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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기행-요하네스버그의 골드 리프 시티(Gold Reef City)

林 山 2008. 9. 22. 15:22

오늘은 조벅의 남서쪽 교외에 있는 유명한 관광명소 골드 리프 시티(Gold Reef City)를 돌아볼 생각이다. 골드 디프 시티를 돌아본 뒤에는 같은 곳에 있는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Apartheid Museum)도 관람할 계획이다. 

 

조벅 북쪽의 포웨이스(Fourways)에서 N1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달리다가 M2 고속도로로 들어선 다음 조벅을 남서쪽 방향으로 관통해서 도심을 벗어나면 곧 사우스데일에 닿는다. 골드 리프 시티와 박물관은 조벅 교외 오먼드(Ormonde)의 북공원로 & 골드 리프로(Nothern Parkway & Gold Reef Road)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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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리프 시티 정문

 

Imaliyam-남아공 드라켄스버그 소년합창단

 

박물관으로 들어가려면 성문처럼 생긴 골드 리프 시티 정문을 통과해야 한다. 골드 리프 시티는 말 그대로 '금광촌'이란 뜻이다. 정문에서는 흑인 시큐리티가 출입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체크를 한다. 

 

골드 리프 시티는 1967년에 폐광된 크라운 마인스(Crown Mines) 금광산 자리에 1890년대 골드 러쉬로 번성하던 당시의 금광촌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테마 파크다. 테마 파크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09:30~17:00까지 개방하며, 성탄절과 월요일에는 문을 닫는다. 입장료는 요일과 연령, 그리고 옵션에 따라 천처만별이다. 가장 저렴한 7십란트(약 9천백원)부터 '조지의 금 이야기(Jozi's Story of Gold)' 공연을 제외한 모든 공연과 놀이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만천란트(약 백4십3만원)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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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리프 시티 매표소 앞의 광부 모형

 

골드 리프 시티에는 금광박물관을 비롯해서 카지노, 놀이공원, 호텔, 레스토랑, 대회의장, 기념품점 등 각종 레저 시설이 들어서 있어 조벅의 디즈니랜드라고도 한다. 시티 입구에는 당시의 주택들과 은행, 양조장, 호텔, 식당, 채굴한 광석을 운반하는 화차, 광부들의 모형을 볼 수 있다. 또 갱도 체험도 할 수 있고, 금괴를 만드는 과정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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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리프 시티 놀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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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로에서 금광석을 제련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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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괴를 주조하는 모습

 

골드 리프 시티에서는 마인 댄스(Mine dance) 공연도 관람할 수 있다. 민속춤으로 공연되는 마인 댄스에는 사실 노동자들의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유럽의 탄광 노동자들은 극도로 열악한 작업환경과 형편없는 저임금으로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각성한 광부들은 광산주들에게 임금인상, 노동환경과 복지의 개선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투쟁하기 시작했다. 이에 정권과 결탁한 광산주들은 강경한 탄압으로 맞섰다. 노사간의 충돌로 탄광의 소요사태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수시로 발생하는 분규로 석탄 생산량이 감소함과 동시에 탄광주들의 이익도 줄어들었다. 

 

탄광주들은 비용도 적게 들면서 광부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광부들에게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충족시키는 향락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탄광주들은 광부들에게 술과 여자들을 풀어놓았다. 그러자 탄광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이 끝난 광부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술집에서 여자들을 끼고 밤새도록 광란의 춤판(마인 댄스)을 벌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광부들은 퇴폐적인 향락에 빠졌으며, 건강한 비판정신과 투쟁의지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탄광의 분규도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탄광주들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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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 댄스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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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인 댄스 공연

 

골드 리프 시티의 금광주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금광주들은 흑인 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정기적으로 마인 댄스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흑인 노동자들에게 마인 댄스는 너무나도 달콤한 독이었다. 흑인 노동자들은 백인 금광주들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 노동해방을 쟁취하기보다 술과 여자에 대한 탐닉으로 고된 삶과 중노동의 고통을 잊으려 했다. 희생을 담보로 하는 노동해방의 길은 멀고, 술과 여자는 손만 내밀면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사회의 지배층이나 지배권력이 민중의 비판정신을 의도적으로 마비시키고 사상을 획일화하여 그들의 투쟁의지를 엉뚱한 곳으로 분출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마인 댄스(의식 잠재우기 또는 불만 잠재우기)라고 한다. 이후 마인 댄스는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지배층이 민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하게 된다.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는 인간사회에는 어디서나 예외없이 마인 댄스가 춤을 춘다.

 

한국에서도 마인 댄스가 횡행한 적이 있을까?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주 많다. 마인 댄스의 주요 수단은 섹스(Sex), 스포츠(Sports), 스크린(Screen) 등 이른바 3S다. 독재정권이 장악한 방송사와 수구보수 신문은 마인 댄스의 나팔수들이었으며, 검은 지원과 장학금을 받는 어용 지식인과 어용 장학생들은 그 선봉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군사반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과 신군부는 반정부 인사들에 대해서는 철권통치를 휘두르는 한편 대중들에게는 마인 댄스를 잘 활용했다.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서둘러 마인 댄스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학살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기도 않은 1980년 7월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세계 미스 유니버스 대회라는 유흥판을 벌이는가 하면,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는 서울의 여의도에서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한 국풍81이라는 굿판을 열기도 했다. 이어 스포츠의 열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1982년에는 지역에 연고를 둔 프로 야구 리그제가 출범했으며, 1983년에는 역시 지역에 연고를 둔 프로 축구 수퍼리그제가 출범했다. 당시 프로 야구는 전 세계적으로 미국과 일본에만 있는 프로 스포츠였다. 마인 댄스의 결정판은 88올림픽의 서울 유치였다. 올림픽 대회의 유치가 확정되자 국민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때는 마침 흑백 TV가 사라지고 컬러 TV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쇼는 화려해졌고, 불륜이나 삼각관계를 다룬 연속극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신문과 잡지들은 선정적인 내용을 경쟁적으로 보도하였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유물인 영화검열도 3S에 걸맞게 손질되었다. 사전검열의 독소조항은 그대로 둔 채 배우들이 옷을 벗는 것이 허용되었다. 새로운 검열법에 부응하여 등장한 영화가 바로 '애마부인'이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의 주된 화제는 주제나 내용이 아니라 주연 여배우의 가슴 크기였다. 때를 만난 향락산업은 나날이 발전하여 술집에는 술과 여자가 넘쳐났다. 

 

비판정신을 상실한 국민들은 정신없이 마인 댄스를 추면서 의식이 마비되어 갔다. 덕분에 전두환 정권은 무사히 정권을 연장할 수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마인 댄스의 마취제에서 점차 깨어나기 시작했다. 1987년 6.10 민주대항쟁을 통해서 국민들은 4.13 호헌조치를 철폐시키고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그러나 차기 대통령 당선자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전두환과 함께 신군부 쿠데타의 주역인 노태우 후보였다. 노태우 정권이 취임 초기에 개최한 88올림픽에서 한국은 종합 4위라는 역대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이에 국민들은 세계 4등 국민이 된 것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88올림픽 덕분에 노태우 정권도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88올림픽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정권에게 있어 절묘한 마인 댄스였던 것이다.   

 

노태우 정권에 이어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보수연합으로 이루어진 민자당의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다. 김영삼 정권 4년만에 초유의 IMF 구제금융 사태가 벌어졌다. 졸지에 한국은 국제 거지가 되고 말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11월 10일 당시 홍재형 경제부총리와의 전화통화 이전까지만 해도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만큼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IMF 구제금융 사태는 사실 박정희 정권이 싹을 틔우고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을 거치면서 곪을 대로 곪은 다음,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마침내 터져버린 것이다. 김영삼 정권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져 온 영남지역과 보수세력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IMF 구제금융 사태는 김영삼 정권이 경제적 무능의 책임을 지고 퇴진해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김영삼 정권에게는 마인 댄스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기득권층과 독재권력의 나팔수 수구보수 신문 3사와 공중파 방송 3사는 앞장서서 '금 모으기 운동'과 '달러 모으기 운동'이라는 마인 댄스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또 마인 댄스를 열심히 추면서 애국하는 심정으로 금과 달러를 갖다 바쳤다. 사실 국민들은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 초래한 경제위기의 실정을 '허리띠를 푼 우리들 탓'이라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렸다. 김영삼 정권의 마인 댄스는 그야말로 도랑도 치면서 가재도 잡는 일석이조의 대성공이었다. 그 덕에 김영삼 정권은 퇴진의 위기를 모면했다.   

 

아직도 죽지 않고 끊질기게 살아 있는 희대의 마인 댄스는 바로 반공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역대 수구보수 정권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온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던가!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맹목적인 민족주의나 전체주의, 인종주의, 각종 이데올로기, 순수한 스포츠의 제전이 되어야 할 올림픽 대회나 월드컵 축구대회, 종교, 지역감정 등을 이용한 마인 댄스는 언제 어디서든지 나타날 수 있다. 아리안족 우월주의를 이용한 히틀러는 나치즘을 마인 댄스화함으로써 지구 역사상 가장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히틀러는 나치당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기막히게 활용했다. 독일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하자 독일 국민들은 나치즘이라는 마인 댄스에 취해 히틀러의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히틀러의 나치즘에 의해 촉발된 2차대전으로 1590만 명이 전사했으며, 6백만 명의 유태인이 희생되지 않았던가! 

 

지배세력이 궁지에 몰리면 마인 댄스는 형태를 달리하여 언제든지 또 나타날 것이다. 마인 댄스에 놀아나지 않는 국민이 많은 나라일수록 성숙한 사회다. 인터넷의 발달은 기득권층이 장악하고 있는 정보의 독점을 무장해제시키고, 마인 댄스를 잠재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양심적인 인터넷 사용자들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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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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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석을 운반하는 갱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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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석 채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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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운 광산의 갱도 지도

  

골드 리프 시티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투어는 지하 2백 미터까지 내려가 채굴현장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갱도 체험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백 미터 지점의 갱도로 내려가면 노동자 점호소와 간이 응급실, 식량 배급소, 배수 펌프장과 자가 발전소, 다이너마이트 보관소 등의 시설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갱도에서는 직원들이 당시의 노동자들이 금을 채굴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기도 한다. 가장 깊은 갱도는 지하 3천 미터까지 내려간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온도는 올라가 지하 3천 미터의 갱도 내부 온도는 거의 섭씨 50도가 넘는다. 안전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갱도에는 환기도 잘 안 되어 흙먼지로 가득했다. 백인 광산주들에 의해 햇빛과 공기로부터 차단되어 지하감옥이나 다름없는 끔찍한 굴속으로 졸지에 끌려온 흑인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며 비참하게 쓰러져 갔던 것이다.   

1886년 조벅의 골드 리프 시티에서 최초의 금광이 발견된 이래 1967년 문을 닫을 때까지 흑인들의 노동착취를 통해서 채굴된 금은 무려 140만 톤에 달한다. 이곳에 묻혀 있던 천문학적인 금 매장량은 이후 해발 천7백 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의 황무지에 불과했던 조벅을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상업도시로 성장케 한 원동력이었다. 화려하고 풍요로운 조벅의 이면에는 2세기가 넘도록 백인들에게 억압과 수탈을 당해온 흑인들의 절망과 울분, 고통과 신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아공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천혜의 기후조건, 풍부한 지하자원(세계 금 매장량의 약 50%,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약 66%)은 유럽의 탐욕스런 백인들을 불러들였고, 그 결과 흑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노예로 전락하는 어처구니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출신의 흑인 식민지 해방운동 이론가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의 책 제목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처럼....... 

 

 

2007년 8월 16일   

 

자료제공-장수건강마을 http://cafe.daum.net/leemsan-g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