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에는 보물 제1527호로 지정된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철불)을 감상하기 위해 충주시(忠州市) 엄정면(嚴政面) 괴동리(槐東里) 빌미산 동쪽 기슭의 백운암(白雲庵)을 찾았었다. 2월 들어서는 보물 제98호 철조여래좌상이 봉안된 지현동(芝峴洞) 대원사(大圓寺)를 찾은데 이어 보물 제512호로 지정된 철조여래좌상을 보기 위해 단월동(丹月洞) 단호사(丹湖寺)를 찾았다. 단호사 철불은 백운암 철불, 대원사 철불과 함께 충주 3대 철불에 속한다.
단호사 전경
단월초등학교 바로 남쪽에 자리잡은 단호사는 대한불교 태고종(太古宗) 소속의 사찰이다. 태고종은 해방 이후 비구승(比丘僧)과 대처승(帶妻僧)의 분규가 일어났을 때 대처승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종파이다. 고려시대 태고 보우(太古普愚)를 종조(宗祖)로 하는 태고종은 자각각타(自覺覺他), 각행원만(覺行圓滿)한 석가모니(釋迦牟尼)의 근본교리를 실천하고,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함을 종지(宗旨)로 삼는다. 태고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금강경(金剛經)과 화엄경(華嚴經)이다.
단호사의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 숙종 때 중건하고 절 이름을 약사(藥寺)로 개명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절은 약사도량(藥師道場)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54년 겨울 절 이름을 다시 단호사로 바꾼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大雄殿)의 철불과 마당의 삼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 등의 유물을 통해 단호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단호사 철불이 봉안되었던 원래 위치를 알 수 없어 창건 연대가 불확실하다.
단호사 당우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약사전(藥師殿), 요사 등이 있다. 용왕전(龍王殿)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단호사 문화재로는 철조여래좌상과 삼층석탑이 있다.
단호사 대웅전
단호사 대웅전 편액
대웅전은 단호사의 중심 법당이다. 안내판에는 대웅전에 대해 '도원스님의 원력으로 2002년에 무애거사가 중창건립한 외2출목 내4출목의 다포집의 팔작 기와지붕이며 단청으로 장엄하였고 벽화는 심우도와 사군자를 그려 놓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안내판의 설명대로 단호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외2출목 내4출목의 다포식(多包式) 건물이다.
대웅전 처마의 단청도 선명하고, 대웅전 외벽의 심우도(尋牛圖)와 사군자(四君子) 그림도 선명하다. 심우도는 번뇌로 방황하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들소를 길들이는 데 비유해서 10단계로 그린 그림으로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大雄殿(대웅전)' 편액은 낙관이 없어 누구의 글씨인지 모르겠다.
대웅전 정면 기둥에는 주련(柱聯) 4개가 걸려 있다. 주련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나서 단호사를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편시방중) 부처님 몸 시방세계에 두루 가득하니
三世如來一切同(삼세여래일체동) 삼세의 부처님들도 모두 똑같으시네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큰 서원 구름처럼 항상 다함 없으니
汪洋覺海玅難窮(왕양강해묘난궁) 망망한 깨달음 바다 가늠조차 어렵네
단호사 대웅전 법당
단호사 대웅전 아미타삼존불
단호사 대웅전 아미타삼존불
단호사 대웅전 철조여래좌상
단호사 대웅전 철조여래좌상
단호사 대웅전 철조여래좌상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대원사 철조여래좌상
단호사 대웅전 법당에는 보물 제512호로 지정된 철조여래좌상과 협시보살(挾侍菩薩)이 봉안되어 있다. 철조여래삼존불(鐵造如來三尊佛)은 다함께 아미타구품정인(阿彌陀九品定印) 중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의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대웅전의 본존불(本尊佛)은 일반적으로 석가모니불(釋迦牟尼)을 모신다. 하지만 단호사 대웅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본존으로 모셨다. 아미타불의 좌우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협시보살로 모셨다. 불단 위에는 닫집을 설치하지 않았다.
단호사 철불은 높이 130cm로 백운암 철불(87cm)보다 43cm 더 크고 , 대원사 철불보다는 32cm 더 크다. 머리에는 뾰족한 나발(螺髮)이 촘촘하게 박혀 있고, 육계(肉髻)는 작은 편이다. 육계에는 반달 모양의 계주(髻珠)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긴 타원형이고,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있다. 눈은 선정에 든 듯 반쯤 뜨고, 눈꼬리는 옆으로 길게 곡선을 그리면서 올라간 반면에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양 볼살은 약간 빠져 보이고, 콧날은 높고 날카우며, 입술은 '八'자형으로 두텁고 각지게 표현되어 있어 중후하고 근엄한 인상을 준다. 귓볼이 뚫려 있는 두 귀는 어깨에 닿을 듯 길게 내려와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어깨는 넓고 가슴은 당당하며 부피감이 느껴진다. 불의(佛衣)는 대원사 철불처럼 통견(通肩)이다. 목 아래로는 굵은 옷주름이 U자형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면서 내려와 있고, 가슴에는 내의의 끝단과 띠매듭이 있다. 특히 가슴의 띠매듭은 고려 말 조선 초부터 나타나는 수평적인 처리에 가깝다.
대원사 철불처럼 단호사 철불도 두 손이 모두 결실되어 수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원래 아미타구품정인을 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두 손은 모두 보수를 한 상태이다. 백운암 철불은 좌수 아미타정인 중 중품중생인, 우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아미타구품정인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두 다리는 불상 전체에 비해 비교적 넓고 높은 자세여서 안정감을 준다. 양쪽 다리 위로는 몇 개의 옷주름이 수평으로 투박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런 모양의 옷주름은 장흥 보림사(寶林寺)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遮那佛坐像)이나 불국사(佛國寺) 금동불상(金銅佛像) 등 통일신라 9세기 중후반부터 등장하는 불상 기법을 부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릎 아래에 깔린 부채꼴 옷주름 등 옷주름 처리는 백운암과 대원사 철불 등 충주의 다른 철불과 그 양식이 거의 같다. 단호사 철불의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전하지 않지만 보존 상태는 좋다.
단호사 철불의 얼굴을 표현한 세부 기법과 머리의 계주 등은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 특이한 옷주름 처리, 각진 상체 등 도식적인 표현 등은 충주의 지방색이 더해진 것이다. 단호사 철불은 특히 대원사 철불과 그 양식이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단호사 철불이 좀더 세련된 느낌을 준다.
백운암 철불은 청양 장곡사(長谷寺)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제58호), 영암 도갑사(道岬寺)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평택 만기사(萬奇寺)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67호), 개성 적조사지(寂照寺址) 철조여래좌상, 포천 출토 철조여래좌상과 그 양식이 유사하다. 특히 10세기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과 그 양식이 가장 유사하다. 따라서, 백운암 철불은 장곡사 철불의 양식을 계승하고, 충주의 지역적인 특색이 더해져 만들어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운암 철불은 장곡사 철불보다 다소 늦은 고려시대 전반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원사 철불은 조각 수법으로 보아 1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찰고기(寺刹古記)에 의하면 고려 중기인 1145년(인종 23)에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사찰고기가 맞다면 대원사 철불은 12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단호사 철불은 가슴에 묘사된 띠 매듭이 고려 말에서 조선 초부터 나타나는 양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고려 후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안내판에는 단호사 철불이 대원사 철불과 비슷한 시기인 11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충주 철불들의 양식과 조각 수법으로 보면 백운암 철불(87cm, 고려 전기)->대원사 철불(98cm, 고려 중기)->단호사 철불(130cm, 고려 후기)로 이행되는 단계적 특징을 보인다. 이는 단호사 철불이 충주 지역의 불상유파를 형성하는 후기 양식임을 시사한다. 고려 전반기부터 각 지역에서는 같은 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철불들이 지역적 특색이 강한 불상유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단호사 철불을 비롯해서 백운암, 대원사 철불 등은 당시 충주 지역에 철불을 제작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과 문화적 수준을 갖춘 호족세력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세 철불은 철의 산지였던 충주의 지역적인 특징과 함께 불상 제작 양식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발견된 20여개의 철불 중 충주에 3구가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이 철의 산지였다는 증거가 된다.
충주는 우리나라 3대 철산지였기 때문에 철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충주에서는 보물로 지정된 3구의 철불 외에도 더 많은 불상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3구 중 단호사 철불과 대원사 철불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불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 충주 지역에는 특유의 불상유파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는 부처이다. 수명이 한량없어 백천억 겁으로도 헤아릴 수 없기에 무량수불(無量壽佛), 광명 또한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춘다고 해서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한다. 단호사 철불도 대웅전 서쪽에 안치되어 동향으로 앉아 있다. 단호사 철불에 예배하는 것은 아미타불이 머무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을 향한 것이 된다.
아미타는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를 한문으로 음역한 것이고, 의역하면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이다.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등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과거세에 법장보살(法藏菩薩)이었다. 법장보살은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48대원(大願)을 세우고 오랜 수행 끝에 마침내 그 대원을 성취하여 지금으로부터 10겁(劫) 전에 성불하여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48대원 가운데 12번째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3번째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에 아미타불의 본질이 잘 드러나 있다. 누구든지 지극한 신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만 염(念)하면 극락왕생(極樂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한 18번째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로써 중생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을 모든 중생에게 비치어 삼도고(三途苦)를 여의고 위 없는 힘을 얻게 한다.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널리 비추어 삼도고를 없애 준다는 보살이다. 아미타불의 협시로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시기도 한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의 열반 후 미륵불(彌勒佛)이 나타날 때까지 부처 없는 세상에서 육도(六道) 중생을 교화한다는 대비보살(大悲菩薩)이다. 육도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하늘, 인간 등 여섯 가지 세상을 말한다.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지장보살은 고려시대 이후 정토신앙이 성행하면서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등장하였다. 아미타불상은 경주 불국사(佛國寺)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27호),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 소조아미타여래좌상(塑造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45호)이 유명하다.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뒤편의 후불탱화는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를 봉안했다. 아미타삼존불의 후불탱화로 봉안하는 극락회상도는 정토삼부경을 토대로 아미타불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불화이다. 극락회상도에는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 극락래영도(極樂來迎圖), 관경변상도(觀境變相圖),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등이 있다.
단호사 대웅전의 후불탱화는 극락회상도 중 아미타설법도에 속한다. 아미타설법도는 아미타불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와 거의 비슷하다. 영산회상도와는 아미타불의 수인과 좌우 보처보살상(補處菩薩像)에서 조금 차이가 날 뿐이다. 아미타불의 수인은 아미타정인이나 설법인(說法印, 전륜법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주로 취한다.
아미타설법도는 다섯 가지 형식으로 분류된다. 첫째, 아미타불을 단독으로 그린 독존도(獨尊圖)가 있다. 아미타불은 연꽃대좌 위에서 아미타구품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둘째, 아미타불을 줌심으로 그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하는 아미타 삼존도(三尊圖)가 있다. 삼존도는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는 화불(化佛)이 있는 보관을 쓰고 연꽃이나 정병을 든 관음보살, 그 오른쪽에는 정병을 든 대세지보살이 배치된다. 정토삼부경에는 없으나 아미타 정토신앙과 결합한 지장보살이 대세지보살 대신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지장보살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석장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셋째, 아미타불과 함께 4대보살, 6대보살, 8대보살을 도상화한 5존도(五尊圖), 7존도(三尊圖), 9존도(九尊圖)가 있다. 아미타불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더하면 오존도, 오존도에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지장보살, 제장애보살(除障碍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을 더하면 구존도가 된다. 아미타팔대보살도라고도 불리는 구존도는 불공(不空)이 번역한 밀교(密敎) 경전 팔대보살만다라경(八代菩薩曼茶羅經)에 근거한 것이다. 구존도는 상하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화면 상단에 본존불, 하단에는 지물(持物)을 들고 있는 여덟 보살을 도상화한 형식이다.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외에 6보살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다.
넷째, 아미타불과 여러 보살, 아라한(阿羅漢), 사천왕(四天王) 등 외호신중(外護神衆)을 함께 묘사하는 군도(群圖)가 있다. 다섯째, 서방극락세계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 단호사 대웅전의 후불탱화는 극락회상도-아미타설법도-군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단호사 대웅전 관음, 지장보살상
단호사 대웅전 관음, 지장보살상
아미타삼존불 좌우에는 각각 66 관세음보살상과 42 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좌우 합하면 132 관음보살상과 84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는 것이다. 132와 84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대웅전 신중탱화
대웅전 북쪽 벽에는 신중탱화(神衆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신중탱화 상단 중앙에는 대예적금강(大穢跡金剛), 그 바로 밑에는 위태천(韋駄天) 즉 동진보살(童眞菩薩), 대예적금강의 왼쪽에는 제석천(帝釋天), 오른쪽에는 대범천(大梵天)을 배치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여러 신중이 묘사되어 있다.
신중탱화는 화엄신중신앙(華嚴神衆信仰)에 바탕을 두고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을 묘사한 불화이다. 신중탱화의 호법신들은 불교의 신중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토착신앙의 신들도 많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불교가 한민족의 토착신앙을 수용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신중탱화는 신앙적 기능에 따라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 대예적금강을 중심으로 하는 신중탱화이다. 대예적금강신중은 전체 탱화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왼쪽에는 제석천, 오른쪽에는 대범천, 그 아래에는 동진보살, 그리고 그 주위에는 성군(星君), 명왕(明王), 천녀(天女) 등을 도상화한다. 단호사 신중탱화는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제석천과 대범천,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신중탱화이다. 이 탱화의 특징은 천상(天像)을 중심으로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제석천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탱화이다. 모든 신중을 제석천의 주위에 배치하기에 제석탱화(帝釋幀畵)라고도 한다. 제석탱화는 무장하지 않은 보살이나 왕의 모습으로만 표현되는 것과 무장한 신장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넷째,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신중탱화이다. 신장만을 묘사하기 때문에 신장탱화(神將幀畵)라고도 한다. 신장탱화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 팔부신장, 오른쪽에 십이지신장(十二支神將)을 도상화한다.
신중탱화 중 가장 규모가 큰 탱화는 104위화엄신중탱화(百四位華嚴神衆幀畵)이다. 104위화엄신중탱화는 상단, 중단, 하단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상단 신중에는 대예적금강과 8대금강(八大金剛), 4대보살(四大菩薩), 10대광명(十大光明) 등이 들어간다. 대예적금강은 금강야차명왕(金剛夜叉明王)과 동등한 신격(神格)을 가진 명왕(明王)이다. 8대금강은 청제재금강(靑除災金剛), 벽독금강(碧毒金剛), 황수구금강(黃隨求金剛), 백정수금강(白淨水金剛), 적성화금강(赤聲火金剛), 정제재금강(定除災金剛), 자현신금강(紫賢神金剛), 대신력금강(大神力金剛) 등이다. 4대보살은 미륵보살과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이다.
중단 신중에는 대범천, 제석천, 사대천왕(四大天王), 공덕천(功德天), 위태천 등의 천신(天神), 용왕(龍王), 야차(夜叉), 건달바(乾達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睺羅伽) 등 팔부신중(八部神衆)과 칠원성군(七元星君), 삼태육성(三台六星), 모신(母神), 수신(水神) 등이 배치된다. 대범천은 불교의 33천(天) 중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왕이고, 제석천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하늘인 도리천(忉利天)의 주인으로 수미산 중턱의 사천왕을 거느리고 불법과 불제자를 보호한다. 사대천왕은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 毘沙門天王)을 말한다. 공덕천은 다문천왕의 비(妃)로 복덕을 베푼다는 여신(女神)으로 길상천(吉祥天)이라고도 한다. 위태천은 사천왕 중 증장천왕이 거느린 8대장군의 하나로 동자(童子)의 모습을 하고 있어 동진보살이라고도 한다.
칠원성군은 북두칠성(北斗七星, 北斗)을 신격화한 것이다. 북두 제1성 천추성(天柩星)은 자손만덕(子孫萬德) 탐랑성군(貪狼星君) 운의통증여래불(運意通證如來佛), 북두 제2성 천선성(天璇星)은 장난원리(障難遠離) 거문성군(巨文星君) 광음자재여래불(光音自在如來佛), 북두 제3성 천기성(天機星)은 업장소제(業障消除) 녹존성군(祿存星君) 금색성취여래불(金色成就如來佛), 북두 제4성 천권성(天權星)은 소구개득(所求皆得) 문곡성군(文曲星君) 최승길상여래불(最勝吉祥如來佛), 북두 제5성 옥위성(玉衛星)은 백장진멸(百障殄滅) 염정성군(廉貞星君) 광달지변여래불(廣達智辯如來佛), 북두 제6성 개양성(開陽星)은 복덕구족(福德具足) 무곡성군(武曲星君) 법해유희여래불(法海遊戱如來佛), 북두 제7성 요광성(搖光星)은 수명장원(壽命長遠) 파군성군(破軍星君) 약사유리광여래불(藥師琉璃光如來佛)이다. 요약하면 칠성신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수복강녕(壽福康寧)과 재물의 신이다.
삼태성(三台星)은 큰곰자리에 속한 별로 자미성(紫微星)을 지키는 상태성(上台星), 중태성(中台星), 하태성(下台星)을 말한다. 삼태성은 자식을 점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육성(六星)은 궁수자리에 속한 여섯 개의 별로 남두육성(南斗六星)이라고도 한다. 도교에서 남두(南斗)는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신격화한 남극장생대제(南極長生大帝)의 통치 아래에 6부가 있는 큰 관청으로 여겨진다. 주로 인간의 수명과 운명을 관장한다는 별이다.
하단 신중에는 호계신(護戒神), 토지신(土地神), 도량신(道場神), 가람신(伽藍神), 방위신(方位神), 산신(山身), 강신(江神), 몽신(夢神), 목신(木神), 축신(畜神) 등이 묘사된다. 호계신은 부처의 계율을 지키는 선신이다. 삼귀의(三歸依)를 받은 사람은 36부(部)의 선신이 지키고, 오계(五戒)에도 각각 다섯 신이 있어 오계를 받은 사람을 지킨다고 한다. 토지신은 절의 경내를 지키는 신이다. 도량신은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의 도량을 지키는 정장엄당도량신(淨莊嚴幢道場神), 수미보광도량신(須彌寶光道場神), 뢰음당상도량신(雷音幢相道場神), 우화묘안도량신(雨華妙眼道場神), 화영광계도량신(華纓光髻道場神), 우보장엄도량신(雨寶莊嚴道場神), 용맹향안도량신(勇猛香眼道場神), 금강채운도량신(金剛彩雲道場神), 연화광명도량신(蓮華光明道場神), 묘광조요도량신(妙光照曜道場神) 등 10위의 신을 가리킨다.
가람신은 호가람신(護伽藍神), 수가람신(守伽藍神), 사신(寺神)이라고도 한다. 중국 당송(唐宋) 시대의 선사(禪寺)에서 유래한 신이다. 칠불팔보살다라니신주경(七佛八菩薩陀羅尼神呪經)에는 18가람신이 나온다. 가람신의 상은 도인의 복장을 하고 있어,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방위신은 오방을 지키는 오방신장(五方神將)으로 동방청제(東方靑帝), 서방백제(西方白帝), 남방적제(南方赤帝), 북방흑제(北方黑帝), 중앙황제(中央黃帝)를 말한다. 산신은 산, 강신은 강, 몽신은 꿈, 목신은 나무, 축신은 짐승을 각각 수호한다.
대웅전 감로탱화
단호사 대웅전 남쪽 벽에는 감로탱화(甘露幀畵)를 봉안했다. 감로탱화는 수륙재(水陸齋)나 우란분재(盂蘭盆齋) 같은 천도재(薦度齋)에 쓰이는 불화이다. 천도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아귀(餓鬼)에게 감로(甘露)를 베푼다는 뜻에서 감로도(甘露圖) 또는 감로왕도(甘露王圖)라고 한다.
대웅전 감로탱화의 상단에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보승여래(寶勝如來), 묘색신여래(妙色身如來),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 이포외여래(離怖畏如來),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등 7여래(七如來)를 중심으로 그 왼쪽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아미타불, 오른쪽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을 도상화하였다. 인로왕보살은 망자의 영혼(靈魂)을 접인(接引)하여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감로탱화의 중단에는 일반적으로 음식이 가득 차려진 재단(齋壇)과 법회(法會) 장면이 묘사된다. 하단에는 장발에 험상궂은 모습을 한 두 아귀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윤회를 반복해야 하는 중생계와 고혼(孤魂)이 된 망령(亡靈)들의 살아생전 모습이 다양하게 도상화된다. 하단에는 또 무녀(巫女)가 굿을 하는 장면, 대북과 날라리, 바라 등을 연주하는 승려들을 표현하기도 한다.
두 아귀상은 아귀도에 빠진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화현한 비증보살(悲增菩薩)과 지증보살(智增菩薩)로도 본다. 비증보살은 이타(利他)의 선근과 자비의 선근이 많은 보살로 육도 윤회의 세계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해 성불하기를 원하지 않는 보살이다. 지증보살은 지혜를 닦고 번뇌를 끊으며,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리(自利)의 선근은 많지만 이타(利他)의 선근이 적은 보살이다.
감로탱화는 도설의 내용상 상단, 중단, 하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단은 불보살의 세계, 중단은 재단과 재의식 장면, 하단은 아귀 등 육도 중생과 죄업을 짓는 망자의 생전 모습이 묘사된다. 이처럼 감로탱화는 각 단계마다 설정된 주제가 있다. 즉, 과거(하단)에서 현재(중단), 현재에서 미래(상단)로 상승하는 삼세여행(三世旅行)을 도상화한다. 감로탱화는 지옥도에서 헤매는 중생들이 재의식(齋儀式)을 행하면 그 공덕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정토신앙(淨土信仰)과 밀교신앙(密敎信仰)이 바탕에 깔려 있는 감로탱화는 특히 조선시대에 많이 그려진 불화이다. 감로(甘露)는 천신(天神)들이 마시는 음료 또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로 곧 부처의 은덕을 뜻한다. 감로는 아귀의 목구멍을 열어주어 배고픔의 고통을 벗어나게 한다는 믿음이 있다.
배고픔의 고통을 받고 있는 아귀는 또한 배고픔의 고통을 받고 있는 죽은 조상을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아귀는 억울하게 죽어서 해원(解寃)해야 할 모든 고혼(孤魂)을 상징하며, 육도 중생의 고통을 한몸에 짊어진 존재이다. 그래서, 감로탱화를 고혼탱화(孤魂幀畵)라고도 한다.
대웅전 범종
대웅전 출입문 곁에는 한글로 '국보사찰 제512호 단호사'라고 새겨진 작은 범종이 하나 종틀에 걸려 있다. 범종의 꼭대기 장식인 용뉴(龍鈕)는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종신(鍾身)의 상대(上帶)와 하대(下帶)는 당초문(唐草紋)으로 장식했다. 상대 바로 밑 동서남북 사방에는 당초문과 비천상(飛天像)으로 장식한 4좌의 유곽(乳廓), 유곽 아래에는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유곽 안에는 각각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유두가 연꽃봉오리 형태일 때는 연뢰(蓮蕾), 유곽을 연곽(蓮廓)이라고 한다. '단호사'란 명문 바로 밑에는 당목(撞木)이 닿는 연화문(蓮花文) 당좌(撞座)가 자리잡고 있다. 연화문 당좌는 당초문으로 빙 둘러서 장식했다.
단호사 약사전
단호사 약사전 편액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식의 작은 건물이다. 처마에는 '藥師殿(약사전)'이라고 쓰고, 낙관 대신 '주지 시주자 무오생 박찬호'라고 새긴 편액이 걸려 있다. 약사전은 나중에 삼성각(三聖閣)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한다.
단호사 약사전 법당
약사전은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인데, 법당에는 무슨 까닭인지 약사여래가 보이지 않는다. 중앙 불단에는 약사여래 대신 관세음삼존보살(觀世音三尊菩薩)과 그 뒤에 후불탱화로 극락회상도가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의 오른쪽에는 지장탱화(地藏幀畫)와 산신탱화(山神幀畫)가 걸려 있고, 대세지보살의 왼쪽에는 칠성탱화(七星幀畫)와 신중탱화가 걸려 있다.
약사전 관세음삼존보살
약사전 중앙 불단에는 원래 단호사 본존불인 철조여래좌상, 그 오른쪽에 대세지보살과 지장보살, 왼쪽에 관세음보살이 협시보살로 안치되어 있었다. 이후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자 철불만 옮겨서 봉안하고 좌우 협시보살들은 그대로 둔 것으로 보인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 자금색 불의를 입은 대세지보살, 오른쪽에 백의관음을 배치한 후불탱화는 극락회상도-아미타설법도-군도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약사전 칠성탱화
칠성탱화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중단과 상단에는 칠불(七佛), 하단에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하였다.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칠원성군은 도교적 민간신앙을 불교에서 수용한 것이다. 북두칠성은 칠여래(七如來)의 화현(化現)이기도 하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재물, 재능을 관장하며, 농경시대에는 비를 내리는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
불교에서 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을 신격화한 것이다. 도교에서는 이 별을 자미대제(紫微大帝)로 신격화했다. 옛날에는 북극성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으며, 이 별에서 신령스런 빛이 나온다고 해서 치성광(熾盛光)이라고 한다. 치성광여래를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고도 한다. 일광변조소재보살(日光遍照消災菩薩, 일광보살)은 해, 월광변조소재보살(月光遍照消災菩薩, 월광보살)은 달을 신격화한 것이다. 치성광여래는 일월성수(日月星宿)를 권속으로 삼아 털구멍에서 치성광을 내뿜어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주며, 무병장수하고, 자손을 번성하게 한다. 이는 약사불과 그 역할이 비슷하다. 그래서 자식이 없거나 아들을 낳고자 하는 여자, 자녀의 수명을 기원하는 이들이 치성광여래를 많이 믿었다.
칠성탱화는 보통 치성광여래와 일광여래, 월광여래 삼존불을 중심으로 상단에 칠여래, 하단에 칠원성군, 그리고 좌우에 삼태, 육성, 이십팔수(二十八宿)를 도상화한다. 칠원성군의 중앙에 자미대제를 도설하는 경우도 있다. 칠원성군은 보통 도사상으로 그려진다.
칠성신만 봉안한 전각을 칠성각(七星閣) 또는 북두각(北斗閣)이라고 한다.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이다. 칠성각은 초기 불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조선시대 중기부터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칠성각에는 삼존불과 칠여래, 칠성신 등이 함께 봉안된다.
약사전 신중탱화
약사전 신중탱화는 중앙 상단의 대예적금강과 그 바로 아래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여러 호법신중들을 도상화했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신중탱화이다. 신중탱화 앞에는 관세음보살을 봉안했다.
약사전 지장탱화
약사전 지장탱화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도상화했다. 지장탱화는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을 묘사한 불화로 사찰의 명부전(冥府殿)에 많이 봉안된다. 지장탱화는 지장보살과 좌우보처(左右補處)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중심으로 명부시왕(冥府十王), 사자(使者), 장군(將軍), 졸사(卒使), 방위신, 사천왕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장탱화는 지장독존도(地藏獨尊圖), 지장삼존도(地藏三尊圖), 지장삼존신중도(地藏三尊神衆圖),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등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지장독존도는 고려나 조선 초기에 많았으며, 대부분이 입상(立像)이다. 흔히 두건을 쓰고 석장(錫杖)을 짚거나 여의주를 들고 있다. 지장삼존도는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을 근거로 하여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는 탱화이다.
지장삼존신중도는 지장삼존 외에 관세음보살과 용수보살(龍樹菩薩), 다라니보살(陀羅尼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 중 2~4명의 보살을 배치하고, 제10 전륜대왕(轉輪大王)과 사천왕, 대범천, 제석천을 호법신중으로 묘사한 것이다.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협시, 명부시왕(冥府十王)과 판관 등을 도상화한 탱화이다. 지장신앙과 시왕신앙이 혼합된 것이다. 단호사 약사전 지장탱화는 지장시왕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지장탱화는 지장보살의 권속들을 본존인 지장보살의 대좌(臺座) 아래쪽 좌우에 배치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여러 존상의 배열이 위쪽으로 올라온다는 특징이 있다. 지장탱화는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지장신앙의 순수성이 감소되고 시왕신앙이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선시대의 지장시왕도에서 지장보살이 육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육도에 각각 나타나는 육지장(六地藏, 六光菩薩)으로 많이 묘사되는 점도 고려 불화와 다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지장보살이 두건을 쓴 형태가 약간 많았다면, 후기에는 머리를 깎은 승형(僧形)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단호사 지장탱화의 지장보살은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았다. 인계(印契)는 왼손에 석장을 짚고 오른손에 보주를 잡은 형식, 왼손에 석장이나 구슬을 잡고 오른손은 둘째와 셋째 손가락 끝을 가슴에 대어 올린 형태, 두 손 모두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대어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들었으며 석장은 도명존자가 대신 가지고 있는 형태 등 다양하다. 단호사 지장탱화의 지장보살은 왼손에 보주, 오른손은 아미타구품정인 중 중품중생인을 취하고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지장탱화 중 대표적인 작품에는 일본 닛코사(日光寺) 소장 지장시왕도와 독일 베를린 동양미술관 소장 지장시왕도, 일본 세이카당(靜嘉堂) 소장 지장시왕도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작품에는 일본 고메이사(光明寺) 소장 지장시왕도(1562년)와 일본 사이호사(西方寺) 소장 지장시왕도(1500년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공산 북지장사(北地藏寺) 지장탱화(1725년), 고성 옥천사(玉泉寺)의 지장시왕도(1744년), 영천 은해사 운부암의 지장탱화(1747년) 등이 있다.
약사전 산신탱화
약사전 산신탱화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아름드리 낙락장송 아래 호랑이를 앞세우고 앉아 있는 백발 수염의 산신을 도상화하였다. 백발 머리에는 관을 쓰고 있다. 붉은색 옷을 입은 산신 곁에는 시봉하는 동남(童男) 동녀(童女) 한쌍이 서 있다. 동남은 표주박이 걸려 있는 지팡이를 들고 있고, 동녀는 접시에 담은 선도(仙桃)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있다.
산신은 불법 수호의 서원을 세운 호법선신(護法善神) 중 하나인 산왕대신(山王大神)으로 흔히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산신은 가람 수호신이자 산중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산신은 옛날 농경민들에게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하는 강우신(降雨神)이나 풍산신(豊産神), 유목민 또는 수렵민들에게 사냥감을 풍성하게 내리는 신으로 여겨졌다. 산신은 또 인간에게 아이를 점지해 주고, 악귀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칠성과 마찬가지로 산신도 불교의 정착 과정에서 토착신앙을 수용한 것이다. 도교 또는 선교(仙敎)에서 유래한 산신은 무속(巫俗)의 대표적인 신이기도 하다. 또,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산악숭배신앙이 강했다. 백제의 산신신앙을 비롯해서 신라에는 오악삼산신(五岳三山神)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악신(四岳神)과 산천신(山川神)을 매우 중요시하여 조정에서 제사를 관장하기도 했다.
산중의 왕은 호랑이였고, 사람들은 호랑이를 산의 신령이라 믿었다. 그래서 산신도에서 산신의 모습은 호상(虎像)과 신선상(神仙像)으로 나타난다. 신선은 바로 호랑이의 변화신(變化身)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내고, 호랑이를 신으로 섬긴다'는 기록처럼 이미 고대로부터 산신의 형상을 호상이나 신선상으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산신에게 제사하는 산제(山祭) 또는 산신제(山神祭)는 무속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다. 산에 묘지를 쓸 때 산신에게 고하는 예식은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산악회나 등산동호회에서는 매년 연초에 산신에게 안전한 산행을 비는 시산제(始山祭)를 지낸다. 심마니들도 산에 들어가기 전에 대물 점지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린다. 산신신앙은 이처럼 우리 민중들 사이에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산신도를 봉안하는 산신각(山神閣)은 대부분 조선 중기 이후에 나타나고 있다. 현존하는 산신도도 조선 후기 이전의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로 보아 사찰에 산신도를 봉안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이후임을 알 수 있다. 산신도는 일반적으로 백발이 성성한 신선과 호랑이가 친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맹수인 호랑이를 용감하고 위엄있게 그리기보다는 해학적으로 묘사한 그림이 많다. 때로는 백발수염의 신선 옆에 고양이처럼 귀엽고 우스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조선시대 민화에서도 호랑이는 친근하고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많이 그려졌다. 산신도의 호상도 조선시대 민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도 수입 종교다. 칠성신앙과 산신신앙은 불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신앙이었다. 이질적인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기존의 토착신앙과의 모순과 갈등이 생기면서 신앙투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시대는 국가적으로 배불정책을 시행하던 시대였다.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당시 민중들의 광범위한 신앙 대상이었던 칠성과 산신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민족의 토착신앙을 수용한 결과 불교는 살아남아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에 오랜 기간 한반도의 주류 신앙이었던 칠성과 산신은 불교 사찰의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포용력은 불교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단호사 요사
대웅전 뒤에는 요사채가 있다. 요사채는 주사(主舍)에 좌우익실(左右翼室)을 이어붙인 삼산형(三山形) 건물이다.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식 건물로 가운데의 주사의 지붕은 높이고, 양쪽 익실의 지붕은 낮게 해서 층을 두어 격식을 갖췄다.
단호사 소나무
대웅전 앞마당에는 옆으로 비스듬히 자란 아름드리 늙은 소나무이 한 그루가 단호사를 지키고 있다. 나이는 510살, 키는 8.5m라고 한다. 510살이면 대략 1506년 전후에 심어졌을 것이니 조선(朝鮮) 중기 연산군(燕山君)~중종(中宗) 연간일 것이다. 단호사는 이 소나무로 인해 한때 송림사(松林寺)라 불리기도 했다.
단호사 노송(老松)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강원도에 문약국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문약국은 재산은 많았지만 자식이 없는 것이 항상 큰 걱정거리였다. 어느 날 문약국은 충주에 산다는 한 노인으로부터 자식이 없는 사람이 단월에 있는 절에서 불공(佛供)을 드리면 아이를 얻는다는 말을 들었다. 문약국은 자식을 볼 생각에 홀몸으로 단월의 절을 찾아 낡은 불당을 보수한 뒤 약방과 거처도 아예 이리로 옮겼다. 사람들은 문약국이 불공을 드리며 거처하는 이 절을 약사당(藥師堂)이라고 불렀다.
문약국은 홀로 지내는 적적함과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절마당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불공을 드리고 남는 시간에 소나무를 가꾸는 일이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자리에 든 그는 고향집 마당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안방에도 부처님을 모셔 놓은 꿈을 꾸었다. 이상하다고 여긴 문약국은 강원도 고향을 찾아 부인에게 꿈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그러자 그의 부인도 단월에 있는 법당이 자기집 안방으로 바뀌어 보이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 아닌가!
꿈이 부부가 한집에서 같이 살라는 계시라고 생각한 문약국은 즉시 고향의 가산을 정리하고 부인을 데리고 단월로 돌아왔다. 부부가 함께 산 지 얼마 안되어 부인은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성년이 되어 문과에 급제하고, 강원도 모현의 현감까지 지냈으며, 그 후손들도 번창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다.
전설은 조선시대의 남아선호사상과 부처의 신통력을 부각시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신이(神異)한 내용의 전설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문약국의 이야기가 소문을 타자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 절과 소나무를 찾아 불공을 드리고 소원을 성취했다고 한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문씨 후손들이 단월의 절과 소나무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단호사 삼층석탑
단호사 삼층석탑
소나무 곁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높이 2.14m의 아담한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소나무가 마치 삼층석탑을 에워싸서 보호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삼층석탑은 군데군데 깨지고 떨어져 나간 곳이 있어 보존상태는 그리 좋지 않다. 하층 기단부(基壇部)는 시멘트로 덮여 있다. 단층기단의 높이는 43㎝로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표현되어 있고, 갑석(甲石)은 높이 16㎝로 윗면에 조각된 1단의 탑신 괴임이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갑석의 한쪽 귀퉁이는 떨어져 나간 것을 보수한 흔적이 있다.
초층 탑신(塔身)은 높이 40㎝로 우주가 표현되어 있다. 초층 탑신의 높이는 2, 3층 탑신보다 두 배 이상 높다. 거의 1/3 정도가 뭉텅 떨어져 나간 부분은 돌과 시멘트로 너무 표나게 보수했다. 각 옥개석(屋蓋石)은 두껍고 투박한 모습으로 경사면이 급하게 처리되었다. 초층 옥개석은 높이 25.5㎝로 하단부에 2단의 층급받침과 상부에 1단의 탑신괴임이 조각되었고, 하면에는 낙수홈이 파여 있다. 2층과 3층의 탑신과 옥개석은 그 양식이 초층과 거의 같다.
상륜부(相輪部) 노반(露盤)은 높이가 6.5㎝로 방형(方形)으로 되어 있다. 노반 윗부분 중앙에는 찰주공(擦柱孔)이 만들어져 있다. 노반을 4층 탑신이라고 보기도 한다. 단호사 삼층석탑이 원래 오층석탑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오층까지 있었다면 상당히 날씬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탑이었을 것이다.
조선고적조사보고서(朝鮮古蹟調査報告書)에 ‘읍남약사전 삼층석탑 신라(邑南藥師殿三層石塔新羅)’라는 기록을 근거로 단호사 삼층석탑을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주와 탱주의 조각 수법과 옥개석의 층급받침, 옥개석 낙수면의 낙수홈 등으로 볼 때 이 탑은 고려 중기 이후나 려말선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호사 삼층석탑은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터로 보인다. 충주지방의 탑들이 대개 산 위에 있는데 비해 이 탑은 평지에 세워졌다는 점이 다소 특이하다.
단호사 미륵불입상
약사전 옆에는 1973년에 조성한 높이 6m의 황금색 대형 미륵불입상이 세워져 있다. 나발 머리에 쓴 관 위에는 2층의 사각형 보개(寶蓋)가 놓여 있고, 초층 보개 네 귀퉁이에는 풍경이 달려 있다. 2층 보개 위에는 석탑의 상륜부처럼 복발(覆鉢), 보륜(寶輪), 수연(水蓮), 보주(寶珠) 등이 올려져 있다. 상호는 온화하고 원만하며, 두터운 귀는 길게 내려와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불의는 통견으로 목 아래로 굵은 옷주름이 U자형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면서 내려와 있고, 그 위로 풍만한 가슴이 드러나 있다. 오른쪽 젖가슴 바로 아래에 가사를 접은 끝단을 표현했다. 소매는 무릎까지 길게 내려와 있고, 수인은 왼손 여원인(與願印), 오른손 시무외인(施無畏印)의 통인(通印)을 취하고 있다. 여원인은 왼손을 내려서 손바닥을 보이게 하는 손모양으로 시원인(施願印), 만원인(滿願印)이라고도 한다. 부처가 중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준다고 하는 의미의 수인이다. 시무외인은 오른손 또는 왼손을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다섯 손가락을 세운 채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손모양으로 이포외인(離怖畏印)이라고도 한다. 부처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고 위안을 주는 의미의 수인이다. 하의는 치마를 입었고, 연화대좌 위에 놓인 두 발은 치마 밑으로 나란히 나와 있다.
미륵불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세상은 갈수록 가진 자, 쥔 자들이 더 가지고, 더 쥐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썩은 세상이다. 이제는 저마다 미륵불이 되어 썩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용화세상을 실현해야 할 때다. 미륵불을 보고 듣고 배우고 깨닫는 이유다. 썩은 세상을 갈아엎고 새 세상을 열으라는 것이 미륵불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미륵불이 던지는 화두다. 우리 모두 미륵불이 되는 썩은 세상을 갈아엎는 그날 비로소 새 세상은 열릴 것이다.
단호사 부도
미륵불입상 앞에는 '丹湖寺住持比丘尼金普眼浮屠(단호사주지비구니김보안부도)'라고 새긴 부도비와 부도가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인동장씨두현 밀양박공철수 영가'라고 새긴 비석과 단호사 공덕주(功德主)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도 보인다.
단호사 석탑과 불상
단호사 경내 남쪽의 작은 연못에는 작은 불상과 보살상, 그리고 석탑이 세워져 있다. 그 주위에는 잔디를 깔고 걸상을 갖다 놓았다. 단호사 신도들의 휴식 공간으로 보인다.
단호사 510살 느티나무 보호수
단호사 350살 느티나무 보호수
단호사 250살 느티나무 보호수
단호사 대웅전 앞쪽 담장에는 수령이 각각 510년, 350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고, 대웅전 북쪽 마당 한가운데에는 수령이 250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서 있다. 이들 느티나무 세 그루는 충주시 보호수 제94호로 지정되어 있다. 510살 느티나무는 수고(樹高) 8.5m, 둘레 2.1m이고, 350살 느티나무는 수고 15m, 둘레 4.7m이다. 250살 느티나무는 수고 21m, 둘레 3.7m이다.
단호사는 아직 무언가 완성되지 않은 사찰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언젠가 사찰의 형식과 내용을 완전하게 갖추었을 때 다시 한번 오리라 생각하면서 단호사를 떠나다.
2016.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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