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이던가? 단풍철 주말이었다. 설악산과 속초 일대를 돌아보기 위해 차를 몰고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서울춘천(경춘)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덕소까지 편도 4차선, 화도 IC까지 편도 3차선을 지날 때만 해도 차량 통행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화도 IC 부근에서 편도 3차선이 2차선으로 좁아지자 차들이 갑자기 밀리기 시작했다. 차들은 거북이 운행을 하면서 기어가다시피 했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 오히려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가다가는 해가 지기 전에 속초에 닿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민자고속도로라 통행료도 터무니없이 비싼데다가 차량 정체까지 겹치니 짜증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고속도로를 만들려면 적어도 10년, 20년 나아가 100년 정도는 앞을 내다보고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속에서는 특정 민간자본에게 고속도로 건설의 특혜를 주어 국민들로 하여금 비싼 통행료를 물도록 한 정부 당국자들에 대한 욕이 마구 튀어나왔다. 도로망 같은 중요한 사회간접자본은 정부 예산으로 건설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유료 민자도로 허용은 재벌에게는 특혜요, 국민들에게는 이중과세나 다름없는 것이다.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 밖에 갖지 못한다는 말이 꼭 맞다. 서민들의 삶은 돌보지 않고 특정 민간자본에 특혜를 주는 정권도 그렇고, 그런 정권을 뽑아주는 국민도 그렇고 다 도찐개찐(도 긴 개 긴)이다.
고속도로를 꽉 메운 차들은 여전히 끝도 보이지 않게 꼬리에 꼬리를 문 채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 때 변동차선(갓길) 통행표시등에 파란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화살표 그림에 파란 불이 들어와 있으면 갓길 통행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갓길 통행을 하는 차량은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통행표시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니 분명히 파란 불이었다.
변동차선 통행표시등에 불이 들어와 있든 없든 상관없이 교통체증이 심하거나 환자 발생 등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갓길을 이용할 수가 있다. 환자 이송이나 화재 진화, 교통사고 처리 등 응급 차량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 갓길 이용이 가능하다. 도로교통법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심한 교통체증을 참으면서 갓길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운전자들이 갓길 통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는 것일까?
나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해서 선뜻 갓길로 들어서지 못했다. 마침내 결심을 한 나는 통행표시등을 믿고 용감하게 갓길로 들어가 차를 몰았다. 100m도 채 가지 못했을 때 관광버스가 느닷없이 갓길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진로를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관광버스 기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관광버스 기사는 내가 도로교통법을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상향등을 켰다 껐다 하면서 관광버스에게 비키라고 경고했다. 그제서야 관광버스는 물러났다.
통행표시등에 파란 불이 들어와 있고, 내가 먼저 갓길로 들어가 달리는데도 따라 들어오는 차량들이 없었다. 한참을 달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차량 운전자들은 오히려 나를 파렴치한 도로교통법 위반자로 생각할지도 몰랐다. 눈이 하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눈이 두 개인 사람이 비정상적인 인간 취급을 받는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답답해 오면서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한국인들은 오랜 왕조전제정권과 독재정권의 통치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제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유를 허용해도 무의식중에 형성된 강제된 사고와 행동 방식에서 감히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 테두리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큰일나는 줄 안다. 그래서 대대로 종이나 노예 생활을 한 사람들은 주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하게 되는 것이다.
정의롭고 용기있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는 특권 지배층이 자신들의 통치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 기존의 지배질서를 유지하려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우민(愚民)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배층은 끊임없이 피지배층을 우민화시키려고 기도한다. 우민화 교육은 정부기관, 학교, 군대, 신문, 방송, 관변단체 등을 통해서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민화 교육은 지배층을 위해 피와 땀을 바치도록 피지배층을 노예로 길러내는 교육에 다름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지배층에 의한 우민화 교육이 성공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노예정신이 뼛속 깊이 박혀버린 사람들은 권력자들의 독재와 부패, 억압과 착취 등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도 무비판적으로 순응하고 순종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권력자의 편에 서서 독재와 부패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탄압하면서도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 옛날의 부잣집 마름 같은 부류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부잣집 고용살이면서도 그들은 주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소작인들에게 횡포를 부렸던 것이다.
노예적 삶을 거부하고 신분해방과 주체적 삶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있다. 진(秦) 시황(始皇, B.C. 259 ~ 210)의 뒤를 이어 황제에 등극한 호해(胡亥, BC 229 ~ 207년)가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여 백성들이 부역의 고통에 시달리고 환관들의 전횡으로 나라가 도탄에 빠지자 농민 출신인 진승(陳勝, ? ~ B.C. 209)과 오광(吳廣, ? ~ B.C. 209)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부르짖으면서 봉기하였으나 지도부의 내분과 전략의 부재로 6개월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고려 무신정권 시절 무인집정 최충헌(崔忠獻, 1149 ~ 1219)의 노예 만적(萬積, ? ~ 1198)도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외치면서 신분해방을 위한 봉기를 선동하다가 동료 노예의 밀고로 처형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지금 어떤가? 집에서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학교에 가서는 교사에게 순종하고, 군대에 가서는 상관에게 순종하라고 끊임없이 세뇌를 받는다. 사회에서는 선배에게,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듣는다. 순종이 강요되는 풍토와 환경에서는 굴종적인 인간만이 양산될 뿐이다. 이런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
인간의 주체적 삶을 보장하려면 부당한 명령이나 불법적인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저항권을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 국민의 저항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권력자와 자본가 등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항구적으로 억압하고 수탈하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저항권을 헌법에 보장하지 않는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굴종적인 삶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권력자나 상급자의 불법적이고 부당한 명령이나 지시에 저항하라고 가르쳐야 한다. 민주 시민이라면 정통성이 없는 권력의 압제와 정당성이 없는 자본의 수탈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쳐야 한다.
인간에게는 오직 두 가지 길만이 있다. 하나는 주체적 삶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노예적 삶의 길이다. 청소년들이여 그대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대들의 선택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
2014.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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