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長興林氏)

장흥임씨(長興林氏) 공조판서공파보(工曹判書公派譜) 발문(跋文) - 임병섭(林炳燮)

林 山 2021. 4. 29. 21:51

족보(族譜)라는 것은 복(服) 입는 촌수가 비록 지났다 하나 일가의 의를 잊을 수 없음을 밝힘이니, 우리 일가가 이 족보를 보게 되면 능히 선조의 계통이 어떻게 내려왔는가를 상고할 수 있다. 나의 몸이 한 근원에서 갈라진 것을 알게 되니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며, 동성 간에 백세를 두고 의를 중히 여겨 돈독에 힘써서 선조의 훈계를 받들고, 묘가의 풍성을 길이 심고 지켜 안으로는 수신과 제가에 힘쓰고 나아가 나라에까지 베풀어 세상의 모범이 되며, 인심을 이끌고 종족을 화목케 하고 풍속을 후하게 함이 여기에 있으니 어찌 족보를 폐힐 수 있겠는가! 

 

현세 우리 임문(林門)에서는 기인이제가 너무 많아 각 파별로 상계를 달리하는 족보가 편찬되고 있음이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제부터라도 한시대를 살고 있는 식자들은 그 계파를 무시하고 경멸할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는 상계에 힘쓰고 후인에 힘쓰고 있음을 통감하고 애써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함이 마땅하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식자들이 반성해야 할 일일지어다.  

 

비록 상계를 달리 해석하여도 한 혈족이라는 것만은 변함이 없고, 한 형제 한 종족이라는 것은 확고하다 할 것이다. 그러니, 의당 자손된 도리로서 서로 화목하게 지낸다면 그 이상 다행스런 일이 없을 것이다. 이후 이를 잘 아는 후손이 나타나 각 계파를 아우르고 상계를 하나로 반듯하게 하여 영호남 통합족보를 편찬하여 한 형제 자손임을 만천하에 공고히 하고 우리 임문(林門)을 일체로 묶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오늘날 우리 임씨 가문이 훌륭하신 선조님들의 음덕으로 한없이 번성하여 많은 일가가 도처에 기거하여 그 수가 많아서 평생 동안 일면식도 없이 지내는 일가가 많이 생겨난 것은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족보 없이 세계와 항렬을 모르며 원근친도 모르고 남과 같이 지낸다면 어찌 일가라는 의미가 있겠는가! 다행히도 현시대 우리 곁에는 훌륭하신 선조님들 덕택에 수백년 동안 간행되어 이어온 족보가 있다. 하지만 수회 간행을 거듭하여 오면서 그때마다 상계를 달리하여 왔다.  

 

그리고 또, 그 상계를 달리하는 세보가 불과 수개월 전 호남에서 무잠조는 평택임씨(平澤林氏) 판윤공파, 귀잠조(貴岑祖)는 충정공계 장흥임씨로 각각 간행되어 이 혼란스러움을 장흥임문(長興林門)의 종파로서 모든 난맥을 정리하는 취지로 부득불 이 족보를 편찬하게 되었다. 또한 지금의 이 족보를 추진하는 이들이 후일의 건강을 기약할 수 없어 부득이 상계를 정립하는 이 족보를 연이어 편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륜과 지식이 짧은 나로서는 이번 이 어른들께서 하시는 일을 그저 지켜만 보고 먼 훗날에 어른들의 치적을 전해줄 요량으로 개인적 견해나 소견 등은 되도록이면 자중하여 왔다. 이제 이렇게 족보가 편찬되고 발문을 요청하여 쓰게 됨은 통상적으로 발문은 은인자중의 인품을 겸비한 주위의 어른께서 쓰는 것이 온당하다. 그러나 그동안의 상황을 내가 알기에 불혹말미의 약관소생이 감히 이렇게 발문을 쓰게 됨에 따라 그동안의 내용을 현세와 후세인에게 전하고자 한다. 

 

충주 원규옹(元圭翁)의 상계 의견이 처음 개진되었을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차분한 정황이 없어 그저 그 어른의 주관적인 견해로만 알았다. 그러나, 광주의 통합족보 편찬 추진회의 전후 시기에 사료를 찾아보고 세은공(世殷公)의 계대에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는 작금에 우선 여러 역사 자료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시대에는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고려 말 무진년(1388년)에 일어난 무진사화 이후 그 사화의 주체 세력이 집권하고 충정공 언수계(彦脩系)가 몰락하는 시기에 우리 득관조(得貫祖)인 분공(蕡公)이 출사를 하시고 그후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 중앙정치권에 계신 것이 의문이었다.

 

그후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유신들과의 평화책으로 여러 고려의 유신들을 불러 유화정책을 쓰려고 한 태조의 부름을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하시고 낙향하신 것을 이미 전 족보를 통해서 알고 있다. 다만 낙향 지역이 왜 장흥이냐 하는 의문 속에는 다소 강제성이 있을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분공의 아래 세대는 조선왕조에 계속하여 출사를 하셨고, 같은 시대에 출사하신 다른 임씨 문중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사료들은 전하고 있다. 한학에 조예가 밝은 대구 종식 종친을 만나 세은공이나 분공의 생졸 연대를 조사하여 줄 것을 부탁드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발췌하여 낸 것이 세은공은 을축년(1385년) 졸(卒)이고, 분공은 태종 무자년(1408년) 졸이다. 이는 추정이 아니고 우리 족보에 기록되어 전해지던 것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동안 분공께서 1370년생이라고 추정하였다. 추정하는 근거는 분공에 대한 기록 중의 '戊辰司馬文科典翰(무진사마문과전한)'이라는 구절이다. 무진년은 1388년이요, 20세가 못되어 사마문과에 급제하였다고 보면 공이 태어난 해는 1370년이 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해석의 차이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 과거제도를 보면 사마시 합격 후 전한(종3품) 벼슬까지 승진하게 되는 것은 통상적으로 20~30년 걸리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래서 다시 해석하면 사마시 급제 후 50세 전후인 무진년에 전한 벼슬에 계셨다라고 해석된다. 또한 우리 족보 기록 중 '公年二七不食他祿以死自誓避居禪門累被避移蕡干長興億夫山下仍居焉'을 공의 연령 27세에 녹을 먹지 않고 장흥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이 또한 잘못된 해석이다. '公年二七'은 공의 나이가 아니라 그 시대 연호 즉 태조 3년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즉 태조 3년에 장흥으로 거처를 옮기셨는데, 이 또한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조에 보면 왕씨 성들을 멸족시키고 기타 고려의 유신들은 거처를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향리나 먼 거리로 보냈다는 조항이 있다. 임쎄 대동세보나 장흥임씨 세보에도 그후 76세로 졸하신 것으로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세종 임자년에 정경을 '증(贈)'하였다고 나오는데, '증'은 돌아가신 분에게 올리는 것이다. 다시 해석하면 분공은 태종 무자년(1408년)에 돌아가시고, 그후 세종조 임자년에 정경을 '증'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결론적으로 쓰면 장택군(長澤君) 세은공의 아들 장훙군(長興君) 분공의 시호는 충정공(忠靖公), 호는 만취정(晩翠亭)인데, 고려조에서 약관의 나이에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대 전한,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으면서 우왕이 이성계 일파에 의해 물러날 때 이를 저지하려다 섬으로 유배되었고, 공민왕 2년(1390년)에 보궐되어 충의배문하시중(忠義拜門下侍中)을 거쳐 보사공신(保社功臣)에 녹선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천운이 조선으로 옮기매 벼슬을 버리고 송도(松都, 개성) 흥국사(興國寺)에서 은둔하며 논도경방(論道經方)한 지 수년에 여러번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公年二七'(태조 3년)에 전라남도 장흥군 억부산(億夫山) 아래 도림촌(桃林村)에 만취정(晩翠亭)을 지어 은거하시다가 태종대 1408년(무자년)에 향년 76세로 졸하니, 개성 남문 밖 야자교상(也字橋上)에 탄허비(誕墟碑)를 세워 '충신임공분지비(忠臣林公蕡之碑)'라 새겼고, 서원을 흥국사 터에 세우고 액(額)을 사(賜)하였다. 

 

이후 세종 14년(1432년)에 정경(正卿)을 증하고 장흥군에 봉하니, 이후 후손들이 평택임씨에서 장흥임씨로 분관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은공 또한 을축년(1385년)에 졸한 것으로 밝혀진 바 생시를 추정하면 13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중요하게 유념해야 할 것은 생졸연대가 충정공계 언수공(彦脩公)은 1294~1384년, 제미공(齊味公)은 1315~1388년, 맹양공(孟陽公)은 1332~1388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맹양공의 여러 아들 중에 등재된 우리 세은공(1310~1385년), 분공(1333~1408)을 계대하면 도저히 맞지가 않는다. 

 

여기서 일부는 위 계대에 근접하려고 세은공(1352~1385년)은 33세 졸, 분공(1370~1408년)은 38세 졸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는 무리한 해석으로 보여지며, 또한 인터넷 자료 등에 분공이 1446년 졸로 나오니 이 또한 우리 족보상에 분공이 76세로 졸한 정황이 있다. 그러니 누군가가 여기에 억지로 맞추고자 이리 고쳐서 전해지는 것으로 모두 오류이다. 

 

그리고 우리 족보상에 분공 이하 이조(頤祖), 득이조(得荑祖), 우소조(雨所祖), 중경조(重敬祖) 등은 생졸연대가 미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이하 귀지조(貴枝祖, 1435~1508), 장춘조(長春祖, 1456~1529), 덕원조(德元祖, 15000~1565), 용개조(用漑祖, 1526~1599), 충국조(忠國祖, 1556~1667), 식조(植祖, 1586~1666), 종하조(宗厦祖, 1617~1682) 등은 생졸연대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귀지공에 관한 문헌 중 세조 13년(1467년) 의주 군관으로 계신 것이 기록으로 전한다. 이분들의 생시 연대를 토대로 위로 거슬러 추정하여도 분공의 생년대는 1333년(대수별 25.5년)이 더욱 1370년(대수별 16.2년)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산정된다. 

 

여기까지 나름대로의 결론을 가지고 2007년 3월 12일 충주에 있는 전객령 판서공파 종친회 사무실에서 규상, 희상, 병철, 병태, 종식, 원규(元圭), 성규(충주), 인규(서울), 병용, 성배, 오상(문경), 종식, 국상님들과 회합을 가졌다. 여기서 전객령계 판서공파 임병구 회장의 설명회를 듣고, 우리는 전객령파에서 애지중지하는 최초 필서 족보의 전체를 놓고 해석해 보았으며, 세춘공(世春公)이 기재된 충주경씨(忠州景氏) 족보 일부를 보았다. 

 

이때까지 홀로 주장하던 원규(元圭)님의 주장과 자료들을 보면서 새삼 세춘공과 세은공은 한 형제가 맞다는 결론을 가지게 되었으며, 필사본에도 형제로 기재되어 있고 위의 생졸연대도 앞뒤가 맞으니 모이신 모든 분들이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필사본에서 새로운 것은 세춘, 세추(世秋), 세하(世夏), 세창(世昌), 세은 등 다섯 분은 형제로 기록되어 있으나 세익, 세규 두 분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니 후인들의 새로운 논란의 촛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세익, 세규 두 분은 평택임씨 충정공계 정언군파와 정평군파로 편제되어 있다. 

 

물론 우리 선조님들이 족보를 우격다짐으로 하셨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적인 정보 부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우리 역사적 사건인 무진사화도 그분들은 몰랐다는 것이 조사하면서 분명해졌다. 그 예로 충정공계의 제미공과 맹양공의 졸년대가 잘못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역사책에도 나와 있는 제미공과 맹양공의 졸년대는 1388년(무진년)이 맞지만, 우리 족보에는 제미공이 1395년, 맹양공이 1372년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 이는 우리 족보가 언수공을 1세조로 추정한 시기가 1875년 호남 쪽에서 최초 기록한 조선시대이니 그 시대의 정사류로는 그 상황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고, 요즘 시대 누구나가 볼 수 있는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 등을 그 시대 국가 춘추관의 서고에 보관된 것을 함부로 접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한 예로 1920년대 발행한 조선씨족통보 103페이지에 장흥임씨는 팔급(八及) 후손 윤유(允儒)와 아들 평장사 이(頤)라고 현재 세보와 달리 기록되어 있다. 영남 쪽에서 최초 기록은 1958년 5번째 편찬부터 기록되었고, 영호남이 합보한 1976년부터 충정공 언수조를 1세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팔급조가 우리 땅에 동도한 시기가 800년대 통일신라시대이고, 최초로 족보를 편찬한 시기가 1700년대 조선 중기이니 수백년 동안의 역사가 구전으로 전해짐으로써 그 시대에는 계대조차 정립할 수가 없어서 대부분의 문중에서 고려 말 세춘공이나 언수공 계대를 1세로 편제하고 있다. 근자에 이르러서는 모든 문물이 왕래하고 모든 자료를 입수할 수 있어서 팔급조에서부터 어느 정도 계대가 정립되었고, 요 근자에 이르러서는 더 나아가 임씨 득성조인 고대 중국의 은나라 비간공(比干公)까지 고증이 되어 있다. 이렇게 최근 들어 밝혀지는 것도 조선시대에는 정황상 엄두도 못 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 문중의 최초보인 을유보(1765년, 영조)는 영호남 합보로 분공이 1세조시고, 2회 1821년에는 영남과 호남 공히 분공이 1세조이시나 영호남이 각자 편찬하였으며, 상계(팔급조~분공)를 달리하고 있었다. 이후 영호남은 각각 족보를 간행하여 왔으며, 호남에서는 1875년부터 언수조를 1세로 하였고, 영남에서는 3회와 4회는 분공이었으나 5회인 무술보(1958년)부터 언수조를 1세로 하여 왔다. 이때 아마 대동회나 호남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추정된다.  

 

그리고, 1976년 200년만에 영호남이 합보하면서 언수조를 1세로 하였다. 언수조를 1세로 최초 기록한 1875년 그 당시 호남 쪽은 언수조의 후손(성미, 견미조)들이 많이 있던 곳으로 우리 선조님들이 분공의 상계를 찾던 중에 시대가 비슷한 곳에서 아랫대가 끊어진 충정공계 제미, 맹양조를 발견하고 거기에다 상계를 맞춤한 것이 아닌가 감히 가정하여 볼 뿐이다.

 

1회 족보부터 기록한 윤유(允儒), 적문(適文), 영무, 성밀 등의 조상님들이 몇 회 뒤에 설명도 없이 기록에서 탈락하였다가 또 뒤편에는 계보 없이 기록되다가 최근에는 분공의 형제분(회, 얼)이 있고, 그 아랫대(유-적문, 자중-균)에 등장하고 있는 등 예로부터 혼란이 많았다. 이렇게 지역, 종파별로 혼란스러움에서 보듯 문물의 왕래가 희박하고 자료 습득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선조님들께서 상계를 정립하려고 한 고충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아직도 많은 자료들을 조사해봐야 결론이 나겠지만 현재까지의 추정된 내용을 위와 같이 간추려 보았으니 이제 결론은 후손들에게 돌린다. 나의 의견으로는 이제까지 잘못 전해진 바깥의 자료(성씨보 등 책자 간행물)는 도움이 될 수 없을 것 같고, 내부 자료(우리 족보나 처가쪽 문중 족보)들을 더욱 세세히 살펴보는 것만이지 싶다. 

 

호남쪽에서 충정공계로 족보 편찬을 2007년에 완성하였고, 그간 그쪽도 나름대로 고충과 노고가 짐작되며, 추진하는 마음이 밝지 않았으려니 느껴지니 새삼 부끄러움을 가지는 바 호남쪽 또한 우리 일가임에는 변함이 없으니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면서 이 모두의 결론이 후손에게서 풀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일전에 서울 인규 종친과 호남이 인쇄하는 족보에 우리의 수단을 제출하여 상계를 묵인하여 주는 대신 현 상계문제의 내용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기고 족보 서문에 위 내용에 대한 연구를 더하여 후일 편찬하는 족보에서 바로잡아 줗 것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서문을 기록하고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를 족보에 페이지를 할애하여 인쇄하는 것이 어떨런지 하는 내용으로 문의 협의한 적이 있다. 이 또한 영남 쪽에서는 따로이 족보를 편찬하기로 하여 거절하였다. 호남 쪽은 시일이 촉박하여 인쇄에 착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문중도 인쇄를 준비 중에 세은공 이상의 상계가 문제가 되어 시일이 자꾸만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객령계도 세춘공 이상의 상계는 희윤공(喜胤公)으로 예전부터 전해 왔다. 장흥임씨 집안도 그리하였고..... 요근자에 추정 생졸년대로 하면 세춘공과 희윤공의 생졸이 100여년 차이가 난다. 하지만 더이상의 정황이 없어 그리 전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연(衍), 정(整), 완조(完祖)를 편제하는 것은 언수공의 비문을 보고 그리들 편제하는데, 그것을 그대로 세춘공, 세은공의 상계로 인정할지는 불분명하다. 

 

전객령계와 여러 경로로 상의한 결과 대부분 우리와 같이 희윤조를 쓰고 있으나 일부 몇 파에서는 충정공 상계와 같이 쓰더라. 희윤, 영, 정, 완조를 전객령계에서 쓴다면 장흥임씨 우리도 무리없이 쓰려고 한다. 현재까지는 별다른 정황이 없어 희윤공 이하 세은공으로 인쇄를 하였다. 

 

이제 예전 우리 선조님들께서 최초부터 편찬하였듯이 세은조, 분조를 1세로 하는 이 족보가 지난 수년간을 노심초사한 원규, 국상 종친과 여러 어른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이제 인쇄가 시작되었다. 이에 이 족보를 영구히 자손에게 전하게 되니 이는 선조의 은덕이며 하늘이 돕고 도와 오늘에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많은 무지한 자들로 인하여 호주제가 폐지된 작금에 민족은 아주 위험한 지경에 처하여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세상의 역사란 오래 지나면 희미해지기 쉽고 잃어버리기도 쉬운 것이니 족보를 굳세고 강개하게 이어나가는 후손들은 음으로 양으로 서로 도움이 있어 화목하며 창성할 것이나, 족보를 무시하는 후손들은 어쩔 수 없이 이 혼탁한 세파에 쉽사리 휩쓸려 힘들게 살 것이며, 결국엔 이름 없이 역사에서 사라짐이 필연이니라.

 

그러매 인정이 차츰 멀어져서 마침내는 길가는 사람처럼 보게 되니 그 선대를 상고하여 보면 한 근본 한 핏줄이었는데 어찌 후손이 어리석게도 지금의 후손이 어느 어른의 분파인 줄 알지 못하는 애달픈 현실 때문에 족보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선조를 생각하고 후손을 부끄럽지 않게 키우며 종족을 화목케 하여 임씨가문을 번창케 하리라.

 

거듭 말하노니 후일 뛰어난 자손이 나와서 실전된 우리 조상을 반석 위에 올려 주시고 연구하고 기술한 것을 참고하여 부끄럽지 않은 후손으로 혈족과 나라에 이바지하기를 심히 바라는 마음이다. 전국의 우리 장흥임문을 일체로 묶어 주기를 바라면서..... 서기 2008년 병섭 삼가 발문에 기록하노라.

 

장흥임씨(長興林氏) 23세손 종손(宗孫) 병섭(炳燮) 삼가 쓰다(謹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