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트로이카' 표지
기억하라, 우리를 위해 싸웠던 이들을!
며칠 후면 광복절이다. 거리마다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던 광경이 불과 50년 전이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언제부터인가 광복절은 그냥 빨간 날이 되어버렸다. 그 감동, 그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야 없겠지만, 우리를 위해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인 민족과 국가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기본적 합의마저 희석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그들을 기억해 내라고 말하고 있다. 작가는 빛바랜 사진과 오래 전 기록을 바탕으로, 희미한 실루엣만 드리우고 있던 그들을 소설의 매력적인 주인공들로 되살려낸 것이다.
잊혀져버린 탁월한 대중 혁명가, 이재유
이 책은 잊혀진 혁명가 이재유의 생애와 활동을 관계자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소설적으로 복원하였다.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운동을 계속한 그들의 활동은 보석처럼 빛난다. 사회주의자들이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선도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서 해방 직전까지도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고 고문과 폭력, 투옥의 위험을 감수한 그들의 존재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지식인들이 두세 명만 모여도 조직의 이름을 정하고, 국제선에 줄을 대어 보려고 노력할 때 이재유는 수백 명의 조직원을 확보하고도 투쟁 현장을 돌아보고, 도와줄 만한 사람들을 접선하는 데 더 힘을 기울였다. 당시에는 선도적이라 할 만한 조직론과 주장으로 대중에게 강하게 다가선 선구자적 인물이기도 했다. 파업을 선도하러 온 것이 아니라 도와주러 온 것이 옳다는 그의 주장, 토론과 협의를 통해 결정하고 지도자도 이를 따라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한다. 당시 그가 제기한 주 5일제, 국민연금, 의료보험, 비정규직 문제들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를 질주한 ‘경성 트로이카’
이재유라는 한 인물의 복원에만 그치지 않고 여기저기 공장이 생겨나고 일제의 부당한 착취에 반발하는 파업이 빈발할 수밖에 없었던 1930년대 경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역사의 총체적 복원이라 할 만하다. ‘반도의 동경’으로 불리며 번창했던 경성의 아름다운 모습, 그러나 일본인 거리나 조선인 부촌과는 거리가 먼 경성의 비참한 빈민촌에 대한 자세한 묘사, 당시 유행했던 찰리 채플린의 무성 영화와 이광수의 『금강산 기행』 같은 문화의 구체적인 모습들까지 아나키스트,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뒤섞여 있던 ‘경성, 1930년대’가 독자의 눈앞에 펼쳐진다.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고 다녔던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의 세 거두(巨頭)가 이끌었던 경성 트로이카! 트로이카는 러시아 말로 세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의미한다. 모든 활동가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자신과 조직의 운명을 결정하고 따르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이라는 뜻으로 조직명을 붙인 것이다. 해방 후 남로당의 실질적인 총 책임자로 활동하게 된 김삼룡, 지리산 빨치산 총대장이 된 이현상의 진가(眞價)를 알아보고 평생의 동지로 삼았던 이재유의 혜안(慧眼)이 드러난다.
1940년대 대부분의 조직들이 운동을 포기하던 그때에도 ‘경성 트로이카’의 멤버들은 ‘경성꼼그룹’을 결성하고 박헌영을 영입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운동의 암흑기에 유일하게 살아 움직인 전국적인 저항 세력인 ‘경성꼼그룹’의 활동은 국내 독립운동의 끊임없는 흐름과 풍부한 역량을 드러내주며, 이 흐름의 근원에는 이재유와 ‘경성 트로이카’가 있었던 것이다.
'경성 트로이카'의 일원이었던 이효정 여사
생생한 증언으로 복원된 여성 운동가들
작가 안재성이 만난 ‘경성 트로이카’의 일원이었던 이효정 할머니는 경성지역 사회주의 운동의 대모였던 박진홍, 박헌영의 연락책으로 활동하던 이순금과 동덕여고 시절부터 운동을 함께 하였던 분으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관술의 제자이기도 하다. 아흔이 넘는 연세에도, 이재유에게 아들 이철한의 죽음을 전하고 지켜본 아버지로서 이재유의 모습 등 자신과 관련된 운동사의 중요한 인물과 사건들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박진홍의 남편이 되는 김태준에 대한 세세한 묘사, 이순금과 사랑하는 사이였던 김삼룡의 외모와 성격에 대한 설명은 그래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해방 후 힘든 삶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이관술, 이순금의 유족들이 울산에 살고 있으며, 함께 운동을 했던 이병희 역시 살아 있다. 『경성트로이카』는 작가가 일제시대 노동운동사에 대한 방대한 관계 논문을 꼼꼼히 섭렵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생존하고 있는 실제 역사의 증인들로부터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듣고 재구성하였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가 있다.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논문이나, 소설에서 볼 수 없는 구체성과 사실성, 현장감이 두드러진다.
식민지 운동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운동, 사랑, 죽음
작가의 꼼꼼한 자료 섭렵과 섬세한 필치를 통해 30년대 운동가들의 삶의 모습을 매우 가깝게 느낄 수 있다.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본정(지금의 충무로) 거리를 누비며 동지들과 긴박하게 접선하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점점 커져가는 갈등 속에서 준비론적인 민주주의에 회의를 느끼며 사회주의로 돌아선 사람들의 심리 또한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운동을 위해 하우스 키퍼로 만났던 남녀 운동가들의 위장 결혼의 모습. 일제에게 잡혀가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하루 동안은 아지트를 불지 않고 동지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는 동지의 약속. 어두운 시대를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던 식민지 운동가들의 열정적인 삶이 다각도로,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이제 박물관의 밀랍인형이 아니라 살아 숨쉬며 경성 거리를 활보했던 운동가를 만날 수 있다.
혁명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이재유, 이관술, 이순금, 박진홍 등 실천적인 삶을 살았던 매력적인 인간들의 인생담 역시 이 소설의 흥미있는 요소 중 하나이다. 더 나은 조국을 만들어보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던 젊은 그들의 열정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강하게 다가온다.
운동에 일생을 바치고, 해방을 겨우 10개월 남기고 죽어버린 이재유. 똑똑한 머리로 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번번히 월사금이 없어 결국 무학력에 무산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이재유의 신출귀몰한 활약은 당시에도 신문에 여러 번 실릴 만큼 유명했다. 일본에서 3년간 70번이나 연행당해 결국 조선으로 송환당하고도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을 감화시켜 서대문경찰서를 2번이나 탈출하고, 결국 지하 토굴에 40일 동안 은신하다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2년 8개월 후 그를 잡은 일본 형사들은 그를 앉혀놓고 기념촬영을 할 정도로 기뻐했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재유야말로 운동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의리의 인물 이관술과 김삼룡, 그리고 융통성은 없지만 누구보다 운동에 진지했던 이현상과 이주하. 그들의 숨겨진 일화와 고뇌를 읽을 수 있다. 이재유를 둘러싼 이순금과 박진홍의 삼각관계, 그리고 감옥에서 태어난 이재유의 한스러운 아들, 이철한. 그들이 70년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다.
버림받은 유령들과의 약속
80년대 『파업』을 썼던 안재성이 새롭게 시도하는 역사적 인물, 사건들의 복원담(復原談)이라는 점도 눈여겨볼만 하다. 실제 존재했던 인물, 실제 존재했던 사건들이 소설적 장치를 통해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다. 『경성 트로이카』는 쉽게 읽히지 않던 일제시대 운동사를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작가는 본문 속에서 자신이 이러한 복원을 시도하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해방 후 찬탁 운동으로 남한에서 대중적 기반을 상실하고, 북한에서도 김일성 세력에게 숙청당하는 등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조선의 국내파 운동가들을 위해 진혼곡을 쓰겠다는 것이다. 일제의 탄압이 가장 극심했던 1930, 40년대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반일에서 친일의 대열로 돌아섰으며, 지조 있는 분들도 붓을 꺾거나 운동을 포기하는 등 소극적 저항의 자세로 일관하였던 시기에 그들은 가장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다.-인터파크
“오래된 자료들과 씨름하는 동안, 사진 속의 영혼들이 내게 사라져 버린 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 주었다. 한때 세계를 뒤흔들었던 공산주의의 유령이, 유령이 되어 버린 영혼들을 통해 연기처럼 되살아났다. 그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아리땁고 총명한 처녀들의 유령이, 타인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혁명가들의 유령이,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면서도 결코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았던, 혹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던, 그러나 끝내 양심을 잃지는 않았던 나약한 이들의 유령이,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외면당해 버린, 역사에서 실종되어 버린 그 외로운 유령들이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는 그들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들 모두를 되살리고 싶어졌다.”-『경성 트로이카』 본문 프롤로그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25쪽) 중에서
'경성 트로이카'의 저자 안재성
안재성
1960년 경기도 용인 출생으로 강원대학교 재학 중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되어 제적되었다. 90년대 중반까지 구로공단 동일제강, 청계피복노동조합, 태백탄광지대, 구로인권회관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장편소설로 《파업》(1989), 《사랑의 조건》(1991), 《황금이삭》(2003) 등이 있다.
작가는 이 책이 ‘노동소설’이라고 말한다. 그는 치열했던 80년대의 고민을 화두처럼 오늘날까지 붙잡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를 계속 고민해 왔다. 이 책에는 이러한 고민 속에서 어떻게 독자와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찾아보려 한 저자의 마음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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