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학생들이 모여서 사회적으로 옳은 일을 위해 싸우면 어떻게 될까? 카이 토머스(Cai Thomas)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체인지 더 네임(Change the Name)'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카이 토머스는 흑인 청소년들의 정체성과 자기 결정, 사회적 위치 등에 천착(穿鑿)하며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다. 토머스 감독은 '넥스트 독(NeXt Doc)'과 '시스터스 인 시네마(Sisters in Cinema)'의 회원이기도 하다. '넥스트 독'은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논픽션 영화 제작자들이 함께 다양한 배경의 신인 논픽션 스토리 텔러를 모아 기술을 공유하는 단체다. '시스터스 인 시네마'는 1997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미디어 제작자에게 온라인 자료 제공을 위해 설립되었다.
'Change the Name'은 '이름 바꾸기' 정도의 뜻이 되겠다. 무슨 이름을 바꾸려는 것일까? 카이 토머스 감독의 카메라 렌즈를 따라가 보자. 일리노이 주 시카고의 노스 론데일(North Lawndale)에는 더글러스 공원(Douglas Park)이 있다. 아니, 있었다. 노스 론데일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더글러스(Douglas)는 누구인가? 바로 미국 제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최대 정적 스티븐 아널드 더글러스(Stephen Arnold Douglas)다. 남북전쟁 당시 그는 미국 상원의원이었다. 그는 1858년에 노예 폐지론자인 링컨에 반대하여 노예 제도 확대론을 지지하는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아내는 적어도 100명의 노예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노예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할 수 있는 주의 권리를 지지함으로써 사실상 이를 지지한 것으로 간주된다.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는 빌리지 리더쉽 아카데미(Village Leadership Academy, VLA)라는 유치원부터 8학년제 사회 정의 초등학교가 있다. VLA는 마을사관학교, 마을지도자학교 정도의 뜻이 되겠다. VLA 학생 구성은 흑인(Black) 73%, 히스패닉(Hispanic) 21%, 백인(White) 3%, 아시아계 또는 태평양 섬 출신(Asian or Pacific Islander) 2%, 하와이 원주민 등 기타 1%로 이루어져 있다. 통계에서 보듯이 VLA는 흑인 학생들이 거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학교다. 지역 사회도 흑인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VLA는 세계사 및 지리 탐구,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인식, 비판적 사고 개발, 사회적 의사 결정 등을 포함한 교수 및 학습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도입한 학교다. VLA에서는 학생들이 나이에 맞는 방식으로 주변 세계를 이해하고 영향을 미치도록 권장된다. VLA의 목표는 높은 수준의 문화적 책임 교육을 제공하고, 학생과 가족이 지역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면서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학생들을 미래의 조국과 세계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데 있다.
VLA의 교육자들과 학생 활동가들은 노예 소유주이자 노예제 폐지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스티븐 더글러스가 공원의 이름으로 길이 기억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VLA 5학년 학생들은 '풀뿌리 운동(Grassroots Campaign)'에 따라 스티븐 더글러스 공원을 노예 해방 운동가 애나 머리(Anna Murray) &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 공원으로 개명하기 위해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한다.
프레더릭 더글러스(1818~1895)는 미국의 노예제 폐지론자, 신문 발행인, 강연자, 정치가이자 사회 개혁가다. 그는 또한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기도 했다. 자신도 노예 출신이었던 그는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신(神) 앞에 평등하다는 철학의 소유자였다. 그는 모든 인류의 형제애를 옹호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당시 가장 뛰어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강연자와 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지식은 사람을 노예가 될 수 없게 만든다.(Knowledge makes a man unfit to be a slave)', '백인의 행복은 흑인의 고통에 의해 추구되어서는 안된다.(The white man's happiness cannot be purchased by the black man's misery.)', '고통 없는 진보는 없다.(Without a struggle, there can be no progress.)', '권력은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Power concedes nothing without a demand. It never did and it never will.)',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비로소 내가 노예임을 알게 되었다.(I didn't know I was a slave until I found out I couldn't do the things I wanted.)' 등의 명언을 남겼다.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불굴의 의지로 노예 해방과 여성 참정권 운동을 펼쳤던 까닭에 '애너코스티아의 사자(The Lion of Anacostia)'라는 별명을 얻었다. 애너코스티아(Anacostia)는 워싱턴 D.C. 남동부 애너코스티아 강 동쪽에 자리잡은 유서 깊은 지역이다. 줄리아 마체시(Julia Marchesi) 감독의 '프레더릭 더글러스: 인 파이브 스피치스(Frederick Douglass: In Five Speeches, 2022)'는 그에 관한 전기 영화다.
애나 머리 더글러스(Anna Murray Douglass, 1813~1882)는 미국의 노예 해방 운동가이다. 애나 머리는 노예 해방을 위한 비공식 네트워크인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Underground Railroad, UR)'의 회원이었다. '지하철도(UR)'는 19세기 초에서 중반에 걸쳐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을 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나 캐나다까지 갈 수 있도록 비밀스런 탈출 경로와 안전 가옥을 제공하였다. 한 추정에 따르면 1850년까지 약 10만 명의 노예가 UR을 통해서 자유를 얻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도 애나 머리의 도움으로 노예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머리는 그에게 여비를 마련해 주고 변장을 시켜서 자유주로 탈출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인연으로 머리는 1838년 프레더릭 더글러스와 결혼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뉴욕 주 로체스터(Rochester)에 있는 집에서 UR을 운영했다.
2017년 VLA 5학년 학생들은 흑인이 지배적인 지역에서 가장 큰 공원이 유명한 노예 폐지론자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노예 제도 옹호자 중 한 명을 기리는 것을 알게 된 후 풀뿌리 운동을 시작한다. 학생들은 1인 시위나 서명 운동 등을 통해서 공원 이름을 바꾸는 캠페인을 펼친다. 공원 이름을 바꿔달라는 청원에는 1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참여한다.
풀뿌리 운동은 지역 사회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정치, 경제, 사회적 운동이다. 풀뿌리 운동은 민주주의 나라에서 매우 중요하다. 풀뿌리 운동이 없는 민주주의는 허상일 뿐이다.
학생들은 공원 이름 개명 청원을 시카고 공원 지구를 감독하는 이사회에 전달한다. 하지만, 관료적인 이사회는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을 딴 공원의 명칭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이유로 개명 청원을 부결시킨다.
이사회의 부결에도 학생들은 좌절하지 않고 시카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공원 이름 개명 운동의 정당성을 알려 나간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시간은 학생들 편이다. 시카고 시민들도 점점 풀뿌리 운동에 관심을 갖고 동조하기 시작한다.
풀뿌리 운동이 시작된 후 3년 동안 학생들은 공원 이름이 잘못됐다는 인식을 높이기 위해 동네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주민들을 만난다. 또한, 주민들에게 스티븐 더글러스와 프레더릭 더글러스, 애나 머리의 역사에 대해 가르치는 정치 교육 활동도 시작한다.
학생들은 카운티 위원들로부터 공원 개명 운동을 지지하는 편지를 모은다. 공원 감독관을 지낸 이후 공원 이름을 바꾸려 애쓰던 마이클 스콧 주니어(Michael Scott Jr. 24)도 풀뿌리 운동에 참여한다. 한 익명의 예술가는 시카고 시가 역사적 잘못을 바로잡기를 기다리는 데 지쳐서 공원의 모든 표지판 'Douglas'에 'S'자를 추가로 그려넣는다. 'Douglas'는 스티븐, 'Douglass'는 프레더릭과 애나의 성(姓)이기 때문이다.
VLA 5학년 학생들이 시작한 풀뿌리 운동은 시카고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마침내 결실을 거둔다. 시카고 공원 지구 감독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공원 이름 개명 절차의 마지막 단계로 새 이름을 승인하기로 가결한다. 위원회는 새 이름이 정해지기 전에 공원 이름을 삭제한다. 새로운 이름을 만들기 위해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 공원에서 삭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위원회의 결정은 향후 다른 공원의 이름을 바꾸는 선례가 될 것이다.
공원의 새 이름은 프레더릭과 애나 머리 더글러스 공원(Frederick And Anna Murray Douglass Park), 약칭 더글러스 공원(Douglass Park)이다. 'Douglas'에 's'자 한 글자를 더 넣어 'Douglass'로 바꾸는 데 3년이란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학생 풀뿌리 운동 조직자 가운데 한 명인 라니야 토머스(Raniya Thomas)는 "공원이 1869년에 설립된 이래 처음으로 노예 해방 및 자유에 뿌리를 둔 유산을 반영할 것입니다. 공원은 더이상 노예 소유자나 백인 우월주의자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학생인 자히르 음벵게(Zahir Mbengue)는 "여성의 업적과 역사적 공헌은 남성만큼 인정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많은 사회 및 정치 운동의 기반이 된 흑인 여성에게 특히 해당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체인지 더 네임'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명언을 떠오르게 하는 영화다. 영화가 끝나면 풀뿌리 운동으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공원의 이름을 바꾼 VLA 5학년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내게 된다. '체인지 더 네임'은 어른들이 어린 학생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은 영화다.
VLA야말로 진정한 학교, 학교다운 학교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시대 잔재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VLA 같은 학교와 학생들이 솔직히 부럽다.
2022. 10. 3. 林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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