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2023 EIDF(EBS 국제 다큐 영화제) 개막 첫날 EBS에서는 아르메니아 출신 하콥 멜코냔(Hakob Melkonyan, 1984~) 감독의 'The War Diary(전쟁 일기)'를 내보냈다. '전쟁 일기'는 프랑스와 아르메니아 합작 영화로 러닝 타임은 1시간 25분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전쟁 일기'를 첫 방영작으로 선택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時宜適切)했다. 왜냐면 '전쟁 일기'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에 걸친 조부(祖父)의 전투 현장을 찾아가며 4개 나라 사이의 얽히고 설킨 역사와 현실을 대면하는 동시대의 로드 무비(contemporary road movie)이기 때문이다.
하콥 멜코냔은 아르메니아 예레반 영화 연극 대학에서 공부한 뒤 독일 유학을 떠나 뮌헨 영화 텔레비전 대학에서 공부했다. 2009년 조국을 떠난 멜코냔은 현재 프랑스와 아르메니아를 오가며 살고 있다. 2015년 그는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Armenian Genocide)에 관한 첫 번째 장편 영화 'The Tree(나무)'의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했다. 'The Tree'는 2016년 몬트리올 뷔 뒤 몽드(Vues Du Monde)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영화 '전쟁 일기'는 아르메니아 국립 기록보관소(National Archives of Armenia, NAA)에서 시작된다. 감독 멜코냔은 NAA에서 한 권의 특별한 문서를 발견한다. NAA 직원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은 바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Armed Forces of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Soviet Armed Forces, Red Army, 蘇聯軍) 제89사단 문서였다. 멜코냔의 조부가 쓴 '전쟁 일기'는 89사단 문서에 들어 있었다.
'전쟁 일기'는 감독의 조부가 소련군 89사단 소속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싸웠던 전투 현장에서 남긴 기록이었다. 그동안 조부는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89사단 문서에는 조부가 전장에서 전사했다는 사망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 그동안 89사단 문서는 러시아에 가 있었고, 그래서 조부는 행방불명으로 처리됐던 것이다.
조부의 일기장은 멜코냔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다. 일기장에는 조부와 함께 싸웠던 전우들에 대한 진한 형제애와 동지애가 적혀 있었다. 멜코냔은 일기를 통해서 옛날 소련(蘇聯) 시절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은 왜 이 모든 나라들이 분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까?'라는 강한 의문을 품는다.
의문을 품은 채 멜코냔은 조부가 몸담았던 89사단 주둔지와 전투 현장을 따라가 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아르메니아에서 조지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크림 반도를 가로지르며 2차 세계대전 참전 생존자나 후손을 만나 그들의 전쟁 관련 기억을 듣기 위한 로드 트립(Road Trip)을 떠난다. 멜코냔의 로드 트립은 조부에 대한 추모 여정이기도 하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여정이다.
1942년 8월 8일 조부의 일기에는 '우리는 가축 운송차에 실려 갔다. 트빌리시에서 다른 부대원들이 기차에 탔다. 우리의 형제들이었다.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압하스인들.....'이라고 쓰여 있었다. 멜코냔은 조부의 흔적을 따라 아르메니아 북서부 기우므리(규므리)에서 기차를 타고 현재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로 떠난다.
2020년 9월 27일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발발했다. 영토 분쟁 중인 카라바흐 스테파나케르트에서는 포탄이 작렬하고 사격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여정에서 만난 한 노인은 "소련은 여러 민족을 통합했다. 16개의 사회주의 공화국이 있었다. 그때는 우리 모두가 형제였다."고 당시의 시절을 회상한다.
총소리가 들리는 언덕에서 만난 한 소년은 "나는 전쟁 중에 태어났다. 그런데, 14살이 되도록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내 아버지는 지금 전장에 나가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한 노파는 비통한 어조로 "천지가 뒤집히는 줄 알았다.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를 공격하고 있다. TV에서 젊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죽는 걸 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자식들이 나에게 무기만 준다면 내가 우리 군인들 대신 나가서 싸우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말한다.
조부의 '전쟁 일기'는 계속된다. '1943년 11월 타만 반도를 빼앗긴 뒤 독일군은 크림 반도의 방어를 강화하는 중이다. 아직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지만 모두가 크림 반도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라고.....
2022년 4월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이다. 마리우폴 포위전을 감행한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시내 곳곳에 포연이 자욱하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달리는 차 안에서 기자는 "이건 악몽이다! 거리에서 민간인들을 쏘고 있다. 러시아군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쏘고 있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보도한다.
멜코냔은 택시를 타고 케르치 다리를 건넌다. 운전 기사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서로 더불어 살아가고 싶은데, 꼭 전쟁을 하려 드는 미치광이들이 있다. 과연 언제 그렇게 될까?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다시 다같이 평화롭게 사는 날 말이다."라고 한탄한다. 운전 기사의 소망처럼 과연 여러 이웃 나라들이 형제처럼 지내는 날이 오게 될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 노파의 추상 같은 질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노파는 "푸틴은 왜 자꾸 전쟁을 벌이는가? 땅이 부족해서인가? 그렇게 넓은 땅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족한가? 권력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그렇게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라고 묻는다. 노파의 말은 사실 감독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 물음에는 러시아 최고 권력자 블라디미르 푸틴이 직접 답해야 한다.
소련이 붕괴한 뒤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는 갈등과 전쟁으로 갈가리 찢어졌다. 멜코냔은 옛 소련군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목격한 갈등과 분쟁으로 얼룩진 동유럽의 답답한 현실을 관객들에게 가감없이 그대로 보여 준다.
과거 형제의 나라에서 오늘날 원수의 나라가 된 동유럽의 비극적인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느껴진다. 감독의 심정은 한없이 답답할 것이다. 관객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오늘날 동유럽이 처한 갈등과 분쟁에 대한 해결책을 쉽사리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23. 8. 21. 林 山
#TheWarDiary #전쟁일기 #EIDF #하콥멜코냔 #HakobMelkon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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