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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평전-안재성

林 山 2009. 4. 30. 09:30

'이현상 평전' 표지

 

최후의 빨치산 대장 이현상의 삶과 투쟁의 기록


이현상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인 1905년 전북(현재는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4남2녀 중 다섯째(4남)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주이씨 양반가로 부친은 부농이었던 진사 이면배였다. 그는 중앙고보 재학 중이던 1925년부터 박헌영 등과 함께 공산당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1926년에는 6?10만세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27년 휴학 중 상하이로 건너가 망명 청년들의 모임 ‘한인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1928년 8월 구속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일제 식민치하에서 총 12년간의 감옥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에 적극 가담하며, 남로당 연락부장, 간부부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나 미군정에 의해 공산당 활동이 불가능해지면서 박헌영 등과 함께 월북한다. 1948년 다시 서울로 내려온 그는 빨치산투쟁을 위해 그해 11월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이후 그는 ‘조선 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으로서 지리산 등지에서 치열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경상도,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 인공이 수립되자 부대를 이끌고 지리산에서 하산하여 낙동강전선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미군의 인천 상륙과 함께 다시 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한다. 1951년 7월 그는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 총사령관의 위치에 오른다. 그러나 1953년 북한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과 함께 남로당 계열이었던 박헌영, 이승엽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된다. 그해 8월 6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열린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와 결정서 9호, 9월 6일의 결정서 10호에 따라 제5지구당은 해체되고 위원장이었던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1953년 9월 17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의문의 총탄에 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되어 화개장터 앞의 섬진강변에서 화장되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는 평범한 키에 언제나 과묵하고 우수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대원들을 아끼고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였으며, 남부군뿐 아니라 빨치산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이현상에게 더 잘 어울리는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그 수많은 대원들이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려 갈구했던 그래도, 큰 바위처럼 기대고 싶었던 선생님이었다. 적군이라도 교전 중이 아닌 이상 절대 죽이지 못하게 하고, 동지의 주검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눈보라치는 겨울 산중의 걸인 움막 같은 천막 속에서 추위에 떨며 홀로 책을 읽다가 스르르 지쳐 잠들곤 하던 영원한 선생님이었다._본문에서

그 어떤 일 앞에서도 화를 내는 일이 없고, 그 어떤 문제를 놓고도 장황하게 말하는 법이 없고, 당 이론에 관한 것이면 안 읽은 게 거의 없으면서도 토론을 즐기지 않았다는 분. 지쳐 쓰러진 대원의 짐을 손수 짊어지고, 대원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땅속 깊이 묻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유일한 반찬으로 마련된 고추장 한 보시기를 굳이 가져오게 해 손수 나뭇가지를 꺾어 일일이 찍어 먹였다는 분._조정래, 『태백산맥』 10권에서

일제시대, 조국독립의 일념으로 공산당운동에 뛰어든 이래, 평생을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지리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 이현상.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춥고 배고픈 산속에서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젊은 시절을 바친 그의 여러 행적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빨치산 투쟁 전적만으로 그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잔혹하다.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인명존중의 정신이라는 거대한 수림 속에서 그것은 그저 작은 관목 한 그루일 뿐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영웅이자, 자신의 삶을 불태운 비운의 혁명가였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민중혁명가


오늘까지도 이현상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한편에서는 일제시대부터 해방 후까지 삼십 년 세월을 민족의 독립과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한 전설적인 영웅으로 떠받드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비현실적인 이념에 경도되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공산주의자로서 그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범죄시해왔다. 그러나 이현상은 한국 현대사의 격류를 건너갈 때 반드시 딛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전설적인 민중혁명가이다. 일제 치하에서는 모진 고문과 회유, 12년간의 옥살이에도 불구하고 단 한순간도 변절하지 않았으며 해방 후 더욱 가혹해진 탄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느 누구보다 민족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철저한 사회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던 그는 오직 민족의 독립과 자립을 위해 외세와의 투쟁에 모든 것을 바쳤던 진정한 애국자요, 영웅이었다.


지리산에서 고군분투하던 이현상의 모든 직위와 명예를 박탈했던 북한은 이현상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섬진강에 뿌려지자 다시 영웅으로 복권시켰다. 북한은 그가 죽기 전인 1953년 2월 날짜로 이현상에게 영웅 칭호를 내렸으며 지리산으로 영웅훈장을 보냈다고 발표했다. 1968년에는 평양 신미동에 조성된 애국열사릉에 이현상의 묘지를 제1호로 만들었다. 시신 없는 가묘였다. 이후 북한이 제정한 제1호 열사증을 추서 받았으며 사망 삼십칠 년 만인 1990년 8월에는 다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60여 컷의 화보 속에는 1990년대 중반, 최초로 공개된 이현상의 직계가족들 사진도 수록하였다. 북한의 대표적인 월간지 중 하나인 『금수강산』에 수록되었던 것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 시, 안내를 맡았던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을 비롯한 후손들의 현재 모습을 담았다.


김성동 선생의 발문은 『이현상 평전』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되살려준다. 「남부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으로 80매에 이르는 장문의 글에 담긴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참으로 깊고 생생하다.-YES24

 

이현상

 

목차

 

프롤로그 _ 끝나지 않은 전쟁

제1부 식민지 하늘 아래
조선의 아들로 태어나
종로에서 만세를 부르다
영웅 이재유와 함께
일제하 마지막 투사들

제2부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불안한 동거
내부의 적, 외부의 적
혁명의 군대를 조직하라
반란의 밤
병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제3부 아, 지리산!
외로운 지리산유격대
낙동강전선의 영웅들
남부군을 창설하다
지리산에 돌아오다
악몽의 겨울
빗점골에서 죽다

에필로그 _ 잊혀진 역사, 새로운 역사
빨치산 대원 명단
발문 : 김성동

연보
참고문헌

 

안재성

 

1960년 경기도 용인 출생. 강원대학교 재학 중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관련되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제적되었다. 1983년부터 10여 년간 구로공단, 청계피복노동조합, 강원도 탄광지대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993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되었다.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등의 장편소설과 <경성트로이카>, <이관술 1902-1950>, <청계피복노동조합사> 등 역사 다큐멘터리를 집필했다. 현재 경기도 이천에서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