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 폭설이 내린 다음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괘방산(掛榜山, 339m)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해수관음도량(海水觀音道場) 등명낙가사((燈明洛迦寺)를 다시 찾았다. 지난번에는 날이 저물 때 와서 절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는 북쪽의 고구려와 동쪽의 왜구 등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지금의 절터에 불사리(佛舍利)를 모시고 수다사(水多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장율사가 수다사에 머물 때의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자장율사의 꿈에 중국 오대산 북대(北臺)에서 보았던 비구가 나타나 '내일 저 큰 소나무 밑에서 꼭 만나자.'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비구가 일러준 대로 자장율사가 그 자리에 갔더니 과연 그곳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수다사는 신라 말기에 병화(兵火)로 불에 타버리고, 고려 초기에 중창하여 절 이름을 등명사(燈明寺)라고 하였다. 등명사는 조선 중기에 폐사(廢寺)되었다. 당시 심한 눈병에 걸린 조선의 왕이 점술가에게 물어보니 정동(正東) 바닷가에 있는 큰 절에서 씻은 쌀뜨물이 동해로 흘러 들어가 용왕이 노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왕의 사신이 원산(元山)을 거쳐 배편으로 동해 정동에 와서 보니 점술가의 말이 맞는지라 등명사를 폐사로 만들었다고 한다.
등명사는 오랫동안 폐사되었다가 1956년 경덕(景德)에 의해 중창되었다. 중창주 경덕(景德)은 천일 동안의 관음기도 끝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절 이름을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을 본따 낙가사로 정하고, 옛 이름 '등명'을 앞에 붙여서 등명낙가사라 명명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강릉부 동쪽 30리에 등명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등명사의 유래도 전하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절은 강릉도호부에서 어두운 방의 등불과 같은 존재이고, 여기서 공부하는 사람이 밤 11시~새벽 1시경 산에 올라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빨랐다는 것이다.
등명낙가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현존 당우로는 만월보전(滿月寶殿), 영산전(靈山殿), 극락보전(極樂寶殿), 약사전(藥師殿), 삼성각(三聖閣), 범종루(梵鐘樓), 소림선원(少林禪院), 전등선원(傳燈禪院), 요사 등이 있다. 최근에 건립된 2층 누각과 문에는 아직 편액(扁額)을 걸지 않았다. 문화재로는 등명사지오층석탑(燈明寺址五層石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이 있다.
등명낙가사 근처에는 고려성지(高麗城址)가 있다. 고려시대에 등명사의 중요한 물품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창고를 짓고, 그 주위에 석성을 쌓았다고 한다. 규모는 사방 1㎞ 정도이다. 성의 규모로 보아 등명사는 당시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괘방산 등명낙가사 일주문 구역
등명낙가사 경내는 일주문(一柱門) 구역, 영산전 구역, 만월보전 구역 등 세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일주문 구역에는 삼층석탑, 일주문, 용구상(龍龜像), 부도전(浮屠田), 무명문(無名門), 등명감로약수(燈明甘露藥水) 등이 있다.
등명낙가사 일주문
등명낙가사 일주문
일주문 편액
일주문 천정
용구상
최근에 세운 듯 단청이 선명한 일주문은 용을 새긴 돌기둥 위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천정에 살고 있는 청룡과 황룡은 사나운 표정으로 일주문을 호위하고 있었다. 일주문 한가운데에는 '대한민국정동'이라고 새긴 원주석(圓柱石) 위에 바늘이 동쪽을 가리키고 있는 나침반이 놓여 있었다. 일주문 앞에는 배불뚝이 화상의 입상과 동자승들에 둘러싸인 배불뚝이 화상의 좌상, 옆에는 거북의 등 위에 여러 마리의 용이 뒤엉켜 있는 용구상을 배치하였다.
배불뚝이 화상은 중국 오대(五代)시대 후량(後梁)의 고승(高僧)인 포대화상(布袋和尙)일 것이었다. 명주(明州) 봉화(奉化) 사람인 포대화상은 스스로 계차(契此)로 일컬었고, 호는 장정자(長汀子)이다. 몸은 뚱뚱하고, 긴 눈썹에 배가 불룩 튀어나왔다. 일정한 거처가 없이 항상 긴 막대기에 포대 하나를 걸치고 다니며 동냥을 하면서 어려운 중생들을 돌봐주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를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화신(化身)으로 여겼다. 중국 민간에서는 포대화상을 혜비수(惠比壽), 대흑천(大黑天), 비사문천(毗沙門天), 수노인(壽老人), 복록수(福祿壽), 변재천(弁才天)과 함께 칠복신(七福神)으로 받들고 있다.
일주문 처마에 걸려 있는 '掛榜山燈明洛迦寺(괘방산등명낙가사)' 편액은 태극서체(太極書體)를 창안한 서예가 초당(艸堂) 이무호(李武鎬)의 글씨다. 일주문 현판식은 2006년 10월 28일에 있었다. 강원도 고성군 건봉사(乾鳳寺) 봉서루(鳳棲樓)에 걸려 있는 '金剛山乾鳳寺(금강산건봉사)' 편액 글씨도 이무호의 작품이다.
등명낙가사 부도전
눈이 쌓인 부도전에는 향봉선사(香峰禪師)와 경덕선사(景德禪師)의 부도, 청신녀(淸信女) 박진여심(朴眞如心) 보살 사리탑 등 5기의 부도가 있었다. 부도밭을 보면 그 절의 역사와 사풍(寺風)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절에 갈 때마다 부도밭을 먼저 찾는다.
등명감로약수
등명감로약수는 일주문 바로 뒤에 있다. 이 약수는 영산전에 청자(靑磁)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조성한 후 발견되었다고 한다. 국립보건원이 조사한 성분 분석표에는 철분 44mg/kg, 황산염 500mg/kg, 알루미늄 200mg/kg, 유리산도 80mg/kg, PH는 4.1로 나와 있다. 약수 맛을 보니 탄산도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성분 분석표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약수터 앞에는 등명약수의 효능을 적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등명약수를 마시면 빈혈과 출혈증, 신경쇠약, 신경통, 소화불량 등에 좋다고 한다. 등명약수로 목욕을 하면 만성피부염과 무좀, 습진 등 피부질환, 류마티스성 신경통, 수족다한증, 여러 가지 부인병에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맹신은 금물이다.
등명낙가사 무명문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문에는 단청만 칠해져 있고, 편액은 걸려 있지 않았다. 문의 형태로 볼 때 금강문(金剛門)이나 사천왕문(四天王門)보다는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해탈문(解脫門)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젠가 등명낙가사에 다시 오게 되면 이 문의 편액을 꼭 확인해 보리라.
등명낙가사 불이문
불이문 편액
일주문 구역에서 영산전 구역으로 들어가려면 불이문(不二門)을 통과해야 한다. 불이(不二)란 불중생(佛衆生), 승속(僧俗), 선악(善惡), 유무(有無), 청오(淸汚) 등 상대적 개념에 대한 모든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不二門(불이문)' 편액 글씨도 이무호의 작품인데, 서체가 다소 특이했다. 한학자인 지인에게 불이문 편액 글씨를 보여 주었더니 '전서체(篆書體)와 예서체(隸書體)를 섞고 변형해서 무슨 서체라고 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등명낙가사 영산전 구역
불이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영산전 구역이다. 이 구역에는 영산전을 비롯해서 극락보전, 삼성각, 범종루, 5층석탑, 종무소 등이 있다. 영산전 뒤에는 괘방산이 병풍처럼 솟아 있다.
등명낙가사 영산전
영산전 편액
등명낙가사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전각인 영산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계 양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다. 영산전에는 솟을살문을 달았다. 솟을살문은 격자살과 빗살을 홉용한 것으로 격자빗살문이라고도 한다. 솟을살문에 꽃무늬가 있으면 솟을꽃살문, 없으면 솟을민꽃살문이다.
영산전은 석가모니(釋迦牟尼)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시기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화(八相幀畫)를 봉안한 법당이다. 영산은 석가모니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법화경)을 설했던 불교 성지(聖地) 영취산(靈鷲山)의 준말로 영산불국(靈山佛國)을 상징한다. 따라서 영산전 참배는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불국토인 영산회상(靈山會上)에 참배하는 것이 된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하기에 팔상전(捌相殿)이라고도 한다.
영산전 처마에 걸려 있는 '靈山殿(영산전)' 편액 글씨는 창해(滄海) 김창환(金昌煥)의 작품이다. 김창환은 '龍(용)'자를 많이 쓴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영산전 석가모니오존불
영산전 오백나한상
영산전 오백나한상
영산전 중앙 불단에는 현세불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는 과거세불인 제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과 미래세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 좌상(坐像), 뒤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 입상(立像)을 봉안했다. 생소한 이름의 제화갈라보살은 연등불(燃燈佛), 보광불(普光佛), 정광불(錠光佛), 제원갈(提洹竭)이라고도 한다.
불상 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걸려 있다. 영산회상도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과 십대 제자, 사천왕 등이 묘사되어 있다.
불상의 좌우에는 청자(靑磁)로 만든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안치했다. 청자 오백나한상은 인간문화재 해강(海剛) 유근형(柳根瀅)이 3년 6개월의 제잗 기간을 거쳐 1977년 10월에 모신 것이다. 500구의 나한상은 옛부터 전승되어 오던 나한도(羅漢圖)에 근거해서 만들었기에 같은 형상이 단 한 구도 없고 각기 서로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원래는 부처와 여래의 10가지 명호인 여래10호(如來十號) 또는 불10호(佛十號) 가운데 하나였다. 즉, 나한은 부처 또는 여래의 지위를 증득한 사람에 대한 호칭이었다.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에는 석가모니에 대한 존경심이 커져서 부처와 수행자로서의 아라한을 구분하게 되었다. 이후 성문(聲聞)의 4향4과(四向四果)의 최고위인 아라한향(阿羅漢向),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사람을 통칭하여 아라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한은 곧 일체의 번뇌를 끊고 끝없는 지혜를 얻어서 인간과 하늘 중생들로부터 공양을 받는 성자인 것이다.
영산전 104위 화엄신중탱화
영산전 지장탱화
영산전 남쪽 벽에는 104위 화엄신중탱화(華嚴神衆幀畵)와 지장탱화(地藏幀畵)를 봉안했다. 신중탱화(神衆幀畵)는 화엄신중신앙(華嚴神衆信仰)에 바탕을 두고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을 묘사한 불화이다. 신중탱화의 호법신들은 불교의 신중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의 신들도 많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토착신앙을 불교가 수용한 결과이다.
104위 화엄신중탱화는 상단, 중단, 하단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상단 신중에는 대예적금강(大穢跡金剛)과 8대금강(八大金剛), 4대보살(四大菩薩), 10대광명(十大光明) 등이 들어간다. 대예적금강은 금강야차명왕(金剛夜叉明王)과 동등한 신격(神格)을 가진 명왕(明王)이다. 8대금강은 청제재금강(靑除災金剛), 벽독금강(碧毒金剛), 황수구금강(黃隨求金剛), 백정수금강(白淨水金剛), 적성화금강(赤聲火金剛), 정제재금강(定除災金剛), 자현신금강(紫賢神金剛), 대신력금강(大神力金剛) 등이다. 4대보살은 미륵보살(彌勒菩薩)과 문수보살(文殊菩薩), 관음보살(觀音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이다.
중단 신중에는 대범천(大梵天), 제석천(帝釋天), 사대천왕(四大天王), 공덕천(功德天), 위태천(韋駄天) 등의 천신(天神), 용왕(龍王), 야차(夜叉), 건달바(乾達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睺羅伽) 등 팔부신중(八部神衆)과 칠원성군(七元星君), 삼태육성(三台六星), 모신(母神), 수신(水神) 등이 배치된다. 대범천은 불교의 33천(天) 중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왕이고, 제석천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하늘인 도리천(忉利天)의 주인으로 수미산 중턱의 사천왕을 거느리고 불법과 불제자를 보호한다. 사대천왕은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 毘沙門天王)을 말한다. 공덕천은 다문천왕의 비(妃)로 복덕을 베푼다는 여신(女神)이다. 길상천(吉祥天)이라고도 한다. 위태천은 사천왕 중 증장천왕이 거느린 8대장군의 하나로 동자(童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한다.
칠원성군은 북두칠성(北斗七星, 北斗)을 신격화한 것이다. 북두 제1성 천추성(天柩星)은 탐랑성군(貪狼星君) 운의통증여래불(運意通證如來佛), 북두 제2성 천선성(天璇星)은 거문성군(巨文星君) 광음자재여래불(光音自在如來佛), 북두 제3성 천기성(天機星)은 녹존성군(祿存星君) 금색성취여래불(金色成就如來佛), 북두 제4성 천권성(天權星)은 문곡성군(文曲星君) 최승길상여래불(最勝吉祥如來佛), 북두 제5성 옥위성(玉衛星)은 염정성군(廉貞星君) 광달지변여래불(廣達智辯如來佛), 북두 제6성 개양성(開陽星)은 무곡성군(武曲星君) 법해유희여래불(法海遊戱如來佛), 북두 제7성 요광성(搖光星)은 파군성군(破軍星君) 약사유리광여래불(藥師琉璃光如來佛)이다.
삼태성(三台星)은 큰곰자리에 속한 별로 자미성(紫微星)을 지키는 상태성(上台星), 중태성(中台星), 하태성(下台星)을 말한다. 삼태성은 자식을 점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육성(六星)은 궁수자리에 속한 여섯 개의 별로 남두육성(南斗六星, 南斗)이라고도 한다. 도교에서 남두는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신격화한 남극장생대제(南極長生大帝)의 통치 아래에 6부가 있는 큰 관청으로 여겨진다. 주로 인간의 수명과 운명을 관장한다는 별이다.
하단 신중에는 호계신(護戒神), 토지신(土地神), 도량신(道場神), 가람신(伽藍神), 방위신(方位神), 산신(山身), 강신(江神), 몽신(夢神), 목신(木神), 축신(畜神) 등이 묘사된다. 호계신은 부처의 계율을 지키는 선신이다. 삼귀의(三歸依)를 받은 사람은 36부(部)의 선신이 지키고, 오계(五戒)에도 각각 다섯 신이 있어 오계를 받은 사람을 지킨다고 한다. 토지신은 절의 경내를 지키는 신이다. 도량신은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의 도량을 지키는 정장엄당도량신(淨莊嚴幢道場神), 수미보광도량신(須彌寶光道場神), 뢰음당상도량신(雷音幢相道場神), 우화묘안도량신(雨華妙眼道場神), 화영광계도량신(華纓光髻道場神), 우보장엄도량신(雨寶莊嚴道場神), 용맹향안도량신(勇猛香眼道場神), 금강채운도량신(金剛彩雲道場神), 연화광명도량신(蓮華光明道場神), 묘광조요도량신(妙光照曜道場神) 등 10위의 신을 가리킨다.
가람신은 호가람신(護伽藍神), 수가람신(守伽藍神), 사신(寺神)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당송(唐宋) 시대의 선사(禪寺)에서 유래한 신이다. 칠불팔보살다라니신주경(七佛八菩薩陀羅尼神呪經)에는 18가람신들이 나온다. 가람신의 상은 도교의 복장을 하고 있어,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방위신은 오방을 지키는 오방신장(五方神將)으로 동방청제(東方靑帝), 서방백제(西方白帝), 남방적제(南方赤帝), 북방흑제(北方黑帝), 중앙황제(中央黃帝)를 말한다. 산신은 산, 강신은 강, 몽신은 꿈, 목신은 나무, 축신은 짐승을 각각 수호한다.
신중탱화는 신앙적 기능에 따라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 대예적금강을 중심으로 하는 신중탱화이다. 대예적금강신중은 전체 탱화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왼쪽에는 제석천, 오른쪽에는 대범천, 그 아래에는 동진보살, 그리고 그 주위에는 성군(星君), 명왕(明王), 천녀(天女) 등을 도상화한다. 둘째, 제석천과 대범천,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신중탱화이다. 이 탱화의 특징은 왼쪽 천상(天像)을 중심으로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제석천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탱화이다. 모든 신중을 제석의 주위에 배치하기에 제석탱화(帝釋幀畵)라고도 한다. 제석탱화는 무장하지 않은 보살이나 왕의 모습으로만 표현되는 것과 무장한 신장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넷째,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신중탱화이다. 신장만을 묘사하기 때문에 신장탱화(神將幀畵)라고도 한다. 신장탱화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 팔부신장, 오른쪽에 십이지신장(十二支神將)을 도상화한다.
등명낙가사 영산전의 지장탱화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묘사했다. 지장탱화는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을 도상화한 불화로 사찰의 명부전(冥府殿)에 많이 봉안된다. 지장탱화는 지장보살과 좌우보처(左右補處)인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중심으로 명부시왕(冥府十王)과 사자(使者), 장군(將軍), 졸사(卒使), 방위신, 사천왕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장탱화는 지장독존도(地藏獨尊圖), 지장삼존도(地藏三尊圖), 지장삼존신중도(地藏三尊神衆圖),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등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지장독존도는 고려나 조선 초기에 많았으며, 대부분이 입상(立像)이다. 흔히 두건을 쓰고 석장(錫杖)을 짚거나 여의주를 들고 있다. 지장삼존도는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을 근거로 하여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는 탱화이다. 등명낙가사 지장탱화는 지장삼존도라고 할 수 있다.
지장삼존신중도는 지장삼존 외에 관세음보살과 용수보살(龍樹菩薩), 다라니보살(陀羅尼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 중 2~4명의 보살을 배치하고, 제10 전륜대왕(轉輪大王)과 사천왕, 대범천(大梵天), 제석천(帝釋天)을 호법신중으로 묘사한 것이다.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협시, 명부시왕(冥府十王)과 판관 등을 도상화한 탱화이다. 지장신앙과 시왕신앙이 혼합된 것이다.
고려시대의 지장탱화는 지장보살의 권속들을 본존인 지장보살상의 대좌(臺座) 아래쪽 좌우에 배치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여러 존상의 배열이 위쪽으로 올라온다는 특징이 있다. 지장탱화는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지장신앙의 순수성이 감소되고 시왕신앙이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선시대의 지장시왕도에서 지장보살이 육도(六道)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육도에 각각 나타나는 육지장(六地藏, 六光菩薩)으로 많이 묘사되는 점도 고려 불화와 다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지장보살이 두건(頭巾)을 쓴 형태가 약간 많았다면, 후기에는 머리를 깎은 승형(僧形)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등명낙가사 지장탱화의 지장보살은 두건을 쓰고 있다. 인계(印契)는 왼손에 석장을 짚고 오른손에 보주(寶珠)를 잡은 형식, 왼손에 석장이나 구슬을 잡고 오른손은 둘째와 셋째 손가락 끝을 가슴에 대어 올린 형태, 두 손 모두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대어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들었으며 석장은 도명존자가 대신 가지고 있는 형태 등 다양하다. 등명낙가사 지장탱화의 지장보살은 왼손에 석장,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지장탱화 중 대표적인 작품에는 일본 닛코사(日光寺) 소장 지장시왕도와 독일 베를린동양미술관 소장 지장시왕도, 일본 세이카당(靜嘉堂) 소장 지장시왕도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작품에는 일본 고메이사(光明寺) 소장 지장시왕도(1562년)와 일본 사이호사(西方寺) 소장 지장시왕도(1500년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공산 북지장사(北地藏寺) 지장탱화(1725년), 고성 옥천사(玉泉寺)의 지장시왕도(1744년), 영천 은해사 운부암의 지장탱화(1747년) 등이 있다.
영산전 천수천안관음탱화
영산전 감로탱화
영산전 북쪽 벽에는 천수천안관음탱화(千手千眼觀音幀畵)를 봉안했다. 금니(金泥)로 그린 이 탱화는 눈이 부시도록 장엄화려하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 천수관음)은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이 한없이 광대무변함을 강조하여 인격화한 변화관음(變化觀音)이다. ‘천(千)’은 '무량, 원만', ‘천수(千手)’는 '자비의 광대함', ‘천안(千眼)’은 '지혜의 원만, 자재함'을 나타낸다. 천수천안은 천의 손 하나하나에 눈이 있어 중생의 괴로움을 보고, 그 손으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염원을 상징한다. 천수관음은 6관음(六觀音)의 하나로 천수천안관자재보살(千手千眼觀自在菩薩), 천비천안관음(千臂千眼觀音), 대비관음(大悲觀音)이라고도 한다.
그림에서는 천수와 천안을 다 묘사하기 어렵기 때문에 흔히 좌우 두 손 외에 한쪽에 20개씩 모두 40개의 손을 표현한다.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지옥에서 천상까지 25단계이므로 하나의 손이 25단계의 중생을 구제한다고 보면 천수(千手)가 된다. 또, 40개의 손에는 각각 눈이 표현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눈이 25단계의 중생을 구제한다고 생각하면 천안(千眼)이 된다. 등명낙가사 천수천안관음탱화는 좌우 세 쌍의 손 외에 천수와 천안이 하나하나 다 표현되어 있다. 참으로 대단한 공력이다.
천수천안관음탱화 바로 옆에는 감로탱화(甘露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감로탱화는 수륙재(水陸齋)나 우란분재(盂蘭盆齋) 같은 천도재(薦度齋)에 쓰이는 불화이다. 천도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아귀(餓鬼)에게 감로(甘露)를 베푼다는 뜻에서 감로도(甘露圖) 또는 감로왕도(甘露王圖)라고 한다.
영산전 감로탱화의 상단에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보승여래(寶勝如來), 묘색신여래(妙色身如來),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 이포외여래(離怖畏如來),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등 7여래(七如來)를 중심으로 그 왼쪽에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을 도상화하였다. 인로왕보살은 망자의 영혼(靈魂)을 접인(接引)하여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감로탱화 앞에는 향봉대선사(香峰大禪師)와 영해당(靈海堂) 경덕대선사(景德大禪師)의 영정과 위패가 놓여 있어 탱화의 중단과 하단의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감로탱화의 중단에는 일반적으로 음식이 가득 차려진 재단(齋壇)과 법회(法會) 장면이 묘사된다. 하단에는 장발에 험상궂은 모습을 한 두 아귀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윤회를 반복해야 하는 중생계와 고혼(孤魂)이 된 망령(亡靈)들의 살아생전 모습이 다양하게 도상화된다. 하단에는 또 무녀(巫女)가 굿을 하는 장면, 대북과 날라리, 바라 등을 연주하는 승려들을 표현하기도 한다.
두 아귀상은 아귀도에 빠진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화현한 비증보살(悲增菩薩)과 지증보살(智增菩薩)로도 본다. 비증보살은 이타(利他)의 선근과 자비의 선근이 많은 보살로 육도 윤회의 세계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해 속히 성불하기를 원하지 않는 보살이다. 지증보살은 지혜를 닦고 번뇌를 끊으며,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리(自利)의 선근은 많지만 이타(利他)의 선근이 적은 보살이다.
감로탱화는 도설의 내용상 상단, 중단, 하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단은 불보살의 세계, 중단은 재단과 재의식 장면, 하단은 아귀 등 육도 중생과 죄업을 짓는 망자의 생전 모습이 묘사된다. 이처럼 감로탱화는 각 단계마다 설정된 주제가 있다. 즉, 과거(하단)에서 현재(중단), 현재에서 미래(상단)로 상승하는 삼세 여행이 도설로 묘사되어 있다. 감로탱화는 지옥도에서 헤매는 중생들이 재의식(齋儀式)을 행하면 그 공덕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정토신앙(淨土信仰)과 밀교신앙(密敎信仰)이 바탕에 깔려 있는 감로탱화는 특히 조선시대에 많이 그려진 불화이다. 감로(甘露)는 천신(天神)들이 마시는 음료 또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로 곧 부처의 은덕을 뜻한다. 감로는 아귀의 목구멍을 열어주어 배고픔의 고통을 벗어나게 한다는 믿음이 있다.
배고픔의 고통을 받고 있는 아귀는 또한 배고픔의 고통을 받고 있는 죽은 조상을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아귀는 억울하게 죽어서 해원(解寃)해야 할 모든 고혼(孤魂)을 상징하며, 육도 중생의 고통을 한몸에 짊어진 존재이다. 그래서, 감로탱화를 고혼탱화(孤魂幀畵)라고도 한다.
등명낙가사 극락보전
극락보전 편액
등명낙가사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극락전에는 연꽃과 잎, 줄기 무늬가 화려한 꽃나무살문을 달았다. 꽃나무살문은 꽃나무를 통째로 새겨서 짜는 문이다.
극락전(極樂殿)은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의 주재자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 전각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극락정토신앙이 널리 유행하여 사찰 건물 중 대웅전(大雄殿) 다음으로 많은 것이 극락전이다. 극락전은 한국 불교에서 대웅전, 대적광전(大寂光殿)과 함께 3대 불전에 꼽힐 만큼 중요한 전각이다. 등명낙가사 극락보전의 편액은 낙관이 없어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가 없다.
아미타는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를 한문으로 음역한 것이고, 의역하면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이다.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등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비구(比丘)였다. 법장은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48대원(大願)을 세우고 오랜 수행 끝에 마침내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으로부터 10겁(劫) 전에 성불하여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48대원 가운데 12번째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3번째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에 아미타불의 본질이 잘 드러나 있다. 누구든지 지극한 신심으로 자신의 명호만 염(念)하면 극락왕생(極樂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한 18번째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의 수명은 한량없어 백천억 겁으로도 헤아릴 수 없어서 무량수불(無量壽佛), 광명 또한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춘다고 해서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극락전을 무량수전(無量壽殿), 무량전(無量殿) 또는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고도 한다. 아미타전(阿彌陀殿)은 이 부처의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머물기에 극락전을 서쪽에 동향으로 세우고, 아미타불상도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도록 봉안한다. 따라서 아미타불상 앞에서 기원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극락세계가 있는 서쪽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등명낙가사 극락보전이나 김천 직지사(直指寺) 극락전이 바로 그런 경우다.
아미타전의 대표적인 건물인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은 전각이 남향이고, 아미타불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강진의 무위사(無爲寺) 극락전(국보 제13호)이나 부여 무량사(無量寺) 극락전(보물 제356호) 등도 같은 경우이다.
극락보전 정면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을 음미하다. 앞 두 구절은 아미타불에 대한 찬송, 뒤 두 구절은 누구든 아미타불을 일념으로 염송하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極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극락보궁 앞 보름달 같은 아미타불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금빛 몸 옥호 광명 온세상 비추이네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누구든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염하면
頃刻圓成無量功(경각원성무량공) 찰나에 무량공덕 원만하게 이루리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
극락보전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脇侍)로 모셨다. 지장보살 대신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협시로 두기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로써 중생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널리 비추어 삼도고(三道苦)를 없애 주며,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으로 인도한다.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지장보살은 고려시대 이후 정토신앙이 성행하면서 아미타불의 협시로 등장하였다. 아미타불상은 경주 불국사(佛國寺)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27호),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아미타여래좌상(塑造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45호)이 유명하다.
아미타삼존불 뒤에는 후불탱화로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를 봉안했다. 극락회상도는 정토삼부경을 토대로 아미타불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불화이다. 극락회상도에는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 극락래영도(極樂來迎圖), 관경변상도(觀境變相圖),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등이 있다.
등명낙가사 극락보전의 후불탱화는 아미타설법도이다. 아미타설법도는 아미타불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영산회상도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아미타불의 수인과 좌우 보처보살상(補處菩薩像)만 조금 차이가 날 뿐이다. 아미타불의 수인은 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이나 설법인(說法印, 전륜법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주로 취한다.
아미타정인
극락보전 주불단 위에는 지붕이 2층으로 된 웅장한 천개(天蓋, 닫집)를 달았다. 닫집에는 용(龍)과 극락조(極樂鳥), 연꽃 등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했다. 기둥과 천장에도 단청을 했다.
극락보전 신중탱화
극락보전의 한쪽 벽에는 신중탱화가 걸려 있다. 극락보전의 신중탱화는 화면을 중앙의 대예적금강, 그 오른쪽의 동진보살, 왼쪽의 제석천과 대범천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삼면팔비상(三面八臂像)의 대예적금강은 화면 중앙의 1/3을 차지하고 있다. 대예적금강은 예적명왕(穢跡明王)이라고도 한다. 험상궂게 생긴 상호에 이빨은 흡혈귀처럼 송곳니가 길쭉하며, 여러 마리의 독사가 목과 허리를 칭칭 감고 있다. 좌우 4쌍의 손에는 여덟 개의 법구(法具)를 가지고 있으며, 활활 타오르는 후광을 가진 신중이다. 모든 마귀와 외도(外道)가 대예적금강을 보면 두렵고 놀라서 달아나 버린다고 한다.
대에적금강의 오른쪽 화면에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신중이 묘사되어 있다. 동진은 천진난만한 동자의 참된 성품, 동진보살은 천진난만함을 그 본성으로 하는 보살을 뜻한다. 동진보살은 초선천(初禪天)의 범왕(梵王)이라는 설과 천신인 위태천(韋駄天)이라는 설이 있다. 초선천의 범왕은 얼굴이 동자를 닮았고, 항상 닭을 받들고 방울을 들었으며, 붉은 번(幡)을 가지고 공작을 타고 있다고 한다. 밀교의 만다라에서는 대자재천(大自在天)의 아들이라 하여 태장계(胎藏界) 외금강부(外金剛部)에 그린다. 위태천은 위타천(韋陀天), 위천장군(韋天將軍), 위태천신(韋汰天神)이라고도 한다. 4왕천(四王天) 중 남방 증장천(增長天)의 8장군 중 하나이며, 32천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당나라 때 율사 도선(道宣)이 위태천을 만난 뒤부터 사찰에 모시게 되었다.
대예적금강의 왼쪽 화면에는 제석천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신중이 표현되어 있다. 제석천과 대범천은 104위 화엄신중탱화에서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등명낙가사 삼성각
삼성각 편액
범종루 뒤편 가장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 양식의 작은 건물이다.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는 전각이다. 삼성각 편액 글씨는 석주 정일(昔珠正一) 전 조계종 총무원장의 작품이다.
삼성각 칠성탱화
등명낙가사 삼성각에는 칠성탱화(七星幀畵, 칠성도)와 독성탱화(獨聖幀畵, 독성도), 산신탱화(山神幀畵, 산신도) 외에 용왕탱화(龍王幀畵, 용왕도)가 하나 더 봉안되어 있다. 등명낙가사가 바닷가에 있기 때문에 용왕도를 모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중단과 상단에는 칠불(七佛), 하단에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하였다.
칠원성군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신격화한 것으로 도교적 민간신앙을 불교에서 수용한 것이다. 북두칠성은 칠여래(七如來)의 화현(化現)이기도 하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재물, 재능 등을 관장하며, 농경시대에는 비를 내리는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칠성신은 각각 북두제일(北斗第一) 자손만덕(子孫萬德) 탐낭성군(貪狼星君), 북두제이(北斗第二) 장난원리(障難遠離) 거문성군(巨門星君), 북두제삼(北斗第三) 업장소제(業障消除) 녹존성군(祿存星君), 북두제사(北斗第四) 소구개득(所求皆得) 문곡성군(文曲星君), 북두제오(北斗第五) 백장진멸(百障殄滅) 염정성군(廉貞星君), 북두제육(北斗第六) 복덕구족(福德具足) 무곡성군(武曲星君), 북두제칠(北斗第七) 수명장원(壽命長遠) 파군성군(破軍星君) 등 맡은 바 그 역할이 있다. 요약하면 칠성신은 수복강녕(壽福康寧)과 재물의 신이다.
불교에서 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을 신격화한 것이다. 도교에서는 이 별을 자미대제(紫微大帝)로 신격화했다. 옛날에는 북극성이 모든 천체의 중심으로 여겨졌으며, 이 별에서 신령스런 빛이 나온다고 해서 치성광(熾盛光)이라고 한다. 치성광여래를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고도 한다. 일광변조소재보살(日光遍照消災菩薩, 일광보살)은 해, 월광변조소재보살(月光遍照消災菩薩, 월광보살)은 달을 각각 신격화한 것이다. 치성광여래는 일월성수(日月星宿)를 권속으로 삼아 털구멍에서 치성광을 내뿜어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주며, 무병장수하고, 자손을 번성하게 한다. 이는 약사불과 그 역할이 비슷하다. 그래서 자식이 없거나 아들을 낳고자 하는 여자, 자녀의 수명을 기원하는 이들이 치성광여래를 많이 믿었다.
칠성탱화는 보통 치성광여래와 일광여래, 월광여래 삼존불을 중심으로 상단에 칠여래, 하단에 칠원성군, 그리고 좌우에 삼태, 육성, 이십팔수(二十八宿)를 도상화한다. 칠원성군의 중앙에 자미대제를 도설하는 경우도 있다. 칠원성군은 보통 도사상으로 그려진다.
칠성신만 봉안한 전각을 칠성각(七星閣) 또는 북두각(北斗閣)이라고 한다.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이다. 칠성각은 초기 불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조선시대 중기부터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칠성각에는 삼존불과 칠여래, 칠성신 등이 함께 봉안된다.
삼성각 독성탱화
독성단의 독성도는 폭포수가 흐르는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낙락장송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독성이 앉아 있다. 머리털은 주변머리만 남아 있는 벗겨지고, 짧은 수염이 덥수룩하다. 속이 비치는 꽃무늬 항라(亢羅) 바지에 황금색 무늬가 수놓인 붉은색의 천을 두르고, 왼손에는 염주를 쥐고 있다. 옥빛 두광은 깨달음을 얻은 성자임을 나타낸 것이다. 시자는 세 명의 동자(童子)가 등장한다. 한 명은 차를 끓이고, 한 명은 과일을 공양하고 있다. 또 한 명은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우거진 숲 뒤에는 작은 집이 보일 듯 말 듯 앉아 있다. 향 연기가 피어오르는 금향로, 상서로운 한쌍의 학과 한쌍의 사슴은 이곳이 신성한 공간임을 상징한다.
독성존자를 묘사한 독성탱화를 불교에서는 독수성탱(獨修聖幀) 또는 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고도 하며, 보통 16나한도(十六羅漢圖)와 같은 구도법으로 그린다. 독성탱화에는 보통 산과 소나무, 구름 등을 배경으로 삭발 머리에 길고 흰 눈썹을 가진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위에 정좌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종종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독성은 스승 없이 독수선정(獨修禪定)으로 진리를 깨달아 부처의 반열에 오른 성자다. 그래서 독성을 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한다. 독성은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독성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불교에서는 나반존자(那畔尊者)가 독성이라고 주장한다. 나반존자는 옛날 천태산에서 스승 없이 홀로 도를 닦아 무상 진리의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독성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나반존자가 부처 없는 세상에 태어나 미륵불(彌勒佛)의 용화세계(龍華世界가 도래할 때까지 현세에 머물며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역할을 맡은 존재라고 믿는다.
독성을 환웅(桓雄)이나 단군(壇君)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독성이 단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불교의 나반존자는 우리나라의 토착 민족신앙을 수용하여 새로운 신앙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불교와 민족신앙의 결합으로 독특한 독성신앙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불교가 핍박받던 말법의 시대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말법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는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였다. 나반존자는 불자들 사이에 매우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독성기도를 많이 올리고 있다.
삼성각 산신탱화
산신도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아름드리 낙락장송 아래 호랑이의 등에 걸터앉아 있는 백발 수염의 산신을 도상화하였다. 또 한 마리의 호랑이는 산신 곁을 지키고 앉아 있고, 붉은색 바탕에 청색과 녹색으로 장식한 옷을 입은 산신은 손에 흰색 긴 털로 만든 채를 잡고 있다. 호랑이 뒤에는 시봉하는 동남(童男) 동녀(童女) 한쌍도 등장한다. 동자가 들고 있는 주장자에는 다구가 걸려 있다. 소나무에는 신성한 운지(雲芝)가 자라고 있고, 산신 뒤에는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린 복숭아나무도 표현되어 있다.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동녀는 산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동남은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 복숭아가 탐이 나는 것일까?
산신은 불법 수호의 서원을 세운 호법선신(護法善神) 중 하나인 산왕대신(山王大神)으로 흔히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산신은 가람 수호신이자 산중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산신은 옛날 농경민들에게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하는 강우신(降雨神)이나 풍산신(豊産神), 유목민 또는 수렵민들에게 사냥감을 풍성하게 내리는 신으로 여겨졌다. 산신은 또 인간에게 아이를 점지해 주고, 악귀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칠성과 마찬가지로 산신도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수용된 것이다. 도교(道敎) 또는 선교(仙敎)에서 유래한 산신은 무속(巫俗)의 대표적인 신이기도 하다. 또,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산악숭배신앙이 강했다. 백제의 산신신앙을 비롯해서 신라에는 오악삼산신(五岳三山神)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악신(四岳神)과 산천신(山川神)을 매우 중요시하여 조정에서 제사를 관장하기도 했다.
산중의 왕은 호랑이였고, 사람들은 호랑이를 산의 신령이라 믿었다. 그래서 산신도에서 산신의 모습은 호상(虎像)과 신선상(神仙像)으로 나타난다. 신선은 바로 호랑이의 변화신(變化身)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내고, 호랑이를 신으로 섬긴다'는 기록처럼 이미 고대로부터 산신의 형상을 호상이나 신선상으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산신에게 제사하는 산제(山祭) 또는 산신제(山神祭)는 무속에서는 매우 중요한 행사다. 산에 묘지를 쓸 때 산신에게 고하는 예식은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산악회나 등산동호회에서는 매년 연초에 산신에게 안전한 산행을 비는 시산제(始山祭)를 지낸다. 심마니들도 산에 들어가기 전에 대물 점지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린다. 산신신앙은 이처럼 우리 민중들 사이에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산신도를 봉안하는 산신각(山神閣)은 대부분 조선 중기 이후에 나타나고 있다. 현존하는 산신도도 조선 후기 이전의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로 보아 사찰에 산신도를 봉안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이후임을 알 수 있다. 산신도는 일반적으로 백발이 성성한 신선과 호랑이가 친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맹수인 호랑이를 용감하고 위엄있게 그리기보다는 해학적으로 묘사한 그림이 많다. 때로는 백발수염의 신선 옆에 고양이처럼 귀엽고 우스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조선시대 민화에서도 호랑이는 친근하고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많이 그려졌다. 산신도의 호상도 조선시대 민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수입 종교다. 칠성신앙과 산신신앙은 불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신앙이었다. 이질적인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기존의 토착신앙과 모순과 갈등이 생기면서 신앙투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시대는 국가적으로 배불정책을 시행하던 시대였다.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당시 민중들의 광범위한 신앙의 대상이었던 칠성과 산신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토착신앙을 수용한 결과 불교는 살아남아 세계 3대 종교가 되었고, 오랜 기간 한반도의 주류 신앙이었던 칠성과 산신은 불교 사찰의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포용력은 불교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이다.
삼성각 용왕탱화
용왕탱화(龍王幀畵, 용왕도)는 물을 관장하는 용을 의인화하여 신앙대상으로 표현한 불화이다. 하늘을 나는 비룡(飛龍), 넘실거리는 바닷물결은 이곳이 용궁임을 상징한다. 옥좌에 앉은 용왕의 복식은 매우 화려하고 위엄이 있어 보인다. 불꽃처럼 생긴 백발 수염은 용의 수염을 닮은 것이 특징이다. 두건을 쓴 머리에는 서책이 끈으로 묶여 있다. 시녀는 불보살처럼 수인을 취하고 있고, 신하는 문서를 받들고 있다. 동자는 용궁 밖을 바라보고 있다.
용은 물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수신(水神)으로 예로부터 한민족의 숭배를 받아왔다. 용신(龍神)은 물고기를 다스리고 파도를 주관하는 도교의 사해용왕(四海龍王)의 영향으로 형성된 관념이다. 용왕신앙은 우리 민족의 토착신앙인 수신과 도교의 용신을 불교가 수용하여 탄생한 것이다. 용왕은 우신(雨神), 방화신(放火神), 해신(海神)으로서 우리 민족의 숭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수호신, 왕가의 조상신으로서 왕실 차원의 제향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용은 신라시대부터 호법신(護法神), 호국신(護國神)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팔관회(八關會)는 천령(天靈), 오악(五岳), 명산(名山), 대천(大川)과 함께 용신을 섬겨 국운의 흥성을 기원하는 행사였다. 용왕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는 용왕도량(龍王道場)은 신라 진평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운우경(雲雨經), 용왕경(龍王經) 등의 불교경전에 따라 사찰이나 왕궁, 또는 선상(船上)에서 용왕도량을 자주 개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기우제를 지낼 때 용을 그려서 행했다. 이처럼 용신신앙(龍神信仰)은 우리 민족에게 매우 뿌리깊은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용왕도 또는 용신도(龍神圖)는 산신도와 함께 도교, 불교 뿐만 아니라 무격신앙(巫覡信仰)에서도 매우 중요한 종교화이다. 오늘날 용도상(龍圖像)은 불화(佛畵)나 건축 장식, 공예품 등에 다양하게 등장한다.
삼성신앙은 민족신앙에서 재물과 수명, 복을 각각 관장하는 삼신신앙(三神信仰)과의 습합(習合)으로 생겨난 것이다. 어떤 사찰에서는 삼성각에 고려말의 고승인 지공(指空). 도옹(逃翁), 무학(無學)과 칠성, 독성을 봉안하기도 한다. 또 사찰에 따라서는 삼성각에 독성도와 산신도, 용왕도를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등명낙가사 범종루
범종루 범종, 법고, 목어, 운판
영산전 옆, 삼성각 앞에 있는 범종루는 정면 3칸, 측면 3카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2층 누각이다. 2층 누각에는 범종을 비롯해서 법고(法鼓)와 목어(木魚), 운판(雲板)이 걸려 있다. 범종은 명부중(冥府衆), 법고는 세간중(世間衆), 목어는 수부중(水府衆), 운판은 공계중(空界衆)을 제도한다는 의미가 있다. 범종소리는 그 울림이 깊으면서도 그윽해서 명부에까지 충분히 다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등명낙가사에서 바라본 동해
영산전 중정 끝에 서면 동해의 넘실거리는 바다가 바로 앞에 보인다. 눈이 많이 쌓여 있음에도 불이문 앞 나무들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등명낙가사 만월보전 구역
등명낙가사 만월보전 구역에는 만월보전을 비롯해서 소림선원, 전등선원, 누각, 등명사지오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 등이 있다. 작고 아담한 건물에서는 달마도를 판매하고 있다.
등명낙가사 등명사지오층석탑과 배례석
오층석탑 문비형과 자물쇠 조각
등명낙가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37호로 지정된 등명사지오층석탑이다. 등명낙가사는 그 연혁이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깊은 사찰임에도 문화재가 단 하나 밖에 없는 것이 다소 의아하다.
등명사지오층석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올리고, 그 위에 상륜부(相輪部)로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높이는 3.5m이다. 옥개석(屋蓋石) 귀퉁이가 군데군데 깨지고 훼손되어 보존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 기단부(基壇部)는 2단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하층기단(下層基壇)을 놓고, 그 위에 하대갑석(下臺甲石)을 덮었다.
지대석은 여러 개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하여 기단부를 받치게 하였다. 하층기단의 면석(面石)은 4매석으로 결구(結構)한 높직한 굄대 위에 놓여 있다. 하나의 판석(板石)으로 된 면석 각면에는 3구씩의 안상(眼象)을 새겼다. 하대갑석도 하나의 판석으로 되어 있다. 하대갑석 하단부는 굽형을 돌리고, 측면에는 각 변 3판씩의 복엽복련(複葉覆蓮)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각 모서리에는 작은 귀꽃문을 새겼다.
하대갑석 위에는 낮은 1단의 굄을 각출하여 상측기단(上層基壇)을 놓고, 그 위에 상대갑석(上臺甲石)을 올렸다. 하나의 돌로 만든 상층기단에는 얕은 음각선(陰刻線)으로 우주(偶柱)를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상대갑석의 각 변에는 3판씩의 복엽앙련(複葉仰蓮)을 화려하게 돌리고, 각 모서리에는 단엽앙련(單葉仰蓮) 1판씩을 장식했다. 상대갑석 상면에는 낮은 굄 2단을 마련하여 탑신부(塔身部)를 받게 하였다.
탑신부 초층의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은 각각 1석, 2층부터는 탑신석과 그 위의 옥개석이 같은 돌로 만들었다. 각 층의 탑신석에는 우주가 표현되어 있다. 1층 탑신석 남쪽 면에는 특이하게도 문비형(門扉形)과 자물통이 새겨져 있다. 문과 자물쇠 조각은 불상을 안치하던 목탑의 감실(龕室)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돌자물쇠를 채워 놓았기 때문에 이 탑 안의 부장품이 도굴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감실 조각이 있는 탑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다.
옥개석(屋蓋石) 상면에는 낮은 굄 1단씩을 마련하여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도록 하였다. 각 층의 옥개석 밑면의 옥개받침은 1~4층까지는 3단이고, 5층만 2단으로 되어 있다.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며, 네 귀퉁이 전각(轉角)의 반전은 날렵하다. 탑신부는 호리호리하여 날씬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석(露盤石)과 앙화(仰花)만 남아 있다. 노반석은 상단부에 복엽 복련을 돌리고, 네 귀퉁이를 귀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원래는 등명사지오층석탑 같은 탑이 3기가 있었다고 한다. 탑 하나는 함포사격으로 파괴되어 그 잔해만 바닷가에 남아 있고, 또 하나는 수중탑(水中塔)이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등명사지오층석탑은 기단부의 구성과 조각 기법, 옥개받침 수, 감실의 표현 양식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등명낙가사 만월보전
만월보전 편액
만월보전의 문살
등명낙가사 만월보전(滿月寶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만월보전에는 국화빗살문과 금강저빗살문 한쌍으로 이루어진 여닫이문을 달았다.
만월보전 또는 약사전(藥師殿)은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瑠璃世界)의 교주인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를 모신 전각이다.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동방정유리세계의 교주이기에 약사전은 대개 동향으로 세운다. 등명낙가사 만월보전도 동향이다. 약사전은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약사전(보물 제179호)과 순천 송광사(松廣寺) 약사전(보물 제302호) 등이 유명하다.
처마에 걸린 '滿月寶殿(만월보전)' 편액 글씨는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겠다. 등명낙가사 큰스님에게 전화로 물어보았으나 지나가는 객손이 쓴 글씨라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었다.
만월보전 약사삼존불
만월보전 법당에는 약사여래삼존불, 그 뒤의 후불탱화는 동방약사유리광회상도(東方藥師瑠璃光會上圖)을 봉안했다. 약사여래의 좌우에는 일광변조보살(日光遍照菩薩)과 월광변조보살(月光遍照菩薩)이 협시하고 있다. 약사여래는 좌상, 좌우 두 보살은 입상이다. 약사여래는 결가부좌(結跏趺坐) 자세로 선정인(禪定印)의 수인(手印)을 취한 왼손 위에 약그릇(藥盒)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 중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의 형상은 흔히 보관에 각각 일상(日像), 월상(月像)의 표시가 있다. 혹은 각각 일상, 월상을 얹은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약사여래삼존불 위의 닫집은 영산전만큼이나 웅장하고 화려하다.
약사여래는 과거세에 약왕보살(藥王菩薩)로 인행(因行)하면서 중생의 고통과 슬픔을 소멸시키리라는 십이대원(十二大願)을 세워 부처가 되었다. 성불한 뒤 약사여래는 동방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 거주하면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 주고, 수명을 연장시켜 주며, 재앙을 소멸하고, 의식주를 두루 갖춰 준다고 한다. 또, 보살행을 닦아 더없는 진리의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는 부처이기도 하다. 그래서 약사여래를 대의왕불(大醫王佛), 의왕여래(醫王如來)라고도 한다.
후불탱화는 약사여래의 정토인 동방약사유리광회상도(東方藥師瑠璃光會上圖, 약사회상도)를 봉안했다. 원래 약사회상도에는 약사삼존불과 호법 12신장을 도상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호법신을 사천왕 등으로 구성하고 있다. 약사여래의 왼손에 약그릇(藥器, 藥壺)을 들고 있는 도상적 특징은 8세기 무렵에 정형화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약사불화는 모두 고려 후기 이후의 것이다.
약사여래도(藥師如來圖)에는 약사여래만을 그린 약사독존도(藥師獨尊圖),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협시로 거느린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 12신장을 권속으로 거느린 약사신중도(藥師神衆圖, 藥師聖衆圖), 약사불과 보살 및 약사십이신장, 성중을 그린 약사불회도(藥師佛會圖), 동방유리광세계를 그린 약사정토변상도(藥師淨土變相圖) 등이 있다. 등명낙가사 후불탱화는 약사불회도라고 할 수 있다. 약사여래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일본 석마사(石馬寺) 소장 고려시대 약사여래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회암사약사삼존도((檜巖寺藥師三尊圖, 1565), 통도사(通度寺) 소장 약사성중도(1775)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약사신앙이 유행한 것은 통일신라 이후이다.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 약사경, 약사본원경) 등 약사신앙 소의경전에 대한 주석과 약사불상은 대부분 통일신라 이후에 이루어졌다. 약사여래는 나라에 닥친 큰 재난을 구제해 준다는 믿음이 있어서 왕실 차원의 약사도량도 자주 열렸다. 선덕여왕이 중병에 걸려 온갖 약도 효험이 없자 밀본법사(密本法師)가 약사경을 염송하여 병을 낫게 한 것은 약사신앙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관음신앙이나 미륵신앙처럼 독립된 신앙은 아니었지만 약사신앙은 특유의 구병(救病) 능력으로 인해 하나의 중요한 신앙이 되어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약사전이 세워졌다. 약사여래의 명호를 염불하면서 소원을 빌면 모든 재앙이 소멸되고, 질병이 낫게 된다는 약사신앙은 민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신라인의 불국토신앙(佛國土信仰)이자 방위신앙(方位信仰)인 사방불신앙(四方佛信仰)에서도 약사여래는 동방불(東方佛)로서 민중들의 신앙대상이 되었다. 신라의 사방불은 동방 약사여래를 비롯해서 남방 미륵불(彌勒佛), 서방 아미타불(阿彌陀佛), 북방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중앙은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로 되어 있다. 신라인들은 사방불로 하나의 불국토를 표현한 것이다.
만월보전 신중탱화
만월보전 신중탱화는 중앙의 대예적금강과 동진보살, 대예적금강 왼쪽의 제석천 신중, 오른쪽의 대범천 신중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성군, 명왕, 천녀 등 호법신들은 시선 처리가 동진보살을 향하도록 묘사되어 있다.
등명낙가사 소림선원
소림선원 편액
동안거(冬安居) 기일이 아직 2주일이나 남았는데도 소림선원은 텅 비어 있었다. 처마에 걸려 있는 '少林禪院(소림선원)' 편액 글씨는 초당 이무호의 작품이다.
전등선원
전등선원 편액
전등선원에서 바라본 등명낙가사 전경
전등선원에는 사람의 발자욱조차 없었다. 전등선원 처마에는 낙관이 없는 '傳燈禪院(전등선원)' 편액이 걸려 있었다. 전등선원 마당에서는 괘방산 동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등명낙가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기 그렇게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눈 덮힌 산사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등명낙가사 누각
포대화상 석상
만월보전 앞에 있는 2층누각은 새로 지은 듯 단청이 선명했다. 누각 위에서는 푸르른 동해바다가 환하게 바라보였다. 누각 처마에는 아직 편액도 걸려 있지 않았다. 누각에서는 동해바다에 월인천강(月印千江)으로 비치는 듯 달 그림자가 아름다우리니 월영루(月影樓)라고 하면 어떨까?
누각 곁에는 포대화상과 도깨비 석상, 미니 5층석탑을 세워 놓았다. 도깨비들은 우락부락한 표정에 방망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배불뚝이 포대화상 앞에는 '배를 세 번씩만 만지고 가면 큰 복을 받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안내판이 있었다.
배불뚝이 포대화상의 배를 세 번 만지고 등명낙가사를 떠나다. 千災雪消 萬福雲興~! 惡人雪消 義人雲興~!
2016.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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