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들어서 첫번째로 맞이하는 일요일이다. 연무가 짙게 끼긴 했지만 날씨는 더없이 화창하다. 가을철 억새로 유명한 화왕산(火旺山, 756.6m)을 오르기 위해 창녕읍내를 통과하여 창녕여자중학교 뒤에서 자하골로 들어선다. 화왕산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과 고암면 사이에 있는 산으로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꽃의 장관으로도 유명하다. 창녕읍 말흘리 자하골 입구는 등산객들과 그들이 타고온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화왕산 등산지도
*자하골 왼쪽의 교동 고분군 옆으로 난 등산로 입구
오늘은 자하골에서 목마산성이 있는 능선을 따라 화왕산에 오른 다음 관룡산을 넘어서 옥천리로 내려갈 생각이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자하골을 따라서 환장고개를 지나 화왕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택한다. 아니면 자하골에서 도성암을 지나 화왕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택하거나..... 자하골 매표소에서 조금 올라가다가 계곡을 막은 작은 댐을 건너면 가야고분군이 나타난다. 고분 발굴현장 옆으로 목마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나 있다. 이 길은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호젓한 산행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목마산성 입구
소나무가 우거진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오르자 목마산성(牧馬山城)이 나타난다. 돌로 쌓은 산성은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사적 제65호로 지정된 목마산성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에 있는 산성으로 둘레가 약 1.9km에 이른다. 창녕읍의 동쪽에 있는 화왕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야산의 골짜기를 둘러싼 측면식(側面式, 山腹式) 또는 반면식(半面式)으로 축성된 이 산성의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진흥왕이 대가야를 정복하고 이 곳에 하주(下州)를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이 성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산성 부근에서 발견되는 가야시대 고분군들은 이 성의 축성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1592) 당시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이 산성터에 돌을 다시 쌓아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목마산성은 삼국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산성의 형태로 그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석축 또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성의 앞면은 계곡 입구를 향하고 있어 아마도 수비를 위해서 쌓은 산성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리고 목마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후대에 말을 기르기 위한 목마장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산성은 화왕산 정상부의 마안형(馬鞍形)인 화왕산성(火旺山城, 사적 제64호)과 규모는 비슷하지만 형식은 다르다. 성벽은 자연석 또는 네모꼴의 할석을 이용하였는데, 아랫부분을 약간 내밀어 견고하게 쌓아서 가야지방에 남아 있는 산성으로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목마산성 전망대 바위에서 바라본 창녕읍
목마산성의 허물어진 성곽의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서 오르다 보면 전망이 시원하게 탁 트인 바위가 나타난다. 전망대 바위에 올라서니 창녕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에는 창녕읍에서 서쪽으로 12km 떨어진 낙동강까지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은 짙은 연무로 인해 낙동강을 볼 수가 없어서 아쉽다. 창녕은 동쪽으로 험준한 화왕산이 우뚝 서 있고 서쪽과 남쪽을 영남의 젖줄 낙동강이 휘감아 돌아나가는 평야지대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고장이다.
창녕은 장마면 유리, 부곡면 온정리, 도천면 일리, 영산면 신제리, 계성면 사리의 지석묘(고인돌)와 창녕읍, 계성면, 영산면, 부곡면 등지에서 발견된 고분군들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석묘는 무문토기시대의 묘제(墓制)로 기원전 8~9백년대에 이미 나타난 거석(巨石)문화다. 문헌상으로는 1세기 전후 삼국지의 변진 24국의 소개에 나타나 있는 불사국(不斯國)이 창녕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삼한시대에는 불사국, 가야시대에는 부족국가인 빛벌가야(非火伽倻)로 존립하여 오다가 신라에 복속된 후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比斯伐), 비자벌(比子伐)이라 하였다.
신라 진흥왕 16년(555)에는 이곳에 하주를 설치하였다가 경덕왕 16년(757)에 화왕군(火王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화왕산의 화(火)자는 기야시대때부터 나타나고 있지만, 화왕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신라 경덕왕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 23년(940) 3월에는 화왕군을 지금의 이름인 창녕군(昌寧郡)으로 고쳤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는 창녕군이 창녕현으로 강등되었다. 조선 인조 9년(1631)에 창녕현은 지도(至道)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현에서 또 한번 강등되어 영산현에 소속되었다가 그로부터 6년후 인조 15년(1637)에 복현(復縣)되었다. 고종 32년(1895) 5월에는 8도제의 폐지와 23부제의 실시로 창녕군은 대구부(大邱府)에 속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1896년 8월 4일 13도제(道制)가 실시되자 창녕군과 영산군으로 개편되어 다시 경상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에는 영산군이 창녕군에 편입되어 15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1960년에는 창녕면이 창녕읍으로, 1963년에는 남지면이 남지읍으로 승격되어 창녕군은 2읍 12면이 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마산성에서 바라본 화왕산 정상부
목마산성에서 화왕산 정상부를 바라본다. 화왕산의 서쪽 사면은 기암절벽과 소나무가 잘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환장고개에서 시작되는 자하골의 깊은 골짜기가 훤하게 내려다 보인다. 왼쪽부터 화왕산 정상과 환장고개, 배바위 억새밭, 산불감시초소, 산불감시초소 바로 앞의 742m봉, 742m봉 오른쪽에 있는 755.8m봉, 755.8m봉에서 자하골로 이어지는 늑대골이 한눈에 들어온다.
*목마산성에서 바라본 568m봉
자하골 건너 화왕산 정상부에서 742m봉과 755.8m봉, 장군바위를 지나 568m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장쾌한 기세로 치달려 간다. 자하골 건너 맞은편에 솟아 있는 568m봉이 매우 가깝게 다가온다. 화왕산 정상부 서쪽 능선의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서쪽으로 뻗어내린 두 개의 산줄기가 자하골을 ㄷ자형으로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목마산성 정상부의 돌탑
*목마산성 꼭대기에서 바라본 창녕읍 도야리와 하리, 억만리 전경
목마산성 정상부에는 여러 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다. 누가 쌓았는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정성이다. 산성 너머로 창녕읍 도야리와 하리, 그리고 억만리의 너른 들판이 내려다 보인다. 바로 앞에 일부분만 보이는 저수지는 도야리의 동위지고 도야리마을 건너편에 있는 저수지는 하리의 상동지다. 하리의 들판은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하게 경지정리가 되어 있다.
*목마산성에서 바라본 622.9m봉
목마산성에서 앞으로 가야할 능선을 바라보니 622.9m봉이 바로 앞에 보인다. 능선길은 오르내림이 그리 심하지 않아서 편한 산행길이 될 것 같다. 산기슭에는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어 산빛이 청청하다. 산림욕을 한다는 기분으로 숲길을 천천히 걸어간다.
*622.9m봉으로 오르는 소나무숲길
목마산성을 떠나 622.9m봉으로 가는 능선길에 오른다.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난 오솔길은 언제 보아도 정겹다. 화왕산은 봄철의 진달래와 가을철의 억새가 장관이라지만 온산에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숲도 참 좋다. 소나무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근한 나무다. 또 소나무의 언제나 변함없이 늘 푸르른 모습은 지조와 절개를 소중히 여기는 한국인들에게 무언의 깨달음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나무는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들의 시에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화가들이 즐겨 그리곤 했던 소재였다.
*622.9m봉 기슭에서 바라본 화왕산 정상부
622.9m봉을 지나자 아까보다 화왕산 정상부가 훨씬 가까이 다가와 있다. 이젠 정상부의 배바위와 산불감시초소, 억새밭이 또렷이 보인다. 송림이 우거진 능선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북동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사위가 어둠컴컴해지기 시작한다. 천둥소리와 함께 시퍼런 번갯불도 번쩍거린다. 오늘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산에 들어왔는데.....
*화왕산 정상
*화왕산 정상부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소나무숲을 벗어나 전망이 좋은 암봉에 올라선다. 화왕산 정상이 바로 앞에 보인다. 화왕산 정상부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능선과 계곡도 한눈에 들어온다. 천둥소리와 함께 먹구름이 점점더 화왕산 정상부를 향해서 몰려오고 있다.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질 기세다. 오늘은 아무래도 우중산행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화왕산 정상표지석
드디어 화왕산 정상에 올라선다. 비좁은 정상에는 몰려든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다. 등산객들은 저마다 정상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야단이다. 사람의 모습이 들어가지 않은 정상표지석 사진을 찍기 위해 아무리 기다려도 기회가 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등산객들 몇 사람이 들어간 사진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나는 어느 산이든 정상에 오르면 사진을 찍는데 오늘은 엄두도 못 내겠다. 훗날 다시 한번 화왕산에 와야 할 것 같다.
화왕산 일대는 경상남도의 중북부 산악지대로서 서쪽과 남쪽은 낙동강, 동쪽은 밀양강(密陽江)이 둘러싸고 있다. 또 이 산에서 관룡산(觀龍山, 750m)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에는 낙동강 지류인 계성천(桂城川)이 흐르고, 동쪽에서 발원한 토평천(土坪川)은 북쪽을 지나 우포(牛浦)늪으로 흘러들어 간다. 화왕산의 서쪽 산록지대는 창녕읍으로 이어진다. 1914년에는 화왕산 서사면의 말흘리에서 신라 진흥왕의 척경비(拓境碑)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화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화왕산성
화왕산 정상에서 화왕산성을 바라본다. 산성은 화산의 분화구로 보이는 안부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축성되어 있는데, 둘레가 약 2.6km에 달한다. 사방의 가파른 암릉지대는 산성이 천혜의 요새가 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산성의 성곽은 서문이 있는 환장고개를 지나 산불감시초소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산불감시초소 왼쪽으로 안부를 지나 솟아 있는 바위가 배바위다. 산불감시초소 바로 오른쪽으로 742m봉과 755.8m봉이 차례로 보인다.
화왕산성은 그 축성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이전 가야시대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창녕은 낙동강 중류에 자리잡은 곡창지대일 뿐만 아니라 서부 경남지방의 군사적 요충지로, 당시에 이 산성은 매우 중요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곳을 의병의 근거지로 삼아 왜적을 방어하기도 하였다. 화왕산성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한두 차례 보수가 이루어져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에도 화왕산은 창녕을 수호하는 진산으로 기록되어 있고, 화왕산성은 영산과 현풍을 아우르는 성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화왕산은 용암의 분출로 형성된 화산으로, 용지(龍池)를 비롯한 세 군데의 분화구가 있다. 시뻘건 용암을 토해내던 화왕산은 '불뫼'라고 불릴 정도로 불기운이 왕성한 산이다. 창녕은 우포늪을 비롯한 습지가 많은 까닭에 옛날부터 수해를 많이 입었다. 그래서 이 고을사람들은 수기(水氣)를 누르기 위해 창녕의 진산인 이 산의 이름을 큰불뫼 곧 화왕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화왕산에 큰불이 나야 그 이듬해 풍년이 들고 재앙이 물러간다고 주민들은 믿어왔다.
산성 안에는 5만6천 평에 이르는 억새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억새평원을 뒤덮은 황금불결이 장관이다. 창녕군에서는 2년마다 홀수가 되는 해에 화왕산에서 정월 대보름날 억새태우기 행사를 연다. 억새가 잘 자라고 병충해가 번지는 것을 막기위해 열리는 이 행사는 달이 뜸과 동시에 불을 놓는데, 산성 안의 억새밭을 통째로 태우는 억새불이 장관이다. 화왕산 억새축제는 창녕사람들의 불기운에 대한 믿음이 축제로 승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많은 구경거리 중에서도 불구경이 으뜸이라고 했다. 언제 화왕산 억새축제를 보고 싶다.
*환장고개 안부에서 바라본 배바위
화왕산 정상에서 사방의 경치를 구경하고 있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배낭에서 윈드자켓을 꺼내어 입고는 환장고개로 내려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다가 이윽고 소나기가 쏟아져 내린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갑자기 소나기가 콩알만한 우박으로 변한다. 우박이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거의 한시간 동안 소나기와 우박을 속수무책으로 맞아야만 했다. 윗옷은 윈드자켓을 입어서 젖지 않았지만 바지는 흠뻑 젖어버렸다. 한동안 쏟아지던 우박이 멈추는가 싶더니 구름이 걷히면서 날이 맑는다. 다행이다.
비가 그치자 간이화장실 근처에서 라면이나 막걸리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다시 좌판을 펼쳐 놓고 손님들을 부른다. 마침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좌판 앞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비옷을 입은 채 저마다 컵라면을 하나씩 들고 맛있게 먹는다. 산에서 먹는 라면맛이란..... 안 먹어본 사람은 모른다. 나도 컵라면을 하나 사서 먹을까 하다가 그만둔다. 아직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장고개에서 내려다 본 자하골
환장고개는 자하골은 물론 창녕읍내까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이 뛰어나다. 자하골의 골짜기마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서쪽 산기슭에서 일어난 안개가 솔솔 불어오는 골바람을 타고 환장고개를 넘어서 동쪽으로 사라져 간다. 자하골에서 이 고개를 오르려면 환장할 만큼 힘이 든다고 해서 환장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자하골로 내려가려는 등산객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산불감시초소에서 바라본 742m봉
환장고개에서 남쪽으로 성곽길을 따라 산불감시초소로 향한다. 옛날 화왕산성의 성곽이었던 자리에는 석축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산불감시초소에 올라서니 남서쪽으로 742m봉이 솟아 있다. 정상 암봉의 평평한 바위에 올라가서 경치를 구경하고 있는 등산객들이 조금은 위험해 보인다. 이곳에서 저 봉우리를 넘어 755.8m봉에서 전망대에 이르는 능선을 타고 자하골로 내려가거나, 755.8.m봉에서 구현산으로 뻗어가는 능선을 타고 가다가 518m봉과 725.6m봉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장군바위 능선으로 해서 늑대골을 따라 자하골로 내려갈 수 있다.
*배바위
산불감시초소에서 동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배바위에 올라선다. 산불감시초소와 배바위는 화왕산성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이 바위에다가 배를 매어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배바위라고 불린다. 또 이 바위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바위틈이 좁아서 사람들이 배를 붙이고 지나가야만 한다고 해서 배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배바위에서 바라본 억새평원과 화왕산
배바위는 전망이 매우 좋다. 화왕산과 억새평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환장고개 건너편 북쪽으로 보이는 두 개의 봉우리 중에서 왼쪽 봉우리가 화왕산이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어 있다.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하늘이다.
*배바위에서 바라본 억새평원과 화왕산성 동쪽 성곽, 그리고 진달래 능선
화왕산성 동쪽 성곽은 새로 보수를 한 듯 제법 산성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화왕산성의 남문과 창녕조씨득성지지(昌寧曺氏得姓之地)비, 동문, 그리고 곽재우장군 전승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산성의 북쪽 끝에서 동쪽으로 뻗어간 능선이 진달래 능선이다.
*배바위에서 바라본 관룡산과 구룡산, 그리고 병풍바위
배바위에서 관룡산과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본다. 바로 앞에 솟아 있는 산이 관룡산이고 그 뒤로 보이는 산이 구룡산이다. 구룡산 바로 오른쪽에 솟아 있는 뾰족한 봉우리는 병풍바위다. 배바위와 관룡산 사이에 있는 깊은 계곡은 옥천계곡으로 옥천리 매표소에서 계성천(桂城川)과 만난다. 구룡산을 넘어서 능선을 따라가면 부곡온천으로 갈 수 있다. 화왕산은 해발고도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세가 매우 씩씩하고 우렁차다.
배바위를 떠나 키만큼 자란 억새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성의 동문으로 향한다. 비가 온 뒤라 비탈길이 매우 미끄럽다.
*화왕산성의 남문에서 바라본 억새평원 북사면
남문에 이르러 억새평원 북사면을 바라본다. 억새의 황금물결이 두 눈에 가득 들어온다. 산성의 동쪽 성곽은 새로 보수공사를 해서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남문 근처에는 단체산행을 온 등산객들이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남문과 동문 사이에 있는 창녕조씨득성지지비
*동문에서 바라본 용지와 환장고개
남문에서 동문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창녕조씨득성지지비를 만난다. 철책이 둘러쳐진 비석의 앞에는 사과와 배 등 과일이 놓여 있다. 아마도 창녕 조씨 후손이 시조의 탄생지를 찾아서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인의 조상숭배는 이처럼 뿌리깊은 것이다.
화왕산성의 동문에 올라 환장고개를 바라본다. 억새평원 안부의 중간쯤에 창녕 조씨의 시조가 탄생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용지(龍池)가 보인다. 용지는 이른바 구천삼지(九泉三池) 중에서 가장 큰 중지(中池)다. 상중하 삼지는 용암의 분출로 형성된 세 개의 분화구에 물이 고여서 된 연못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홉 군데의 샘에서 흐르는 물은 각각 삼지로 흘러들어 왔을 것이다. 삼지는 세월이 흘러 매몰되어 사라졌다가 1958년 초에 호남사람 조병의(曺秉儀)라는 사람이 사재를 들여 두 해에 걸친 공사 끝에 세 개의 못을 찾아서 다시 팠다고 한다. 그리고 1990년 초에는 창녕 조씨 대종회에서 다시 못을 개수하고 못 주위에 철책을 둘렀다고 한다. 그런데 용지 외에 두 곳의 연못은 보이지 않고 철책도 철거되어 있다.
이처럼 용지는 창녕 조씨 후손들에게 그들의 시조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신라부마위) 태사공 조계룡(太師公 曺繼龍)이 탄생한 영지(靈池)로 신성시되고 있는 연못이다. 창녕 조씨의 시조인 조계룡은 신라 진평왕(眞平王, 579∼632년)의 사위가 되었으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었다고 한다. 그의 출생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인 예향은 혼기가 찼을 때 우연히 뱃속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올라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녀의 병은 완쾌되었고 그날부터 몸에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예향의 꿈 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 아이를 잘 기르면 자라서 높은 벼슬을 하게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잘 생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겨드랑이 밑에 '조(曺)'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씌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이학사(李學士)라는 사람이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여 조씨 성과 계룡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계룡은 자라서 진평왕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에 이르렀다. 그후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창녕(昌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문헌의 실전(失傳)으로 계룡의 후손 겸(謙)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대를 이어오고 있다.
동문 바로 앞에는 임진왜란때 의병장이었던 곽재우 장군이 화왕산성을 의지하여 왜병을 물리친 것을 기리는 의병전승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곽재우 장군은 '배화진(背火陣)'을 치고 전투를 벌여서 왜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화왕산이 불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일화다.
*진달래 능선 기슭에 있는 드라마 허준 촬영장
*진달래 능선 기슭의 드라마 허준 촬영장에서 바라본 배바위와 억새평원
동문을 떠나 관룡산으로 향한다. 동문에서 진달래 능선을 타고 관룡산으로 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임도를 따라서 가기로 한다. 진달래 능선 중간쯤의 기슭에 드라마 허준 촬영장이 나타난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니 억새평전의 남사면과 배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보니 배바위가 마치 산꼭대기에 쪽배가 올라앉아 있는 듯도 하고, 배를 묶어두는 말뚝처럼 보이기도 한다.
*임도 고개마루에서 바라본 진달래 능선
허준 촬영장을 지나 임도 고개마루에 올라선다. 고개마루에는 차와 음료를 파는 포장마차가 있다. 길가에는 때아닌 개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다. 개나리는 봄철의 대표적인 꽃나무가 아니던가! 화왕산의 북쪽 능선에서 이어지는 진달래 능선이 동쪽을 향해서 뻗어간다.
*관룡산 능선에서 되돌아 본 화왕산과 일야봉산장, 고암면 청간 사거리
임도 고개마루에서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오면 관룡산과 옥천계곡의 일야봉산장, 고암면 청간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사거리가 나온다. 이 사거리에도 음식과 음료수를 파는 포장마차가 있다. 임도는 여기서 일야봉산장으로 해서 옥천계곡을 따라서 옥천마을로 이어진다. 고암면 청간으로 가는 길에도 임도가 나 있다. 화왕산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은 고암면 청간, 왼쪽은 옥천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관룡산으로 가는 능선에 올라서서 사거리를 되돌아 본다.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서일까? 화왕산에 언제 또 다시 온다는 것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일까? 인생은 어쩌면 길 위에 있는 나그네와도 같다. 되돌아 보면 지나온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떠나와 있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또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언젠가는 끝이 있는 법이다. 길이 끝날 때까지는 걸어가야만 하는 것 그게 인생이다. 어떤 길을 가든 그것은 각자 개인이 선택해야 할 문제다. 최선의 길을 간다는 것이 나의 인생목표다.
*능선길에서 바라본 관룡산
관룡산으로 오르는 능선길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여 걷기에 편하다. 관룡산이 바로 앞에 보이는 봉우리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이제 관룡산 정상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구룡산과 관룡산 삼거리
*관룡산 정상
한달음에 구룡산과 관룡산 삼거리에 닿는다. 삼거리는 바로 관룡산 정상에 있다. 여기서 관룡산 정상을 지나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능선길은 용선대를 거쳐 관룡사로 이어진다. 구룡산으로 가려면 남동쪽 능선길을 타야 한다.
삼거리에서 불과 10여m 떨어진 관룡산(觀龍山, 750m) 정상에 올라선다. 관룡산 정상에는 헬기장이 닦여져 있고 아무런 표지판도 없다. 팔공산맥(八公山脈) 중에 솟아 있는 관룡산은 비슬산(琵瑟山), 물불산(勿弗山)과 함께 팔공산을 주봉으로 하는 산으로 태백산맥의 지맥(支脈)을 이루며, 계성천의 발원지이다. 화왕산의 유명세에 가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지만 관룡산을 오르지 않고서는 화왕산을 제대로 보았다고 하기 어렵다.
*관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화왕산
관룡산 정상도 전망이 상당히 좋다. 북동쪽으로 진달래 능선과 화왕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이 산이 화왕산의 산세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룡산을 떠나 구룡산으로 가는 능선길에 오른다.
*관룡산 중턱에서 바라본 용머리 암봉과 구룡산
관룡산을 내려오는데 전망이 매우 좋은 바위가 보인다. 바위에 올라서자 바로 앞에 용머리 암봉과 구룡산(740.7m), 그리고 병풍바위가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관룡산에서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바위능선은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방불케 한다.
*용머리 암봉
*용머리 암봉에서 바라본 관룡산
*용머리 암봉에서 바라본 구룡산과 병풍바위
관룡산을 다 내려오면 용머리라는 이름의 암봉이 솟아 있다. 암릉을 타고 용머리 정상에 올라선다. 방금 전에 내려온 관룡산을 바라보니 산기슭의 나뭇잎들이 늦가을빛으로 물들어 있다. 관룡산 정상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능선이 용선대를 거쳐 관룡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남쪽으로 구룡산의 바위능선과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는 병풍바위를 바라본다. 마치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면서 용트림을 하는 듯한 형상이다.
관룡산이라는 이름은 원효대사가 이곳에 있는 절에 들어와 백일기도를 드릴 때 화왕산 용지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원효대사는 자신이 백일기도를 드렸던 사찰을 관룡사라 이름짓고, 관룡사를 품고 있는 뒷산을 아홉 마리의 용이 날아오른 산이라 하여 구룡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구전에는 관룡산에서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있는 아홉 개의 바위가 용머리와 같다고 해서 구룡산이라 불리어졌다고도 한다. 구룡산이 언제 관룡산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관룡사 사적지에는 구룡산으로 나와 있다. 내 생각에는 관룡산에서 구룡산에 이르는 이 일대의 산 전체를 구룡산이라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또 사적지에는 관룡산 일대에 관룡사, 청룡암, 극락암, 흑룡암, 황룡암, 령은암, 동암 등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산이름과 절이름에서 보듯이 이곳의 산과 절은 용의 전설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용머리 암봉의 바위벼랑길
*구룡산과 관룡사 삼거리
용머리를 내려오면 암봉 밑으로 돌아가는 바위벼랑길이 기다린다. 벼랑길에는 굵은 밧줄이 매어져 있어 어렵지 않게 건너갈 수 있다. 하지만 겨울에 빙판이 지면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구간이다. 용머리 암봉 벼랑길을 통과하여 암릉으로 올라서서 조금만 내려가면 안부에 구룡산과 관룡사 삼거리가 나타난다.
*구룡산과 관룡사 삼거리에서 바라본 관룡산 동쪽 산기슭
*구룡산과 관룡산 삼거리에서 바라본 북동쪽 계곡
구룡산과 관룡산 삼거리에서 잠시 쉬면서 땀을 식힌다. 관룡산 동쪽 산기슭의 잎이 누렇게 변한 활엽수들을 바라보면서 만추의 감상에 젖는다. 구룡산과 관룡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고암면 청간마을의 청간지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류한 다음 토평천을 이루어 우포늪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 계곡은 토평천의 발원인 셈이다.
*용머리 암봉의 남쪽 암릉
삼거리에서 관룡사로 가는 가파른 암릉길로 내려선다. 용머리 암봉의 남쪽 암릉은 기암절벽과 소나무가 잘 어우러져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바위틈에서 자라는 소나무들을 보면 온갖 풍상을 겪은 흔적이 여실히 드러난다. 사람들의 눈에는 저 소나무가 멋지고 아름답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저 소나무는 물과 토양이 부족한 극한적 환경을 이겨내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으리라. 사람으로 말하자면 팔자가 억세게 사납고 드센 소나무라고 할 수 있겠다.
*용머리 암봉 기슭에 자리잡은 청룡암
*청룡암 뒤로 솟아 있는 암봉
가파른 바위길을 내려오다가 전망이 뛰어난 암반에 올라서자 울창한 활엽수림에 둘러싸인 청룡암이 바로 앞에 보인다. 비구니스님이 바깥에 나왔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다. 이것도 인연이런가. 비구니스님이시여 불도를 잘 닦아서 부디 성불하시기를..... 문득 내가 백두대간 순례를 마치고 '산으로 가는 길'이란 책을 냈을 때 기꺼이 우정의 글을 써준 수해(修海) 비구니스님이 떠오른다. 수해스님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청룡암 뒤로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암릉이 병풍처럼 솟아 있다. 전망대 바위를 내려와 집채만한 바위를 끼고 돌면 청룡암으로 올라가는 사립문이 나타난다. 바위 바로 밑에는 샘이 있어 목마른 산길나그네가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누군가 플라스틱 바가지를 가져다 놓았다.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시자 시원한 느낌이 가슴속까지 전해진다.
청룡암을 떠나 관룡사로 내려간다. 산기슭에는 아름드리 붉은 소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관룡사에 거의 다 내려온 지점에는 경남 문화재자료 제19호인 부도가 있다. 부도 주위에도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부도란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무덤과 같은 것이다. 이 부도는 관룡사 경내에 있는 일곱기의 부도 중 하나로, 그 구조와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관룡사 대웅전
*관룡사에서 바라본 구룡산 병풍바위
관룡사에 이르니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다. 사천왕문 바로 앞 계단에 아름드리 은행나무에 걸린 햇빛에 눈이 부시다. 사천왕문에는 '화왕산 관룡사(火旺山 觀龍寺)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관룡사는 관룡산의 품에 안겨 있는데 어째서 화왕산이란 말을 썼을까? 관룡이란 말이 두번 반복되는 것이 거슬려서였을까? 대웅전 정면에는 '2007학년도 대입수능시험 백일기도'라고 쓴 대형현수막이 걸려 있다. 수험생 자녀들이 수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도록 기원하는 학부모들의 백일기도가 열리고 있는 모양이다. 대웅전 처마 너머로 구룡산 병풍바위가 백일기도가 열리고 있는 관룡사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관룡사는 관룡산 남쪽, 능선과 계곡이 모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경내에 있는 석조불상 등을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사찰로 추정되지만 그 창건 경위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 태종 원년(1401)에 대웅전이 건립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으며, 광해군 9년(1617)에 다시 짓고 그후 영조 25년(1749)에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관룡사 불교유적에는 대웅전(보물 제212호),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 관룡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 약사전(보물 제146호), 약사전 3층석탑(유형문화재 제11호), 부도 등 보물로 지정된 것만 해도 네 개나 된다. 용선대는 관룡산에서 뻗어내린 능선에 있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15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영조 9년(1733년)에 평해군수 신유한이 쓰고, 이듬해 망규산인 명학이 발문을 붙인 사적기에는 관룡사가 서기 349년에 창건됐으며, 그 근거가 된 것은 약사전을 수리할 때 대들보에서 나온 영화오년기유(永和五年己酉)라는 글이다. 그런데 이것은 고구려에 처음 불교승려가 들어왔다는 372년보다 23년이나 앞서는 기록이다. 사적기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관룡사는 가야국의 사찰로 보아야 한다. 사적기는 불교가 고구려를 통해서 들어왔다는 북방전래설이 아니라 지리산의 칠불사처럼 가야시대 해상전래설에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구룡산의 용머리바위 자하맥의 끝에 자리잡았다고 전해지는 약사전은 사방 한칸의 작은 건물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어서 가야양식이 아닌가 추정된다. 약사전 석불좌상은 고려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으나, 스님들은 인도양식에 가깝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룡사를 떠나 옥천리 매표소로 향한다. 관룡사 바로 앞에는 대나무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대나무숲을 지나면 신돈이 자라고 출가했다는 옥천사지가 나타난다. 관룡사에서 옥천마을로 내려가는 길 옆의 꽤 넓은 절터에는 주춧돌과 연화대석 기단석, 석등의 하대석, 석축 등이 남아 있어 이곳이 옥천사의 옛터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절터로 보아 대사찰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옥천사는 삼국시대에 창건되어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 창녕현 기록에 의하면 신돈의 어머니는 이 절의 노비였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옥천사의 노비였던 어머니로 인해 그는 이 절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어린 나이에 출가를 하였다.
신돈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공민왕 20년(1371년)에 죽었다. 그의 본관은 영산(靈山)이고 승명은 편조(遍照), 자는 요공(耀空)이다. '돈'이란 이름은 그의 집권 후에 정한 속명이다. 신돈은 총명했지만 천한 출신이었던 까닭에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공민왕 7년(1358년) 김원명(金元命)에 의해 공민왕에 천거되었다. 공민왕은 신돈에 대한 신하들의 반대와 암살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를 중용하였다. 당시에는 혼맥과 혈맥으로 얼킨 권문세족이 대를 이어 정치를 좌우하던 때라 개혁정치를 추구하던 공민왕은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때 공민왕은 이렇다 할 배경도 조직도 없는 신돈이 개혁정치의 적임자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신돈은 1364년 마침내 두타승(頭陀僧)이 되어 권력을 잡게 된다. 그는 공민왕으로부터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법호를 받고 사부가 되어 국정을 자문했다. 1365년 5월에는 최영(崔瑩)을 비롯한 보수적인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7월에는 진평후(眞平侯)에 봉해진 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산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都僉議使司事判重房監察司事鷲山府院君提調僧錄司事兼判書雲觀事)라는 긴 이름을 가진 최고위직에까지 이르렀다.
신돈의 중용에 대해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저지른 실정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이씨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일종의 역사왜곡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돈이 영도첨의사사사가 되자 인사권은 물론 모든 권력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과 지위는 왕권의 비호가 잇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그가 독자적인 세력을 다지지는 못했으며, 불가의 계보도 변변찮은데다가 천한 출신성분 때문에 불교계의 지지도 받지 못했던 듯하다. 그래서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권문세가 출신 고승 보우(普愚)로부터 사악한 승려로 몰리기도 했다.
신돈이 집권했던 기간에는 실제로 많은 개혁정치가 이루어졌다. 1366년 5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서 자신이 판사(判事)가 되어, 권력자들의 학정과 가렴주구로 억울하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는가 하면 강제로 노비가 된 백성들을 풀어주는 등 혁명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자 신돈은 백성들로부터 '성인'의 칭호를 얻기까지 하였다. 이듬해인 1367년에는 유학(儒學)을 중흥시키려는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숭문관(崇文館) 옛터에 성균관을 다시 열어서 새로운 문신세력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 정몽주(鄭夢周)와 정도전(鄭道傳)은 이러한 배경속에서 신진 문신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 같은해 '도선비기(道詵秘記)'를 근거로 왕에게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소용이 없는 일이지만 만약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면 후세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평양천도의 좌절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국시로 삼았던 북진정책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신돈은 등용될 때부터 보수적인 권력층과 불교교단으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해야만 했다. 결국 그는 1367년 처첩을 거느리고 아이를 낳아 주색에 빠졌다는 비난이 거세지면서 몰락하게 된다. 1369년에는 5도(道)의 도사심관(都事審官)이 되기 위해 사심관제를 부활시키려다가 좌절되면서 결정적인 실각의 길로 들어선다. 1370년 10월 뒤로 물러나 있던 공민왕이 정치일선에 돌아온 다음해 7월 마침내 그는 역모혐의로 체포되어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사형을 당한다. 신돈을 실각시킨 세력은 그후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추대하였다. 조선왕조때 편찬된 고려사에는 신돈을 대역죄인, 요승(妖僧) 등 매우 부정적인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신돈은 성인으로부터 요승, 사승(邪僧)에 이르는 다양한 칭호에서 보듯이 그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사람이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가 간 신돈의 역사가 서려 있는 옥천사지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한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서 출가한 옥천사는 온데간데 없고 옛날의 절터에는 잡초만이 무성하다. 문득 이색,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야은 길재의 시조 한 수가 떠오른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옥천계곡과 관룡사 삼거리
옥천사지에서 한참을 걸어서 내려오면 옥천계곡과 관룡사 삼거리를 만난다. 왼쪽은 옥천계곡, 오른쪽은 관룡사로 오르는 길이다. 아스팔트길을 오래 걸으니 발바닥이 아파온다. 삼거리 주차장 근처 포장마차에서 어묵으로 시장기를 달랜다. 어묵을 우려낸 국물이 참 시원하고 구수하다.
시내버스를 타려면 옥천리 매표소까지 내려가야 한다. 옥천리 매표소에 도착하자 마침 시내버스가 곧 떠난다고 한다. 실로 오랜만에 타보는 버스다. 차삯은 천삼백 원. 자하골 주차장에서 가까운 곳에 내려달라는 부탁을 운전기사에게 하고 자리에 앉는다. 차안에는 승객이 별로 없다. 시내버스는 옥천마을을 떠나 창녕읍으로 향한다. 차창으로 보이는 화왕산 주변의 능선과 계곡이 아름답다. 서녘하늘에는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다.
창녕읍으로 들어와 버스기사가 일러준 대로 자하골 근처에서 내렸다. 자하골 주차장으로 올라가니 그렇게 많던 차량들은 다 빠져나가고 내 차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주차장에서 자하골을 떠나기 전 화왕산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화왕산과 무언의 작별인사를 나누고 자하골을 떠난다.
잘 있거라 화왕산아, 진달래가 활짝 필 때쯤 다시 오려마.
2006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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