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바람꽃을 보러 들어갔던 가야산(伽倻山, 678m)은 며칠 전 내린 폭설로 눈천지가 되어 있었다. 변산바람꽃은 보지도 못하고 가야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명월봉(明月峰) 정상에 있는 헌종대왕태실(憲宗大王胎室)을 찾았다. 명월봉은 가야산 옥양봉(玉洋峰, 621m)에서 서원산(書院山, 481m)을 지나 남동쪽으로 옥계저수지(玉溪貯水池)를 향해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에 솟은 낮으막한 산봉우리다. 1957년에 준공된 옥계저수지는 덕산저수지(德山貯水池)라고도 부른다.
명월봉
헌종 태실과 귀부
헌종 태실과 귀부
헌종 태실
귀부
귀부
헌종 태실비
헌종 태실 안내판
헌종 태실도
가야산로에서 남쪽 옥계저수지로 뻗어내린 능선을 따라가면 곧 명월봉 정상에 조선 제24대 왕 헌종(1827~1849)의 태를 묻은 태봉(胎封)이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태를 백자항아리에 보관하였다가 길일을 택해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을 찾아 봉안했다. 태봉은 아기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가 왕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이왕직(李王職)을 설치하고 1928년 전국에 안치된 조선왕의 태실 53기를 파헤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길 때 이곳 헌종 태실도 훼손되었다. 현재의 헌종 태실은 1927년에 훼손된 채 여기저기 나뒹굴던 부재(部材)들을 수습하여 복원한 것이다.
헌종 태실은 원구형(圓球形)이다. 기단(基壇)은 몸돌이 놓일 부분을 비워두고 쐐기형 석재들을 팔각형으로 빙 둘러 깔았다. 각 석재에 뚫려 있는 구멍들은 보호 난간을 설치했던 흔적이다. 몸돌의 하단과 상단에는 원 고리들을 연결한 형태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몸돌 중앙부에는 팔랑개비 형태의 특이한 겹꽃 문양이 돌아가면서 새겨져 있다. 팔각의 지붕돌은 급경사를 이루면서 내려오다가 끝부분에서 기왓골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지붕돌의 위 3/4 정도는 겹꽃 복련(覆蓮)을 새겼고, Y를 거꾸로 한 크고 작은 음각선(陰刻線)이 교대로 배열되어 있다. 상륜부(上輪部)에는 연꽃봉오리를 올렸고, 지붕돌과 상륜부의 연결부는 염주(念珠)를 조각했다. 몸돌과 상륜부의 형태와 문양은 조선시대 풍수와 미술 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헌종 태실비는 비신(碑身) 받침인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 기단과 귀상(龜像)은 한돌로 되어 있다. 거북의 네 다리는 기단 바로 위에 세밀하게 부조되어 있고, 거북등은 다소 도식화된 무늬를 반복적으로 새겼다. 비좌(碑座) 주위에는 복련을 조각했다. 귀두(龜頭)는 튀어나온 눈, 주먹코, 도식화된 이빨 등 다소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1970년대에 훼손된 채 사라졌던 비신은 40여 년만인 2015년 9월 20일 옥계저수지 물속에서 두 동강이 난 채 '下胎室(하태실)'이 새겨진 부분만 인양되었다. 태실비의 나머지 부분은 아마도 '憲宗大王殿(헌종대왕전)'이 아닐까 짐작된다. 용두(龍頭)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태실비의 원래 크기는 비신 하단에서 용두 상단까지 약 150cm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내판의 태봉 그림은 1847년(헌종 13) 태실을 석물로 단장한 뒤 주변의 산세를 함께 그려 왕실에 보고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그림을 보면 남쪽에서 바라본 태봉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안태사(安胎使) 이지연(李止淵)이 명월봉 태봉소(胎封所)에 가서 태를 봉안했다는 실록기사와 당시 제작한 원손아지씨안태등록(元孫阿只氏安胎謄錄)에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헌종(재위 1834∼1849년)의 이름은 환(奐),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이다. 헌종은 순조(純祖)의 손자이자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 익종(翼宗)의 아들이다. 순조는 정조(正祖)의 2남이다. 헌종의 어머니는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풍양조씨(豊壤趙氏)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神貞王后)이다. 헌종의 비(妃)는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조근(金祖根)의 딸 효현왕후(孝顯王后), 계비(繼妃)는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남양홍씨(南陽洪氏) 홍재룡(洪在龍)의 딸 명헌왕후(明憲王后)이다.
1830년(순조 30) 왕세손에 책봉된 헌종은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어린 나이로 경희궁(慶熙宮)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려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원왕후는 안동김씨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이다. 김조순은 김조근과 7촌 재당숙질간이다.
순조는 자신이 죽기 전 헌종의 외삼촌 조인영(趙寅永)에게 손자의 보위를 부탁했다. 이에 힘입어 1837년(헌종 3) 3월부터 신흥 외척 풍양조씨 세력은 안동김씨 세력을 물리치고 세도를 잡았다. 그러나 1846년 조만영이 죽자 정권은 안동김씨에게로 돌아갔다. 1841년 헌종이 14세 되던 해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둠으로써 친정(親政) 체제에 들어가자 다시 풍양조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헌종대 세도정치를 이끈 실세는 조인영과 조만영의 아들이자 신정왕후의 오빠인 조병구(趙秉龜), 조득영(趙得永)의 아들 조병현(趙秉鉉) 등이다.안동김씨에 이어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여파로 과거제도는 부정이 만연하고, 백성들의 삶과 직결된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등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다.
설상가상 헌종 재위 15년 중 9년에 걸쳐 일어난 수재(水災)는 백성들을 아사직전으로 몰고 갔다. 게다가 전염병의 창궐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1836년 남응중(南膺中)은 남경중(南慶中) 등과 헌종을 몰아내고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은언군은 바로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 장조(莊祖)의 서자이자 철종(哲宗)의 조부이다. 1844년에는 이원덕(李遠德)과 민진용(閔晉鏞) 등이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의 장남 이원경(李元慶)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1848년부터는 영국, 프랑스 등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군함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해왔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은 무역과 포교를 명분으로 동양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무지한 조선의 집권층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쇄국정책은 왕실과 집권층의 안정만을 고려한 정책이었다. 일제시대 부일민족반역자들처럼 이들에게는 나라가 망하든 말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든 말든 관심사가 아니었다.
외세의 침투가 시작되면서 백성들도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무능한 왕과 세도정치의 폐해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신(神)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며, 야훼(Yahweh)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상은 낡은 봉건질서를 지탱하는 기존의 유교사상보다 훨씬 매력적인 것이었다. 천주교는 조선왕조라는 낡은 봉건체제 하에서 신음하던 백성들 사이에 복음(福音)이 되어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헌종은 순조 때의 천주교 탄압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1839년 헌종의 묵인 하에 풍양조씨의 주도로 일어난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앵베르(Imbert, L. J. M.) 주교와 모방(Maubant, P. P.), 샤스탕(Chastan, J. H.)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천주교도들이 학살당했다. 풍양조씨 세력은 천주교 탄압을 통해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안동김씨 세력도 동시에 제거하고자 했기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도 많았다. 모진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조선의 민중들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1846년(헌종 12) 프랑스 해군 제독 세실(Cécille)은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洪州)의 외연도(外煙島)에 들어와 국서를 헌종에게 전달할 것을 요구했으나 현지 지방관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프랑스의 국서는 기해박해 때 프랑스인이 처형된 것에 대한 항의와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라는 협박이었다. 프랑스 함대의 국서 건을 청(淸)에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헌종은 영의정 권돈인(權敦仁)과 이 문제를 의논했다. 권돈인은 프랑스 함대가 온 것은 천주교도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결국 천주교를 더욱 탄압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1947년 프랑스 군함 글로아르(Gloire) 호가 세실 함장이 전했던 국서의 답변을 받아가겠다며 서해로 들어오다가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해안에서 폭풍을 만나 좌초되었다. 글로아르 호 선원들은 고군산군도에 약 1개월간 머물다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빌려 온 영국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는 후환이 두려워 세실이 보낸 국서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그동안 조선의 영해에 나타난 프랑스 선박의 동정과 기해박해 때 프랑스 신부를 죽인 사실 등을 적은 문서를 작성해 청(淸)의 예부(禮部)에 전달했다. 이 문서는 조선이 서양에 보낸 첫 외교문서였다.
헌종은 천주교도들을 적발하기 위해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하는 한편, 1846년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던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金大建)과 여러 천주교도들을 처형했다. 기해박해 때 처형당한 모방 신부에게 발탁된 김대건은 마카오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돌아와 포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오가작통법은 조선시대 주민 감시와 사찰을 목적으로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묶은 인보조직(隣保組織)으로서 북한의 오호담당제(五戶擔當制), 남한의 테러방지법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봉건왕조와 지배층은 다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척사위정(斥邪衛正) 정책을 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봉건 왕조의 전제와 세도정치 독재의 폐단이었다.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철이 든 헌종은 점차 풍양조씨 외척의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날 헌종은 입궁한 외숙 조병구의 국정 농단을 따지며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라고 경고했다. 이는 조병구 일개인 뿐만 아니라 풍양조씨 세도에 대한 경고였다. 조병구는 충격을 받고 황급히 궁을 빠져나가다가 수레가 뒤집혀 그 자리에서 죽었다.
하지만 헌종은 외척의 세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을 펼쳐볼 새도 없이 1849년 창덕궁(昌德宮) 중희당(重熙堂)에서 23세의 나이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헌종은 비와 두 명의 후궁이 더 있었음에도 아름다운 궁녀들만 보면 불러들여 성교를 할 정도로 여자를 좋아했음에도 후사를 얻지 못했다. 문제는 그의 왕위를 계승할 6촌 이내의 친족이 신유박해로 모두 죽고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헌종의 후사가 끊어지자 이씨 왕실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때 순조비로 대왕대비인 안동김씨 순원왕후는 1849년(헌종 15) 강화도에 살고 있던 전계대원군 이광의 3남 이변(李昪)을 데려다가 자신의 아들로 삼고 덕완군(德完君)에 봉했다. 전계대원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이다. 헌종이 죽자 순원왕후는 옥쇄부터 찾았다. 그런 다음 영조(英祖)의 유일한 혈손인 19세의 이변을 1850년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시켰다. 강화도에 농사를 짓던 강화도령 철종은 졸지에 한양으로 불려와 왕위에 올랐기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 철종은 순원왕후의 근친인 안동김씨 김문근(金汶根)의 딸 철인왕후(哲仁王后)를 비로 삼았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으로서 철종을 보좌하자 정권은 다시 안동김씨 수중으로 들어갔다. 철종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고, 세도정치의 폐해는 날로 심각해져 갔다. 이후 전국각지에서 조선왕조와 지배층에 불만을 품은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최제우(崔濟愚)가 주창한 동학(東學)의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은 학정으로 고통받고 신음하는 민중들 사이에 복음으로 전파되었다. 순조 말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의 폐해는 결국 조선을 망국의 길로 내몰았다.
조선의 망국 과정에 왕위에 오른 헌종은 매우 불행한 왕이었다. 그의 초상화 1본이 선원전(璿源殿)에 봉안되어 있다. 시호는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묘호는 헌종(憲宗)이다. 능호는 경릉(景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그는 재위 기간 중 왕권의 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羹墻錄), 삼조보감(三朝寶鑑)을 비롯해서 열성지장(列聖誌狀), 동국사략(東國史略), 문원보불(文苑黼黻),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등의 서적을 편찬하게 했다. 또, 각 도에 제언(堤堰)을 수축하게 하여 가뭄과 장마에 대비하였다. 헌종은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헌종의 급서(急逝)에 대해 의문사설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암살을 당했다면 순원왕후와 안동김씨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
2016.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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