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클래식에서 헤비메탈

Gracias A La Vida(생에 감사해)-Mercedes Sosa(메르세데스 소사)

林 山 2009. 10. 6. 23:03

Gracias a La Vida (Live 80')-Mercedes Sosa

 

Gracias A La Vida-Joan Baez(조안 바에즈) & Mercedes Sosa

 

생에 감사해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었어
내게 준 두 개의 샛별로는
잘 가려내지 검은 것과 흰 것을
높은 하늘에 박힌 촘촘한 별들을
그리고 군중 속에서 내 사랑하는 그이를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었어
활짝 열린 귀를 주었어
밤낮으로 듣지 귀뚜라미, 카나리아 소리
망치, 물레방아, 공사장, 소낙비 소리
그리고 내 사랑하는 그이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었어
소리와 글자를 주었지
그것으로 낱말을 생각하고 발음하지
어머니, 친구, 오빠, 그리고 찬란한 빛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그이 영혼의 길을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었어
두 발을 주어 걸을 수 있게 해주었어
난 도시들과 늪지들을 걸어다녔어
해변과 사막을, 산과 벌판을
그리고 너의 집, 네가 사는 거리, 또한 너의 정원을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었거든
심장을 주었지, 그게 막 뛰어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고결한 작품을 볼 때
나쁜 사람들 멀리 착한 사람을 발견할 때
그리고 너의 맑은 눈 깊숙한 곳을 바라볼 때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었어
웃음도 주고, 눈물도 주었어
그래, 난 기쁨과 슬픔을 구별해내지
그것들은 내 노래의 두 재료야
그 노래는 또한 여러분의 노래
모두의 노래는 또한 나의 노래


생아 고마워, 생에 감사해

 

 메르세데스 소사

 

2009년 10월 4일 오전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민중가수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가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소사는 지난 9월 18일부터 숙환인 신장과 폐 질환으로 집중 치료를 받아왔으나 결국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소사를 사랑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국회로 옮겨진 그녀의 시신에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그녀의 장례식은 5일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 시내 샤카리타 묘지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Cristina Elisabeth Fernandez)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됐다. 

 

짙은 검은색 머리 때문에 '라 네그라(La Negra, 검은 여인)'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던 소사는 라틴아메리카 고유의 음악에서 대중음악(fork music) 음악의 원류를 찾는 운동인 동시에 민중음악을 통한 사회변혁운동인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on, 새로운 노래)'을 이끈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들 편에서 그들을 옹호했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래를 무기로 삼아 악명 높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쳤다. 

 

소사는 1935년 7월 9일 투쿠만(Tucumán) 주 산미구엘(San Miguel)에서 프랑스인과 케추아족 인디언(Quechua Amerindian) 사이의 혼혈인 메스티조(mestizo)로 태어났다. 소사의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였기에 그녀는 어려서부터 현실문제에 눈을 떴다. 그녀는 15세부터 노래를 시작했다. 1959년 그녀는 첫남편 마누엘 오스카 마투스(Mauel Oscar Matus)의 도움으로 앨범 'La Voz de la Zafra'을 발표했다. 5년 뒤인 1965년에는 코르도바(Córdoba) 시에서 열린 음악 페스티벌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1960년대 중반부터 진보주의적 가수이자 민중운동 활동가이기도 했던 소사와 그녀의 남편은 본격적으로 누에바 칸시온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그녀는 1960~1970년대 아르헨티나 누에바 칸시온의 선두주자로 활동했다. 소사는 평생 남미의 전통음악을 추구했던 아르헨티나의 가수이자 작곡가 아따우알바 유빤끼(Atahualpa Yupanqui, 1908~1992)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남미의 구전음악과 종교음악에 바탕을 둔 노래들을 통해서 그녀는 고통받고 상처받은 민중들의 영혼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소사는 언제나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대변하였기에 그녀의 노래는 정치색을 띨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사는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로 불렸다.  

 

칠레 민속음악의 선구자 비올레타 파라(Violetta Parra, 1917~1966)가 작사, 작곡한 '생에 감사해(Gracias a la Vida, 삶에 감사를)'는 소사가 불러서 더욱 유명해진 노래다. 멕시코 출신의 미국 반전가수 조안 바에즈(Joan Baez, 1941~)가 부른 뒤에 이 노래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독재정치와 인종차별에 맞서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여성 민권운동가들이었다.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금지곡으로 묶여버린 이 노래는 1970~1980년대 전세계 양심적 지식인과 진보적 좌파들의 송가로 불리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체포와 투옥 끝에 국외로 추방당한 그녀는 1976~1982년까지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한국의 민중들도 당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에 이어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 군부독재정권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오랜 망명생활 끝에 죽음을 무릅쓰고 1982년 귀국한 소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을 갖고 그녀의 목소리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르헨티나 민중들에게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Gracias a la Vida)', '알폰시나 이 엘 마르(Alfonsina y el Mar)', '솔로 레 피도 아 디오스(Solo le pido a dios)' 등 남미 포크 음악의 걸작들을 들려주었다. 심금을 울리는 소상의 노래는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그녀의 공연 실황 앨범 '엔 아르젠티나(En Argentina)'는 14년이나 뒤늦은 2006년에서야 국내에서 발매되었다. 

 

소사는 생전에 40여장에 이르는 앨범을 발표하였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1935~2007), 영국 가수 스팅(Godon Matthew Sumner, 1951~)과 공연을 가진 바 있다. 또, 조안 바에즈 외에 브라질 출신의 까에따누 벨로주(Caetano Emanuel Viana Teles Veloso, 1942~), 스페인 출신의 후안 마누엘 세라(Joan Manuel Serrat, 1943~), 콜롬비아 출신의 샤키라(Shakira Isabel Mebarak Ripoll, 1977~) 등과도 공연했다. 소사는 1994년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대성당에서 공연했다. 2002년에는 뉴욕 카네기홀, 2004년에는 로마 콜로세움에서도 성황리에 공연을 가졌다. 

 

2008년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Andrew Soderbergh, 1963~) 감독의 영화 '체(Che)'에는 소사가 부른 '발데라마(Balderrama)'가 사운드트랙으로 쓰이기도 했다. 2009년 6월 국내에서 발매된 앨범 '칸토라(Cantora)'는 그녀의 마지막 유작으로 남게 됐다

 

생전에 평소 '나는 좌파다.'라고 당당히 밝히곤 했던 소사는 라틴아메리카의 포크음악 나아가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남미의 뮤지션들 뿐만 아니라 영미권 뮤지션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으며,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위대한 음악인으로 인정받았다. 한국에서도 메르세데스 소사나 조안 바에즈 같은 위대한 민중가수들이 나오기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