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生諱貴枝姓林氏號三松. 林之先出於中國翰林學士忠節公諱八及卽東來八學士之一. 至諱世殷又封長興君貫以長興蓋自此始. 中世有諱蕡諡忠靖侍中平章事. 有諱頤諡忠毅平章事冠山伯於公爲高祖. 曾祖諱得荑工曹判書號湖隱祖諱雨所官至尙州判官再任牧使號芝峰仍居尙州池洞. 考諱重敬副護軍妣安東金氏父得成. 世廟十七年一四三五乙卯生始移居醴泉栗里官通訓大夫行鴻山縣監中宗三年一五O八戊辰卒享年七十四. 墓在栗里松谷癸坐之原短碣相傳鴻之士民伐石來樹其遺愛桐鄕可知也. 配淑人安東權氏從仕郞若衡之女左議政諱軫之孫也. 生二男一女男長春厚陵參奉次淑春奉事女適金慶祖. 參奉二男一女長德元判官次得元女適進士安鳳齡. 奉事一男一女希壽女適朴仲敬. 判官六男用漑軍資判官用潤奉直郞司僕寺判官用澤將仕郞部將用灌侍講院習讀用沃用浹宣務郞尙衣院別坐二女判決事李南陽朴炯. 玄孫以下不盡錄. 公之平日政績行事旣載金石然兵燹之餘文籍蕩然嘉言善行無從以考据可慨也. 碣久而泐後孫會運正翹等改治一石囑識仁行其陰自顧非其人竊惟我溪東先祖實爲軍資公. 自出誼不可以下不文辭謹敍其先繼後承爲之銘曰源旣遠其流也長泐而新潛德之光.
崇禎紀元後四年辛卯 禦侮將軍前行翊衛 眞城 李仁幸 撰
선생의 성은 임씨(林氏), 휘(諱)는 귀지(貴枝), 호는 삼송(三松, 주1)이다. 임씨의 선조(先祖)는 중국에서 나시어 동방(東方)으로 오신 팔학사(八學士)의 한분이신 충절공(忠節公) 휘 팔급(八及)이시다. 휘 세은(世殷, 주2)은 장흥군(長興君)에 봉해져 장흥임씨(長興林氏) 관(貫)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중세(中世)에 이르러 장흥군의 아들 휘 분(蕡), 시호(諡號) 충정공(忠靖公)은 시중(侍中)과 평장사(平章事, 주3)를 지냈다. 충정공의 아들 휘 이(頤), 시호 충의공(忠毅公)은 평장사를 지내고, 관산백(冠山伯, 관산은 장흥의 별호)에 봉해졌다. 충의공은 삼송선생의 고조부이다. 선생의 증조부 휘 득이(得荑), 호 호은(湖隱)은 공조판서(工曹判書, 정2품)를 지냈고, 조부 휘 우소(雨所), 호 지봉(芝峰)은 상주판관(尙州判官, 종5품)에 이어 다시 상주목사(尙州牧使, 정3품)를 지낸 뒤 상주 지동(池洞, 못골)에 거주했다. 선생의 고(考, 돌아가신 아버지) 휘 중경(重敬)은 부호군(副護軍, 별칭 定略將軍, 宣略將軍, 종4품)을 지냈고, 선생의 비(妣, 돌아가신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 득성(得成)의 따님이시다.
세종(世宗) 17년(1435년) 을묘년에 탄생하신 삼송선생은 처음 예천군(醴泉郡) 유천면(柳川面) 율현(栗峴)으로 이거(移居)하셨는데, 벼슬이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당하관 문관 품계) 행홍산현감(行鴻山縣監, 종6품, 주4)을 지냈으며, 중종(中宗) 3년(1508년)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묘는 율현 송곡(松谷, 솔골) 계좌(癸坐, 癸方을 등진 좌향)에 있다. 묘소에는 비석(碑石)과 상석(床石)이 세워져 있으니 자손들의 수묘(修墓), 보림(保林)에 대한 조상 숭배 관념이 크고 깊음을 알 수 있다.
숙인(淑人, 주5)은 안동권씨(安東權氏) 종사랑(從仕郞, 주 6) 약형(若衡)의 딸, 좌의정(左議政) 휘(諱) 진(軫)의 손(孫)이시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자(長子) 장춘(長春)은 후릉참봉(厚陵參奉, 종9품), 차자(次子) 숙춘(淑春)은 봉사(奉事, 종8품)를 지냈고, 딸은 김경조(金慶祖)에게 출가했다. 후릉참봉 장춘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자 덕원(德元)은 판관(判官, 종5품)을 지냈고, 차자는 득원(得元)이며, 딸은 진사(進士) 안봉령(安鳳齡)에게 출가했다. 봉사 숙춘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희수(希壽)이고, 딸은 박중경(朴仲敬)에게 출가했다.
판관 덕원은 6남을 두었는데, 용개(用漑)는 군자감(軍資監) 판관, 용윤(用潤)은 봉직랑(奉直郞, 文散階 종5품 첫째 등급) 사복시(司僕寺) 판관, 용택(用澤)은 장사랑(將仕郞, 문산계 종9품) 부장(部將, 종6품), 용관(用灌)은 시강원(侍講院) 습독(習讀, 종9품 무관)을 지냈다. 용옥(用沃)은 벼슬이 없었고, 용협(用浹)은 선무랑(宣務郞, 문산계 종6품 하계)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 정종5품)를 지냈다. 사위는 판결사(判決事, 정3품) 이남양(李南陽)과 박형(朴炯)이다. 현손(玄孫, 5세손) 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다.
삼송선생의 비문에 실려 있던 정치적 업적과 행적은 전화(戰禍)로 문적(文籍)이 탕진(蕩盡)되어 일일이 상고(詳考)할 자료가 없다. 비갈(碑碣, 주7)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닳아 없어지고, 행적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에 후손 회운(會運) 정교(正翹) 등이 다시 비석을 세워서 어진 행적과 음덕(陰德)이 드러나니 삼송선생이야말로 진정 우리의 계동선조군자공(溪東先祖軍資公)임을 알 수 있다.
내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묘갈명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사양할 수 없어 그 앞과 뒤를 적어보았다. 원류(源流)가 먼 물은 그 흐름도 길며, 오랫동안 잊혀진 유덕(遺德)도 새로이 파헤치면 그 빛을 발휘하는도다!
숭정기원후4년(崇禎紀元後四年) 신묘(辛卯) 어모장군(禦侮將軍, 정3품 당하관 무관 품계) 전행익위(前行翊衛, 정5품) 진성(眞城) 이인행(李仁幸) 지음(撰)
주1) 임귀지(林貴枝, 1435~1508)는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율현리 출신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임우소(林雨所)의 손자다. 조선 세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홍산현감(鴻山縣監)을 지냈다. 백성을 사랑하고 정치를 잘하여 그곳 선비와 백성이 선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예천군 유천면 율현리로 와 숨어살면서 삼송정(三松亭)을 지었다.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며 선비들과 사겼다.
주2) 임세은(林世殷)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장흥군에 봉해졌다.
주3) 시중(侍中)은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최고 관직이다. 종1품 재상직의 통칭이며, 고려 후기에는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이라고도 하였다. 평장사(平章事)는 고려 문종 때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문하평장사, 중서평장사가 있었으며, 정원은 각 1인이었다. 품계는 모두 정2품이었다.
주4) 행홍산현감(行鴻山縣監)의 행(行)은 품계보다 낮은 관직을 받게 될 때 붙인다. 정3품 당하관 문관이 종6품 홍산현감을 제수받았으니 행(行)을 앞에 붙인 것이다.
주5) 숙인(淑人)은 조선 시대 정3품에 해당하는 관직인 통훈대부(通訓大夫), 어모장군(禦侮將軍), 창선대부(彰善大夫), 정순대부(正順大夫) 이하의 품계를 역임한 당하관(堂下官)의 아내, 종3품에 해당하는 관직을 역임한 종친 및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작위(爵位)이다. 숙인은 내명부 관등 등급상 숙부인(淑夫人)의 아래, 영인(令人)의 위에 해당한다.
주6) 종사랑(從仕郞)은 조선 시대 정9품 문관의 품계이다. 장사랑(將仕郞)의 아래, 승사랑(承仕郎)의 위이다.
주7) 비갈(碑碣)은 비석(碑石)과 갈석(碣石)이다. 비석은 사적(事蹟)을 기념하기 위하여 글을 새겨 세우는 것이다. 갈석은 가첨석(加檐石)을 얹지 않고 머리를 둥글게 만든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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