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5일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Uygur Autonomous Region of Sinkiang)의 수도 우루무치(烏魯木齊, Wulumuqi, Wulumuchi, Urumchi)의 인민광장과 해방로 등 도심에서 일어난 위구르족(維吾爾, Uyghur, Uighur)의 대규모 시위대에 중국(中華人民共和國, People's Republic of China) 군인과 경찰이 발포하여 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중국 정부는 7월 8일 현재 156명이 사망하고 1080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다. 위구르인 해외단체들은 7일 현재 우루무치에서 5백명 이상이 희생됐으며, 시위도 일부 지방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 군인과 경찰은 시위관련자 1400명 이상을 체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태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G8(서방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의 참석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했다.
우루무치 민중봉기는 지난 6월 25일 중국 광둥성(廣東省) 사오관시(韶關市)의 대형 완구공장에서 위구르족과 한족(漢族, Han race, Chinese race) 노동자들간의 집단 패싸움으로 위구르족 2명이 숨지고 10여명이 부상한 사건이 얼어나면서 발단이 되었다. 당시 위구르인이 한족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유언비어에 분노한 한족 노동자들은 위구르 노동자들을 습격하여 집단폭행했다. 그러나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집단폭행을 당하는 위구르인들을 보고도 수수방관했다는 소식이 인터넷 등을 통해 확산되자 7월 5일 오후 마침내 위구르인들의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면서 대규모 유혈사태로 확산된 것이다. 이번 사태가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차별에 대한 항의로 일어났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지속된 위구르 분리독립운동의 일환이라는 성격이 매우 짙다.
지난해 3월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 Autonomous Region of Xizang) 티베트(Tibet) 라싸(拉薩, Lasa)에서 발생한 분리독립을 위한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항쟁에 이어 우루무치에서도 위구르인들의 대규모 항쟁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중국 정부는 긴장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위구르 유혈사태의 불똥이 티베트족 등 55개 소수민족으로 튀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 제얼라 이샤무딩(吉爾拉衣沙木丁) 우루무치 시장은 포고령을 내려 전시가지에 차량출입을 통제하는 등 우루무치시는 사실상 계엄령 상태에 들어가 있다.
위구르족의 시위가 대규모 유혈사태로 확대된 것은 중국 당국의 무차별적인 진압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당국은 수천명의 시위대가 흉기로 행인들을 공격하고 차량을 불태우는 등 난동을 부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언론에 따르면 중국 경찰이 시위대를 소몰이용 전기봉으로 무차별 공격하고 경고사격까지 하자 흥분한 시위대가 경찰 차량을 불태우는 등 시위가 과격해지면서 대규모 유혈사태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 지도자 레비야 카디르(Rabiye Qadir, 1947~) 세계위구르대표대회(World Uighur Congress, WUC) 의장이 대규모 시위의 배후조종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도 지난 6일 인터넷판에서 '레비야가 전화와 위구르 온라인 등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선동선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그러나 '위구르족의 달라이 라마'로 불리며 망명지 미국에서 중국의 위구르족 차별과 탄압을 서방세계에 폭로해온 위구르족 분리독립운동 지도자이자 2006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된 바 있는 레비야 카디르는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ast Turkestan Islamic Movement, ETIM)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며, 나아가 모든 위구르 단체들에게 평화적 투쟁을 역설한 바 있다.
지난 8일 우루무치에 도착한 중국 정부의 치안 책임자인 멍젠주(孟建柱) 공안부장은 '이번 사건은 해외의 분열세력이 선동하고 국내의 분열세력이 실행에 옮긴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폭력 범죄'로 규정하였다. 실제로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의 해외 망명인사들은 사오관시에서 발생한 위구르인 2명의 사망사건에 대해 중국 내 위구르인들이 항의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세력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신장의 독립을 위해 1993년 해외에서 결성된 ETIM 세력도 어느 정도 커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ETIM이 중국 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할 능력이 있는지는 상당히 의문시된다. 2001년 7월 중국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 주변 5국과 상하이협력기구(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 SCO)를 결성하고 이슬람 근본주의와 테러에 반대하는 국가간 협력을 강화시켜온 데다가, 9·11 테러 이후 미국과 유엔(UN)이 ETIM을 테러 조직으로 규정하면서 이들은 국제적으로 매우 고립된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ETIM은 중국 내에서 소규모 저항운동을 전개하기에도 벅찬 실정이다. 그러므로 외부 세력의 조종과 선동이 이번 유혈사태의 원인이라고 규정한 중국 정부의 주장은 정당성이 없다.
위구르족의 한족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1884년 청나라가 이 지역에 대한 직접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신장성(新疆省)을 설치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구르 지역에 파견된 청나라 관료들이 억압적으로 통치하자 위구르족은 여러 차례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1944년 11월 위구르인들은 이닝(伊寧) 지역에서 동투르키스탄공화국(Republic of Eastern-Turkystan)을 선포한 바 있다. 1965년 가을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주도한 친위쿠데타인 문화대혁명 당시에도 위구르족에 대한 억압적 통치가 강화되자 위구르인들은 산발적인 저항을 전개하였다.
중국 정부는 신장위구르자치구와 티베트에서 소수민족을 내보내고 한족을 유입시키는 이주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해왔다. 1950년대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위구르족 : 한족 비율은 74.7% : 6.1%로 위구르족이 한족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1954년 88%가 한족으로 구성된 신장생산건설병단(新疆生産建設兵團) 건설과 함께 '중국판 서부개척'이라 불리는 신장위구르자치구에 대한 한족 이주 정책이 시작되었다. 1999년부터 중국 정부는 지역간 격차를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서부대개발 정책을 시행하여 신장과 티베트에 엄청난 규모의 투자를 해왔다. 대규모 개발 붐을 타고 한족과 한족의 자본은 신장과 티베트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중국 정부는 한족에게 보조금과 일자리 등 각종 혜택을 제공하면서까지 서부 지역으로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최근에는 간쑤성(甘肅省) 농민 50만명이 정부의 지원을 받고 신장위구르자치구로 이주하기도 했다. 이처럼 한족의 상권과 영향력이 급속히 증가하자 위구르인들은 정체성의 위기와 함께 심각한 좌절감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한족의 경우와는 달리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을 강제적이고 비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2006년 중국 정부는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350만명(89%)의 위구르인이 거주하는 남동부 카슈가르 지역에서 20대(18∼25세) 여성들을 모집해 다른 지방에 취업시키는 집단이주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실제 목적은 가임여성의 수를 줄여 위구르족의 인구를 줄이겠다는 민족말살 정책에 있었다. 이주에 동의하지 않는 부모들에게는 토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여성들의 모집은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방법으로 2007년 한해 동안 페이자와트현에서만 3천명의 젊은 여성들이 텐진(天津) 등 다른 성(省)의 대도시 공장지대로 이주해야만 했다. 세계위구르대표대회(WUC)는 2006∼2007년간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강제로 이주한 노동자가 24만명을 넘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강제이주 정책을 시행한 이후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의 현재 위구르족 : 한족 비율은 45% : 41%로 거의 비슷해졌다.
위구르족 이주 여성들의 임금은 한족 노동자에 비해 형편없이 낮았다. 이주 비용 등을 이유로 위구르족 노동자들에게 월급이 지급되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들은 5천위안의 벌금이 무서워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러한 처지에 놓인 위구르족 이주 노동자들은 사실상 노예나 다름 없었다. 한편 위구르족이 집단이주한 지역에서는 한족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위구르족 저임 노동자들이 대량 유입되면서 일자리 경쟁은 치열해진 반면 임금은 낮아졌기 때문이다. 위구르족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은 한족으로 하여금 증오심을 갖게 했다. 우루무치 유혈사태의 발단이 된 광둥성 사오관시 장난감 공장에서도 이런 상황에 처한 위구르 이주 노동자 800여명이 한족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멍젠주 공안부장은 이번 유혈사태를 정치적 목적이 있는 국가분열 행위라면서 '유혈 시위 주동자들에게 절대로 관용을 베풀지 않고 법에 따라 엄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리즈(栗智) 우루무치 공산당 서기도 지난 8일 기자회에서 '이번 소요의 배후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살인 혐의를 받는 청년들을 구금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구금된 청년들은 대부분 학생들'이라고 덧붙였다.
1884년 청나라는 이 지역을 강제로 합병했으며, 1949년 중국은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강제로 점령해서 합병했다. 중국은 제국주의 식민지 종주국으로서 이 지역을 식민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유혈시위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거나 위구르족의 폭력성만을 강조하면서 무자비한 진압으로 사태를 해결하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강자의 논리에 따라 폭력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면 국제깡패와 무엇이 다른가?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의 자결권을 존중해서 신장위구르자치구에 독립을 허용하는 것이 옳다. 사형시켜야 할 것은 위구르족 시위 주동자들이 아니라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와 식민주의(植民主義, colonialism)다.
다음은 2009년 7월 8일 참여불교재가연대가 발표한 '중국 정부는 위구르인에 대한 학살을 중단하라!'는 제목의 성명서다. 또 하나는 '레프트21' 김용욱 기자가 쓴 '신장 유혈사태의 책임은 중국 정부의 식민지배에 있다'는 제목의 글이다.
중국 정부는 위구르인에 대한 학살을 중단하라!
중국 정부가 지난 5일 위구르 시위대에 발포하여 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중국 정부는 156명이 사망하고 1080명이 부상했다고 밝혔지만, 위구르 해외단체들은 7일 현재 우루무치에서 5백명 이상이 희생됐으며, 시위도 일부 지방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이 뒤따를지 조마조마한 상황이다.
우리는 위구르 수도 우루무치의 참상을 전해주는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면서 대체 중국 공산당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소수민족을 총칼로 짓밟으려는지 참담한 심경을 감출 수 없다.
중국 정부는 이번 사태가 소수 위구르 주민들의 폭동이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지난해 봄 티베트 라싸에서 중국 정부가 주민들의 평화시위에 대한 폭력적 진압으로 주민들의 폭동을 유발하고, 대규모 학살극을 벌였던 전례를 알고 있기에 그들의 주장을 전혀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중국 정부가 특히 이번 사태에 위구르 거주 한족들을 전면에 내세워 양 민족간의 충돌로 사건의 본질을 왜곡해 가고 있는 점에 깊이 우려한다. 일부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번 위구르인들의 시위는 지난 달 26일 광둥성의 한 완구공장에서 일어난 한족-위구르족 노동자들간의 충돌 시 중국 정부가 2명의 위구르 노동자들이 상해되는 것을 방조한데 대한 항의시위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일 시위 직후 한족 자경단이 조직되어 위구르인들을 집단 공격한데서도 이러한 조짐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동안 중국 정부는 대규모 한족이주, 원주민에 대한 차별과 인권 유린, 종교탄압 등 위구르 자치구에서 강력한 소수민족 억압 정책을 펼쳐왔다. 그런 중국 정부가 이제 군경의 총칼도 모자라 한족들을 앞세워 민족간의 충돌로 사태를 왜곡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비인륜적인 만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더 이상 위구르 사태를 외면하지 말 것을 호소한다. 지난해 티베트 사태가 터진 후 올림픽 보이콧까지 논의하던 미국과 유럽국가들 대부분은 이번 사태에 침묵하거나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아무리 중국 정부가 ‘위구르인들과 이슬람 테러조직이 연계 돼있다’는 등 악선전을 해왔다지만,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야만이 이슬람문화권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라도 중국 정부는 위구르인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을 즉시 중단하고, 위구르인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한다. 한국 정부와 국제사회는 중국 정부의 발표에 속지 말고, 철저한 진상조사를 우선 실시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식민지 국가에서 피억압 민중이 먼저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보편적인 시각을 이번 위구르 사태에서도 견지할 것을 촉구한다.
- 중국 정부는 위구르에 대한 탄압과 학살을 중단하라.
- 유엔은 국제조사단을 파견하여 사태의 진상을 조사하라.
- 한국 정부는 중국 정부의 비인륜적 만행과 학살에 대해 공식 항의하라.
2009. 7. 8
참여불교재가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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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유혈사태의 책임은 중국 정부의 식민지배에 있다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곳은 한국만이 아니다. 제국주의 옛 식민 지배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익숙한 광경이 중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분리주의 세력의 음모”를 성토하는 식민지 총독, 현지인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이는 점령군, 잡혀간 부모ㆍ형제ㆍ자매ㆍ친구를 돌려달라고 울부짖는 현지인들, 현지인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흉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본토’ 이주민들….
식민지 총독을 중국 공산당 지역 서기장으로, 점령군을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현지인들을 가족이 점령군에 잡혀간 위구르족들로, 본지 이주민들을 한족 이주민으로 바꾸면 바로 지금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지구 우루무치 시(市)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정확한 묘사가 될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7월 5일 우루무치에서 수백∼수천 명의 위구르인들이 6월 26일 광동성의 한 공장에서 위구르 노동자 2명이 집단 구타당해 숨진 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요구하며 평화롭게 행진을 벌인 것이었다.
그 뒤 발생한 일은 중국 정부의 정보 통제로 다소 불확실하다. 그러나 많은 목격자들은 곤봉으로 무장한 중국 경찰들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고 증언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위구르인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한족 이주민들과 충돌했다.
중국 정부는 이 과정에서 1백50여 명이 죽었고, 사망자의 대다수가 한족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해 티베트 항쟁에서 희생된 티베트인 숫자를 왜곡 발표한 중국 정부의 작태를 보면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이 비극적 유혈 사태의 책임은 군사 점령과 대규모 한족 이주 정책 등 전형적인 식민화 정책을 편 중국 정부에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 - 중국 제국주의
신장 지역은 1949년 당시 거주민의 다수를 구성했던 위구르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중국 정부에 강제로 점령됐다. 이 지역을 주변국에 대한 ‘완충 지대’로 삼기 위해서였다. 점령을 공고히 하려고 한족을 대량 이주시켰고, 반발하는 위구르인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을 탄압했다. 그 결과, 본래 6퍼센트에 불과하던 한족 비율이 1976년에는 42퍼센트로 늘었다. 이슬람 상징물들과 모스크는 ‘봉건 악습’으로 여겨져 철저히 파괴됐다.
위구르족에 대한 억압은 1980년 개방 정책 이후 잠시 완화되는 듯 했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다시 강화되기 시작했다. 대규모 한족 이주가 재개됐고, 우루무치 시 인구의 70퍼센트가 한족이 됐다. 위구르족은 교육, 고용, 공공서비스 등 모든 분야에서 차별받았다. 신장의 대규모 유전은 한족만 고용하며, 위구르족 평균수명은 한족 이주민보다 10살이나 낮다.
이맘[이슬람 지도자]들은 중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해야만 설교 허가를 얻을 수 있었고, 설교 내용은 철저히 감시받았다. 어떤 위구르 무슬림은 ‘정부가 허가하지 않은 판본’의 쿠란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또, 1996년 이후에는 이른바 ‘분리주의’ 세력을 색출하는 군사 작전을 주기적으로 벌여 한꺼번에 ‘용의자’ 수만 명을 잡아들이고, 그들 중 1백70명을 처형했다. 그러나 이런 공식 통계는 감춰진 희생자 수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예컨대, 1997년 2월 5일, 위구르 자치지구 이리(伊犁)시에서 위구르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상당수 인권단체는 목격자의 증언을 기초로 당시 진압, 체포, 고문으로 위구르족 1천여 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1990년대 이후 중국 정부가 탄압의 고삐를 강하게 쥔 이유는 우선 톈안먼 항쟁과 옛 소련과 동구권이 대중 항쟁으로 붕괴하는 것을 보면서 사회 전반에 탄압의 수위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가 약화되자 자신이 중앙아시아에서 패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중앙아시아와 인접한 신장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가 됐다.
또, 신장이 중국의 최대 석유 생산기지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점에도 주목했다. 이미 신장에서 중국산 석유의 약 25퍼센트가 생산되고 있다.
결국 중국 정부는 자신의 반민주적 독재를 유지하고, 제국주의적 야욕과 자원에 대한 탐욕을 채우기 위해 위구르인들을 속죄양 삼은 것이었다. 어제와 오늘 우리가 목격한 것은 이렇게 몇십 년 간 탄압받으며 쌓인 위구르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 관영언론들은 ‘위구르족 폭도들의 폭력 행위’를 집중 보도하며 한족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고 있다. 신장의 한족 이주민들이 위구르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중국 정부의 책임이다.
중국 언론의 태도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과거 1950년대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알제리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무장 투쟁을 시작했을 때, 1960년대 미국 대도시에서 흑인 소요가 발생했을 때, 오늘날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저항할 때, 서방의 주류 언론들은 수십년 동안 피억압자들이 당한 고통ㆍ학살ㆍ수모를 무시한 채 이들의 ‘폭력 행위’를 비난하기 바빴다.
그러나 이들을 비난하기 앞서 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중무장한 제국에 맞설 수단을 고를 때 과연 얼마나 선택의 여지가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 발생의 책임, 즉, 진정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중국 정부의 식민지 점령을 직시하는 것이다.
대안 - 한족 노동자ㆍ민중의 위구르족 연대
오랜 식민 지배와 억압에 맞선 위구르인들의 투쟁은 정당하다. 중국 정부가 당장 군사 점령을 중단하고 신장 위구르인들에게 민족자결권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지배자들의 이해관계와 우월한 군사력을 고려할 때 신장 위구르족이 승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신장 위구르 민족해방 운동은 지금 중국 지배자들의 모순과 탐욕에 맞서 싸우고 있는 한족 노동자ㆍ민중 투쟁 ― 집단 시위가 2008년에 18만 건, 2009년 상반기에 6만 건이 발생했다 ― 과 결합돼야 한다. 현대 중국의 역사에서 소수민족의 자결권 문제가 최초로 진지하게 제기됐던 것은 1920년대 중국 혁명기였던 점을 떠올려 보자.
지금 중국 지배자들이 한족 민주주의를 이용하는 것을 볼 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힐끗 보여 준 최근 선례가 있다.
20년 전 5월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시작했을 때 신장에서도 이들의 행동에 고무받아 지지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는 곧 신장 위구르족의 자결권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톈안먼 광장에서는 위구르족이 지도자 중 한 명이 됐다. 비록 중국 정부의 탄압으로 베이징과 신장의 두 운동은 실패했지만 이것은 한족 노동자ㆍ민중과 소수민족이 공동의 적에 맞서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
오늘날 한족 노동자ㆍ민중 투쟁이 1920년대나 1989년 톈안먼 항쟁 같은 대규모 투쟁으로 발전한다면 신장 위구르족 등 중국 소수민족 해방 운동에 훨씬 유리한 조건이 조성될 것이다.
미국과 서방 정부의 ‘악어의 눈물’
미국을 위시한 서방 정부와 유엔은 ‘신장 사태’에 우려를 표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 중국 정부가 위구르족을 탄압할 때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인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 바로 미국과 서방 정부들이었고, ‘테러와의 전쟁’에 정당성의 날개를 달아준 것이 유엔이었다.
또, 2002년에는 미국과 서방 정부는 신빙성 있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위구르족 저항 단체를 “알카에다의 지령을 받는” 국제 테러조직으로 지목했다. 이 덕분에 중국은 위구르족 탄압을 ‘극단주의 세력’에 맞서는 세계적 전쟁의 일부로 거리낌 없이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유엔의 ‘테러와의 전쟁’은 중국 정부의 위구르족 탄압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침략 정책에 불과하며, 오늘날 오바마 정부 아래 이름만 바뀐 채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계속 진행 중이다. 미국과 서방 정부, 유엔은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중국 정부에 우려를 표하기 전에 자신의 악행부터 참회하고 점령 정책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2009년 7월 8일
김용욱(레프트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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