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순례기

100대 명산 태화산 포토기행

林 山 2006. 11. 3. 18:52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도 맑고 화창하다. 산으로 들어가기에 참 좋은 날이다. 한국의 100대 명산이자 영춘지맥이 시작되는 태화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강원도 영월로 향한다. 도로주변의 논밭에는 가을걷이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에도 가을빛이 완연하다. 

 

예전에는 충주에서 영월을 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요즘은 4차선 도로가 잘 나 있어서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제천서 영월까지는 자동차 전용도로여서 시속 90km까지 달릴 수 있다. 자동차 전용도로는 현재 영월까지만 개통되어 있는데, 정선과 태백쪽으로 공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 도로가 완공되면 아마 강릉까지 연결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태화산 등산지도

 

영월로 들어와 남한강 강변도로를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영월화력발전처 바로 앞에 있는 팔흥교를 건넌다. 팔흥교를 건너면서 남한강을 바라보니 강물이 흙탕물처럼 뿌옇다. 장마가 진 것도 아닌데 물빛이 매우 탁하다. 어디선가 하천공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공사를 하더라도 강물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팔흥교를 건너 영월군 팔괴리 괴리마을을 지나는데 마을회관 마당에서 김장담그기가 한창이다. 온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다 모여서 두레로 김치를 담그고 있다. 고추가루와 마늘, 파 등으로 양념을 한 속을 넣은 배추김치가 먹음직스럽다. 갓담은 김치를 먹고싶어 한 할머니에게 부탁하니 양념이 잘 된 김치 한쪽을 입에 넣어준다. 김치를 먹으면서 나는 그 할머니에게서 돌아가신 내 친할머니의 훈훈한 정을 느낀다.

 

고마움의 표시로 나는 마을구판장에서 막걸리를 한통 사서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에게 한잔씩 돌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구판장 주인 할머니가 술안주를 하라면서 돼지고기 수육을 큰 접시로 하나 가득 내오는 것이 아닌가! 김장을 담그던 한 젊은 아낙네는 햇김치를 쟁반에 푸짐하게 담아서 내온다. 마을구판장 마당에서는 뜻하지 않게 작은 잔치가 벌어졌다. 지나가던 동네 어르신도 기꺼이 잔치에 참여한다. 막걸리를 한 순배 돌린 다음 나도 한사발 들이킨다. 구판장에서 직접 담갔다는 막걸리 맛이 가히 일품이다. 술안주로 햇김치에 돼지고기 수육 한점을 싸서 먹으니 둘이 먹다가 둘다 죽어도 모를 만큼 꿀맛이다.  

 

괴리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다는 어르신이 팔괴리 마을의 유래와 태화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 이 동네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여덟 그루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덟팔(八)자, 홰나무괴(槐)자를 써서 팔괴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팔괴리나 괴리마을의 이름으로 보아 느티나무와 깊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진작에 했었다. 태화산은 가을단풍이 좋은데 올해는 가뭄이 들어서 나뭇잎들이 단풍도 제대로 들지않고 말라버렸다고 한다. 마을사람들과 막걸리잔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마치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진다. 좀더 머물다 가라는 괴리마을 아주머니들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태화산을 향해 떠난다. 괴리마을이 인심좋고 살기좋은 마을로 오래오래 남아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흥월리 흥교마을 등산로 입구

 

괴리마을을 지나면 오그란이라는 동네가 나타난다. 오그란이에서 태화산성을 거쳐 태화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있다. 마을입구에는 등산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오그란이에서 협곡으로 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면 달지마을이 있는데, 이곳에도 큰골을 타고 태화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큰골 입구에서 조금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면 흥교마을로 오르는 길이고, 우회전을 하면 청령포로 나가는 길이다. 좌회전을 해서 가파른 고개를 올라서면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 흥교마을이 태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폐교된 흥교분교장을 지나 입산신고소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시멘트로 포장된 길가에 무덤이 하나 있다. 무덤에서 본격적인 입산이 시작된다. 길가에 피어 있는 서양민들레꽃과 달맞이꽃이 산길 나그네를 반겨준다.     



*낙엽으로 뒤덮힌 등산로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계곡으로 들어가는 산길로 접어든다. 태화산 기슭에는 활엽수들이 노란색으로 또는 누런색으로 물들어 있다. 울긋불긋 곱게 물든 단풍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산의 나뭇잎들도 단풍이 채 들기도 전에 말라버렸다. 계곡으로 난 길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계곡길에서 영춘지맥이 지나가는 능선길로 올라선다. 낙엽이 쌓여 희미해진 능선길에는 영춘지맥을 종주하는 사람들이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빛바랜 표지기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오늘은 태화산에 오른 김에 영춘지맥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그 출발점을 찾아볼 생각이다. 능선길에도 낙엽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미끄러져 넘어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낙엽이 바위나 돌 위에 쌓여 있을 때는 미끄러져서 발목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흥교에서 영춘지맥을 따라서 태화산을 오르는 길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삼거리에서 바라본 태화산

 

1031m봉 팔부 능선을 횡단하는 길을 따라가다가 태화산과 영춘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인 태화산맥 주능선에 올라선다. 절고개라고도 하는 삼거리에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가면 태화산이고, 남쪽으로 가면 영춘이 나온다. 태화산이 바로 앞에 보인다. 여기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다. 그러나 나무들이 얼마나 우거졌는지 숲에 가려 태화산이 잘 보이지 않는다. 태화산에는 상록수들은 드물고 참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태화산을 오르기 전에 1,031m봉을 먼저 오르기로 한다. 이 봉우리는 삼거리에서 주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2,3분 정도 올라가면 된다. 정상은 몽긋한 형태의 봉우리로 영춘 일대가 잘 조망된다. 그러나 오늘은 짙은 연무로 인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정상에는 아무런 표지판도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에 산행객들이 매달아 놓고 간 표지기들만 무수히 달려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은 1,031m봉이 더 높은데도 불구하고 1,027m봉에 정상표지석이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궁금하다. 그것은 아마도 주흘산처럼 산세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영봉이라 하고, 그 산의 맥의 흐름이 모이는 중심으로 산세가 가장 뛰어난 봉우리를 주봉이라 한다. 그렇다면 1,031m봉을 태화산 영봉, 1,027m봉을 태화산 주봉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까? 앞으로 나는 그렇게 부르기로 하겠다.



*태화산 정상부에 있는 이정표

 

태화영봉에서 삼거리로 도로 내려와 태화주봉으로 향한다. 주봉으로 가는 능선길에도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삼거리에서 안부로 한번 내려갔다가 한번 올라서면 주봉 정상부에 이르게 된다. 주봉 바로 못미친 곳에 있는 작은 공터에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달곳마을에서 이곳까지는 3km의 거리다. 여기서 태화주봉을 지나 큰골까지는 2.8km, 태화산성까지는 2.5km의 거리다. 


*영춘지맥 태화산 정상표지석


*태화산 정상에서 필자

 

태화산 주봉에 올라선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우거진 숲으로 인해 전망이 별로 좋지 않다. 태화주봉은 충북 단양군(영춘면)과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흥월리)의 경계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정상표지석도 단양군과 영월군에서 각각 따로 세워 놓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세운 정상표지석은 충북의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이 천편일률적으로 개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강원도 영월군에서 세운 정상표지석은 점판암 조각작품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충북이나 강원도나 다같이 막대한 정부예산을 받아서 정상표지석을 설치했을 것이다. 같은 예산을 쓰고도 어떤 도는 똑같은 모양에 글씨만 다른 정상표지석을 세우는가 하면 어떤 도는 산의 특징과 미적 감각을 살린 정상표지석을 세운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조형물 하나만을 보더라도 행정을 하는 사람들의 마인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정상표지석과 같은 조형물을 세울 때는 미리 그 산이 있는 지역의 산악인들이나 조각가들에게 자문을 구한다면 이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충북에 있는 산에 오를 때마다 도에서 세운 몰개성적인 정상표지석을 보면 아쉬운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태화주봉에서 바라본 태화영봉

 

태화주봉은 천미터가 넘는 산봉우리치고는 정상부가 상당히 비좁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태화영봉을 바라본다. 태화영봉은 잡목숲에 가려 정상부만 간신히 보인다. 녹음이 짙은 여름철에는 전망이 훨씬 더 안좋을 것 같다. 주봉의 북동쪽에 있는 1,025m봉도 우거진 참나무들과 잡목으로 인해 윤곽만 보일 뿐이다. 태화주봉을 떠나 1,025m봉으로 향한다. 



*태화주봉 정상부에서 바라본 1,025m봉

 

태화주봉에서 조금 내려오자 영춘지맥 주능선상의 암벽지대와 1,025m봉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영춘지맥을 종주하는 사람들은 대개 영월군 하동면 각동리 중말에서 일어나는 산줄기의 끝자락을 출발점으로 한다. 각동리 중말에서 영춘지맥 종주를 시작한다면 620.8m봉, 711m봉, 715m봉을 넘어서 오그란이와 태화주봉, 고씨굴 갈림길이 있는 사거리에서 태화산맥 주능선으로 올라선 다음 915m봉, 905m봉을 지나 바로 저 앞의 1,025m봉에 이르게 된다. 영춘지맥은 1,025m봉에서 다시 태화주봉을 넘고 영춘과 흥교 삼거리에서 태화영봉을 오른쪽 사면으로 횡단하다가 태화영봉에서 내려오는 능선을 다시 만나 흥교마을로 내려와 국지산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사거리에서 북동쪽으로 더 뻗어간 주능선을 따라가다가 전망대가 있는 암봉에서 동남쪽으로 각동리 길론마을을 향해서 뻗어내린 산줄기를 영춘지맥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하나는 전망대 암봉에서 북동쪽으로 뻗어간 영월군 하동면과 영월읍의 경계가 되는 능선이나,  전망대 암봉에서 북쪽으로 482.1m봉을 지나 팔괴리 오그란이쪽으로 뻗어간 능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산맥의 흐름이나 산줄기의 길이, 산세를 종합하면 전망대 암봉에서 각동리 길론마을로 뻗어가다가 남한강 물속으로 산꼬리를 감추는 산줄기가 영춘지맥의 원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태화주봉과 1,025m봉 사이에 있는 암벽지대

 

1,025m봉으로 가려면 암벽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암벽지대라고 해서 험하거나 가파른 것은 아니다. 밧줄을 매어 놓은 곳 한군데만 통과하면 오르내림이 별로 없는 편한 능선길이다. 


*태화산맥 주능선길

 

언제 1,025m봉에 올랐는지도 모르게 정상에 올라선다. 태화주봉과 1,025m봉 사이에 큰골을 타고 달지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길이 희미하여 주의해서 찾아야 한다. 태화산맥 주능선의 산기슭에도 참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잎을 떨군 나뭇가지들이 앙상한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다.


*암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한강과 단양군 영춘면 오사리


*암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영월군 하동면 각동리

 

아름드리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전망 좋은 암봉에 올라선다. 그러나 전망이 아무리 좋은 곳이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연무가 짙게 끼어 있어서 남한강 건너편에 있는 산들은 어슴푸레하게 윤곽만 간신히 보일 뿐이다. 날씨만 맑으면 장엄한 모습을 드러낼 소백산맥도 오늘은 오리무중이다. 서강과 동강이 영월에서 합쳐서 구불구불 내려오던 남한강은 태화산을 휘휘 돌아 각동리 뱃나드리에서 옥동천과 만나 단양땅을 향해 유유히 흘러간다. 저 아래 남쪽으로 단양군 영춘면 오사리가 보인다. 일주일 전에 태화산을 오르다가 비를 만나서 도로 내려간 바로 그 오사리마을이다. 남동쪽으로 영월군 하동면 각동리 중말과 뱃나드리마을도 내려다 보인다. 각동리 중말쪽으로 뻗어내려간 태화산맥의 지능선에 620.8m봉이 솟아 있다.  


*헬기장


*헬기장에서 바라본 서녘하늘

 

헬기장을 지난다. 헬기장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니 서녘하늘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은 많이 남아 있는데 슬슬 걱정이 된다. 초행길이라 지형도 모르고 길도 모르니 산중에서 밤을 맞으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전등도 준비하지 않아서 산속을 헤매고 다니는 생고생을 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고씨동굴까지 가려면 아직도 두 시간 정도 더 가야만 하는데...... 잘하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도 같다. 서둘러 길을 다시 떠난다.   



*오그란이와 고씨동굴, 각동리 중말 갈림길이 있는 사거리

 

헬기장에서 주능선을 따라서 조금만 더 가면 왼쪽으로 태화산성과 914m봉으로 해서 오그란이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러나 표지판도 없고 길도 뚜렷하지 않아서 이 산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은 헷갈리기 쉽다. 914m봉은 주능선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태화산성과 914m봉을 둘러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고압선 철탑을 세웠던 흔적이 있는 곳을 지나면, 오그란이와 고씨동굴, 각동리 중말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사거리에 이른다. 조금 전 지나왔던 태화산성으로 가는 길로 돌아서 와도 914m봉 안부에서 이곳 사거리에 이를 수 있다. 여기서 오른쪽 능선길은 하동면 각동리 중말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능선을 타고 가다가 715m봉 조금 못미친 곳에 있는 삼거리에서 계곡으로 내려서면 각동리 괴목마을이 나온다. 그런데 중말로 내려가는 능선길 길목을 누군가 참나무를 찍어서 가로막아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모르겠다. 누군가 참나무에 달아 놓은 표지판에는 이곳에서 고씨동굴까지 두 시간 거리라고 씌어져 있다. 산길에서 두 시간 걸린다면 대충 4km 정도 되는 거리다. 이젠 경치고 전망이고 살펴 볼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서둘러야만 한다.

*전망대 암봉과 고씨동굴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


사거리에서부터 고씨굴로 가는 주능선은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은 듯 표지기도 드문드문 붙어 있다. 가끔 만나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쓴 이정표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또 길이 헷갈리기 좋은 곳에는 '영월을 사랑하는 모임'(영사모) 산악회원들이 달아 놓은 표지기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태화산맥의 주능선의 끝부분에 있는 전망대 암봉과 고씨굴 삼거리에 이른다. 전망대 암봉은 삼거리에서 10여m도 채 안되는 거리다. 암봉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우거진 숲과 짙은 연무로 인해 경치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암봉에서 태화산맥 주능선 방향으로 북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은 영월군 영월읍과 영월군 하동면의 경계가 되는 산줄기다. 암봉 북쪽 능선은 482.1m봉을 지나 영월읍 팔괴리 오그란이로 뻗어간다.

 

고씨굴로 내려가려면 여기서 남동쪽 능선을 타야 한다. 능선길은 초입부터 얼마나 가파른지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으로 옷은 이미 축축하게 다 젖어버렸다. 얼굴에는 소금기마저 버석거린다. 그러고보니 오늘 산으로 들어온 뒤부터는 점심도 안 먹고 물 한모금 안 마셨다. 배낭에 김밥과 물 한병이 들어 있지만 배도 별로 안 고프고 갈증도 나지 않아 그냥 가기로 한다. 낙엽으로 덮힌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오느라 몇 번이나 미끄러졌는지 모른다. 종아리의 힘줄이 땅기기 시작하고 무릎과 발목도 시큰거린다.


*고씨굴 능선에서 바라본 전망대 암봉

 

전망대 암봉에서 고씨굴로 이어지는 가파른 능선길을 내려오자 전망이 확 트인 밋밋한 봉우리가 나타난다. 누군가 봉우리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낸 흔적이 보인다. 방금 내려온 능선이 저만치 바라다 보인다. 전망대 암봉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뻗어내려간 능선이 영월읍과 하동면의 경계가 되는 산줄기다. 바로 앞에 보이는 계곡의 왼쪽 능선이 내가 타고 내려온 능선이다. 산기슭에는 소나무를 비롯한 상록수들이 제법 많이 자라고 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활엽수들도 단풍이 채 들지 못하고 나뭇잎들이 말라가고 있다.  



*고씨굴 능선의 암릉길

 

전망대 봉우리를 떠나 고씨굴로 가는 능선길에 오른다. 한동안 양쪽이 깎아지른 듯이 좁고 가파른 암릉길이 이어진다. 해는 이미 져서 사위가 어둑어둑해져 오고 있다. 어느 순간 오른쪽으로 깊은 계곡에 자리잡은 길론마을이 보인다. 태화주봉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던 터라 반가운 마음이 든다. 마을이 가깝다면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이야기다.

 


*고씨굴 입구로 내려가는 벼랑길
 

 

길론마을과 고씨굴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타난다. 고씨굴은 왼쪽으로 가파른 비탈길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아까 지나왔던 주능선상의 전망대 암봉을 내려오는 비탈길보다도 훨씬 더 가파르다. 잘못하면 굴러 떨어질 판이다. 주위에는 마땅히 붙잡을 만한 나무나 덩굴이 별로 없어서 힘이 들고 위험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바로 저 아래로 남한강과 강변도로가 보인다. 고씨굴교 건너편에 있는 진별리마을도 눈에 들어온다.  

 

어찌 된 일인지 비탈길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더 가파라진다. 위성안테나를 지나자 고씨굴 입구가 바로 밑에 보인다. 위성안테나가 있는 능선에서 거의 절벽수준인 계곡을 밧줄에 의지한 채 횡단하면 마지막 벼랑길이 기다린다. 군대에 있을 때 유격훈련을 하던 식으로 밧줄을 잡고 벼랑길을 내려가는데 팔에서 쥐가 나려고 한다.   

 


*고씨굴 등산로 입구

 

가까스로 고씨굴로 내려왔다. 캄캄한 밤이 되기 전에 산행을 마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벼랑길을 내려오느라 힘을 많이 쓴 탓인지 두 손이 벌벌벌 떨린다. 체력이 딸리는 사람은 이 등산로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 등산로 입구에는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비를 세워놓았다. 몸도 지치고 피곤해서 김삿갓의 시를 읽어보기도 귀찮다. 티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데 손이 떨려서 제대로 나올라나 모르겠다. 야간촬영이라 셔터도 느리게 닫히는데..... (이 사진도 손이 떨리는 바람에 흔들렸다.)   


*고씨굴 입구

 

김삿갓 시비 근처에 있는 수도에서 땀에 절은 얼굴을 씻는다. 소금기가 눈으로 들어갔는지 쓰려온다. 세수를 하고나니 시원하다. 고씨굴 입구는 관람시간이 벌써 끝난지 오랜 듯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좀더 일찍 내려와서 고씨굴을 보고 갔으면 좋았을 것을.....

 

고씨굴은 영월읍에서 영월대교를 건너 영월화력발전처로 이어지는 88번 지방도를 따라 자동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나루뚜둑마을(진별리)의 강 건너편에 있다. 예전에는 나룻배를 타고 폭이 130m여 미터에 이르는 남한강을 건너야 했지만, 지금은 다리가 놓여져 있어 고씨굴까지 걸어서 갈 수 있다. 이 동굴은 원래 노리곡동굴 또는 노리곡석굴이라고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종원 일가와 지역주민들이 피난을 하였다고 해서 고씨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굴 내부에는 당시 피난살이를 하면서 밥을 짓기 위해 불을 때서 그을린 흔적과 솥을 걸었던 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전형적인 석회동굴로 다층구조를 갖고 있는 고씨굴은 1969년 6월 4일에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었으며, 1974년 5월 15일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통로가 발달한 동굴의 아래층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다. 수평굴의 형태를 띠고 있는 주굴의 길이는 약 0.95km, 지굴의 길이는 약 2.438km로 고씨굴의 총연장은 3.388km(6.3km라는 설도 있음)이며, 이 중에서 약 0.62km 구간만 관람할 수 있다. 약 4억년 전부터 형성된 종유석 동굴 내부에는 4개의 호수와 3개의 폭포, 6개의 광장이 있으며, 다양한 종유관, 종유석, 석순, 석주, 동굴산호, 유석, 커튼과 동굴진주, 피솔라이트, 동굴방패, 곡석, 월유 등이 조화되어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그밖에 기형종유석도 여러 곳에서 성장하고 있다. 고씨굴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흑색의 동굴산호라고 할 수 있다. 동굴산호는 동굴수의 공급이 멈춘 석순과 유석 위에서 많이 발견된다. 동굴산호가 흑색을 띠는 이유는 동굴수에 토양으로부터 공급된 유기물의 영향이다. 고씨굴에는 또 다양한 동굴생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총 8강 25목 50과 58속 67종이 발견되었다. 이 중에서 절지동물인 결합류 1종은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굴속에는 24여 종의 미생물도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씨굴에서 바라본 고씨굴교와 진별리마을

 

고씨굴을 떠나 진별리로 향한다. 고씨굴교 건너편 진별리마을 상가촌에는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다. 고씨굴을 보러온 관광객들의 발길도 거의 끊어진 상태다.


*고씨굴교 중간쯤에서 바라본 고씨굴 능선

 

고씨굴교를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땅거미가 밀려오고 있는 능선을 바라본다. 저 가운데 봉우리에 있는 삼거리에서 고씨굴로 뻗어내린 능선을 타고 내려온 것이다. 여기서 보면 그리 험한 능선같지도 않은데 아까는 내려오느라 애를 먹었다.



*고씨굴 앞을 흐르는 남한강

 

이번에는 고씨굴 앞을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본다.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기슭의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땅을 지나 예까지 흘러와서는 단양, 제천, 충주, 여주를 거쳐 양평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하여 한강을 이룬 다음 서울, 김포, 강화를 지나 서해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고요하게 흐르는 남한강 위로 저녁 어스름이 밀려오고 있다. 고씨굴교를 건너 진별리마을에 도착하니 저녁 7시가 다 되었다.

 

오늘 태화산맥을 종주하고 나니 비로소 영춘지맥이 어디서 시작하는지를 알겠다. 영춘지맥의 출발점은 산맥의 흐름으로 보나 산세로 보나 남한강과 하동면 각동리 길론마을 사이로 뻗어내린 산줄기라고 보는 것이 옳다. 영춘지맥 종주를 제대로 하려면 길론마을에서 내려오는 개울 건너편의 산자락에서 시작해야 한다. 교통이 불편하다면 고씨굴에서 시작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태화산맥을 가슴에 안고 귀로에 오르다.

 

2006년 10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