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族譜)란 씨족(氏族)의 혈통(血統)과 자손(子孫)의 번창함을 파악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장흥보(長興譜)는 6회에 걸쳐 수보(修譜)를 하였으나 상계(上系)에 았어서는 바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1765년 을유보(乙酉譜)는 분조(蕡祖)를 1세로 하였고, 1821년 신사보(辛巳譜)는 분조를 1세로 하고 세은조(世殷祖)를 원조(遠祖)로 하고 있습니다. 1934년 갑술보(甲戌譜)는 팔급조(八及祖) 충절공(忠節公)을 1세로 하고 평택세춘(平澤世春), 울진(蔚珍), 예천(醴泉), 부안(扶安), 선산(善山), 조양(兆陽), 장흥(長興) 관(貫) 등 7관이 후갑자보(後甲子譜)로 수보하였으며, 이후 상계를 바로잡은 관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장흥관은 바로잡지 못하고 1958년 무술보(戊戌譜)와 1976년 병진보(丙辰譜), 그리고 1989년 기사보(己巳譜)까지 언수조(彦脩祖)를 1세로 하여 오던 중 1996년 병자년(丙子年)에 팽성임씨중앙회(彭城林氏中央會)가 발족하면서 상계분과연구위원회(上系分科硏究委員會)를 구성하여 잦은 토론으로 많은 발견을 하여 임씨(林氏) 상계 시정(是正) 내용을 중앙회 홈페이지에 탑재하였습니다.
그리고 평택임씨전객령공파(平澤林氏典客令公派)의 소장(所藏) 필사본(筆寫本)은 1594년(선조 27년) 임경업(林慶業) 장군(將軍) 등이 반역죄(反逆罪)로 몰려 수보를 못하고 1700년대 필사본을 근간으로 1802년 임술보(壬戌譜)를 처음 수보하였습니다.
참고문헌 임경업장군실기(林慶業將軍實記)와 장흥보, 갑술보, 삼송정중건기(三松亭重建記), 그리고 1917년 정사임영기조(丁巳林永祈祖) 기록 내용을 보면 '惟我先祖三松先生鴻山縣監貴枝乃長興君諱世殷之后(오로지 우리 선조 삼송선생 홍산현감 귀지공은 장흥군 세은조의 후손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임씨전기중기분적표(林氏前期中期分籍表) 기록 내용 등 모든 사료(史料)를 섭렵해보면 충정공(忠貞公) 언수조는 세은조의 상계가 될 수 없습니다.
1. 장흥보에서 언수조는 평택임씨 충정공(忠貞公) 완조(玩祖)의 후손이고, 충정공 비문(碑文)에 있듯이 1294~1384년이고, 장흥보-해남장흥보(海南長興譜)는 1914년 갑인보(甲寅譜)부터 언수조를 1세로 기록하였고, 장흥보-예천율현보(醴泉栗峴譜)는 1958년 무술보부터 언수조를 1세로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언수조를 희윤조(喜胤祖) 후손 세춘조(世春祖, 1275~1308년)의 윗대로 계대(系代)한 것은 자손으로서는 망발(妄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상계대표 참조). 삼송정중건기 1917년(丁巳), 임영기조(후갑자보) 세은조의 후손입니다.
2. 세춘조(世春祖)와 세춘조(世椿祖)는 같은 사람입니다. 1961년(辛丑) 충청남도 연기(燕岐)에서 대동보추진위원장(大同譜推進委員長) 임지수(林志洙)가 발행한 대동보 2권에 '一云世春(일운세춘)'으로 되어 있고, 주문(註文)에 '通訓大夫世子典客令兼禧官副使配淸州慶氏父工監侍郞綏墓高陽雙龍洞癸坐(통훈대부 세자 전객령 겸 희관부사 배 청주경씨 부 공감시랑 수 묘 고양 쌍룡동 계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청주경씨 세보(世譜)를 복사한 것입니다.
3. 제미후손(齊味後孫)으로 되어 있는데, 1996년(丙子) 팽성임씨회보(彭城林氏會報) 임행진(林行鎭) 112면에 제미, 맹양(孟陽) 부자(父子)가 참살(斬殺)되었다는 내용이 무진사화실록(戊辰士禍實錄)에 있고, 후손들을 찾지 못했는데 세은조가 그 뒤를 이었다는 것은 시대와 연대 계대상으로 맞지 않습니다.
4. 임씨초기중기분적표가 전객령파에서 나온 것을 세림장학회(世林奬學會)가 사용한 것인데, 여기에 보아도 세은조를 언수조로 붙인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5. 중앙회 홈페이지에 잘 정리되어 있는데 아직도 고치지 못하는 것은 지난날 잘못 전달되어온 집착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6. 분조의 사적(史蹟)을 짚어보면 '皇明洪武二十五年(황명홍무25년)'은 1392년(壬申) 밍(明)나라 홍우(洪武) 조정(중국 연대)를 썼습니다. 공양왕(恭讓王) 2년은 1390년(庚午)이고, 신우연대(辛禑年代)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윗대 왕실입니다. 태종(太宗) 무자졸(戊子卒)은 1408년 태종 8년이고 76세를 살았다면 1332년(壬申)인데, 이 연대가 세은조와 언수조의 연대가 근사(近似)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흥원사록(長興院司錄)에 '1501년~1556년 졸(卒)'로 기록된 것은 자손들이 무능한 소치로 생각됩니다. 장흥보에 생(生), 졸(卒), 사회활동 등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추후에 연구해 볼 필요성을 느낍니다.
상계정립표(上系整立表)에 충정공계와 전객령공계(상계 설명서 참조)는 금차(今次) 수보를 하기 위해 10여회 이상 회의를 가졌으나 모든 사료가 분명하게 규명되었는데도 일부에서는 호남측(湖南側)으로 갔으며, 일부는 지난 구보(舊譜)로 남아 있습니다. 이는 각종 통신상의 문제와 각종 사료 수집이 어려워 이러한 오류가 있었으나 밝혀진 모든 사료를 중심으로 장흥임씨(長興林氏)의 수보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세은조를 1세로 하는 과감한 시정(是正)으로 이번 기회에 후손을 위하여 수보에 착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수보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세은조와 언수조는 동일연대(同一年代)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언수조가 세은조의 증조(曾祖) 항렬(行列)로 상계되어 있는 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사료(史料)와 배척(排斥)되는 문제로 자손들에게 욕되는 망발로서 세은조를 1세로 하는 장흥보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급한 종사(宗事)로 결정되었습니다.
이후 비문 등에 언수조의 어떤 문헌기록이 나온다면 이는 우리 조상님들이 모르고 살아온 역사이자 사실이니 추후 모든 기록을 고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소조(雨所祖)와 중경조(重敬祖)의 설단지(設壇地)를 확장정지(擴張整地)하여 세은조, 분조, 이조(頤祖), 득이조(得荑祖), 우소조, 중경조 6위(位)의 설단과 설단지, 안내비를 세우고 세사봉행(歲祀奉行)하는 것이 자손들이 해야 할 의무로 봅니다. 이제 발견된 사료들을 바탕으로 수보하게 되었으니 조상님들도 안심하고 영면하시고 자손들도 지금껏 불안정한 심정으로 살아왔지만 이제 자신있게 활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양분된 족보를 갖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바른 족보로 합보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료를 제공하여 주신 전객령공파대종회(典客令公派大宗會)와 전객령파판서공종회(典客令派判書公大宗會) 임원 여러분, 그리고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협조하신 임원 여러분과 인쇄사 여러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2008년(戊子年) 장흥(長興) 후(後) 24세손 산척(山尺) 교정(校正) 겸 총무(總務) 원규(元圭) 삼가 발문을 쓰다(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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