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長興林氏)

신라팽성백임공팔급(新羅彭城伯林公八及) 제단비(祭壇碑) - 민병승(閔丙承)

林 山 2021. 3. 1. 22:01

昔我檀君撫夷九種箕聖東來有仁賢之化. 是以孔子發欲居之歎而有乘桴之志者也. 學士林公唐末譖言孔張禍機莫測遂與七人色擧蹙下項頷之牡登樂浪之舟永言以歌之曰八人浮海兮桂棹蘭檣次第和之弁六十四字其辭也. 正易之否君子以儉德避難者也. 過句麗越百濟卜新羅之彭城龍珠而居之蓋服其新德羅賢之義而學百里奚之智. 仕至彭城伯子姓保之歷羅麗至聖朝千有餘年綿綿也. 歲在甲子公後孫設大同宗約于漢師譜旣成萬殊一本開卷瞭然. 遂開花樹會酌而樂之旅也咸一辭言曰學士公衣履之藏旣失其傳而香火爲闕帥是以行何异乎. 若敖之餒廟而墠墠而墓禮也旣墓復墠雖曰非經古人多有行之者遂與卜地漢師之弼雲. 築壇建閭以上巳享之又翌日繹而樂之定著爲歲式率爲常奉先敦族之道於斯盡矣. 學士公之遺澤其在百世而不替夫.

 

嘉義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奎章閣直提學 驪興 閔丙承 撰

崇綠大夫前判敦寧院事 海平 尹用求 書

 

옛날 우리 단군(檀君)이 구이(九夷)를 무마(撫摩)하고 성인(聖人) 기자(箕子)가 동방으로 와서 인현(仁賢)의 문화가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공자(孔子)가 구이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는 탄식을 말하였고, 간편한 배를 타고 동방으로 떠나려는 뜻을 두었던 것이다. 

 

학사(學士) 임공(林公)이 당(唐)나라 말기에 참소(讒訴)하는 말이 크게 번져 화기(禍機)를 예측할 수 없자 마침내 일곱 사람과 함께 위축된 모습으로 목을 내리뜨리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낙랑(樂浪)의 배를 타고서 길게 노래 부르기를 '여덟 사람이 바다로 떠내려감이여! 계수나무 노에 목란의 돛대로다.'라고 하여 차례대로 그에 화답하였으니 64글자로 즐겨 읊으신 그 가사(歌辭)였다. 그렇다면 정역(正易)의 비색(否塞)에 군자(君子)가 검덕(儉德)을 지니고 피난하였던 사람들이었다. 

 

고구려(高句麗)를 지나고 백제(百濟)를 넘어 신라(新羅)의 팽성(彭城) 용주(龍珠)에 자리잡고 살았으니, 대체로 신라의 나라 이름이 새로운 덕으로 어진 이를 등용(登用)한다는 뜻에 승복(承服)함이었으며, 불의(不義)의 나라에서 망명(亡命)하여 어진 이를 대접하는 나라에 가서 자기의 재능을 발휘했던 백리해(百里奚)란 사람의 지혜를 배워서 한 일이었다. 벼슬이 팽성백(彭城伯)에 이르고 자성(子姓)들이 보호받아 신라와 고려(高麗)를 거치고 조선왕조(朝鮮王朝)에 이르기까지 천여년에 면면히 이어왔다. 

 

갑자년(甲子年)에 공의 후손들이 서울에 대동종약소(大同宗約所)를 설치하고 족보를 완성하자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가지로 달라졌음은 책을 펴면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침내 화수회(花樹會)를 열고 술잔을 기울이며 즐겁게 모였을 때 한마디씩 말을 하거늘 '학사공(學士公)의 묘소가 이미 실전(失傳)되어 향화(香火)를 궐(闕)하고 있으니 이런 일에 더불어 행하는 것을 어떻게 꺼리겠는가? 주(周)나라의 초군(楚君) 약오(若敖)가 제사(祭祀)받지 못함에 있어서는 묘(廟)를 세워 제단(祭壇)을 모시게 되고, 제단을 모시는 곳이면 묘례(墓禮)가 되어 버리거늘 이미 묘례로 한 바 다시 제사지내는 곳으로 함은 비록 경례(經禮)는 아니라 하더라도 옛 사람들이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고는 마침내 서울의 필운동(弼雲洞)에 터를 정하였다.   

 

단(壇)을 쌓고 제각(祭閣)을 세워 삼짓날(음력 3월 3일)에 제향(祭享)을 드리고, 또 다음날에 모여서 즐거움을 누렸다. 해마다 지내는 예식(禮式)으로 정해 놓고 항상 지키도록 하였으니 선조(先祖)를 받들고 돈족(敦族)하는 도리가 이에서 더할 수 없었다. 학사공의 유택(遺澤)이 백세(百世)가 되더라도 없어지지 않음인가 싶다. 

 

가의대부행승정원도승지겸규장각직제학(嘉義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奎章閣直提學)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 지음(撰)

숭록대부전판돈녕원사(崇綠大夫前判敦寧院事) 해평(海平) 윤용구(尹用求) 씀(書)

 

*추기(追記)

 

그후 서울의 필운동에서 충남(忠南) 청양군(靑陽郡) 화성면(化城面) 화암리(化巖里)로 옮겨 3월 3일에 제사를 지낸다. 2003년 3월 18일 충절공(忠節公) 팔급(八及) 동상을 건립했다. 

 

충절공 팔급께서는 중국 당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서기 850년경 참소를 당하여 칠학사와 함께 중국 푸젠성(福建省) 펑청(彭城) 해변을 떠나 신라땅 경기도 평택시(팽성)에 망명하여 정착 세거(世居)하였다. 

 

그러나, 천여년 동안 정확한 세거지(世居地)를 찾지 못해 오다가 평택시 중부일보사 사장 임완수(林完洙)께서 세거지 찾기에 나서 학계의 고증(考證)을 거쳐 임씨중앙회장(林氏中央會長) 임방현(林芳鉉)과 경기도지사 임창렬(林昌烈)의 농성공원화(農城公園化) 특별 지원 사업으로 성역화(聖域化)하여 우리의 도시조(都始祖) 충절공 동상을 세우니 한국(韓國) 임씨(林氏)의 자랑이요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민병승(閔丙承, 1886~?)의 본관은 여흥(驪興), 아버지는 민응식(閔應植)이다. 1884년(고종 21) 1월 외국어학교 부교관(副敎官), 1885년 1월 탁지부(度支部) 주사를 지냈다. 같은 해 3월에 실시된 과거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6월에 탁지부 서기로 승진하였다. 1886년 4월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고, 시강원겸문학,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 승정원 동부승지, 성균관 대사성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887년에는 내무부 참의(內務部參議)가 되었고, 1888년에는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의,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을 지냈다. 1890년에는 이조 참판이 되었고, 1893년에는 규장각 직제학이 되었다. 1896년 8월에는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명되었으며, 1897년에는 중추원 1등의관이 되었다. 1899년에는 종궁내부 특진관 칙임4등관이 되고, 1905년에는 칙임3등관이 되었다.

 

*윤용구(尹用求, 1853~1939)의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주빈(周賓)이다. 호는 석촌(石村), 해관(海觀), 수간(睡幹), 장위산인(獐位山人)이다. 남녕위 의선(宜善)의 아들이다. 1871년(고종 8) 직장(直長)으로서 문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예조와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법부와 탁지부, 내무부 등 대신에 십수회 배명(拜命)받았지만 취임하지 않고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 은거하면서 ‘장위산인’이라 자호하였다.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을 수여하였으나 거절하고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자오(自娛)하며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글씨는 해서와 행서를 많이 썼으며 그림은 난과 대를 잘 그렸다. 금석문으로 과천의 '문간공한장석신도비(文簡公韓章錫神道碑)'와 광주(廣州)의 '선성군무생이공신도비(宣城君茂生李公神道碑)'가 있으며,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 입구의 강선루(降仙樓) 현판 등을 남겼다. 그림으로는 '죽도(竹圖)'(개인소장)와 '묵죽(墨竹)'(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