍이 장공예의 집에 행차하여 그 많은 친족이 한 집에 살면서 서로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이에 장공예가 '인(忍)'자 백여 자를 써서 올렸다고 한다. '소학(小學)' <선행(善行)>에 나온다.
주5) 도기(塗墍)는 벽을 흙으로 매끈하게 바르는 것을 말한다. 집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의미한다.
주6) 협방(夾房)은 안방에 붙은 작은 방을 말한다.
주7) 홍만적(洪萬績, 1660~1733)은 경상도 용궁현(龍宮縣) 출신이다. 자는 성임(聖任), 호는 송계당(松桂堂), 본관은 남양이다. 숙(淑)의 6세손, 화포(花浦) 익한(翼漢)의 종손(從孫), 익익재(翼翼齋) 봉한(鳳漢)의 증손자, 통덕랑(通德郞) 계원(啓元)의 2자, 여적(汝績)의 동생이다. 편부 슬하(嚴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699년(숙종 25) 식년 진시시에 2등 8위로 합격하였다. 음사로 선릉 봉사(宣陵奉事), 참봉(參奉)을 지냈다. 문학으로 세상의 추앙을 받았고,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묘는 유천면 매산리 13번지 조유동 경좌(鳥踰洞庚坐)에 있고, 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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