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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당 창당 30주년의 추억 - 홍기표

林 山 2022. 1. 22. 14:21

2022년 1월 19일은 주대환, 노회찬 등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韓國社會主義勞動者黨, 약칭 한국노동당, 韓國勞動黨) 창당준비위원회(창준위) 결성 30주년이었다. 광화문의 모 중국집에서 조촐하게 열린 창준위 결성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자유기고가 홍기표는 '한국노동당 창당 30주년의 추억'이라는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에 게재했다. 홍기표의 글을 이해하려면 이 땅의 진보정당사를 대략이나마 알아야 한다.  

 

한국 정치사에서 최초의 진보정당은 1956년 11월 10일 조봉암(曺奉岩), 박기출, 김달호 등이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창당한 진보당(進步黨)이다. 진보당은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 대통령후보가 216만 표를 얻는 성공을 거두자 1958년 2월 이승만(李承晩) 독재정권은 조봉암 외 진보당 간부 7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하는 한편 진보당의 당 등록을 취소하였다. 1959년 이승만 독재정권이 조봉암을 처형하는 정치적 살인사건을 자행하면서 진보당은 와해되었다.

 

1960년 4ㆍ19 혁명을 계기로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 한국사회당(韓國社會黨) 등 진보정당들이 등장해 국회의원까지 배출했다. 그러나, 1961년 쿠데타 수괴 박정희(朴正熙, 창씨개명 이름, 다카키 마사오, 高木正雄)를 중심으로 한 5ㆍ16 군사반란으로 인해 해산되거나 지하조직으로 전환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진보정당 창당운동이 재점화되어 1988년 민중의당, 한겨레민주당, 1990년 민중당(民衆黨), 1992년 1월 19일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한국노동당, 韓國勞動黨) 창당준비위원회, 1997년 10월 국민승리21(國民勝利21), 1998년 청년진보당(靑年進步黨) 등이 생겨났다. 이 중 민중당은 1991년 지방선거에서 13.3%를 득표, 진보정당사에 큰 획을 그었다. 하지만, 1992년 민중당은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해 해산되고 말았다.

 

국민승리21의 주요 세력인 민중정치연합(대표 노회찬)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던 민주노총, 민족민주운동 계열의 전국연합은 새로운 진보정당 창당을 모색했다. 하지만 전국연합은 1997년 대선을 거치면서 진보정당 창당 운동 대열에서 이탈했다. 민중정치연합과 민노총은 2000년 1월 30일 역사적인 민주노동당(대표 권영길, 부대표 노회찬)을 창당했다. 민주노동당은 2002년 6ㆍ13 지방선거에서 정당득표율 8.13%로 자민련을 제치고 제3당으로 뛰어올랐으며, 2004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10석을 차지하며 마침내 국회 진출을 이루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자주파의 '일심회 사건', 당직 부정선거, 친북 & 종북주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분당되고 말았다. 2008년 3월 16일 평등파와 사민주의 계열은 진보신당을 창당했고, 자주파는 민주노동당을 장악했다. 청년진보당-사회당-한국사회당은 다시 사회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진보신당과 합당했다. 2011년 자주파의 민주노동당과 유시민 등 구 열린우리당의 친노무현 계열의 국민참여당, 심상정과 조승수, 노회찬 등 진보신당 탈당파의 새진보통합연대가 연합하여 통합진보당을 창당했으나 '이석기 사건'으로 해산됐다.  

 

2012년 10월 진보정의당 창당을 주도했던 국민참여당 출신의 참여당계, 자주파의 일부인 인천연합계, 진보신당을 탈당한 평등파 세력인 새진보통합연대계가 주축이 되어 정의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 생태주의 정당인 녹색당이 창당되었다. 2013년 7월 21일 진보신당은 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2016년에는 경기동부연합 계열이 민중연합당이 창당했고, 2017년에는 울산연합 계열이 새민중정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 민중연합당과 새민중정당은 민중당으로 합당한 뒤 다시 당명을 진보당으로 바꿨다. 같은 해 청년당의 후신으로 신좌파를 표방한 미래당이 창당됐으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득표수 미달로 등록이 취소되었다. 이후 정의당을 제외한 진보정당들은 지리멸렬하고 있는 상태다. 

 

2022년 1월 19일은 한국노동당 창당 30주년이었다. 당시 주대환은 노회찬 등과 함께 한국노동당 창당을 추진하면서 창당준비위원장(창준위)을 맡았다. 한국노동당 창준위는 김문수, 이우재가 주도하던 민중당에 합류하여 통합민중당이 되었으나 1992년 총선에서 참패한 뒤 자동해산되었다. 

 

1995년 주대환은 노회찬과 개혁신당에 입당해서 창원 을 지역위원장을 맡았다. 2000년 주대환은 노회찬과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마산갑 지역위원장을 맡았다. 2004년 6월 주대환은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이후 주대환은 뚜렷한 행적이 없다. 

 

노회찬은 17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안기부 X파일', 일명 '삼성 X파일' 을 공개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노회찬은 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노원구 병 선거구에 통합진보당 후보로 출마하여 57%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삼성 X파일' 관련 상고심에서 징역 4월(집행유예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형을 확정해 의원직을 상실했다. 심상정과 함께 정의당을 창당한 노회찬은 20대 총선에서 창원 성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회찬은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의혹을 받던 중, 2018년 7월 23일 동생 부부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이 땅의 상당히 유의미했고, 잘하면 한국 정치사를 다시 쓸 수도 있었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홍기표의 글은 여러 가지로 생각에 잠기게 한다. 노회찬, 주대환, 홍기표와는 함께 활동하면서 몸으로 부대끼곤 했던 민주노동당의 동지였다. 주대환이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그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은 바 있다. 노회찬 의원 부부가 충주를 방문했을 때 바쁜 일정으로 식사 한끼 못하고 헤어진 것이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다음은 홍기표의 글 '한국노동당 창당 30주년의 추억' 전문이다. <林 山>  

 

자유기고가 홍기표

  한국노동당 창당 30주년의 추억 - 홍기표

 

1992년 1월 19일, 한국노동당 창당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번 30주년 기념식에는 광화문의 모 중국집에서 6명이 조촐하게 모였다.  

 

재미있었던 것은 전체 참석자의 2/3가 30년 전 한국노동당 창당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도 1992년 초반에는 주사파였던 시절이라 한국노동당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한국노동당은 그저 '말'지에서 기사로나 접하던 

'남의 동네'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노동당 창당 30주년 기념식의 하이라이트는 H 모 선생의 '반공강연'이었다. 짜장면 토크 형식을 빌려 자유롭게 진행된 강연에서 강사는 자신이 1980년대 말 소비에트연방(소련)에 살면서 직접 겪었던, '배급표를 받는 생활'의 생생한 경험을 구수한 입담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해 주었다.

 

우리 세대 중에는 돈 대신 '전표'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한 번 쯤 '이상'이라고 생각해 본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사실 화폐를 완전히 폐기하려면 배급표 조차 있으면 안된다. 

 

전표건 배급표건 어차피 '증권화'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화폐의 시작도 어차피 금 교환권이니까 말이다. 화폐대신 배급표를 쓴다는 것은 결국 방법론 차원에서 '고급 증권화'를 포기하고 '저질 증권화'를 유지한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따라서 결국 사회의 복잡화에 따른 화폐의 다른 기능들은 타국 화폐, 다시 말해서 자국 화폐가 아닌 달러로 대신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당시에도 '소련의 부유층을 아무 집이나 털면 장롱에서 미화 2000달러(238만5,000원) 정도는 무조건 나온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자본 축적 기능을 달러가 대신수행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달나라 얘기인가?'라고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주제는 거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관심 아이템이라서 배급제 사회를 실제로 겪고 온 경험자로부터 실감나게 전해진 생생한 간증 시간이었다. 

 

지금은 다 사라져 그 유골도 찾기 힘든 정당, 한국노동당 창당 30주년 기념으로 중국집 '반공교육'을 받으며, 나는 '우리의 생각이 언제 어디까지 계속 변하게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평생 똑같은 생각의 감옥에서 장기수로 지내는 것보다는 과감한 탈옥수가 되어 세계를 유람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뭔가 변화가 생기면 꼭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이 끝 난 것인지? 안 끝난 것인지? 명확한 개념 규정없이 '모호성'을 유지하는 바람에 얻어진 결과는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조기 몰락이라고 본다.

 

피티독재 포기, 전위정당 포기, 폭력혁명 포기를 공식화한 이 문서가 상당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 이유다.

 

*뱀발 - 기념식이니 강연회니 하는 용어는 실제 그런 행사치레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갖다붙인 말이다.

 

글쓴이 홍기표(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