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지방에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岩寺)의 홍매화도 피었을까? 벌써 꽤 오래전 봄의 일이다. 송광사에서 조계산을 넘어서 선암사로 내려왔을 때, 경내를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던 홍매화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불현듯 선암사 홍매화의 향연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토요일 진료를 마치자마자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는 조계산으로 떠나는 여행길에 오른다. 꽃을 보러 가는데 내 마음이 이렇게 설레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중부와 경부, 호남고속도로를 차례로 달려 전남 순천시 승주톨게이트(선암사톨게이트)를 빠져나오니 저녁 8시가 넘었다. 저녁때가 지난지라 톨게이트 여직원에게 근처의 마땅한 식당을 물으니 선암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쌍암기사식당을 알려준다. 그녀가 일러준 대로 승주읍 서평리 쌍암기사식당에 들러 저녁식사를 하고 가기로 한다. 식단은 오천원짜리 백반 단 한 가지다. 아주머니가 식탁을 푸짐하면서도 정갈하게 차린다. 밥맛도 좋고 반찬으로 나온 돼지고기에 묵은 김치를 넣어서 요리한 불고기, 생선구이, 젓갈도 입맛에 맞아서 아주 마음에 드는 식당이다. 다음에 또 이곳으로 여행을 오게 되면 이 집에서 식사를 해야겠다. 쌍암은 승주의 옛이름으로 지금의 순천시 승주읍은 1895년(고종 23년)까지는 순천군 쌍암면이었다. 1949년에 순천군과 승주군이 분리되면서 승주군 쌍암면이 되고, 1985년에는 쌍암면이 승주읍으로 승격되었다가, 1995년 순천과 승주가 통합되면서 순천시 승주읍으로 바뀌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서 어둠속에 잠겨 있는 상사호를 지난다. 상사호는 승주읍 신학리와 순천시 상사면 용계리 사이에 건설된 상사조절지댐으로 인해서 생긴 호수다. 유역면적 135㎢, 총 저수량 250만톤인 상사호는 순천과 여수, 광양 등 전남 동부권에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있으며, 수력발전으로 연간 수백만㎾의 전기도 생산하고 있다. 또한 순천 등 전남 동부권 지역의 용수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송광면 곡천에서 조계산을 가로질러 승주읍 유평에 이르는 길이 11.5㎞의 도수터널을 뚫어서 주암댐의 물을 상사조절지댐으로 보내고 있다. 상사호 호반도로에는 오래 묵은 벚나무가 많이 보인다. 4월이 되어 벚꽃이 일제히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면 상사호는 일순간에 환상적인 호수로 변하게 될 것이다.
선암사 사하촌인 죽학리 괴목마을에 도착하여 식당과 민박을 겸한 새조계산장에 들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식당에서 홍어삼합에 곡차를 한 잔 하기로 한다. 보살님이 섬섬옥수로 따라주는 곡차 한 잔에 조계산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밤이 이슥해서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다.
*조계산 지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를 마친 다음 선암사골을 거슬러 선암사로 향한다. 하늘은 맑고 날씨도 화창하다. 북동쪽으로 조계산 장군봉(將軍峰, 884m)이 선암사골을 굽어보고 있다. 오늘은 선암사를 둘러보고 운수암-냉골-장군봉-장밭골 몬당-장밭골 삼거리-연산 사거리-연산봉-송광굴목재-천자암봉-천자암-운구재-송광사(松廣寺)로 이어지는 산길을 걸을 생각이다.
조계산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분쟁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했던 산이다.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麗順事件) 당시 14연대의 김지회 중위와 지창수 상사는 제주도민들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일으킨 4.3민중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동조하는 군인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김지회 반군은 여수와 순천을 중심으로 친일파의 처단과 조국통일의 기치를 내걸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미군과 정부군에 쫓긴 김지회 반군은 나중에 조계산과 백운산,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현상 총사령관이 지휘하는 남부군(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의 핵심이 되었다. 조계산은 또 조정래의 장편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염상진'과 '하대치' 등이 활약하던 주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나는 그 소설을 오래전에 읽었지만 '외서댁'이나 '벌교 꼬막'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전북 장수의 백두대간 영취산(靈鷲山, 1,075.6m)에서 갈라진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은 장안산(長安山, 1,237m)과 수분현(水分峴, 530m)을 지나 팔공산(八公山, 1,151m), 성수산(聖壽山, 1,059m), 마이산(馬耳山, 667m), 부귀산(富貴山, 806m)을 거쳐 65km를 달려서 전북 무주의 주화산(珠華山, 565m)에 이르러 다시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으로 갈라진다. 호남정맥은 주화산에서 남서쪽으로 전북 정읍의 내장산(內藏山, 763.2m)을 지나 전남 담양의 추월산(秋月山, 731m), 전북 순창의 강천산(剛天山, 584m)에 이른 다음, 다시 남쪽으로 광주의 무등산(無等山, 1186.8m)을 거쳐 전남 장흥과 보성의 경계를 이루는 제암산(帝巖山, 807m), 사자산(獅子山, 666m)까지 뻗어내린 뒤 북동쪽으로 방향을 튼다. 사자산에서 북동쪽으로 보성의 일림산(664.2m), 활성산(465m), 봉화산(475m), 방장산(535.9m), 주월산(557m), 존제산(704m), 순천의 백이산(伯夷山, 584.3m)을 지나온 호남정맥은 북쪽으로 머리를 돌려 고동산(709.5m)을 거쳐 조계산(曹溪山, 장군봉, 884.3m)에 이른다.
조계산에서 이 정맥은 접치(230m)를 건너뛰어 오성산(五聖山, 606m), 유치산(酉峙山, 530m), 희아산(戱娥山, 764m), 문유산(文遊山, 687.6m), 바랑산(618.9m), 농암산(476.5m), 갓꼬리봉(689m), 갓머리봉(708m)을 거쳐 순천과 광양의 경계를 이루는 깃대봉(858.2m)과 월출봉(月出峰, 768.9m)을 지나 광양으로 넘어간다. 섬진강을 휘휘 돌아서 광양으로 들어온 호남정맥은 형제봉(兄弟峰, 등주리봉, 861.3m)과 도솔봉(兜率峰, 1123.4m)을 지나 백운산(白雲山, 1217.8m)에 이른 다음 매봉(865.3m), 갈미봉(520m), 쫓비산(537m), 불암산(佛巖山, 431.3m), 국사봉(國師峰, 445.2m), 천왕산(天王山, 225.2m), 망덕산(望德山, 197.2m)을 거쳐 섬진강 하구와 광양만이 만나는 외망포구에서 약 462km에 이르는 대장정을 마친다.
호남정맥의 거의 끝부분에 자리잡은 조계산은 전남 순천시 송광면과 승주읍, 주암면에 걸쳐 있으며, 남쪽 산자락에는 외서면과 낙안면, 상사면을 품고 있다. 옛날에는 조계산을 송광산(松廣山)이라고 하였다. 구전설화에 의하면 이 산은 장차 ‘십팔공(十八公)이 배출되어 불법(佛法)을 널리(廣)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송(松)’자를 ‘십팔공’으로 파자(破字)하고, ‘광(廣)’자를 불법광포(佛法廣布)의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송광사(松廣寺)라는 절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다. 송광산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김영수(金映遂)는 이 산이 예로부터 '솔갱이(소나무의 방언, 松)'가 우거져 있었으므로 지방사람들이 ‘솔메’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송광의 ‘광(廣)’은 본래 산등성이나 언덕을 의미하는 ‘강(崗)’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송광사지'를 쓴 임석진(林錫珍)도 송광산이라는 이름이 이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면서 김영수의 주장을 타당하다고 보았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知訥, 1158~1210)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 터에 사찰을 개설하고 그를 존경하였던 희종(熙宗)이 친히 글을 써서 내려준 제방(題榜)에 따라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로 이름을 고쳤다. 그 후 875년(헌강왕 1년) 연기 도선(煙起道詵, 827~898)이 창건한 장군봉 선암사에 자주 화재가 일어나자 그 원인이 산강수약의 지세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1761년(영조 37년)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1823년(순조 23년) 또 불이 나자 해붕 전령(海鵬展翎(?~1826)과 눌암 식활(訥庵識活, 1752~1830), 익종(益宗)을 중심으로 해천사를 중창하고 조계산 선암사로 이름을 도로 바꾼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계산의 연원은 중국 당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계산은 중국의 영남이라고 하는 소주부(韶州付, 지금의 광동성 곡강현)에 있다. 당나라때 육조(六祖) 혜능(慧能, 638~713)은 오조(五祖) 홍인(弘忍, 602~675)으로부터 황매산(黃梅山)에서 법을 인가받았다. 이때 조후촌(曹喉村)의 조숙량(曹叔良)이라는 사람이 혜능을 존경한 나머지 보림사(寶林寺, 지금의 남화선사)의 옛터인 쌍봉(雙峯) 아래 대계(大溪)벌에 절을 지어 시주를 하였다. 이에 감동한 혜능은 이 절이 자리잡은 산이름을 조숙량의 성인 '조(曹)'자와 쌍봉 대계의 '계(溪)'자를 합해서 조계산(曹溪山)이라 지었다. 혜능은 후에 오조 홍인의 유언에 따라 남방으로 가서 남종선(南宗禪)의 시조가 된 사람이다. 중국 선종(禪宗)은 인도에서 중국 남북조시대의 양(梁)나라로 온 인도의 제28대 조사(祖師)이자 중국의 일조(一祖) 보리 달마(菩提達磨, ?~?)로부터 이조(二祖) 혜가(慧可, 487~593), 삼조(三祖) 승찬(僧璨, ?~606), 사조(四祖) 도신(道信, 580~651), 오조 홍인을 거쳐 육조 혜능에 이르면서 조계산의 보림사를 중심으로 크게 선양되었다. 조계산은 또 제38대 조사로 임제종(臨濟宗)의 개조인 당나라의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과 그의 법손으로 한국 조계종의 원조라고 일컬어지는 제56대 조사 원나라의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석옥 청공이 조계종의 원조라고 보는 이유는 고려시대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가 바로 석옥 청공으로부터 법을 인가받아 제57대 조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라 말엽 남종선이 들어온 뒤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혜능의 법맥을 이은 한국의 선사(禪師)들에게 중국의 조계산은 곧 선종의 상징이었으며, 조계란 바로 육조 혜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조계종(曹溪宗)은 중국의 육조 혜능을 법조(法祖)로 하고, 그의 선지(禪旨)를 종지(宗旨)로 삼은 선종의 종파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조계산은 조계총림(曹溪叢林)인 송광사와 태고총림(太古叢林)인 선암사 등 두 총림을 중심으로 한국 선종의 중흥지가 되었으며, 나아가 한국 불교의 종산(宗山)이 되었다. 총림(叢林)이란 선승(禪僧)들이 좌선을 수행하는 도량으로 선림(禪林) 또는 선원(禪苑)이라고도 하는데, 수많은 수도승들이 한곳에 머물며 화합하여 수행하는 모습을 수목이 우거졌으면서도 한없이 고요한 숲에 비유한 말이다. 총림은 선승(禪僧)들이 참선수행하는 도량인 선원(禪院)과 불교경전을 공부하는 4년 과정의 전문교육기관인 강원(講院), 승려로서 지켜야 할 계율을 공부하는 2년 과정의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경전과 부처의 명호를 암송하는 염불수행을 전문적으로 전수하는 염불원(念佛院)을 두루 갖춘 종합수행도량이다. 대학으로 말하자면 종합대학인 셈이다. 한국의 5대 총림 가운데 염불원이 있는 곳은 아직 없으며, 일반적으로 선원과 강원, 율원을 갖춘 사찰을 총림이라고 한다. 팔공산(八公山)의 동화사(桐華寺)는 2004년부터 선원과 강원, 율원에 염불원까지 갖추고 제6대 총림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사세와 가람의 규모가 매우 큰 가람이 아니면 총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계산은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그런 총림을 두 개나 거느리고 있으니 정말 대단한 산이다.
조계산은 고온다습한 해양성기후의 영향으로 다양한 식생과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소강남(小江南)으로 일컬어진 명산이다. 특히 송광사 일대는 연산봉(851m)에서 천자암봉(天子庵峰, 755m)에 이르는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송광사 내팔경(內八景)과 외팔경(外八景)이 정해져 있을 정도로 경치가 뛰어나다. 조계산은 활엽수림이 울창하고 수종도 다양하여 전라남도 채종림(採種林)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또한 계곡에는 수림이 울창하여 밀림을 이루고, 홍골의 토다리 근처에는 비룡폭포(飛龍瀑布)와 같은 이름난 폭포도 있다. 조계산 동쪽에는 선암사를 비롯하여 대각암(大覺庵), 운수암(雲水庵), 대승암(大乘庵), 비로암(毘爐庵) 등 선암사 산내암자가 있으며, 서쪽에는 송광사를 비롯해서 광원암(廣遠庵), 감로암(甘露庵), 천자암(天子庵), 부도암(浮屠庵), 불일암(佛日庵), 인월암(印月庵), 오도암(悟道庵) 등 송광사 산내암자가 있다. 이들 사찰에는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 국보 제42호),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 국보 제43호), 송광사 국사전(松廣寺國師殿, 국보 제56호) 등의 국보와 송광사 경패(松廣寺經牌, 보물 제175호), 송광사 하사당(松廣寺下舍堂, 보물 제263호), 송광사 약사전(松廣寺藥師殿, 보물 제302호), 송광사 영산전(松廣寺靈山殿, 보물 제303호), 선암사 삼층석탑(仙岩寺三層石塔, 보물 제395호), 승선교(昇仙橋, 보물 제400호), 대각국사진영(大覺國師眞影, 보물 제1044호), 대각암부도(大覺庵浮屠, 보물 제1117호) 등의 보물, 곱향나무쌍향수(천연기념물 제88호)와 같은 각종 국가지정 문화재와 천연기념물을 보유하고 있다.
옛 승주팔경 중에서도 제일경으로 손꼽히는 조계산은 사시사철 아름답고 멋진 경치를 보여주는 산이다. 봄철 매화와 동백, 왕벚꽃, 영산홍, 목련이 활짝 피어 꽃천지를 이루는 선암사의 꽃경치, 여름철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울창한 숲과 계곡, 가을철 활엽수림에 곱게 물드는 단풍, 겨울철 산기슭에 하얗게 피어나는 상고대 등이 특히 아름답다. 그리고 조계산 일대에서 나오는 산채와 고로쇠약수도 유명하다. 조계산은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불교 사적지가 많아서 1979년 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산림청도 같은 사유로 조계산을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선정하였다. 또한 송광사와 선암사 일원은 명승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암사 계곡
*선암사 부도전과 비석
*선암사 구름다리
*선암사 승선교와 강선루
활엽수림이 우거진 선암사골을 오르면서 계곡의 맑은 물에 마음의 묵은 때를 씻는다. 키 큰 나무들 밑에는 조릿대가 무성하게 깔려 있다. 아직 나무에 움은 트지 않았지만 봄기운이 완연하다. 머지않아 저 나무들의 가지에 일제히 움이 터서 잎이 피어나면 조계산은 초록색의 바다로 변하리라. 어디선가 숲속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에 귀 기울이며 산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한 자연인으로 돌아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마음은 더욱 평화로와지고 고요해진다.
붉은 글씨로 '曹溪山仙巖寺(조계산선암사)'라고 새겨진 돌기둥이 세워진 곳을 지나 편백과 동백숲에 둘러싸인 선암사 부도전(浮屠田)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잔디가 곱게 깔려 있는 부도전에는 11기의 부도와 8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은 부도들을 보니 평생을 수행정진으로 보내고 열반에 들어서도 선정에 든 선승들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대부분의 부도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인데 화산당 오선(華山堂晤善)의 사리탑만은 네 마리의 석사자 등에 삼층석탑이 올려져 있는 특이한 양식이다. 이 사리탑은 구례의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35호)과 그 양식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탑을 모방해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또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의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 보물 제94호)도 이 사리탑과 양식이 아주 비슷하다. 높이 4.1m인 이 사리탑은 벽산당 금타(碧山堂金陀)의 비석과 같은 시기인 1928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양식이 매우 드물고 희귀해서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흥사(大興寺) 부도전에서 보았던 상월 새봉(霜月璽封)의 비석이 이곳에도 있다. 그런데 그의 비석은 다른 비석들과는 방향을 달리해서 세워져 있다. 그의 비석을 이렇게 모로 세운 것은 무슨 까닭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후학을 사랑했던 새봉을 기리기 위해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선암사 강원을 향해서 비석을 세웠다는 설과 새봉의 모친이 있는 순천의 고향을 향하도록 비석을 세웠다는 설, 원래 그의 비석이 올바른 방향이고 나머지 비석들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설, 그가 입적했다는 묘향산의 보현사(普賢寺)를 바라보도록 세워졌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처음과 마지막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새봉의 비석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그가 1687년(숙종 13년) 순천에서 태어나 11세에 조계산 선암사의 극준(極俊)을 은사로 출가하여 16세 때 화악(華嶽)에게서 구족계를 받는 등 선암사와 인연이 깊었기 때문이다. 또한 새봉은 대흥사 제5대종사인 설암 추붕(雪巖秋鵬, 1651~1706)에게 수학한 뒤 그의 의발(衣鉢)을 전수받고, 제6대종사인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에게 심인(心印)을 얻음으로써 대흥사와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1776년(영조 43년) 10월 새봉은 '水流元歸海(물은 흘러서 바다로 돌아가고), 月落離天(달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도다.)'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81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새봉을 다비(茶毘)하였을 때는 사리(舍利)가 나오지 않았으나, 그의 문하인 탁선(卓璿)이 묘향산에 가서 초제(醮祭)를 지낼 때 3과의 사리가 나왔다. 그의 사리는 오도산(悟道山)과 선암사, 대흥사에 각각 하나씩 나누어 봉안되었다. 언제나 문자를 떠난 진리를 설파하고, 쓸데 없는 견해에 떨어지는 편협함보다 화엄정신을 생활화한 화엄종사(華嚴宗師) 새봉은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 중 제9대종사가 된 사람이다. 이런 연유로 새봉의 비석은 대흥사와 선암사에 세워졌고, 그의 진영은 선암사에 소장되어 있다.
선암사 부도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선암사 입구의 삼인당에서 송광굴목재쪽으로 백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도 부도전이 있다. 또 선암사 대웅전에서 서북쪽으로 6,7백 미터쯤 떨어진 대각암 뒤편 언덕에는 고려 전기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義天, 1055~1101)의 부도라고 전해지는 선암사 대각암부도(仙巖寺大覺庵浮屠, 보물 제1117호)가 있다. 이 부도는 탑신과 기단부가 뒤바뀌어 있던 것을 1985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의천은 남방을 순례하면서 가야산 해인사와 지리산 화엄사, 무등산 규봉암(圭峰庵)을 거쳐 부도가 있는 자리의 암자에 주석하면서 크게 깨달았기에 암자의 이름을 대각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선암사 경내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차밭을 지나 약 4백 미터쯤 올라간 산중턱의 옛 선조암지(禪助庵址)에는 연기 도선의 부도로 알려진 선암사 북부도(仙巖寺北浮屠, 보물 제1184호)가 있다.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부도는 신라시대의 일반형 부도를 계승한 팔각원당형의 석조부도이다. 그리고 선암사의 별전인 무우전(無憂殿) 뒤편 비전(碑殿)에서 능선을 따라 2백 미터쯤 올라간 산기슭에도 역시 고려 전기의 부도인 선암사동부도(仙巖寺東浮屠, 보물 제1185호)가 있다. 이 부도도 팔각원당형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하였으며, 각 부의 구름과 연꽃문양 등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는 이 부도가 무우전부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전에 의하면 동부도는 아도화상(阿度和尙)과 관계가 있는 부도라고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선암사 중수비문(仙巖寺重修碑文)에 '1철불 2보탑 3부도(1鐵佛2寶塔3浮屠)'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3부도란 바로 대각암부도와 북부도, 동부도를 가리킨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전을 지나서 조금 더 올라가면 두 눈을 부라리고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한쌍의 장승을 만난다. 다른 사찰에서는 장승을 본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이 장승들은 사찰의 수호신으로 세웠을 것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으며, 사찰이나 지역간의 경계표 또는 이정표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장승은 보통 남녀상 한쌍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은 모두 남자상이다. 호법선신(護法善神) 장승은 세 갈래의 수염을 동그랗게 꼰 형상이고, 방생정계(放生淨界) 장승은 세 갈래의 수염을 몸통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다. 호법선신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사천왕(四天王), 십이신장(十二神將), 십육선신(十六善神), 이십팔부중(二十八部衆) 등이 이에 해당한다. 방생정계도 호법선신과 마찬가지로 호법신장류이다. 1904년에 세워진 갑진년 장승은 선암사 설선당(說禪堂)으로 옮겨지고, 지금 이 장승은 1987년에 새로 세운 일명 정묘년 장승이다. 조형미는 갑진년 장승이 훨씬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나무로 만든 장승은 10년 정도 지나면 썩어버리지만 두 장승은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한 밤나무로 만들었기에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장승은 아무리 보아도 무섭지가 않고 오히려 해학적이어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장승이 있는 곳을 지나면 홍예교(虹霓橋, 무지개다리)인 선암사 승선교(仙巖寺昇仙橋, 보물 제400호)가 나온다.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는 다리라...... 그렇다면 이 다리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달밤에 와서 보아야 제격이겠다. 다리 옆으로 새로 길이 나기 전에는 아래에 있는 구름다리를 건넌 다음 다시 승선교를 건너야만 선암사 경내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옥류수가 흐르는 승선교 무지개다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강선루(降仙樓)가 한폭의 동양화처럼 다가온다. 눈을 지긋이 감으니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이 펼쳐진다. 강선루로 내려와 날개옷을 훌훌 벗은 선녀들은 명경지수에 옥같이 흰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더니 승선교에서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훨훨 날아올라간다. 눈을 뜨는 순간 선녀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일장춘몽이라.
승선교는 계곡의 자연 암반을 기초로 다리 아래부분부터 장방형의 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쌓아올렸다. 홍예의 짜임새가 매우 정교해서 부드러운 곡선미와 아름다운 조형미가 잘 드러나 있다. 아치형의 홍예 바깥 양쪽에는 길과 평행을 이루도록 자연석으로 석벽을 쌓고 그 사이에 흙을 채워넣었다. 홍예의 천정 한가운데 돌출되어 있는 용머리는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사악한 기운과 잡귀로부터 이 다리를 지키도록 한 수호신격이다. 이 용머리를 뽑아버리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승선교는 1713년(숙종 39년) 10월 호암 약휴(護岩若休, 1663~1738)가 6년만에 완공했다는 기록이 홍교비(虹橋碑)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홍예의 축조양식이 같은 인근의 벌교 홍교(筏橋虹橋, 보물 제304호)보다 약 20년 정도 앞선 것이다. 승선교는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폐허가 된 선암사를 중건할 때 함께 놓은 것이다.
선녀가 내려온다는 이층누각인 강선루를 지난다. 강선루의 안과 밖에는 '降仙樓'라는 글씨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안쪽은 조선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쓴 것이고, 바깥쪽은 안진경(顔眞卿)과 황정견체(黃庭堅體)의 해서에 뛰어났던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7)의 작품이다.
*선암사 삼인당
*선암사 일주문 앞 고목
선암사 삼인당(仙巖寺三印塘, 전남유형문화재 46호)에 이르러 마음을 고요히 비추어 본다. 장타원형으로 석축을 쌓은 연못 한가운데는 작은 섬이 떠 있다. 물이 대롱을 타고 떨어지면서 수면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연못 이름을 삼인당이라 지은 것은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삼인(三印)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등 불교의 근본교리를 이루는 세 가지 진리, 즉 삼법인(三法印)을 말한다. 여기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더하면 사법인이 된다. 제행무상은 우주 삼라만상 모든 사물은 잠시도 머무름이 없이 항상 변한다는 것이고, 제법무아는 우주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인연으로 인해 생겼으므로 변하지 않는 참다운 자아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열반적정은 모든 번뇌를 벗어나서 고요하고 청정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일체개고란 무상과 무아를 깨닫지 못하고 번뇌와 집착으로 인해 고통에 빠져 있는 것으로, 즉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연못의 장타원형은 자각각타(自覺覺他), 섬은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뜻하며 대승불교에서 수행의 이상을 나타낸 것이다. 자각각타란 스스로 깨달은 뒤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이요, 자리이타란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더불어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작은 연못 하나에도 이렇게 깊은 뜻이 담겨 있을 줄이야!
삼인당은 길이와 너비가 2.2:1의 비를 갖는 장타원형의 연못 안에 길이 11m, 너비 7m의 계란형 섬이 저부(底部)에서 4m의 거리를 두고 떠 있는 중도형(中島形) 연못이다. 이러한 양식의 연못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연못은 직선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 양식이 대부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불국사의 구품연지(九品蓮池)는 정타원형 연못이며, 통도사의 구룡지(九龍池)도 정타원형으로 연못의 한가운데 다리가 놓여 있다. 따라서 선암사의 삼인당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연못으로 추정된다. 선암사 사적에도 이 연못의 이름이 삼인당이고,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축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한 삼인당이라는 이름과 독특한 연못 양식은 선암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이다.
선암사로 올라가는 길가에는 층층나무과의 상록수인 식나무가 자라고 있다. 잎에 노란 무늬가 있는 금식나무는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식나무를 청목 또는 넓적나무라고도 하는데, 3~4월에 꽃이 피어서 빠알갛고 예쁜 열매를 맺는다. 일주문 앞에는 벼락을 맞아서 죽었다는 아름드리 고목이 불에 탄 채 등걸만 남아 있다. 나무도 오래 묵으면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법이다. 오랜 세월 선암사의 영고성쇠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고목나무는 죽어서도 일주문 곁을 지키고 있다.
선암사는 542년(진흥왕 3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비로암(毘盧庵)이라고 하였다는 설이 전해지지만 이는 믿기 어렵다. 875년(헌강왕 1년)에 연기 도선이 창건해서 선암사라고 했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도선은 어떤 인물인가? 고려중기 최유청(崔惟淸, 1095~1174)의 '백계산옥룡사승겸선각국사사적비'에 의하면 도선은 영암출신으로 성은 김씨, 혹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서자라고도 한다.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도선은 한국 풍수지리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도선은 15세 되던 해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출가하여 화엄교학을 공부하였으나,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화엄교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선종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846년(문성왕 8년) 동이산문 개산조인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로부터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득도하여 선법을 인가받았고, 850년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는 광양의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주석하면서 옥룡산파의 개산조가 되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선암사와 금둔사, 징광사(澄光寺)에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그가 옥룡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할 때는 언제나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당시 그의 명망이 얼마나 높았던지 헌강왕은 그를 왕궁으로 초빙하여 법문을 들을 정도였다.
도선은 고려 태조 왕건에 대한 예언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875년에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을 하였는데, 과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왕건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으로 인해 그는 왕건 이후의 고려왕들로부터 극진한 존경을 받게 된다. 왕건은 도선의 사상적 영향으로 도참서인 '도선비기(道詵秘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왕건이 손수 쓴 훈요십조 제2조의 '여기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정한 자리에 개창한 것이다. 도선은 일찍이 그가 점쳐서 정한 곳 외에 함부로 사원을 세우면 지덕(地德)을 손상하여 국운이 길하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생각컨대, 왕이나 공주, 왕비, 조신들이 서로 원찰을 마음대로 세운다면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신라 말엽에 사찰을 함부로 이곳저곳에 세웠기 때문에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경계하여야 한다.'는 내용에도 도선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왕건은 불교신앙을 통한 부처의 가호와 도참설에서 주장하는 지기(地氣)를 얻어서 큰 뜻을 성취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도선이 산천의 지세를 점쳐서 정한 터에 세운 절이나 탑을 특별히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고 한다.
도선이 혜철문하를 떠나 15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세운 절은 3천8백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선암사도 그가 세운 비보사찰의 하나였다. 박전지(朴全之)의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에는 지리산 성모천왕(聖母天王)이 '만일 세 개의 암사(巖寺)를 세우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라고 한 계시에 따라 도선은 선암(仙巖)과 운암(雲巖), 용암(龍巖)에 세 암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세 암사는 승평부 조계산의 선암사와 광양현 백계산의 운암사(雲巖寺), 영암 월출산의 용암사(龍巖寺)를 가리킨다. 도선이 선암사를 초창하면서 세웠다는 1철불 2보탑 3부도는 지금도 이곳에 전해지고 있다. 선암은 절 서쪽에 있는 꼭대기가 평평하고 높이가 100장(丈)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로 옛날에 신선들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지금의 장군봉 남쪽 중턱에 있는 배바위가 바로 이 바위로 선암사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다. 898년 도선이 72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신라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은 옥룡사에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을 세웠다. 고려 숙종은 대선사(大禪師)와 왕사(王師),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를 각각 추증하였으며, 의종은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선암사 성보박물관에는 도선의 진영과 그의 유품으로 알려진 직인통 3점(전남지방문화재 21호)이 소장되어 있다. 도선은 도선비기 외에도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를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도선이 창건한 이래 선암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내암자 19개소 등 방대한 규모로 중창함으로써 호남지방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의천은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과 인예왕후(仁睿王后)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후(煦), 자는 의천, 대각국사는 시호다. 그는 11세 때 개풍군 오관산(五冠山)의 영통사(靈通寺)에서 출가하여, 광종이 그의 모후인 유씨(劉氏)의 원당으로 세운 판문군 보봉산의 불일사(佛日寺)에서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에게 구족계를 받고, 경율논(經律論) 삼장(三藏) 특히 화엄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그는 삼장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 제자백가서에도 두루 능통하였다. 그는 학문이 심오하고 강의를 잘하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문종은 1067년 그에게 우세(祐世)라는 호와 함께 승통(僧統) 직책을 내려주었다.
의천은 송나라 유학의 뜻을 세우고 여러 차례 입송구법표를 올렸지만 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종 2년 마침내 송나라로 건너가서 철종(哲宗)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 송나라 불교계는 무종(武宗)의 탄압과 9대에 걸친 전쟁으로 인하여 불교서적들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의천은 고려에서 지엄(智儼)의 '공목장(孔目章)', '화엄수현기(華嚴授玄記)', '무성섭론소(無性攝論疏)',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와 현수(賢首)의 '화엄탐현기(華嚴探玄記)',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 '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 '십이문론소(十二門論疏)', '삼보제장문(三寶諸章門)'과 청량(淸凉)의 '정원신역화엄경소(貞元新譯華嚴經疏)', 규봉(圭峯)의 '화엄론관(華嚴論貫)' 등의 서적들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항주(杭州)로 그를 찾아온 송나라의 학승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그는 화엄종(華嚴宗)의 정원(淨源)과 유성(有誠), 천태종(天台宗)의 종간(從諫), 법상종(法相宗)의 혜림(慧林)과 선연(善淵), 율종(律宗)의 택기(澤其)와 원조(元照), 선종(禪宗)의 요원(了元)과 회련(懷璉) 등 당대 여러 종파의 고승대덕들을 두루 만나 의견을 교환하였다.
항주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의 정원은 '화엄보현행원참의(華嚴普賢行願懺儀)'를 쓴 사람으로 의천과 교분이 두터웠던 사람이다. 두 사람은 화엄경과 능엄경, 원각경, 기신론 등의 사상은 물론 천태와 현수의 교학에 대해서도 토론을 하였다. 의천은 훗날 정원에게 화엄경의 세 가지 번역본과 이 경전들을 봉안할 장경각의 건립비로 금 2천 냥을 보냈다. 이에 정원은 장경각을 건립하여 화엄경을 안치하고 혜인원(惠因院)을 고려사(高麗寺)로 바꾼 뒤 의천의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유성은 화엄학의 대가였으므로 의천과 서로 잘 통하였다. 두 사람은 화엄사상과 현수의 천태교판(天台敎判)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는 자변대사(慈辨大師)와 영지사 원소율사(元炤律師)와도 교유가 깊어 천태교관과 계율, 정토교학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는 또 상국사(相國寺)로 운문종(雲門宗)의 종본(宗本)을 방문하고, 흥국사(興國寺)에서 인도 승려 천길상(天吉祥)을 만나 인도의 불교에 대해서도 견문을 넓혔다. 그는 천태종의 지자대사탑(智者大師塔)에서 고려에 천태종을 개창할 것을 서원하고, 명주(明州) 육왕광리사(育王廣利寺)에서 운문종의 회련을 만난 뒤, 3천여 권의 경전을 수집해서 1086년 귀국하였다.
송나라에서 돌아온 의천은 개풍군 덕적산에 문종의 원찰로 창건된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 고승들과 서적, 서신을 교환하면서 학문에도 정진하였다. 그는 송과 요, 일본 등지에서 불교서적 4천여 권과 국내의 고서를 수집하여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들 경전을 간행하였다. 이때 간행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편집한 뒤 안제목을 '해동유본현행록(海東有本現行錄)'이라 하였는데, 줄여서 '의천목록(義天目錄)' 또는 '의천록(義天錄)'이라고 한다. 이것은 삼장의 정본과 함께 주석서인 장소(章疏)만을 수집해서 목록을 작성한 것으로 한국 최초의 일이다.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따라 경전을 간행하였으며, 이를 '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이라고 한다. 속장경을 편찬하고 남방순례에 나선 의천은 합천 해인사와 구례 화엄사를 거쳐 지금의 대각암 자리에 와서 주석하다가 대오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 대각암을 세우고 선암사를 크게 중창하였는데, 당시 당우만 해도 백여 채가 넘었다고 한다. 그는 또 지금의 칠전선원(七殿禪院) 뒤편에 다원(茶園)을 조성하여 송나라에 차를 수출하기도 하였다.
1097년(숙종 2년) 의천은 그의 청원으로 인예태후가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에 창건한 국청사(國淸寺)의 초대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중국 저장성(浙江省) 톈타이산(天台山)에 수나라 문제(文帝)가 창건한 국청사도 천태종의 사찰이었다. 의천이 인예태후의 원찰을 국청사로 이름한 것에서 그가 고려에 천태종을 개창하려는 의지가 그만큼 컸음을 알 수 있다. 그해 5월 의천은 선교겸수(禪敎兼修)와 지관선법(止觀禪法)을 주창하고 국청사를 종찰(宗刹)로 삼아 천태선종(天台禪宗)을 창시하였다. 1099년 천태종 최초의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뒤에는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시행함으로써 천태종은 비로소 공인된 종파가 되었다. 의천이 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하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선종과 화엄종의 고승들을 비롯한 당대의 신진학승들은 천태종으로 모여들었다. 의천이 화엄종 계통의 승려였음에도 불구하고 천태종을 창종한 것은 회삼귀일(會三歸一)과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는 천태의 근본사상으로 나라와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고, 선교양종(禪敎兩宗)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신라 중엽부터 선종은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 는 입장을 표방하면서 큰 세력을 형성하자 기존의 교종과 대립하게 되었다. 신라 말기에는 마침내 선종과 교종으로 교단이 양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려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선종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나, 현종 이후 화엄종을 중심으로 한 교종이 점차 세력을 얻게 되면서 선종과 교종의 대립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시기에 의천은 바로 천태사상을 바탕으로 선교양종의 대립을 종식시키고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서 고려 불교계를 정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의천은 1101년(숙종 6년) 속세의 나이 47세, 법랍(法臘) 36세로 입적하였는데, 그가 열반에 들어가기 전날 숙종은 그에게 대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문하에서는 교웅(敎雄)과 징엄(澄儼), 수개 등 160여 명의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후에 의천을 기리는 비석이 그가 출가했던 영통사와 칠곡군의 선봉사(僊鳳寺)에 세워졌다. 선암사를 크게 중창한 인연으로 성보박물관에는 의천의 유물인 대각국사진영(大覺國師眞影, 보물 제1044호)과 용문탁의(龍紋卓衣, 중요민속자료 제244호), 금동은입사향로(金銅銀入絲香爐, 전남유형문화재 제20호), 금란가사(金襴袈裟), 중창건도기(重創建圖記) 등이 소장되어 있다. 선암사에서는 매년 음력 9월 28일 의천을 기리는 연중 가장 큰 행사인 탄신다례(誕辰茶禮)가 열린다. 의천의 저서에는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비롯해서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 '석원사림(釋苑詞林)',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 '계악권선면학(誡惡勸善勉學)', '팔사경직석(八師經直釋)', '소재경직석(消災經直釋)' 등이 있다.
의천 이후 고려시대의 중창기록은 보이지 않고, 조선시대로 들어와 1540년(중종 35년)에 일주문(一柱門)을 중수했다는 기록만 보인다. 정유재란 당시 선암사는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과 보탑, 부도, 문수전(文殊殿), 조계문(曹溪門), 청측( )만 무사하였다. 1660년부터 경준(敬俊), 경잠(敬岑), 문정(文正) 등에 의한 8년간에 걸친 중수가 있었고, 그 뒤 침굉 현변(枕肱懸辯, 1616~1684)이 많은 당우들을 보수하였다. 침굉은 9세에 천풍산(天風山) 처우(處愚)에게 출가하였다. 그는 13세 때 지리산 방장사(方丈寺)로 들어가 휴정(休靜)의 수제자인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의 법맥을 잇고, 보광 건우(普光虔祐)와 송계 원휘(松溪圓輝, 1630~1694) 등 당대의 고승들로부터 선법을 물려받았다.
침굉은 선암사 비로암(毘盧庵)에서 대오한 뒤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 머물렀다. 그는 선암사에 주석하면서 매년 제석(除夕)에 승려들이 동서로 패를 나누어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을 금하고 염불로써 밤을 새우도록 하는 등 규범을 엄하게 하였다. 법호에서 보듯이 그는 평생 팔꿈치를 베고 자면서도 항상 화두(話頭)를 놓지 않고 삼매경에 들었으며, 염불이 성불의 직절문(直截門)이라는 청허 휴정의 가르침에 따라 오로지 염불에만 온힘을 기울였다. 그는 선승이면서 유교와 도교에 정통하였으며, 서예와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침굉이 19세 되던 해 윤선도(尹善道)가 양자로 삼아 환속시키려고 하였으나 울면서 거절한 일화도 있다. 윤선도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광양으로 유배되었을 때는 그를 찾아가 창랑가(滄浪歌)를 불러주면서 위로하였다. 윤선도의 영향으로 그는 귀산곡(歸山曲), 태평곡(太平曲), 청학동가(靑鶴洞歌) 등 국문으로 된 불교가사를 남겼다.
침굉은 말년에 벌교 금화산(金華山)의 징광사 조실로 추대되어 그곳의 상암에서 1684년 세수(世壽) 69세로 입적하였다. 그는 가부좌를 한 자세로 열반에 들면서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지 말고 산속에 갖다 놓아서 들짐승이나 새들의 먹이가 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침굉의 제자들은 유언에 따라 시신을 징광사 뒷산 바위틈에 모셨는데, 짐승은 물론 벌레도 달려들지 않고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시신이 누워있는 것을 보고 놀라는 등 문제가 생기자 산중회의를 열어서 다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대중들이 다비를 하려고 빙 둘러서자 신기하게도 시신에 저절로 불길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연기와 함께 한줌의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고 한다. 다비에서 나온 사리는 선암사 부도전에 부도를 세워 안치하였고, 그의 진영은 진영당(眞影堂)에 소장되어 있다. 제자인 계음(桂陰)은 후에 그의 글을 모아 선암사에서 '침굉집' 2권을 간행하였으며, 지금도 그 목판이 남아 있다. 침굉의 문인에는 호암 약휴와 치현(致玄)이 있다.
호암 약휴는 1697년부터 8년간에 걸쳐 선암사를 중창하고 불상과 영정을 새로이 조성하였다. 1697년(숙종 23년)에는 관음상을 조성하였고, 이듬해에는 원통각(圓通閣)을 중창하였으며, 1699년에는 불조전(佛祖殿)을 세우고 60불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702년에는 도선과 대각 두 창건주의 영각(影閣), 1704년에는 소요 태능과 침굉 현변 두 조사의 영각을 건립하였다. 그밖에도 약선궁(若仙宮)과 대법당, 오십전 등을 중창하고 승선교를 놓았으며, 영정도 새로이 조성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선암사 제5차 중창주가 되어 사찰을 보전하였으므로 일명 호암자(護巖子)라고도 일컬어졌다. 순천 출신의 호암은 12살에 선암사의 경준에게 출가하여 침굉 현변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청허 휴정에서 소요 태능, 침굉 현변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계승하였다. 호암은 성품이 강직하고 호매과감(豪邁果敢)하여 공사의 손님에게 마혜(麻鞋)를 선물하던 폐습을 없애고, 승려가 관리에게 절하던 풍습을 폐지하였으며, 호족이 사전(寺田)을 빼앗는 것을 막아 산문을 부흥시켜 석문영웅(釋門英雄)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그는 전라도 각 사찰의 기강이 해이해지자 예조에 건의해서 도승통제(都僧統制)를 창설하여 규율을 바로잡았다.
1736년(영조12년) 호암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과 자헌대부겸장진승군대장(資憲大夫兼壯鎭僧軍大將)에 임명되어 북한산성에 부임하였다. 조선정부는 승려들을 징발하여 북한산성 안에 승군을 위한 중흥사(重興寺) 대웅전과 산경루(山景樓)를 대규모로 중건하고 태고 보우의 영각과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승려들이 지나친 부역을 견디지 못하자 호암은 조정에 건의하여 정승(定僧)에게 향전(香錢)으로 대신하게 함으로써 신역(身役)을 폐지토록 하였다. 그는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모방하여 호암청규(護岩淸規)를 만들어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 세웠다. 호암이 일곱 축에 이르는 법화경을 한 글자에 삼배하면서 사경(寫經)을 하였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진다. 선암사 서부도전에는 호암의 부도가 전하고, 그의 진영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704년에는 호연(浩然)이 선암사사적(仙巖寺事蹟)을 썼다. 1819년(순조 19년) 봄에 선암사에 불이 나자 곧 상월 새봉이 중건하였고, 1823년에 또 다시 불이 나자 눌암 식활(訥庵識活, 1752~1830)과 해붕 전령(海鵬展翎, ?~1826), 월파(月波) 등이 6차 대중창을 하였다. 눌암 식활은 순천에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는 17세 때 부친이 양반집에서 볼기를 맞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몽둥이를 들고 한달음에 달려가서 주인 양반을 두들겨 패고는 마당으로 끌어내릴 정도로 담력이 컸다. 이 사건이 있은 뒤 1768년 눌암은 '대장부로 태어나 비굴하게 살 바에는 차라리 나비처럼 자유롭게 세상이나 떠돌아다니리라.' 하고 탄식하면서 선암사로 출가하여 상월 새봉의 법손인 혜암 윤장(惠庵玧藏)의 선법을 이었다. 그는 금강산의 마하연(摩訶衍)에 들어가 화두를 붙잡고 참선에 정진하였다. 그 뒤 묘향산 법왕봉의 바위에서 좌선할 때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3년동안 곁에서 지켰다고 한다. 경율논 삼장에도 능통하고 도가 이미 통하자 대중들이 모여들어서 법문을 청했으며, 평안감사 윤사국(尹師國)도 눌암을 존경하여 스승으로 받들었다.
1789년(정조 13년) 봄에 눌암은 금강산에서 선암사로 돌아왔다. 정조가 후사가 없어 걱정을 하자 예조판서 윤사국은 그에게 백일기도를 청하였다. 이에 눌암은 선암사 원통전(圓通殿)에서, 해붕은 대각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려 2년 후에 순조가 태어났다. 정조는 눌암에게 국일도대선사대각등계홍제존자(國一都大禪師大覺登階弘濟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쌍용문가사, 금병풍, 은향로, 가마 두 축, 순조는 친필 '대복전(大福田)'과 '인(人), 천(天)' 현판을 하사하였다. 지금도 선암사에는 그의 가사와 순조의 친필 현판, 가마가 전해지고 있다. 눌암이 칠전선원에 호남제일선원(湖南第一禪院) 현판을 걸고 선원 12조례를 정하여 실행하자 전국의 선승들이 몰려와서 참선수행을 하였다. 그는 서예의 동국진체에 능하여 명필로도 명성이 높았다. 눌암은 청련암(淸蓮庵)에서 입적하였는데, 그의 부도와 진영이 선암사에 전해져 내려온다.
해붕 전령은 순천 출신으로 선암사에서 출가하여 묵암 최눌(默庵最訥, 1717~1790)에게서 법을 인가받았다. 그는 선교에 정통한 강백이자 유명한 선승으로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서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해붕은 당대의 명사들인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초의 의순(草衣意恂)과도 교분이 깊었으며, 노질(盧質), 이학전(李學傳), 김각(金珏), 심두영(沈斗永), 이삼만(李三萬), 초의 의순 등과 함께 호남칠고붕(湖南七高朋)의 한 사람이다. 또한 백곡 처능(栢谷處能), 무용 수연(無用秀演), 해붕 전령을 일컬어 승중문장(僧中文章)이라고 한다. 선암사에 소장되어 있는 해붕의 진영에는 추사가 죽기 다섯 달 전에 쓴 친필찬문이 남아 있어 두 사람의 교분이 매우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해붕은 1826년 10월 1일 선암사에서 입적하였는데, 그의 저서로는 '장유대방록(壯遊大方錄)' 1권이 있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표된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에 따라 선암사는 31본산 중의 하나가 되어 승주군과 여수시, 여천군의 말사를 관할하였다. 선암사에는 불각(佛閣) 9동, 당료(堂寮) 25동, 누문(樓門) 31동 등 65동에 이르는 건물이 있었으나 6.25전쟁 중에 불타고, 대웅전과 원통각, 팔상전, 불조전, 장경각 등 20여동의 건물만 남아 있다. 선암사에는 현재 삼층석탑 등 보물 9점, 금동향로 등 지방유형문화재 8점, 마애여래입상 등 지방문화재자료 3점, 국가중요민속자료 1점, 지방기념물 1점 등 국가지정문화재 10점과 지방지정문화재 12점이 있다.
선암사가 배출한 고승에는 창건주인 연기 도선을 비롯해서 대각국사 의천, 침굉 현변,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 호암 약휴, 상월 새봉, 눌암 식활, 해붕 전령, 용암 혜언(龍岩慧彦, 1738~?), 금암 천여(錦岩天如, 1794~1878), 침명 한성(沈溟翰醒, 1801~1876), 벽파 찬영(碧波贊英, 1807~1887), 함명 태선(函溟太先, 1824~1902), 경붕 익운(景鵬益運, 1836~1915), 경운 원기(擎雲元奇, 1852~1936), 금봉 기림(錦峯基林, 1869~1916), 선곡 지우(禪谷智雨, 1898~1968) 등이 있다. 백암 성총은 '화엄경소초(華嚴經疏抄)'와 '회현기(會玄記)'의 합본 80권을 간행하여 불법홍통종사(佛法弘通宗師)로 추앙받았다. 그의 저서에는 '백암집(栢庵集)'과 '정토보서(淨土寶書)', '사경지험기(四經持驗記)', '치문경훈주(緇門經訓註)' 등이 있다. 제72대 조사인 용암 혜언은 전국의 명산대찰을 순방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금암 천여는 1837년(헌종 3년) 선암사 불조전의 53불을 도금하고 팔상전과 원통전, 대웅전에 단청을 하였다. 그는 선암사와 송광사, 태안사, 흥국사 등 전라도 지역의 사찰에 수많은 불화를 남겼으며, 대표작으로는 선암사 대웅전의 삼장탱, 선암사 향로암의 관음탱, 청련암의 신중탱 등이 있다. 선암사 미타전(彌陀殿)과 무우전(無憂殿) 현판의 글씨도 그의 필적이다. 그의 진영이 선암사에 전한다.
침명 한성은 함명 태선, 경붕 익운, 경운 원기, 금봉 기림과 더불어 선암사 5대강백으로 계율에 철저하여 여인과는 같은 방에 앉지도 않았고, 옷을 다려 입지도 않았으며, 항상 바루공양을 하였다. 그는 글씨에도 능하여 명필이었다고 한다. 그의 비석과 진영이 선암사에 전해진다. 자신이 태어난 진도의 벽파진리(碧波津里)의 이름을 따서 호로 삼은 벽파는 15세에 해남 두륜산 대흥사로 출가하여 척잠(陟岑)의 제자가 되었고, 연하(緣何)로부터 구족계를 받았으며, 연서(蓮棲)의 법을 이었다. 그는 제68대 조사 호암 체정(虎巖體淨)과 설파 상언(雪坡尙彦), 유화(有華), 청윤(淸潤), 연서로 이어지는 법맥을 물려받았다. 그의 비석과 진영이 선암사에 전한다. 함명 태선은 14세에 화순 만연사(萬淵寺)의 풍곡(風谷)에게 출가하여 다음 해 백양사의 도암(道庵)으로부터 계를 받고, 침명 한성에게 참구하여 대승법기(大乘法器)가 되었다. 그는 경붕 익운에게 법을 전한 뒤에도 30여년간 경전과 계율에 더욱 정진하여 '진불(眞佛)이 출세(出世)했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의 비석과 진영, 그가 가르친 제자들의 명단인 학계연록이 선암사에 전한다. 저서에 '치문사기(緇門私記)' 1권이 있다.
경붕 익운은 순천군 주암면 출신으로 15세에 선암사로 출가하여 함명 태선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1868년(고종 5년) 그가 무등산 원효사(元曉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할 때에는 수백 명의 승려들이 모여들었으며, 이때 ‘교가(敎家)의 노호(老虎)’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말년을 오로지 염불수행으로 보내다가 입적하였으며, 대표적인 제자로는 율사(律師)인 경운 원기가 있다. 선암사에 그의 비석과 진영이 전한다. 경운 원기는 17세에 지리산 연곡사의 환월(幻月)에게 출가한 뒤, 선암사의 대승강원(大乘講院)에 들어가 경붕 익운에게 참구하였다. 그는 경붕에게서 강석을 물려받아 선암사를 당대 강학의 중심지로 만든 사람이다. 당시 그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던지 전국 31본산의 주지들이 직접 선암사 대승암에 와서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근대의 대표적인 사경승(寫經僧)이자 명필이었던 그는 1880년(고종 17년) 명성왕후의 발원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서사하였고, 1896년에는 선암사 비로암에서 화엄경의 사경을 시작하여 6년만에 끝냈다. 경운은 1911년 이회광(李晦光)의 원종에 맞서 영호남승려들이 송광사에서 결성한 조선불교임제종(朝鮮佛敎臨濟宗)의 종관장에 추대되었고, 1913년에는 송광사와 제휴하여 순천의 환선정(喚仙亭)을 사들여 도시포교당으로 삼아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주도하였으며, 1917년에는 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이 창립되었을 때 교정(敎正)으로 추대되었다. 경운은 1936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입적하였는데, 선암사에는 그의 비석과 진영, 화엄경사경 등 많은 유품이 전해지고 있다.
근천부(近天府, 여수시) 화양면 옥적리(玉笛里)에서 태어난 금봉 기림은 법증조 함명 태선, 법조 경붕 익운, 법부 경운 원기로부터 법맥을 이어받은 남방강가(南方講家)의 근대사전(近代四傳)의 적주(嫡胄)였다. 그는 14세에 영취산(靈鷲山) 흥국사(興國寺)에서 경담(鏡潭)에게 출가하여 화엄사의 원화(圓化), 선암사의 경운 원기, 대둔사의 범해 각안(梵海覺岸), 원응(圓應)을 스승으로 삼아 사집과 사교, 염송을 공부하였으며, 당시의 명유(名儒)였던 이밀제(李蜜齊), 황매천(黃梅泉), 여가정(呂苛亭)과도 교유를 하였다. 금봉은 선암사 주지와 순천군 선교양종강연소(禪敎兩宗講演所) 포교사를 지낸 뒤 48세의 젊은 나이로 입적하였다. 선암사 탑비전에 그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선곡 지우는 17세에 송광사에서 공양주로 지내다가 뒷마루에 펴진 심우도(尋牛圖)를 보고 출가를 결심하여 선암사 비로암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용맹정진으로 10년 만에 견성오도(見性悟道)하였다. 그는 해방 후 여순사건(麗順事件)과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선암사에 홀로 남아서 사찰을 수호하였으며, 1954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으로 비구승과 대처승간의 분쟁이 격화되었을 때도 깊은 수행력으로 선암사 역대 조사들의 종지(宗旨)와 종풍(宗風)을 지켜냈다.
*선암사 일주문
*선암사 대웅전
*선암사 대웅전 본존불상
*선암사 대웅전 천장
*선암사 팔상전
*선암사 원통각
아홉 개의 돌계단 위에 세워진 선암사 일주문(仙岩寺一柱門, 전남유형문화재 96호 )이 고색창연하다. 그런데 선교양종을 겸비한 태고총림의 일주문으로서는 왠지 좀 초라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대도(大道)는 원래 무문(無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상록 활엽수가 무성한 일주문을 바라보노라니 이곳이 남쪽나라라는 것을 실감한다. 돌계단 양쪽 난간에는 용두(龍頭)와 비슷한 석수(石獸)가 무시무시한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있다. 일주문의 정면에는 종서로 '曺鷄山仙巖寺(조계산선암사)', 안쪽에는 풍관산인(楓觀散人) 안택희(安宅熙)가 쓴 '古淸凉山海川寺(고청량산해천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이 산과 절 이름이 청량산 해천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일주문의 민흘림기둥 양쪽으로는 낮은 담장을 쌓아서 연결하였다. 기둥의 앞뒤로 세운 보조기둥은 위로부터 30㎝ 지점에서 잘려져 있는데, 이것은 담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일주문의 지붕은 정면 한칸의 맞배지붕 겹처마기와집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배치된 외사출목(外四出目), 내이출목(內二出目)의 다포식 건물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포가 정면에 3구, 측면에 1구씩 있어서 처마밑이 마치 공포로 꽉 차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기둥 위에는 두 마리의 용 머리를 문과 평행하게 안쪽으로 끼워서 장식하여 위엄을 더하였다. 이 일주문은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 병자호란(1636년)의 전화를 입지 않은 선암사 유일의 당우로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주문과 범종루(梵鐘樓) 사이에는 신중문(神衆門)이 들어서야 하는데, 선암사에는 금강문(金剛門)과 사천왕문(四天王門)이 없다. 선암사에는 이른바 삼무(三無), 즉 다른 사찰에는 있지만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 법당의 기둥에 붙이는 주련(柱聯), 대웅전 어간문과 더불어 사천왕문도 그중의 하나다. 선암사에 신중문이 없는 이유는 이 절이 들어앉은 자리가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 장군터이기에 굳이 사천왕이 지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선암사 바로 뒤에 우뚝 솟은 장군봉의 기운이 흘러넘치는데 어느 잡귀가 감히 이곳을 넘보랴! 당우의 기둥에 주련을 걸지 않은 데는 개구즉착(開口卽錯, 말을 하면 할수록 진리에서 멀어진다는 뜻), 다시 말해서 깨달으면 말이 필요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대웅전 정중앙의 문인 어간문(御間門)을 두지 않은 것은 석가모니처럼 깨달은 사람만이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겹처마팔작지붕에 단청이 아름다운 범종루에는 목인(木人) 전종주(全鐘柱)가 쓴 '太古叢林曹溪山仙巖寺(태고총림조계산선암사)'라는 편액 위에 추수(秋水)가 쓴 '梵鐘樓(범종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범종루는 일주문과 만세루(萬歲樓), 대웅전(大雄殿)과 한 축을 이루는 건물로 1935년 영성루터에 이월영(李月泳), 박춘광(朴春光)이 중건한 중층 종루이다. 이곳에는 불전사물인 목어와 운판, 범종, 법고 등이 있다. 목어는 물에 사는 짐승, 운판은 날짐승, 법고는 축생, 범종은 허공중생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친다. 범종은 아침에는 28번, 저녁에는 33번을 친다. 아침에는 석가모니로부터 달마조사에 이르는 28대 조사들의 깨달음을 본받고자 하는 의미로 28번, 저녁에는 욕계(欲界) 6천의 제2천인 33천(忉利天, 도리천)을 위해서 33번의 종을 울린다.
범종루를 지나면 서포 김만중의 부친 김익겸(金益兼, 1615~1637)이 쓴 '六朝古寺(육조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긴 건물 만세루(萬歲樓)가 나온다. 육조는 혜능을 가리킨다. 혜능이 중국의 조계산에서 수행을 하여 6대 조사와 남종선의 개조가 된 것처럼 선암사도 조계산에 자리잡은 인연을 바탕으로 혜능의 선맥을 이어받아서 선풍을 일으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익겸은 '六祖'를 왜 '六朝'로 쓴것일까? 이 건물은 강당과 포행을 위한 공간으로 수많은 학승들이 여기서 강학을 하였다. 1824년 대웅전과 함께 해붕 전령, 눌암 식활 등이 중창한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식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초기의 가람배치에서 강당은 보통 대웅전의 뒤에 있지만 조선시대의 사찰에서는 강당이 대웅전 앞에 위치한다. 다른 사찰에서는 일반적으로 주축선상에 누문(樓門)을 두고 누하(樓下)를 통해서 안마당(中庭)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선암사는 이 누문을 닫아서 만세루의 좌우로 돌아서 들어가가게 하였다.
만세루를 옆으로 돌아서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면 우선 동서 삼층석탑(仙巖寺三層石塔, 보물 제395호)이 눈에 띈다. 그리고 중정을 중심으로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311호)과 설선당(說禪堂), 심검당(尋劍堂), 만세루가 ㅁ자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의 좌우에는 응향각(凝香閣)과 지장전(地藏殿)이 있고, 지장전 가까이에 범종각을 세웠다. 대웅전 앞에 있는 높이 4.7m인 두 기의 삼층석탑은 두 층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세 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인데, 규모나 수법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사람이 동시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옥개석 정상에 있는 두 층의 굴곡을 이룬 괴임은 희귀한 수법이다. 동삼층석탑의 노반 위에 놓여 있는 석재들은 원래의 부재가 아니다. 탑의 각 부에는 약간의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상하의 비율이 건실하고 우아한 이 탑은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상하기단 탱주의 수가 하나로 줄고, 옥개석 받침의 수도 4층으로 줄어든 것으로 볼 때, 이 탑들은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 경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986년 동탑을 해체 보수할 때 1층 탑신의 하부에 있는 사리공에서 고려시대(11세기)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요(龍雲里窯)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삼이소호(靑磁三耳小壺)와 조선 중기(16세기 전반)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요(雲垈里窯)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분청사기분장유개호(粉靑沙器粉粧有蓋壺), 금동사리탑(金銅舍利塔) 등 3종 3점의 유물(仙巖寺三層石塔內發見遺物, 보물 제955호)이 발견되었다. 분청사기항아리 속에 비단으로 싸인 채 발견된 금동사리탑은 높이 6.2cm, 너비 1.9cm의 팔각원통형이다. 금동사리탑의 안에 들어 있던 팔각원통형의 수정용기 속에는 회백색의 타원형 사리 한 과가 봉안되어 있었다. 이 금동사리탑은 옥개에 표현된 기와골과 귀꽃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삼층석탑과 대웅전 사이에는 괘불대를 세우는 돌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선암사 괘불(仙岩寺掛佛, 보물 제1419호)은 가로 6.82m, 세로 12.15m로 한국에서 가장 큰 걸개탱화 가운데 하나다. 이 괘불은 화면구성이 단순하여 석가여래를 화면 가득하게 그린 그림으로 평상시에는 대웅전의 후불탱화 뒤 왼쪽 벽에 걸려 있다. 1753년(영조 29년) 상월 새봉의 발원으로 천삼백 명의 승려가 백일기도를 올리는 가운데, 쾌윤(快允) 금어金魚)의 주도하에 많은 화승과 화사들이 참여하여 이 괘불을 그렸다고 한다. 이 괘불은 사월 초파일 불탄일 행사 외에 나라에 내우외환이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기우제를 지낼 때도 사용되었다.
일주문과 범종루, 만세루를 잇는 중심축에 위치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단청을 하지 않아서 다소 질박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의 현판글씨는 순조의 장인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쓴 것이다. 글쓴이의 이름과 낙관은 뒤에다가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현판의 오른쪽 위에 '金祖淳書'라는 글씨가 마치 두인(頭印)처럼 새겨져 있다. 원래 두인은 왕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조순이 두인을 했다는 것은 그가 왕에 버금가는 권력의 실세였음을 의미한다. 대웅전 처마에는 신임 주지의 당선을 축하하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선암사는 2006년에 주지 임명을 둘러싸고 승려들 사이에 장기간의 폭력사태가 벌어져 세간에 물의를 빚은 바 있다. 욕심을 버려야 할 승려들이 염불은 안중에도 없고 잿밥에만 관심을 쏟는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대웅전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이후 1759년과 1823년의 화재로 두 번이나 불에 탔다. 지금의 대웅전은 1824년(순조 24년) 중건한 건물이지만 기단과 돌계단은 고려시대의 것이다. 다듬돌로 쌓은 높이 1m의 기단 위에 원형주석(圓形柱石)을 놓고 민흘림 원형기둥을 세웠다. 용머리를 장식한 기둥의 위로는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의 공포를 짜 올리고, 매칸마다 세 개의 주간포(柱間包)를 배열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하다. 빗꽃살을 둔 사분합문(四分閤門)의 창호는 색이 바랜 단청으로 고색이 묻어난다. 처마에는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기법을 보여준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신 대웅전의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단청을 하였다. 오랜 세월 탓으로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아직 그 문양만은 선명하다. 통문(通門)을 연결하는 대들보는 박공면에서 합각부분까지 용문양을 장식하여 걸쳤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에 중건할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학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석가모니불 뒤에는 영취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는 석가모니불과 8대 보살, 10대 제자, 12명의 신장상을 비단에 그린 초대형 영산회상도(가로 3.94m, 세로 5.9m)가 후불탱화로 걸려 있다. 전체적으로 녹색과 붉은색이 대비되어 화려하고 장식적인 효과로 인해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이 탱화는 1765년(영조 41년)에 제작된 것으로 초대형의 석가모니불을 중상단에 배치하고 다른 협시상들은 작게 그렸으며, 이 협시상들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고 있다. 이러한 군도식구도법(群圖式構圖法)이나 석가모니불의 머리에 장식된 계주, 장식성이 강한 광배, 둥근 얼굴에 가는 눈, 작은 입, 나선형의 콧수염 등에서 조선시대 후기 불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중정의 서쪽에 자리잡은 설선당은 돌을 쌓고 흙을 바른 담이 둘러쳐져 있어서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설선당은 선암사 6방 중 염불원(念佛院)으로 예전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독송하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행자들의 교육과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쓰인다. 외부에서 볼 때는 단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2층으로 되어 있다. 맞배지붕이 이어져 ㅁ자를 이룬 건물들이 중앙의 작은 마당을 향해서 배치되어 있고 외부로는 문이 별로 없어 폐쇄적인 느낌을 준다. 설선당 상량문에는 1824년에 대웅전을 복원하고 그 이듬해 심검당(尋劍堂)과 함께 중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정의 오른쪽에 설선당과 마주보고 있는 심검당은 선암사 6방 중 하선원(下禪院)으로 납자(衲子)들이 처음 선방에 들어와서 수행을 하면서 거처하는 공간이다. 건물의 구조는 설선당과 비슷하여 가운데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팔작지붕이 이어진 ㅁ자형 건물로 외부에서는 단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2층이다. 이 건물도 바깥으로는 벽과 창문이 둘러져 있어 다소 폐쇄적이다. 벽면의 환기창에는 수(水)자나 해(海)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산강수약의 지세를 가진 선암사의 수세를 북돋아서 화재를 예방하려는 의미로 보인다. 과거 여러 차례 큰 불로 소실된 경험이 있는 선암사가 화재예방을 위해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고 있는 흔적이다. 같은 이유로 예전에는 선암사 경내에 석등이 없었다고 하는데, 최근에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석등을 만들어 세웠다.
대웅전 서쪽에 남향으로 앉아 있는 응향각(應香閣)은 대웅전을 관리하는 승려가 기거하는 요사채로 여느 가정집처럼 친근감을 주는 건물이다. 황토흙으로 바른 벽이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파스텔톤을 띠고 있다. 이 건물은 홑처마 맞배지붕의 전후퇴집으로 외곽에 담을 둘러 쌓았다. 맨 오른쪽의 지붕이 북쪽으로 꺽여서 ㄱ자형을 이룬 것과 천장을 낮게 하고 동자주를 높게 하여 서까래와 천장 사이를 드나들 수 있게 한 것이 특이하다. 대웅전의 동쪽에서 서향으로 앉아 있는 겹처마 맞배지붕의 지장전(地藏殿)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비롯한 명부의 시왕(十王)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협시하고, 왼쪽에는 2,4,6,8,10왕이, 오른쪽에는 1,3,5,7,9왕이 모셔져 있다. 이 건물은 1823년(순조 23년)에 불에 타버린 일년 뒤에 해붕 전령과 눌암 식활, 익종 등이 중건하였다. 지장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선암사에서 가장 화려한 조각상들이 모셔져 있다. 공포형식은 주심포에 익공식을 가미하였으며, 약하게 돌출된 8각형의 외목도리가 독특하다. 박공부분에는 풍판이 달려 있으며, 단청은 비교적 단출하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닷집이 간략하고, 문은 빗살창을 단 이분합문(二分閤門)이다.
대웅전 뒤로 한 단 높은 축대의 계단을 오르면 보물장(寶物藏)과 삼전(三殿), 조사당(祖師堂), 불조전(佛祖殿), 팔상전(八相殿, 전남유형문화재 제60호), 원통전(圓通殿, 전남유형문화재 제169호), 첨성각(瞻星閣), 장경각(藏經閣)이 있는 원통전 영역으로 들어선다. 마당의 왼쪽에는 사내 보물을 보관하는 보물장, 오른쪽에는 조사당과 불조전, 팔상전 등 세 전각을 관리하는 승려가 거처하는 삼전이 있다. 삼전은 팔상전 우측에 주축의 직각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앞쪽 왼쪽부터 조사당과 불조전, 팔상전이 자리잡고 있으며, 불조전과 팔상전 사이의 좁은 통로를 통해서 원통전의 독특한 건물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원통전의 서쪽에는 첨성각과 장경각이 위치하고 있다.
조사당은 정면 한칸, 측면 한칸의 작은 전각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이곳에는 중국에 선을 전한 제28대 조사 보리 달마를 비롯해서 제33대 조사 육조 혜능, 제35대 조사 마조 도일(馬祖道一) 등 중국의 5대 선사와 태고종의 종조이자 제57대 조사인 태고 보우, 선암사의 선법을 널리 알린 침굉 현변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불조전은 일반적으로 사찰의 개창자나 중창자, 중수자, 역대 유명한 선조사(禪祖師)들의 진영을 모시는 전각이다. 그런데 선암사 불조전에는 과거 7불과 미래 천불의 불조인 53불 등 60불이 모셔져 있다. 이들은 1702년(숙종 28년)에 일곱 장의 탱화로 나뉘어서 제작되었는데, 지금은 다섯 장만 남아 있다. 1761년에 상월 새봉과 서악이 중창한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팔작기와지붕으로 대들보 위의 우물천장에는 물고기, 자라, 모란 등을 조각해서 붙여 놓았다.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전생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를 모신 전각이다. 1761년에 상월과 서악이 중창한 이 전각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으로 내부의 대들보 위에는 널판으로 천장을 만들고 불단 위에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팔상전 뒤편 축대 위에는 높이 11.5m, 수관폭 16m, 밑둥치 지름 82cm에 이르는 약 620년 묵은 유명한 백매(白梅) 한 그루가 있다. 팔상전에는 아미타불이 주불로 봉안되어 있고, 정면 후벽에는 화엄경변상도(
화엄경변상도는 1780년(정조 4년)에 쾌윤 금어가 제작한 가로 2.48m, 세로 2.79m의 비단 바탕에 채색그림이다. 이 불화는 화엄경의 내용 가운데 7처9회의 설법장면을 쉽게 알 수 있도록 그림으로 나타냈지만, 구도는 꽤나 복잡한 그림이다. 화면 상단의 하늘에는 네 번의 설법장면, 땅에는 다섯 번의 설법장면이 수미산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구름과 분신불(分身佛)을 그려 넣어서 공간감을 표현하였다. 그 아래에는 찰종(刹鐘)이라는 글씨와 큰 연못이 그려져 있다. 화면 하단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찾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즉 장엄한 연화장(蓮華藏) 세계와 일곱 군데에서 열린 아홉 번의 설법, 불법을 구하는 선재동자의 구도자적 모습 등이 표현되어 있다. 청색과 홍색, 녹색을 주로 사용해서 색감이 강렬하고 선명하지만 다소 어두운 느낌을 주는 선암사 화엄경변상도는 구도와 색채 등에서 1770년에 제작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와 매우 비슷하여 같은 계통의 금어들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팔상전에는 보통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봉안하지만 선암사에는 화엄경변상도가 봉안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화엄경변상도는 한국에 단 세 폭밖에 없는데, 나머지 두 폭은 송광사와 쌍계사에 있다.
원통전은 선암사에서 가장 개성적인 건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1660년(현종 1년)에 경준, 경잠, 문정 등이 초창하여 1698년(숙종 24년) 호암 약휴가 중창하였고, 1824년(순조 24년) 해붕 전령, 눌암 식활, 익종 등이 재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T자형 건물로, 지붕 전면을 길게 돌출시켜 합각이 세 곳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물 정면의 어칸에는 화려한 꽃창호를 달았고, 그 아래 청판에는 달나라 계수나무 밑에서 방아를 찧는 토끼와 파랑새가 그려져 있다. 원통전의 내부는 보가 없는 구조로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같은 형식이며, 불상을 안치하는 불단이 설치된 내진(內陣, 본당)과 외진(外陣)으로 나뉘어져 있다.
호암 약휴가 원통전을 중창할 때의 일이 전설로 내려온다. 호암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려는 원을 세우고 장군봉의 배바위에서 백일동안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백일기도를 마치고도 관세음보살이 끝내 나타나지 않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바위절벽 밑으로 몸을 던졌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코끼리를 탄 여인이 내려와 그를 받아서 배바위에 도로 올려놓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호암은 순간 이 여인이 관세음보살인 것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원통전을 지어서 그가 친견한 관세음보살의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고 한다. 원통전을 지을 때 승선교도 함께 놓았다고 한다. 눌암이 원통전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고 2년 뒤에 태어난 순조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하사한 ‘人, 天(인, 천)’, ‘大福田(대복전)’ 등 친필 현판은 이 건물의 안에 걸려 있다.
원통전의 서쪽에 있는 건물인 첨성각은 원통전을 관리하는 스님이 사는 요사채이다. 첨성각이란 별을 보는 전각으로 승려들이 별이 보이는 새벽에 일어나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첨성각의 서쪽에 있는 장경각은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팔작지붕이다. 장경각의 현판은 염재 송태회(念齋宋泰會, 1873~1943)의 글씨다. 이 건물은 원래 판전(板殿)이라는 이름으로 팔상전 옆에 있었으며, 장경각의 본래 이름은 성수전(聖壽殿)으로 왕실의 명복을 기원하는 전각이었다. 장경각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어칸부분의 계단에 해태모양, 사자모양을 하고 있는 소맷돌이다.
원통전의 뒤로 더 올라가면 응진당(應眞堂)과 달마전(達磨殿), 벽안당(碧眼堂), 진영당(眞影堂), 미타전(彌陀殿), 산신각(山神閣)이 모여 있는 응진당 영역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선암사에서 가장 뒤쪽에 별도로 세워진 작은 승원 영역인 칠전선원(七殿禪院)으로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여 독립된 공간을 이루고 있다. 정문격인 문각(門閣)에는 눌암 식활이 쓴 '湖南第一禪院(호남제일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선암사 6방 중 상선원(上禪院)인 칠전선원은 하선원에서 어느 정도 수행을 마친 납자들이 참선을 하는 공간이다. 조선시대 4대 선원 가운데 하나였던 칠전선원은 수많은 고승들이 거쳐갔던 유서깊은 선원이다. 주불전인 응진당은 석가모니의 설법장인 영산회상에서 유래한 전각으로 원래는 유마경(維摩經)이나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나오는 제자들을 모셔야 하지만,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16나한(十六羅漢)을 봉안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래서 응진전(당)을 나한전(羅漢殿) 또는 영산전(靈山殿)이라고도 부른다. 선암사 응진당에는 삼존불(三尊佛)과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삼존불은 석가모니본존불(釋迦牟尼本尊佛)과 협시보살인 미륵보살(彌勒菩薩),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이다.
응진당을 중심축으로 한 좌측에는 달마전, 우측에는 진영당이 세워져 있다. 칠전의 응진당 좌측에는 달마전과 벽안당이 ㄱ자 형태로 중심축을 향해서 앉아 있다. 달마전은 선암사 선방이고, 벽안당은 승려들이 생활하는 요사채다. 진영당은 칠전의 응진당 우측에 중심축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는 건물로 선암사의 중창주나 고승대덕의 진영을 모셔놓은 곳이다. 이곳에는 아도화상을 비롯하여 연기 도선, 대각국사 의천, 호암 약휴 등 선암사에 주석했던 창건주와 중창주들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미타전은 응진당 우측에 나란히 위치한 요사형식의 승방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미타전은 대웅전과 함께 사찰에서 양대 불전에 속하는 중요한 전각이었다. 지금은 미타전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 다른 특별한 의미는 없는 전각이다. 산신각은 응진당 바로 뒤에 있는 산신을 모시는 건물이다 산신각은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선암사 산신각 또한 마찬가지다. 낮고 단출한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인 산신각 안에는 산신탱화가 모셔져 있다.
*응진당과 무우전 담장 밖에 활짝 핀 청매화
칠전의 동쪽은 담으로 둘러싸여 또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이루는 무우전(無憂殿) 영역이다. 이곳은 선암사에서 가장 외진 곳으로 한적하기 그지없어 승려들의 선방으로 제격이다. 태고종(太古宗) 종정(宗正)의 거처인 무우전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ㄷ자형으로 뒷마당을 둘러싼 무우전의 북쪽 끝에 자리잡은 건물은 각황전(覺皇殿, 전남문화재자료 제177호)이다. 무우전은 전면이 팔작지붕이고 양측면의 날개는 맞배지붕에 한식기와를 올려서 사찰의 요사채라기보다는 평범한 양반집처럼 보이는 건물이다. 선암사 6방 중 정읍원인 무우전은 밀교계통의 다라니(陀羅尼)를 독송하는 공간이다.
각황전의 본래 이름은 장륙전(丈六殿)이었다. 석가모니의 몸을 장륙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장륙전에는 장륙존상을 봉안했을 것이다. 861년(신라 경문왕 원년)에 연기 도선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장륙전은 1092년(고려 선종 9년)에 의천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60년(현종 1년)에 복원하였고, 1760년(영조 36년)에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각황전은 사방 한칸의 작은 전각이지만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의 겹처마 팔작지붕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내부구조는 선암사 원통전이나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같은 무량구조(無梁構造)로 천장에 우물천장을 설치하였다. 불단에는 연기 도선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철불좌상을 1900년경에 석고로 다시 도색하여 봉안하였다. 응진당과 무우전의 담장 밖으로는 청매화가 활짝 피어 꽃터널을 이루고 있다. 무우전의 담장 옆에는 높이 12m, 수관폭 14.5m, 밑둥치 지름 83cm인 약 550년 된 홍매(紅梅)가 있는데, 꽃은 아직 피지 않고 꽃봉오리만 맺혀 있다. 홍매화는 아직 철이 좀 이른 듯하다.
*적묵당 담장에 핀 춘백꽃
*춘백꽃 낙화
대웅전 영역과 원통전 영역의 서쪽에는 아래에서부터 해천당(海川堂), 적묵당(寂默堂), 창파당(滄波堂), 무량수전(無量壽殿), 삼성각(三聖閣)이 모여 있는 천불전(千佛殿) 영역이 있다. 담을 두른 해천당은 객사로 선암사를 찾은 객승이나 신도들이 묵는 곳이다. 칠도 하지 않은 판자에 갈겨 쓴 듯 오목새김한 현판이 특이하면서도 재미있다. 해천당은 선암사의 옛 이름인 해천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화마를 막기 위한 벽사의 의미가 담겨 있다. ㄱ자형 건물인 해천당은 정면은 팔작이고 측면은 맞배지붕에 한식기와를 올렸다. 툇마루 앞에 있는 오래 묵은 매화나무에 꽃봉오리가 이제 막 피어나고 있다.
1997년에 새로 지은 적묵당은 T자형 건물로 대중들이 공양을 하는 곳이다. 이 건물은 홑처마 맞배집으로 담을 둘러 폐쇄적 경향을 보인다. 공양간과 뒷간, 세면장 등 세 곳을 일러 삼묵(三默)이라고 한다. 이것은 공양을 할 때나 대소변을 볼 때, 씻을 때는 항상 엄숙해야 한다는 뜻이다. 적묵당 담장 밖에 서 있는 춘백나무에는 붉은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짓붉은 꽃잎 속에 노란 속살을 내밀고 있는 춘백은 아름다우면서도 노골적으로 요염한 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세월이 흐르면 지기 마련이다. 색이 바랜 채 무수히 떨어져 있는 꽃잎들을 바라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대웅전의 서쪽 끝에 있는 창파당은 예전의 선암사 6방 중 도감원(都監院)으로 선암사의 살림살이를 관장하는 곳이었는데, 지금도 종무소와 강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1844년 이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단층의 낮은 ㄱ자형 건물에 누(樓)가 있는 ㄹ자형 건물이 이어져 ㅁ자를 이루고 있어 전통적인 양반집 안채와 같은 느낌을 준다. 창파당이라는 이름도 선암사의 산강수약한 지세를 보강하고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무량수전은 천불전이라고도 하는데 선암사 6방 중 강원으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無量壽閣(무량수각)'이라는 편액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다. 무량수전도 ㅁ자형 건물로 구배에 따른 물매와 이음새가 아름답다. 건물의 형식은 양반집의 안채와 비슷하지만 그 규모가 훨씬 커서 압도적인 느낌을 주며, 중앙의 마당에는 소대(消臺)가 있다. 후퇴가 있는 남쪽의 건물은 무고주오량(無高柱五梁)집으로 서까래와 천정 사이가 벌어져 있어 특이하다. 천불전중수상량문(千佛殿重修上樑文)에 의하면 이 건물은 만력연간(1573~1619) 후기에 창건되었으며, 숭정기원후사갑신(崇禎紀元後四甲申)인 1844년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불전 영역에서 가장 뒤쪽이면서 대웅전의 북서쪽에 자리잡은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을 모신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작고 아담한 전각이다. 삼성각의 편액 글씨는 근원 구철우(槿園具哲祐, 1904~1989)의 작품이다. 삼성각은 불교가 토착화하면서 한민족 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신앙에 수용되어 생긴 신앙형태이다. 내부에는 칠성단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독성단과 산신단을 배치하였다. 무량수전과 삼성각 앞에 있는 아름드리 누운 소나무 한 그루가 고풍스런 건물과 잘 어울린다.
선암사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건물이 있다. 해천당 바로 옆에 위치한 한국의 사찰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화장실이라는 선암사 뒷간이 바로 그것이다. TV에 이 뒷간을 배경으로 노승과 동자승이 나오는 불가리스 광고가 나간 뒤로 이곳은 선암사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건물 입구에는 뒷간을 고어로 표기한 팻말이 붙어 있다. 고풍스런 목조건물인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一자형 건물의 북쪽 중앙에 맞배지붕을 붙여서 T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건물을 지면에서 높게 지어 냄새를 멀리하고, 건물의 앞뒤로는 살창을 두어서 바람이 잘 통하게 하였다.
초월적인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진성'과 죽음에 직면한 한 남자를 구해 준 인연으로 파계하고 속세를 떠도는 '청화'라는 두 여승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서 현대인들에게 참다운 자유와 진리에 이르는 길을 깨우쳐 주는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선암사는 고풍스런 건물에 나무와 꽃들이 어우러져 친근하면서도 정감을 주는 그런 절이다. 옛 멋이 담뿍 배인 소박하고 아름다운 선암사를 떠나 운수암(雲水庵)으로 가는 길에 오른다.
*선암사중수비
청매화가 활짝 핀 무우전 옆길을 따라서 운수암(북암)으로 오르는 길가에 선암사중수비(仙岩寺重修碑, 전남유형문화재 제92호)가 세워져 있다. 정유재란 당시 불에 타버린 선암사를 호암 약휴가 중수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이 비석은 거북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형태다. 거북받침돌의 용두화된 머리의 입은 여의주를 물지 않은 채 꼭 다물고 있으며, 그 사이로 이빨이 드러나 보인다. 목은 짧고 굵으며, 앞쪽 두 발을 안쪽으로 모아 잔뜩 웅크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거북받침돌의 등에는 이중의 육각무늬가 선명하게 오목새김되어 있고, 그 바깥으로는 이중의 띠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거북받침돌의 한가운데에는 장방형으로 홈을 파서 비신을 끼워 넣어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사각형의 머릿돌 하단에는 연꽃을 새겼고, 그 아래로 3단의 층급받침을 비신과 연결시켰다. 머릿돌 상단에는 몸을 뒤튼 채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의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신의 앞면 상단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권규(權珪)가 전서체로 쓴 ‘조계산선암사중수비(曹溪山仙巖寺重修碑)’라는 제액이 있으며, 비의 제목은 해서체로 ‘승평부조계산선암사중수비명병서(昇平府曹溪山仙巖寺重修碑銘幷書)’라 오목새김하였다. 비문은 선교랑(宣敎郞) 채팽윤(蔡彭胤)이 짓고, 가선대부 이진휴(李震休)가 글씨를 썼다. 비문의 끝에 보이는 ‘숭정기원후팔십정해임종월일입(崇禎紀元後八十丁亥林鍾月日立)’이라는 구절로 볼 때 이 비석은 1707년(숙종 33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운수암(북암)의 관음전
*운수암에서 바라본 조계산 장군봉과 소장군봉
선암사중수비를 지나면 냉골 계곡이 나타난다. 다리를 건너 가파른 길을 오르면 비구니 도량인 운수암에 다다른다. 운수암은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조용하기만 하다. 화단에는 상사화가 꽤 많이 자랐다. 운수암 마당에서 장군봉과 소장군봉을 바라본다. 해우소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서 냉골을 오르기 시작한다.
*소장군봉 능선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선암사와 상사호
냉골에는 조릿대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산길을 오르다가 맞은편에서 내려오던 고로쇠수액 채취꾼이 이 길은 등산로가 아니란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곡을 따라 계속 오르기로 한다. 얼마쯤 가다가 보니 과연 그의 말대로 길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소장군봉 능선을 가늠하고 허리까지 오는 조릿대를 헤치면서 가파른 산기슭을 오르노라니 몹시 힘이 든다. 산기슭 중간쯤에서 만난 아름드리 고로쇠나무에는 수액을 채취하기 위한 가느다란 플라스틱 관이 수없이 꽂혀 있다. 고로쇠수액이 관절염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수액은 사람으로 말하자면 혈액과 같은 것이다. 생명활동에 필수적인 자신의 수액을 인간에게 제공하는 고로쇠나무야말로 보살이 아니고 무엇이랴! 나무고로쇠보살!
한참동안 조릿대와 씨름하면서 가까스로 소장군봉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에는 대각암에서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잘 나 있다. 능선을 오를수록 길이 점점 가파라진다. 전망이 좋은 암봉에 이르러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바위에 올라서니 선암사와 상사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 장군봉 정상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조계산 장군봉 정상
*남쪽의 고동산에서 깃대봉을 지나 장군봉에 이르는 호남정맥
*조계산 북릉과 장밭골
*조계산 서릉의 연산봉과 천자암봉
전망대 암봉에서 장군봉까지는 상당히 가파른 길이다. 산기슭에는 활엽수와 조릿대가 우거져 있다. 이른 봄의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884m)에 올라선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한가로이 흘러가고 바람도 잠잠하다. 저 멀리 남쪽의 고동산에서 깃대봉을 지나 장군봉에 이른 호남정맥은 장밭골(장박골) 몬당을 넘어 북쪽으로 오성산을 향해서 치달려 간다. 장군봉 정상에서 섬진강을 굽이굽이 돌아서 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호남정맥과 감격적인 해후를 한다. 호남의 등줄기를 달려온 산맥의 유장한 흐름이 온몸에 느껴진다.
조계산은 장밭골 삼거리 서쪽의 무명봉과 장밭골 몬당을 잇는 북릉의 동쪽과 서쪽에서 장밭골을 사이에 두고 동릉과 서릉 두 능선이 남쪽으로 나란히 뻗어간다. 동릉은 북쪽의 접치에서 장밭골 몬당과 장군봉, 깃대봉을 지나 남쪽의 고동산으로 뻗어가는 호남정맥 주능선을 중심으로 깃대봉에서 남동쪽으로 갈라져 용마봉, 남암재로 이어지는 지능선과 장군봉에서 동쪽으로 소장군봉을 지나 선암사로 뻗어내린 지능선, 장군봉 북쪽의 범바위봉에서 북동쪽으로 달리다가 다시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지능선 등 세 개의 지능선이 있다. 서릉은 장밭골 삼거리 서쪽의 무명봉(지도에는 이 봉우리가 연산봉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음)에서 남쪽으로 연산봉과 천자암봉으로 뻗어간 다음 천자암봉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계봉으로 달려가는 주능선을 중심으로, 장밭골 삼거리 왼쪽에 있는 무명봉에서 서쪽의 786.6봉에 이른 다음 북쪽의 오두재로 뻗어가는 지능선과 786.6봉에서 남서쪽의 송광사로 뻗어내린 지능선이 있다.
조계산의 주요 계곡으로는 우선 동쪽의 선암굴목재에서 발원하여 상사호로 흘러드는 선암사골과 장군봉에서 발원하여 선암사골로 합류하는 냉골이 있다. 동릉과 서릉 사이에는 장밭골계곡이 남쪽으로 흘러 주암호로 합류하고, 북쪽에는 장밭골 몬당에서 발원하는 신전리계곡이 동쪽으로 흘러 이사천(伊沙川)으로 합류한다. 서쪽에는 연산봉에서 발원한 피아골과 송광굴목재에서 발원한 홍골이 합류하여 이루어진 송광천(松光川)이 서쪽의 주암호로 흘러든다. 조계산의 서쪽으로는 섬진강의 지류인 보성강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며, 그 건너편에 모후산(母后山, 919m)이 솟아 있다.
장군봉 정상에서는 조계산 주능선과 장밭골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계산은 전형적인 육산이어서 후덕하고 인자한 느낌을 주는 산이다. 장군봉 남쪽 산허리에는 '노아의 방주'와 유사한 전설이 깃든 배바위가 있는데, 선암사에서 이 바위를 거쳐 장군봉으로 오를 수도 있다. 배바위에는 아주 먼 옛날 큰 홍수가 나서 온 세상이 물에 잠기자 사람들이 커다란 배를 만들어 이 바위에 붙들어 맨 채 몇 날 며칠을 기다린 끝에 살아남아서 새 세상을 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 이 바위는 신선들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 하여 선암이라고도 한다. 이 바위에서 선암사라는 절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장밭골 몬당
장군봉을 떠나 북쪽으로 호남정맥의 마룻금을 걸어서 범바위봉을 넘어 장밭골 몬당에 이른다. 장밭골이란 순천의 장안사람들이 이곳에서 밭을 일구고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몬당은 마루(봉우리)의 이 지방 사투리라고 한다. 호남정맥은 여기서 북쪽으로 접치를 지나 오성산으로 뻗어간다. 장밭골 몬당은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전망은 별로 좋지 않다. 북릉은 이 장박골 몬당에서 시작된다.
*북릉 능선의 조릿대숲
*북릉의 무명봉에서 바라본 장밭골 몬당
조계산 주능선은 부드러운 흙길인데다가 경사도 완만해서 느긋하게 산책하는 기분으로 산길을 걷는다. 예전에 조계산에 들어왔을 때는 키를 넘는 조릿대숲을 헤쳐가면서 북릉길을 걸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동안 사람들이 많이 다닌 탓인지 능선에는 큰 길이 나 있다. 조릿대도 키가 훨씬 작아진 듯한 느낌이다. 연산봉 사거리와 작은 굴목재, 장군봉 갈림길인 장밭골 삼거리 안부에는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다. 여기서 남쪽으로 장밭골을 따라서 작은 굴목재로 내려갈 수 있다. 장밭골 삼거리 안부 바로 서쪽에 있는 무명봉에서 조계산 서릉이 시작된다. 연산봉과 송광사, 선암사, 장군봉 갈림길인 연산봉 사거리를 지난다. 여기서 서쪽의 피아골을 타고 송광사로 내려갈 수 있다. 연산봉 사거리를 지나면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뜨음해진다.
*연산봉에서 바라본 장군봉
*장밭골 몬당에서 연산봉에 이르는 능선
*연산봉에서 바라본 천자암봉
활엽수와 잡목이 우거진 호젓한 산길을 걸어서 연산봉(851m)에 올라선다. 장군봉이 동릉의 주봉이라면 연산봉은 서릉의 주봉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장군봉을 중심으로 한 동릉을 조계산, 연산봉을 중심으로 한 서릉을 송광산이라고 하였다. 연산봉도 전망이 매우 좋아서 조계산맥과 장밭골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장밭골 건너편으로 장군봉과 배바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장밭골 몬당으로부터 연산봉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능선이 정겹기만 하다. 연산봉 남쪽에는 앞으로 가야 할 천자암봉이 솟아 있다.
*송광굴목재
*천자암봉에서 바라본 연산봉과 장군봉
*천자암봉에서 바라본 장밭골 건너편의 선암굴목재와 깃대봉
연산봉을 내려가는데 한 노인이 산길을 닦고 있다.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닦는 것이리라.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노인의 얼굴에는 행복한 표정이 역력하다. 산중에서 만난 노인에게서 한량없는 깨우침을 얻는다. 사람으로서 걸어가야 할 큰 길을 닦는 사람은 도인이요, 이타행(利他行)을 행하는 사람은 보살이라. 이 노인이야말로 바로 그런 도인이나 보살이 아닐런지.....
송광사와 선암사, 천자암봉과 연산봉 사거리인 송광굴목재에는 쉼터가 있다. 여기서 서쪽의 홍골을 타고 송광사로 내려갈 수 있다. 조계산에는 굴목재가 두 군데 있다. 호남정맥의 깃대봉과 배바위 사이에 있는 재를 선암굴목재, 연산봉과 천자암봉 사이에 있는 재를 송광굴목재라고 한다. 이 지방 사람들은 굴목재를 굴맥이재라고 부른다. '굴'은 '골(골짜기, 계곡)'의 이 지역 사투리로, 옛부터 이곳 사람들은 '장밭골'을 '장밭굴'이라고 발음한다. 그러니까 '굴목재'는 '골짜기를 가로막고 있는 고개', 또는 '골짜기로 통하는 목이 되는 고개' 쯤 될 것이다. '맥이'는 '목'이 변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지명은 그 지방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름으로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천자암봉(天子庵峰, 755m) 정상에는 꽤 큰 바위 하나가 비스듬히 박혀 있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니 연산봉 너머로 장군봉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천자암봉에서는 선암굴목재와 깃대봉이 장밭골 건너편으로 바로 앞에 보인다. 천자암봉이라는 이름은 이 봉우리의 남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천자암(天子庵)에서 유래한 것이다.
*천자암봉 기슭에 자리잡은 천자암
*천자암의 쌍향수
천자암봉을 남서쪽으로 돌아들면 조계종의 대표적인 참선도량 가운데 하나인 천자암에 이르게 된다. 천자암은 송광사의 산내암자이다. 이 암자는 송광사 제9세 국사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담당이 금나라의 왕자였던 까닭에 암자의 이름을 천자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법당 뒤 나한전 옆에는 수령 약 800년, 높이 12.5m에 이르는 아름드리 곱향나무 쌍향수(雙香樹, 천연기념물 제88호)가 서 있다. 이 쌍향수는 능견난사(能見難思), 비사리 구시와 함께 송광사 3대 명물 가운데 하나이다.
줄기가 배배 꼬여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두 그루의 곱향나무에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知訥)과 담당국사에 관련된 전설이 전해온다. 금나라 장종(章宗) 왕비의 고질병을 치료해준 인연으로 보조국사는 왕자인 담당을 제자로 삼아서 고려로 데리고 돌아왔는데, 이때 보조국사가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천자암의 뒤뜰에 나란히 꽂아둔 것이 자라서 이 쌍향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쌍향수를 언뜻 보면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게 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제자인 담당이 스승인 보조국사에게 예를 표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조국사와 담당국사의 연대 차이가 백여 년이나 나기에 이 전설은 신빙성이 없다. 이 쌍향수를 만지기만 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얼레지꽃
*조계봉 기슭에서 바라본 조계산 홍골과 서릉
천자암을 떠나 천자암봉 산허리를 북서쪽으로 횡단해서 조계봉 능선의 운구재(지도에는 인구치로 표기됨)로 내려선다. 천자암봉 서쪽 산기슭에는 다른 곳과는 달리 소나무가 무성하다. 운구재에서 홍골로 내려가는 길가에는 얼레지가 한창 피어나고 있다. 보라색 꽃잎을 뒤로 활짝 젖히고 아래를 향해서 피어난 얼레지가 그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얼레지(Erythronium japonicum)는 백합과(百合科, Liliaceae)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비늘줄기가 달린다. 마주보고 달리는 두 장의 잎에는 얼룩덜룩한 무늬가 생기는데, 어린 잎은 이른 봄철에 나물로 먹을 수 있으며, 비늘줄기는 초가을에 캐서 쪄먹을 수 있다. 비늘줄기에는 건위(健胃), 진토(鎭吐), 지사(止瀉)의 효능이 있어 약이 귀하던 시절에는 위장염과 이질, 구토 등의 치료제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높은 산악지대의 숲속 그늘에서 자라는 얼레지는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들 중 하나다.
*홍골의 송광굴목재(혹은 연산봉, 왼쪽)와 천자암봉(오른쪽) 갈림길
*봄까치풀꽃
*송광사 대나무숲길
홍골의 천자암과 송광굴목재(혹은 연산봉) 삼거리로 내려오면 사실상 산행은 끝나게 된다. 길가 밭둑에는 푸른 보라색의 작고 귀여운 봄까치풀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이 풀의 원래 이름은 개불알풀이다. 꽃이 지고 나서 맺는 열매의 모양이 꼭 개의 불알처럼 생긴 까닭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봄까치풀은 현삼과의 두해살이풀로 전초를 파파납(婆婆納)이라 하여 옛날에는 산기(疝氣, Hernia), 요통, 백대(白帶) 등을 치료하는 데 쓰기도 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벋어 올라간 대나무숲은 보기만 해도 서늘한 기운을 느낀다. 대나무숲을 내려가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자 조계총림인 승보종찰(僧寶宗刹) 송광사에 이른다. 조계산에서 내려오면 송광사 정문격인 우화각(羽化閣)으로 들어가기 전,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사방 한칸의 매우 작은 전각인 세월각(洗月閣)과 척주당(滌珠堂)을 만난다. 달을 씻고 구슬을 닦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름이 참 낭만적이면서도 은유적이다. 이 두 전각은 죽은 영가(靈駕)가 천도재(薦度齋)를 지내러 절에 들어오기 전에 하룻밤 묵으면서 속세의 욕망과 허물을 벗는 관욕소(灌浴所), 즉 혼령들이 목욕을 하는 곳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세월각은 여자 영가의 관욕소, 척주당은 남자 영가의 관욕소이다. 세월각과 척주각 곁에는 보조국사가 직접 심었다는 고향수(枯香樹)라는 이름의 바짝 마른 고목나무가 돌무지 중앙에 깃대처럼 서 있다. 보조국사가 세상을 떠날 때 이 향나무도 그를 따라서 말라죽었다고 한다. 이 나무에는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다시 찾아올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래서 송광사 스님네들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나무라고 한다.
*송광사 삼청교(능허교)와 우화각(옆면)
*송광사 우화각(정면)
*송광사 종고루
*송광사 대웅보전
*송광사 대웅보전의 웅장하고 화려한 지붕
*승보전에서 바라본 대웅보전과 지장전
*승보전 뒤 마당에서 바라본 관음전(정면). 왼쪽은 중현당과 대지전
대웅보전 안에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인 연등불(燃燈佛)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미륵불(彌勒佛)이 봉안되어 있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다. 삼세불과 협시불 뒤에 걸려 있는 대형 후불탱화는 불상과 보살상들의 장엄함과 엄숙함을 더해준다. 천장의 아름다운 단청과 화려하고 정교한 닫집이 눈을 압도한다. 대웅전의 오른쪽에는 조사단(祖師壇), 왼쪽에는 신중단(神衆壇)을 모셨으며, 안과 밖의 벽에는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인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 진리로 구성된 사성제(四聖諦)와 대승불교의 여섯 가지 수행덕목인 보시(布施), 인욕(忍辱), 지계(持戒),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내용으로 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삼세불이 봉안된 불단의 앞면과 양쪽 옆면의 하단에는 석가모니와 한국 불교의 법맥을 이어 온 원효(元曉)와 보조 지눌의 생애를 조각해 놓았다.
중정의 서쪽에 자리잡은 승보전은 승보종찰 송광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6.25전쟁이 끝난 뒤에 중창된 대웅전을 지금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이 자리로 옮겨온 전각이다. 승보전의 내부에는 영산회상을 재현하여 석가모니와 10대 제자, 16나한, 1250비구가 봉안되어 있다. 승보전의 좌우측 벽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심우도 중에서 다섯 번째 그림인 목우도(牧牛圖)는 마음을 닦는다는 뜻으로 송광사의 수행풍인 목우가풍(牧牛家風)과도 관련이 깊은 그림이다. 심우도는 자기의 본심(本心)인 소를 찾아 나서는 심우(尋牛), 소는 보지 못하고 소의 발자취만 발견하는 견적(見積), 드디어 소를 발견하는 견우(見牛), 길들여지지 않은 소를 얻는 득우(得牛), 소를 길들이는 목우(牧牛), 소를 타고 무위(無爲)의 깨달음의 세계인 집으로 돌아오는 기우귀가(騎牛歸家), 이제 소는 달아날 염려가 없으므로 소 같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안심하는 망우존인(忘牛存人), 사람도 소도 본래 공(空)임을 깨닫는 인우구망(人牛俱忘),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듯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는 반본환원(返本還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입진수수(入廛垂手) 순서로 그려진다.
지장보살은 자신의 성불(成佛)도 포기한 채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 보살이다. 또한 부처가 없는 세상에서 모든 중생의 행복을 책임지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에게 귀의하면 정해진 업조차도 소멸된다. 지장보살의 이러한 대자비심으로 인해 지장신앙은 관음신앙과 함께 신라시대 이래 대표적인 불교신앙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지옥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더욱더 지장보살을 신봉하였다. 현세의 죄업를 소멸시켜 주는 보살은 관세음보살이 최고이지만, 사후세계에서 육도윤회와 지옥타락을 구제해주는 보살은 지장보살이 으뜸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육도윤회를 심판하는 명부의 구세주로 명부전의 주존(主尊)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지장보살과 관련된 의식에는 매년 7월 15일에 개최되는 우란분회(盂蘭盆會)와 7월 24일에 열리는 지장재(地藏齋)가 있다. 백중날인 7월 15일은 참회의 날로 이승을 떠난 부모를 위해 시방의 부처와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것은 지장보살이 관세음보살과 함께 죽은 사람의 넋을 맞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장보살은 사자(死者)를 위해서 49재(齋)를 지낼 때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보살로 신봉되고 있다.
시왕사상은 불교만의 독특한 사상이 아니라 서역과 중국에서 유행했던 명부신앙과 도교, 민간신앙 등이 불교와 결합하여 당나라 말기에 성립된 것이다. 지장신앙과 결합된 시왕신앙은 한국과 일본 등지로 전파되었다. 불교의 경우에는 티벳 라마불교 경전인 '사자(死者)의 서(書)'에 사후의 여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나, 대승불교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따라서 시왕사상은 민간신앙의 형태로 전승되어 왔는데, 거의 모든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명부전이나 시왕전이 그 증거이다. 삼국유사 선율환생조(善律還生條)에 승려 선률이 죽어서 명부에 갔으나 다시 환생했다는 기록에서 신라시대에 이미 시왕신앙이 유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시왕신앙은 한민족 고유의 내세관과 결합되어 독특한 신앙형태로 전해져 온 것이다. 시왕신앙의 경전으로는 염라왕수기사중역수생칠재공덕왕생정토경(閻羅王授記四衆逆修生七齋功德往生淨土經, 약칭 豫修十王生經, 또는 十王生經)과 지장보살발심인연시왕경(地藏菩薩發心因緣十王經, 약칭 發心因緣十王經, 또는 地藏十王經)이 있다.
송광사의 건물들은 대웅보전 뒤의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대상(臺上)과 대하(臺下) 건물로 대별된다. 대웅보전 뒤쪽의 대상(臺上) 건물에는 진여문(眞如門)과 설법전(說法殿), 수선사(修禪社), 응진당(應眞堂), 향적전(香積殿), 상사당(上舍堂), 하사당(下舍堂), 응향각(凝香閣), 관음전(觀音殿), 응현당, 행해당, 차안당, 국사전(國師殿), 풍암영각(楓巖影閣, 일명 眞影閣) 등이 있다. 대웅보전 뒤편의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설법전에 이른다. 설법전은 원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봉안하던 곳이었다. 1899년 봄에 조정에서 인출한 해인사의 대장경 4부 가운데 1부를 봉안하였으나 1951년의 화재로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68년에 중창되어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설법전 바로 오른쪽에 있는 수선사는 송광사의 또 하나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수선사는 조계총림 최초의 방장(方丈)인 보조 지눌의 거처였다고 하는데,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祖師堂)으로 사용되었다. 1969년에 정면 6칸, 측면 4칸의 규모로 지어진 현재의 건물 내부에는 커다란 둥근 거울만 있다. 수선사는 수행에 정진하는 선객들이 상주하고 있는 선방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일체 금지하고 있는 곳이다. 이들 중에는 외국인 승려 여러 명도 함께 정진하고 있다. 수선사와 설법전의 편액 글씨는 원광 경봉(圓光鏡峰, 1892~1982)의 작품이다.
수선사 오른쪽에 있는 소박하고 아담한 국사전(국보 제56호)은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송광사가 배출한 나라를 빛낸 16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전각이다. 일명 자음당(慈蔭堂)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참선을 하던 곳이었다. 1369년(고려 공민왕 18년)에 처음 지었고, 그 뒤 두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조선 초기 양식을 지니고 있는 이 건물은 사찰 건물로는 보기 드문 정면 4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이다. 건물을 장식한 단청과 우물천장의 연꽃무늬, 대들보의 용무늬 등은 건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수선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은 전남 나주출신으로 성은 최씨(崔氏)요,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이다. 어머니 배씨(裵氏)는 하늘의 문이 열리는 꿈과, 세 번이나 벼락을 맞는 꿈을 꾸고 나서 그를 낳았다고 한다. 1201년(신종 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와 간호를 하면서 불경을 공부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진각 혜심은 조계산 수선사에서 그녀의 명복을 비는 재(齋)를 올린 다음 보조 지눌을 스승으로 삼아서 출가하였다. 지눌은 전날 밤 송나라의 선사로 '송고백칙(頌古百則)'을 엮은 설두 중현(雪竇重顯)이 절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이튿날 찾아온 혜심을 보자마자 그가 곧 큰 법기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제자로 삼았다. 그날부터 혜심은 열심히 수행에 정진했는데, 한때는 오산(蜈山)의 반석에 앉아 밤낮으로 선정을 닦았고, 오경(五更)이면 어김없이 게송(偈頌)을 읊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들려 사람들이 이로써 시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또, 한겨울 지리산 금대암(金臺庵)의 연좌대(宴坐臺) 위에서 참구할 때는 눈이 내려 머리까지 쌓여도 오로지 좌선에만 열중하였다.
1205년(희종 1년)에 혜심은 억보산(億寶山) 백운암(白雲庵)에 머물던 스승 지눌을 찾아갔다. 이때 지눌이 헌신짝을 가리키며 '신은 여기에 있는데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지자, 혜심은 '왜 그때에 보지 않았습니까?'라고 답하였다. 또, 지눌이 조주 종심(趙州從諶, 778∼897)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犬者無佛性).'는 화두와 대혜종고의 ‘열 가지 병(十病)’에 대해서 묻자, '세 가지 병을 앓는 이라야 그 뜻을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지눌이 다시 '세 가지 병을 앓는 사람은 어떤 곳으로 숨을 쉬는가?'라고 묻자 혜심은 손으로 창을 한 번 내려쳤다. 그러자 지눌은 '나는 이제 그대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그대는 불법을 임무로 삼아 본래의 서원을 바꾸지 말라.'고 하면서 법을 인가하였다. 1208년 지눌이 혜심에게 수선사의 사주 자리를 물려주고 규봉산(圭峰山)으로 돌아가 쉬려 하자 그는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혜심이 죽은 뒤에 고종은 진각국사라는 시호와 원조지탑(圓炤之塔)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그의 부도는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는 전남 강진군 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각각 세워졌다.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비문이 '동국이상국집'과 '동문선', '조선금석총람' 등에 실려 전한다. 그의 제자로는 청진국사 몽여와 진훈(眞訓), 각운(覺雲), 마곡(麻谷) 등이 있다. 혜심은 지눌을 이어받아 간화선을 크게 떨침으로써 고려 선의 전통을 지킨 인물이다. 그가 수행의 핵심을 지(止)와 관(觀), 정과 혜, 즉 정혜쌍수라고 본 것은 지눌과 같다. 하지만 지관과 정혜가 모두 간화일문(看話一門)에 들어 있다고 한 것은 그만의 독창적인 이론이다.
수선사 제3세 청진국사 몽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그가 활약한 시기는 진각 혜심이 입적한 1234년(고종 21년)부터 그가 입적하기까지의 대략 18년간으로 추정된다. 당시 고려 불교는 거란과 몽고의 계속된 침략으로 황룡사 9층탑이 불에 타는 등 침체기를 맞이하였다. 왕실이 위태로와지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자 고려에는 기복불교(祈福佛敎)가 크게 성행하면서 궁중에서는 복을 비는 법석이 다달이 열렸다. 이러한 때 청진 몽여는 수선사의 사주를 맡아 보조 지눌이 일으킨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혜심의 선문염송에 347칙(則)을 덧붙여 스승의 참신한 선풍을 계승하였다. 그는 당대의 법왕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문하에서 진명 혼원과 원오 천영 등 뛰어난 제자들이 나왔다. 또한 그는 당대의 대문호인 이규보와도 교분이 깊었다. 그가 사람을 보내어 정이안(丁而安)의 흑죽(黑竹)을 구하자 이규보가 흑죽 2간(幹)을 보내면서 쓴 글이 '동문선'에 전한다. 몽여는 1252년에 진명 혼원에게 수선사 사주를 물려주고 입적하였다.
수선사 제4세 진명국사 혼원은 쌍봉사(雙峰寺)의 청우(靑牛)를 모시고 수행하다가 뒤에 수선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제3세 청진국사 몽여의 지도를 받았다. 그를 존경했던 권력자 최우는 왕에게 주청하여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직책을 하사하고 정혜사의 주지로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전국을 주유하면서 법문을 강설하였다. 1245년(고종 32년) 최우가 선원사(禪源社)를 창건하고 낙성회를 열 때 회주(會主)가 되기를 청하자 승려 2백 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1252년 청진 몽여가 입적하자 왕명에 의해 수선사의 제4세 사주와 혜심이 머물렀던 단속사(斷俗寺)의 도감(都監)에 임명되었다. 1256년 원오 천영에게 사주를 물려주고 은거하였으나, 1259년 고종의 명을 받아 자운사(慈雲寺)로 가서 왕사가 되었다. 원종이 즉위한 다음해인 1261년 진명 혼원은 다시 수선사로 돌아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는 항상 자비심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사람을 겸손하게 대하였으며, 솔직담백하고 해학적이었다. 혼원은 수선사의 선풍을 전라도지방에서 중앙에까지 전파시키고, 수선사와 선원사, 단속사의 결사를 하나로 통합한 선원을 세운 인물이다. 혼원은 세수 80세, 법랍 68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사후에 진명국사로 추증되었고, 탑호는 보광(普光)이다.
수선사 제5세 원오국사 천영은 담선법회의 참가자가 되었으며, 1236년 선선(禪選)의 중상상과(中上上科)에 급제한 뒤, 남쪽으로 내려가 수선사 제3세 청진국사 몽여의 지도를 받고, 제4세 진명국사 혼원을 스승으로 삼았다. 1246년 최우가 선원사를 창건하자 그 자리에 참석하여 그의 존경을 받았다. 원오 천영은 삼중대사가 되어 단속사에 있을 때인 1249년 최우가 창건한 창복사(昌福寺)의 회주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선원사의 법주(法主)가 되었으며, 보제사(普濟寺)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주맹이 되었다. 그는 1256년 수선사의 제5세 사주가 되어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충렬왕은 그를 개경으로 초빙하였으나 병환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286년(충렬왕 12년) 2월 그가 중창했던 불대사(佛臺寺)에 초빙되어 갔다가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충렬왕은 자진원오(慈眞圓悟)라는 시호와 정조(靜照)라는 탑호를 내렸다. 또 이익배(李益培)가 짓고 광묵(廣默)이 글씨를 쓴 비석이 고흥군 팔영산 불개사(佛蓋寺)에 세워졌다. 지금 비석은 없고 비문만 전한다.
제6세 원감국사 충지는 전남 장흥 출신으로 속성은 위씨(魏氏), 속명은 원개(元凱), 본래의 법명은 법환(法桓), 자호는 복암(宓庵), 뒤에 법명을 충지라 하였다. 그는 매우 총명하여 어려서 경서(經書)와 자사(子史)를 통달하였으며, 17세 때 사원시(司院試)에 합격하였다. 그는 비구계를 받은 후 불법을 구하고자 53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닌 화엄경의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본받기 위해 남쪽 여러 지방의 명산대찰을 찾아서 순력(巡歷)하였다. 그는 1266년(원종 7년) 경남 김해의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되었고, 1269년에 삼중대사가 되었으며, 3년 후에는 감로사를 떠나 순천의 수선사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선보다는 교에 치중하여 보조국사로부터 시작된 수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을 기미가 없었다.
1283년 원감 충지는 대중을 거느리고 조계산을 출발하여 원오 천영이 선원사에서 수선(修繕)하여 수선사로 옮기던 거란본대장경을 도중에서 맞이하여 나누어 지고 왔다. 이때 '단본대장경경찬소(丹本大藏經慶讚疏)'와 시를 지었다. 1284년 그는 수선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가서 수행에 정진하였다. 1286년 2월 원오 천영의 입적으로 수선사의 제6세 사주가 되었다. 1291년에는 합단적(哈丹賊)의 난을 피하여 수선사를 떠나 고흥군 불대사(佛臺寺)에 잠시 머물렀다. 1292년 1월 10일 정오 그는 분향과 축원을 올린 뒤 선상(禪床)에 앉아 설본무설(說本無說)이라 설하고 입적하였다.
제7세 자정국사 일인은 송광사에서 출가하여 득도했다고 하나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행적과 생몰년을 알 수 없다. 송광사사원사적비(松廣寺嗣院事蹟碑)에 따르면 그의 법명은 일인이며 1293∼1301년(충렬왕 19∼27년) 사이에 수선사의 사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제8세 자각국사 도영과 제9세 담당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제10세 혜감국사 만항은 본관이 웅진(熊津)으로 속성은 박씨(朴氏)이다. 그는 어려서 출가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였으며, 구산선(九山選)에서 장원을 하였으나 명리를 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지리산으로 옮긴 뒤에는 한 벌의 옷만을 갖춘 채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눕지도 않고 오로지 수행에 힘을 쏟았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드날리자 충렬왕의 명과 스승인 원오 천영의 권유로 삼장사(三藏社)에 머물렀다.
제11세 자원국사와 제12세 혜각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제13세 각진국사 복구는 고성(固城) 사람으로 호는 무언수(無言?) 또는 무능수(無能?)이며, 선종의 사굴산파(闍崛山派) 승려이다. 1279년 10세 때 수선사 제5세 원오국사 천영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나, 천영이 입적하자 제8세 자각국사 도영을 따라가 10년 동안 공부하였다. 21세 때 선선상상과(禪選上上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자각 도영이 학도들을 맡기려고 하자 그는 '얻은 바 있은 뒤라야 남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인데 진실로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10여 명의 도반과 함께 백암사(白巖寺)로 옮겨가 10여년 동안 부지런히 정진하였다. 그 뒤 월남사(月南寺), 수선사에 40여년을 머물면서 중생을 제도하고 선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제14세 정혜국사 복암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제15세 홍진국사 혜영은 1259년(고종 46년) 삼중대사, 1263년에 수좌가 되었다. 1267년(원종 8년)에는 속리사(俗離寺)에서 주석하였으며, 1269년에는 승통(僧統)이 되었다. 1274년 그가 통도사에 머물 때 사리 여러 매를 얻어 항상 곁에 두었는데 신기하게도 많은 분신사리(分身舍利)가 생겨 이를 구하는 사람에게 주었다. 같은 해에 중흥사(重興寺)로 갔다가 왕명으로 9년 동안 개경에 머물렀다. 1285년(충렬왕 11년) 유가사(瑜伽寺)로 옮겼고, 1290년 사경승(寫經僧) 백 명을 데리고 원나라에 들어가자 원세조는 홍진 혜영 일행을 경주사(慶州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때 만안사(萬安寺)에서 인왕경(仁王經)을 강설하여 원나라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이듬해 금니(金泥)로 대장경을 베껴 쓴 뒤 귀국하였다. 1292년 국존에 봉해져 보자(普慈)라는 법호를 받았고,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어 동화사(桐華寺)의 주지를 맡았다. 1294년 1월 24일 단정히 앉아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을 읽다가 입적하였다. 그의 사후에 홍진국사라는 시호와 진응(眞應)이라는 탑호가 내려졌다. 문인에는 금산사 주지 승통 효도(孝棹) 등이 있다. 저서에 유경(柳璥)의 청으로 지은 '백의해(白衣解)'가 전한다.
제16세 고봉국사 법장의 속성은 김씨, 본관은 신주(愼州), 호는 고봉(高峰) 또는 지숭(志崇)이다. 어머니는 임씨(林氏)이다. 그는 20세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젊어서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나옹 혜근(懶翁惠勤)을 스승으로 삼아 그의 법맥을 이었다. 그는 항상 발우(鉢盂) 하나만 들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는데, 특히 풀피리를 잘 불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30년 동안 명산대찰을 순방하다가 안동의 청량산에 청량암(淸凉庵)을 짓고 수행에 정진하였다. 1395년(조선 태조 4년) 남쪽의 여러 산을 다니던 중 금전산(金錢山) 금둔사(金芚寺)에서 절을 짓는 꿈을 꾸었는데, 다음날 우연히 송광사에 이르니 꿈에서 본 절의 주변경치와 너무나 똑같았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송광사를 중창하리라고 서원하여 1399년(정종 1년) 불법승전당(佛法僧殿堂) 30채를 지었다.
국사전 바로 오른쪽에 있는 진영각인 풍암영각(楓巖影閣, 전남유형문화재 제97호)은 1852년(철종 3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아한 맞배집으로, 풍암 세찰(楓巖世察, 1688~1767)과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고승 43명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 송광사의 고승대덕들은 거의 모두 풍암의 문하에서 나왔으므로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풍암 세찰의 속성은 밀양박씨로 순천출신이다. 그는 동화사에서 출가하여 철웅(哲雄)화상을 은사로 삼아서 득도하였다. 이어 무용 수연(無用秀演, 1651∼1719)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영해 약탄(影海若坦, 1668~1754)의 법맥을 이어받아 벽암문파(碧巖門派)의 고승이 되었다. 그는 1759년(영조 35) 순천 모후산(母後山) 대광사(大光寺)의 영천암(靈泉庵)에서 자신의 의발을 묵암 최눌(默庵 最訥, 1717~1790)에게 전한 뒤 은거에 들어가 수행에 정진하였다. 그의 법계는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취미 수초(翠微守初, 1590∼1668)-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무용 수연-영해 약탄-풍암 세찰-묵암 최눌로 이어진다.
七十三年遊幻海
今朝脫殼返初源
廓然空寂元無物
何有菩提生死根
오늘 아침에서야 껍질을 벗고 처음의 근원으로 돌아왔네.
모든 것이 공하여 원래는 아무것도 없었음을 확연히 깨달으니
어찌 깨달음과 생사의 뿌리가 있을 것인가!
제자들은 그의 사리를 수습하여 송광사와 해인사, 칠불사, 백장사 등 네 곳에 부도를 세웠다. 광해군은 그의 사후에 부휴당부종수교변지무애추가홍각대사선수등계존자(浮休堂扶宗樹敎辯智無追加弘覺大師善修登階尊者)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휴 선수의 문하에는 벽암 각성, 취미 수초, 백곡 처능(白谷處能), 백암 성총, 무용 수연을 비롯해서 7백여명의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도 벽암 각성과 뇌정(雷靜), 대가(待價), 송계(松溪), 환적(幻寂), 포허(抱虛), 고한 희언(孤閑熙彦) 등은 조선 중기 불교교단의 11개파 중 7개파를 형성하였다. 부휴는 격외선(格外禪)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일념회기(一念回機)와 일념회광(一念回光), 회광반조(回光返照)를 강조하여 임진왜란 이후의 불교계를 정비하였다. 부휴의 시문을 모아서 수제자 벽암 각성이 편찬한 '부휴당대사집'이 전한다.
나 또한 산을 알려 하지 않는도다.
산과 내가 서로 마음을 두지 않아 잊고 있거늘
어찌 이보다 더한 한가함이 있겠는가.
(취미 수초의 선시)
묵암 최눌의 저서에는 '묵암집(默庵集)', '화엄과도(華嚴科圖)', '제경회요(諸經會要)'. '내외잡저(內外雜著)', '심성론(心性論)' 등이 있다. 심성론은 그가 일체 중생의 심성을 논함에 있어 연담 유일과 수차례 논문을 주고받은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1775년 가을 두 사람은 심성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 최눌은 부처와 중생의 마음이 각각 원만하지만 동일체(同一體)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연담은 부처와 중생의 마음이 각각 원만한 것은 맞지만 그 근원자리는 동일심체(同一心體)라고 주장하였다. 나중에 화일(華日)과 경현(敬賢)은 천은사(泉隱寺) 상선암(上禪庵)에서 이 책이 후세의 선승들 사이에 쟁론의 불씨가 될 것을 염려하여 불태워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묵암 최눌은 1790년(정조 14년) 조계산 보조암(普照庵)에서 세수 73세, 법랍 55세로 입적했다.
송광사가 배출한 현대의 고승에는 효봉 학눌(曉峰學訥, 1888~1966)과 취봉(翠峰, 1898~1983), 구산 수련(九山秀蓮, 1909~1983), 회광 일각(廻光壹覺, 1924~1996)이 있다. 1888(고종 25년) 평남 양덕군 쌍룡면 반석리 금성동(錦城洞)에서 태어난 효봉 학눌의 속성은 수안이씨(遂安李氏), 속명은 찬형(燦亨)이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901년 평안감사가 주최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 그는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26세에 귀국해서 조선인 최초의 판사가 되어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과 평양의 복심법원에서 십여년간 근무하였다. 그러나 1923년 36세에 한 피고에게 사형을 판결한 뒤 심한 죄의식과 회의에 빠져 판사직을 버리고는,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엿판 하나를 든 채 3년 동안 참회와 고행의 방랑을 하였다. 1925년 여름 금강산 유점사(愉岾寺)에 들르고 나서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으로 들어가 석두(石頭)로부터 사미계를 받고 늦깎이 납자가 되었다. 이때 그는 좌선할 때 눕지도 않고 용맹정진한다고 하여 도반들로부터 '절구통수좌'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吾說一切法
都是早騈拇
若問今日事
月印於千江
내가 설한 모든 법
그거 죄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천강에 비치리
46세 때인 1954년 하안거를 마치고 상경하여 5백자 혈서를 쓰는 등 불교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55년 초대 전남 종무원장에 취임하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塔殿)에서 안거하였으며, 1956년에는 조계종 중앙감찰원장에 임명되었다. 1957년에는 광양 백운산의 상백운암(上白雲庵)을 중건하고 불도에 정진하였다. 1960∼67년까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1962년(54세)에는 대구 동화사 주지에 취임했다. 1966년 자운 성우(慈雲盛祐)와 함께 세계불교승가대회에 참석하고 동남아시아 불교성지를 순례하였으며, 그 해 9월 효봉이 입적하자 사리탑을 세운 뒤 1967년 3월 송광사 삼일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1969년(61세) 4월 보름날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설립되자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었고, 그해 9월 5일 총림의 후원단체인 불일회(佛日會)의 총재 겸 총회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3월 수선사를 중건하고 ‘3월불사’를 시작한 이후 이 불사는 매년 개최되었다. 이렇게 해서 구산 수련은 침체한 호남지방의 불교에 활기를 불어넣고, 송광사는 보조 지눌 이래 면면히 이어져온 승보종찰의 면모를 새롭게 일으켰다.
1983년 10월 미질(微疾)을 보이자 구산 수련은 '몸에 주사하지 말 것, 좌선의 자세로 열반할 것이니 좌관을 사용하고 좌장을 해줄 것, 화합 단결하여 선풍에 누를 끼치지 말 것, 자신을 속이는 중노릇을 하지 말고 실답게 수행에 임할 것'을 당부하고는, 12월 16일(음 11월 13일) 46년 전 바로 그가 득도수계하였던 송광사 삼일암에서 제자와 문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수 75세, 법랍 47세로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物物頭頭大機全彰
生也空兮死也空
能仁海印三昧中微笑而逝
삼라만상이 그 바탕을 온통 드러내도다.
태어남도 공이요 죽음도 또한 공한 것이니
석가모니의 해인삼매 중에 미소지으며 가노라
念起念滅卽生死
無起無滅卽涅槃
生死涅槃誰由事
古往今來手裏掌
일어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곧 열반이다
생사와 열반이 누구를 말미암아 있는 일이냐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손등과 손바닥이니라
송광사가 배출한 보조 지눌을 비롯한 16국사와 부휴 선수를 위시한 근세의 네 고승,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효봉 학눌이하 세 고승들은 당대 최고의 선승들이었며, 조계종의 종맥과 선맥을 이으면서 선풍을 드날린 사람들이다. 이들로 인해서 송광사는 명실공히 승보종찰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혜쌍수를 통해서 선교일치를 완수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조 지눌이여, 부휴 선수여, 효봉 학눌이여! 윤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영원히 선정에 든 아름다운 이름이여! 오늘 송광사에 와서 16국사를 비롯한 수많은 고승대덕들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대반열반경소는 중국 5호16국(五胡十六國)의 하나인 북량(北凉)의 담무참(曇無嘴)이 번역한 대반열반경을 수나라의 관정(灌頂, 561~632)이 해설하고, 당나라의 법보(法寶)가 소(疏)를 붙인 33권의 책이다. 대반열반경은 석가모니 입적 전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소승의 것과 석가모니가 입적하기 직전에 설한 교의(敎義)를 그 내용으로 하는 대승의 것으로 나뉜다. 관정의 대반열반경소는 혜관(慧觀)과 사령운(謝靈運)이 함께 편찬한 대승의 대반열반경 36권을 해설한 것이다. 이 경전은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와 거란 등지에서 불서와 경전을 들여와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1096년에 완성한 속장경(續藏經) 안에 들어 있던 것을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다시 복각(覆刻)한 것이다. 이 책은 속장경은 아니지만 속장경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대정신수대장경이나 대일본속장경에도 없는 장소(章疏)가 들어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동요령은 절에서 강의할 때 사용했던 기구로 높이는 20.6㎝이며, 몸체와 긴 손잡이로 이루어져 있다. 요령의 몸체는 원형에 가까운 사각형으로서 어깨부분부터 유려한 곡선을 이루는 반구형(半球形)으로 되었고, 밑면은 구연부(口緣部) 네 곳에 반원형을 설치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몸체 상부 중앙에는 마디가 하나 있는 긴 손잡이가 있고, 몸체의 네 모서리와 구연부를 구분한 굵은 융기선을 따라 화판문양(花瓣紋樣)이 연속되어 있다. 네 면 각각의 구획 안에는 몸을 뒤틀면서 위로 치솟는 용이 한 마리씩 돋을새김하였고, 간지(間地)에는 비운(飛雲)이 장식되어 있다. 용머리 앞쪽에는 입에서 뿜어내는 기운이 표현되어 있다. 손상으로 인해 손잡이의 자세한 장식은 알 수 없으나, 손에 잡았을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화문(花紋) 또는 사격자문(斜格子紋)을 새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요령은 우아한 형태와 아름다운 조각으로 현존 요령 중에서도 걸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박물관 전시실의 동쪽에는 효봉 학눌 등 송광사가 배출한 세 명의 대선사 진영과 유물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당대 최고의 선풍을 드날렸던 대선사들에게 합장삼배로 예를 표한다. 박물관을 나오니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다.
*도성당 담밖의 화단에 피어난 수선화
*도성당의 산수유꽃
승보전과 도성당 사이의 마당에는 맑은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석수조가 놓여 있다. 수조 안의 물속에는 많은 동전이 가라앉아 있다. 물속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동그란 그릇 안에 동전이 들어가면 행운이 온다던가..... 도성당 동쪽 담장 밖 화단에는 노오란 수선화가 활짝 피어 있다. 도성당의 남쪽 담장 안에는 산수유꽃이 만발하였다. 아, 이제 봄은 도성당의 담장 밑에 와 있구나! 문득 경허(鏡虛)선사의 시가 떠오른다.
하루종일 봄을 찾아도 봄은 안보여
짚신이 다 닳도록 온산을 헤매었네
봄 찾는 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니
울타리의 매화나무에 꽃 한송이 피어 있네.
이 시는 죽비가 되어 나의 무지몽매함을 사정없이 내려친다. 꼭 나를 두고 읊은 시같다. 나는 무엇을 찾아서 조계산에 들어왔던가! 내가 찾는 것은 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송광사 경내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하산길에 오른다. 아까 들어왔던 종루와 우화각을 되돌아 나와 일주문을 나선다. 송광사 일주문은 조계문(曹溪門)이라고도 부른다. 일주문은 모든 진리는 일심(一心)으로 인하여 나타나고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불교의 진리관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통 사찰의 이름을 쓴 편액은 일주문의 공포 밑에 거는데, 송광사 일주문의 편액은 3열의 글씨를 세로로 써서 공포의 중앙 아래에다가 현판을 걸었다. 3열의 오른쪽에는 '曹溪山(조계산)', 가운데는 '大乘禪宗(대승선종)', 왼쪽에는 '松廣寺(송광사)'라고 씌어 있다. 송광사가 바로 조계선종의 종풍을 떨치는 절이란 것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는 편액이다. 일주문에는 또 김충현이 쓴 '僧寶宗刹曹溪叢林(승보종찰조계총림)'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 송광사가 한국의 삼보사찰 가운데 하나인 승보종찰인 동시에 조계총림의 총본산임을 알 수 있다. 일주문을 나서서 속세로 돌아간다. 발걸음 하나에 승속이 갈린다.
일주문 밖에는 오른쪽에 불일서점이 있고, 왼쪽에 거대한 비석과 함께 송광사 역대 고승대덕과 공덕주들의 비석들이 모여 있는 비림(碑林)이 있다. 거대한 크기의 보조국사 공적비는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여진다. 비림을 바라보면서 송광사의 유구한 역사와 조계종의 선맥을 이어온 대선사들을 생각한다. 두 줄로 열을 지어 늘어서 있는 저 비석들은 그대로 조계종의 거대한 승맥의 흐름이다. 비림 앞에 서 있자니 조계종의 선맥을 이어온 대선사들의 선풍이 온몸에 느껴진다. 우화각 밑을 흐르는 계곡을 막아서 만든 낙하담(落霞潭)의 잔잔한 수면에는 고목들 사이로 뭉게구름이 한가로이 흘러가는 하늘이 내려와 앉아 있다. 낙하담 옆에 있는 다송원(茶松苑)은 일반인에게 다도를 소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다송원에 들러 전통차를 마시면서 다도를 접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길을 따라서 내려오면 커다란 자연석에 '曹溪叢林大道場(조계총림대도량)'을 새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송광사 청량각
사찰의 입구에 놓인 다리에는 대개 피안교(被岸橋)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누각에는 앉아서 다리쉼을 할 수 있도록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송광사로 들어가기 전 난간에 잠시 앉아서 계곡을 흐르는 물에 탐진치(貪嗔痴) 삼독을 깨끗이 씻어버린 뒤 청정무구한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배려로 보인다. 조계산의 계류에 놓은 무지개다리인 피안교 위에는 청량각(淸凉閣)이라는 운치있는 누각이 세워져 있다. 맑고 시원하게 씻어주는 다리누각이라는 뜻이겠다. 청량각 천장의 들보에 턱을 괴고 있는 용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해학적인 모습에 그만 웃음이 피식 나온다. 특이하게도 송광사쪽으로 들어가는 쪽의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지 않은 반면에 나오는 쪽의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송광사로 들어갈 때는 탐진치 삼독에 물든 사바세계의 중생이었지만 나올 때는 무상의 깨달음을 얻어서 나온다는 의미렷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임석재 교수는 불교의 공(空)사상과 도교의 비움사상이 전통 사찰 공간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면서, 이 두 사상이 건축 장르에 응용되어 가변성과 무형성이라는 특징으로 합쳐졌다고 본다. 공과 비움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공간의 물질성을 지워야 한다. 그러나 공간의 물질적 구조물을 지우는 순간 건축의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임 교수는 이러한 모순을 물질과 비움 사이의 절묘한 공존 상태로 구현해낸 건축물이 바로 이 청량각이라고 한다. 전통 사찰 건축물을 바라보는 임 교수의 시선이 새롭다.
청량각을 지나서 조금 더 내려오면 길다란 자연석에 '僧寶宗刹曹溪山松廣寺(승보종찰조계산송광사)'라고 새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상가촌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와 산행을 마무리한다. 해는 이미 서산에 걸려 있고 봄산에 석양이 물들기 시작한다. 귀로에 오르며 시 한 수 남기다.
오는 봄을 맞으러 선암사에 이르렀더니
무우전 담장의 홍매는 아직 이르다 하네
장군봉 너머 송광사 열여섯 국사의 선풍은
산수유 꽃향기에 실려 온산에 드날리는데
선향(禪香)에 취한 나그네 산문을 나서네
2007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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