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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대원사(大圓寺) 철조여래좌상을 찾아서

林 山 2016. 3. 5. 16:06

눈이 올 듯 말 듯 흐리던 날 보물 제98호로 지정된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忠州大圓寺鐵造如來坐像)을 보기 위해 충주시(忠州市) 지현동(芝峴洞) 269번지 대원사(大圓寺)를 찾았다. 지난 1월 3일에는 충주시 엄정면(嚴政面) 괴동리(槐東里) 빌미산(352.2m) 동쪽 기슭의 백운암(白雲庵)을 찾아 철조여래좌상(물 제1527호)을 살펴본 바 있다. 대원사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와 본 뒤 처음으로 다시 온 것이다. 몇 십 년만에 다시 보는 대원사는 그 모습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대원사 전경


대원사 창건주 우암 승현 대선사비


대원사는 금봉산(錦鳳山, 636m) 또는 남산(南山)에서 발치봉(發峙峰, 549m), 충주의 진산인 대림산(大林山, 489m), 사직산(社稷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충주 도심 쪽으로 뻗어내린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대원사 무량수전(無量壽殿) 북동쪽으로는 계명산(鷄鳴山, 775m), 남동쪽으로는 금봉산이 한눈에 바라다보인다. 


대원사가 있는 지현동은 1969년 지곡동(芝谷洞)과 빙현동(氷峴洞)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동이다. 빙현동은 용운사(龍雲寺) 옆 서낭댕이 동편 일대였는데, 겨울이면 대원사 옆의 샘이 넘쳐 빙판을 이루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곡동은 고려 중엽 충주목으로 낙향한 민 대감이라는 벼슬아치가 이곳에 세운 저택의 조경을 경주(慶州) 포석정(鮑石亭) 같은 산수지곡(山水之谷)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민 대감의 대궐 같은 저택을 휘돌아 흐르는 물길에 술잔을 띄우면서 주연을 벌였다는 이야기에서 유상곡수(油觴曲水)라는 말도 나왔다.  


1956년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되면서 용산리(龍山里)가 용산동(龍山洞)으로 바뀌었고, 1962년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용산동을 용산1구, 용산2구, 지곡동, 빙현동, 역전동(驛前洞)으로 분할하였다. 1969년 지곡동과 빙현동을 통합하여 지현동으로 만든 뒤, 2002년 3월 호암동의 일부가 지현동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현동 문화유적으로는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98호) 외에 조선 전기의 문신 이승소(李承召)의 문집인 함흥판본삼탄집(咸興板本三灘集,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이 있다. 삼탄집은 지현동에 살고 있는 이승소의 후손인 이용신이 소장하고 있다. 지현동은 또 충주사과의 최초 재배지이기도 하다. 


대원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1929년 9월 김추월(金秋月)이 창건한 대원사는 포교당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충주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로 성장하였다. 경내에는 '大圓寺創建主愚岩勝鉉大禪師之碑(대원사창건주 우암승현대선사지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 뒷면을 보면 대원사 창건주 우암 승현대선사의 속명이 김추월임을 알 수 있다. 


1994년 화재로 본전인 무량수전 일부와 철조여래좌상을 봉안했던 보호각이 불에 탔다. 주지 현덕은 무량수전을 보수하여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과 후불탱화(後佛幀畵)를 봉안하였고, 대원어린이집도 문을 열었다. 1998년에는 주지 법광(法光)이 극락전(極樂殿)을 새로 지어 철조여래좌상을 안치하고, 후불탱화를 조성하였다. 무량수전이나 극락전은 사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 주재자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법당(法堂)이므로 대원사가 아미타도량(彌陀道場)임을 알 수 있다. 대원사의 당우는 무량수전과 극락전, 요사채 밖에 없어 단출하다.


대원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편액


대원사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렸다. 단청 또한 화려하고 선명하다. '無量壽殿(무량수전)' 편액은 낙관이 없어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 없다. 


무량수전 정면 기둥에는 화엄경(華嚴經) 게송(偈訟)을 적은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아미타불을 생각하면서 무량수전 기둥에 걸린 주련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佛身充滿於法界(불신충만어법계) 부처님 몸은 온 세상 가득차시어 

普現一切衆生前(보현일체중생전) 모든 중생 앞에 두루 나타나시네 

隨緣赴感靡不同(수연부감미부동) 인연 따라 감응함을 달리 하시어 

而恒處此菩提座(이항처차보리좌) 언제나 여기 보리좌에 거하시네

佛智圓明無罣碍(불지원명무괘애) 부처님 지혜 두루 밝아 걸림 없고

威光遍照濟衆生(위광변조제중생) 거룩한 빛 두루 비춰 중생 구하네


무량수전 아미타삼존불


무량수전 아미타삼존불


무량수전 법당에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그 뒤에는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를 봉안했다. 아미타불은 좌상(坐像)이고, 좌우의 협시보살(脇侍菩薩)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입상(立像)이다. 아미타불의 수인(手印)은 아미타구품정인(阿彌陀九品定印) 중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천수관음(千手觀音)으로 합장한 손 바로 아래 손에는 약그릇처럼 생긴 그릇을 받치고 있고, 나머지 손에는 석장(錫杖) 두 개를 비롯해서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다. 지장보살의 오른손에는 석장, 왼손에는 보주(寶珠)를 받치고 있다. 


아미타구품정인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은 한량없는 수명이 백천억 겁으로도 헤아릴 수 없어서 량수불(無量壽佛)광명 또한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춘다고 해서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한다관세음보살은 자비로써 중생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으로 인도한다. 


아미타불의 협시로 지장보살 대신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봉안하기도 한다.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널리 비추어 삼도고(三道苦)를 없애 준다는 보살이다.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지장보살은 고려시대 이후 정토신앙이 성행하면서 아미타불의 협시로 등장하였다. 아미타불상은 경주 불국사(佛國寺)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27호),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 소조아미타여래좌상(塑造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45호)이 유명하다.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인 무량수전을 극락전(極樂殿), 무량전(無量殿), 보광명전(普光明殿),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극락정토신앙이 널리 유행하여 사찰 건물 중 대웅전(大雄殿) 다음으로 많은 것이 무량수전이다. 무량수전은 한국 불교에서 대웅전, 대적광전(大寂光殿)과 함께 3대 불전에 꼽힐 정도로 중요한 전각이다.


아미타는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를 한문으로 음역한 것이고, 의역하면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이다.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등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과거세에 법장(法藏)이라는 보살이었다. 법장은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48대원(大願)을 세우고 오랜 수행 끝에 마침내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으로부터 10겁(劫) 전에 성불하여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48대원 가운데 12번째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3번째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에 아미타불의 본질이 잘 드러나 있다. 누구든지 지극한 신심으로 자신의 명호만 염(念)하면 극락왕생(極樂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한 18번째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머물기에 극락전을 서쪽에 동향으로 세우고, 아미타불상도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도록 봉안한다. 따라서 아미타불상 앞에서 기원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극락세계가 있는 서쪽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김천 직지사(直指寺) 극락전이 바로 그런 경우다. 


아미타전의 대표적인 건물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은 남향이지만 아미타불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강진의 무위사(無爲寺) 극락전(국보 제13호)이나 부여 무량사(無量寺) 극락전(보물 제356호) 등도 같은 경우이다. 대원사 무량수전과 극락전은 동북쪽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절터의 지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미타삼존불 봉안된 극락회상도는 정토삼부경을 토대로 아미타불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불화이다. 극락회상도에는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 극락래영도(極樂來迎圖), 관경변상도(觀境變相圖),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등이 있다.


대원사 무량수전의 후불탱화는 극락회상도 중 아미타설법도에 속한다. 아미타설법도는 아미타불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영산회상도와 거의 비슷하다. 영산회상도와는 아미타불의 수인과 좌우 보처보살상(補處菩薩像)에서 조금 차이가 날 뿐이다. 아미타불의 수인은 아미타정인이나 설법인(說法印, 전륜법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주로 취한다. 


아미타설법도는 다섯 가지 형식으로 분류된다. 첫째, 아미타불을 단독으로 그린 독존도(獨尊圖)가 있다. 아미타불은 연꽃대좌 위에서 아미타구품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둘째, 아미타불을 줌심으로 그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하는 아미타 삼존도(三尊圖)가 있다. 삼존도는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는 화불(化佛)이 있는 보관을 쓰고 연꽃이나 정병을 든 관음보살, 그 오른쪽에는 정병을 든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배치된다. 정토삼부경에는 없으나 아미타 정토신앙과 결합한 지장보살이 대세지보살 대신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지장보살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석장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셋째, 아미타불과 함께 4대보살, 6대보살, 8대보살을 도상화한 5존도(五尊圖), 7존도(三尊圖), 9존도(九尊圖)가 있다. 아미타불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더하면 오존도, 오존도에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지장보살, 제장애보살(除障碍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을 더하면 구존도가 된다. 아미타팔대보살도라고도 불리는 구존도는 불공(不空)이 번역한 밀교(密敎) 경전 팔대보살만다라경(八代菩薩曼茶羅經)에 근거한 것이다. 구존도는 상하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화면 상단에 본존불, 하단에는 지물(持物)을 들고 있는 여덟 보살을 도상화한 형식이다.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외에 6보살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다. 넷째, 아미타불과 여러 보살, 아라한(阿羅漢), 사천왕(四天王) 등 외호신중(外護神衆)을 함께 묘사하는 군도(群圖)가 있다. 다섯째, 서방극락세계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 무량수전 후불탱화는 극락회상도-아미타설법도 중 군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무량수전 주불단 위에는 2층 구조의 웅장한 천개(天蓋, 닫집)를 달았다. 닫집에는 용(龍)과 극락조(極樂鳥), 연꽃 등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했다.  


무량수전 천불상


무량수전 천불상


아미타삼존불 좌우의 불단에는 천불상(千佛像)이 안치되어 있다. 지난적의 대겁(大劫)인 장엄겁(莊嚴劫), 이적의 대겁인 현겁(賢劫), 올적의 대겁인 성수겁(星宿劫)의 삼겁(三劫)에 걸쳐 나타난다는 각각의 1천 부처가 천불(千佛)이다. 우리가 보통 천불이라고 할 때에는 이적 현겁천불을 말한다. 현겁천불은 이미 출현한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 4불과 앞으로 올 미륵불(彌勒佛)을 비롯해서 마지막 누지불(樓至佛)까지의 996불을 말한다. 석가모니는 현겁에서 네 번째 출현한 부처이다. 


대겁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불교에서 세계는 이루어져(成), 그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住), 무너져서(壞) 텅 비어 있는(空) 네 가지 유전을 되풀이한다고 본다. 이 한 주기를 대겁이라고 한다. 대겁은 우리 인간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시간 개념이다. 


무량수전 600보살상


무량수전 한쪽에는 600구의 작은 청자(靑瓷) 보살상들이 모셔져 있다. 보살상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세음보살상 같다. 


보살은 성불(成佛)의 서원(誓願)을 일으켜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며(上求菩提下化衆生)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제도하는(自未度先度他) 구도자를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사상은 공사상(空思想)과 결합하여 육바라밀(六波羅蜜) ,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실천하는 것이 핵심이다. 보살에게는 초발심(初發心), 행도(行道), 불퇴전(不退轉), 일생보처(一生補處) 등 4단계가 있다. 즉, 보살로서 일생을 마치면 부처가된다. 


석가모니도 과거에는 보살이었다. 보살의 개념이 확대되어 탄생한 부처가 미륵불이다. 미륵불은 미래에 성불하기 전 현재는 도솔천(兜率天)에 미륵보살로서 거주하고 있다. 여기서 미래지향의 미륵신앙이 나타났다. 정토사상에서 아촉불(阿閦佛)은 과거에 아촉보살(阿閦菩薩),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보살(法藏菩薩)이었다.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자비와 절복(折伏)의 신앙대상이다. 반야경 계통의 문수보살(文殊菩薩), 화엄경 계통의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성립된 이후 지장보살 등 수많은 보살들이 나타났다. 


보살은 실존했던 고승(高僧)이나 대학자에 대한 존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인도 중관사상(中觀思想)의 용수(龍樹) , 기신론(起信論)의 마명(馬鳴) , 삼론종조(三論宗祖)의 한 사람으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밝힌 제바(提婆), 유가사상(瑜伽思想)과 법상종(法相宗)의 개조(開祖)인 무착(無着) , 구사종(俱舍宗)의 종조로 유식학(唯識學)의 완성자 세친(世親) 등도 보살의 칭호를 얻었다. 중국에서는 축법호(竺法護)가 돈황보살(敦煌菩薩), 도안(道安)이 인수보살(印手菩薩), 한국에서는 원효(元曉)가 해동교주 원효보살(海東敎主元曉菩薩)의 칭호를 받았다.


보살사상은 중기 대승불교 이후 성행한 여래장(如來藏) , 불성(佛性) 사상과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불-보살-일체중생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었다. 이후 보살의 개념은 재가(在家)와 출가(出家)를 막론하고 불교도 전체로 확대되었다. 재가불자도 보살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누구나 보살행을 실천하면서 무상보리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은 불교가 가진 큰 장점이다.


무량수전 신중탱화


무량수전에는 신중탱화(神衆幀畵)도 봉안되어 있다. 신중탱화 중앙 상단에는 대예적금강(大穢跡金剛), 그 바로 밑에는 위태천(韋駄天) 즉 동진보살(童眞菩薩), 대예적금강의 왼쪽에는 제석천(帝釋天), 오른쪽에는 대범천(大梵天)을 배치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여러 신중이 묘사되어 있다.    


신중탱화는 화엄신중신앙(華嚴神衆信仰)에 바탕을 두고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을 묘사한 불화이다. 신중탱화의 호법신들은 불교의 신중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의 신들도 많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불교가 한민족의 토착신앙을 수용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신중탱화는 신앙적 기능에 따라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 대예적금강을 중심으로 하는 신중탱화이다. 대예적금강신중은 전체 탱화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왼쪽에는 제석천, 오른쪽에는 대범천, 그 아래에는 동진보살, 그리고 그 주위에는 성군(星君), 명왕(明王), 천녀(天女) 등을 도상화한다. 대원사 무량수전의 신중탱화는 바로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둘째, 제석천과 대범천,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신중탱화이다. 이 탱화의 특징은 왼쪽 천상(天像)을 중심으로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제석천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탱화이다. 모든 신중을 제석천의 주위에 배치하기에 제석탱화(帝釋幀畵)라고도 한다. 제석탱화는 무장하지 않은 보살이나 왕의 모습으로만 표현되는 것과 무장한 신장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넷째,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신중탱화이다. 신장만을 묘사하기 때문에 신장탱화(神將幀畵)라고도 한다. 신장탱화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 팔부신장, 오른쪽에 십이지신장(十二支神將)을 도상화한다. 


신중탱화 중 가장 규모가 큰 탱화는 104위화엄신중탱화(百四位華嚴神衆幀畵)이다. 104위화엄신중탱화는 상단, 중단, 하단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상단 신중에는 대예적금강과 8대금강(八大金剛), 4대보살(四大菩薩), 10대광명(十大光明) 등이 들어간다. 대예적금강은 금강야차명왕(金剛夜叉明王)과 동등한 신격(神格)을 가진 명왕(明王)이다. 8대금강은 청제재금강(靑除災金剛), 벽독금강(碧毒金剛), 황수구금강(黃隨求金剛), 백정수금강(白淨水金剛), 적성화금강(赤聲火金剛), 정제재금강(定除災金剛), 자현신금강(紫賢神金剛), 대신력금강(大神力金剛) 등이다. 4대보살은 미륵보살과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이다.


중단 신중에는 대범천, 제석천, 사대천왕(四大天王), 공덕천(功德天), 위태천 등의 천신(天神), 용왕(龍王), 야차(夜叉), 건달바(乾達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睺羅伽) 등 팔부신중(八部神衆)과 칠원성군(七元星君), 삼태육성(三台六星), 모신(母神), 수신(水神) 등이 배치된다. 대범천은 불교의 33천(天) 중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왕이고, 제석천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하늘인 도리천(忉利天)의 주인으로 수미산 중턱의 사천왕을 거느리고 불법과 불제자를 보호한다. 사대천왕은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 毘沙門天王)을 말한다. 공덕천은 다문천왕의 비(妃)로 복덕을 베푼다는 여신(女神)으로 길상천(吉祥天)이라고도 한다. 위태천은 사천왕 중 증장천왕이 거느린 8대장군의 하나로 동자(童子)의 모습을 하고 있어 동진보살이라고도 한다.


칠원성군은 북두칠성(北斗七星, 北斗)을 신격화한 것이다. 북두 제1성 천추성(天柩星)은 탐랑성군(貪狼星君) 운의통증여래불(運意通證如來佛), 북두 제2성 천선성(天璇星)은 거문성군(巨文星君) 광음자재여래불(光音自在如來佛), 북두 제3성 천기성(天機星)은 녹존성군(祿存星君) 금색성취여래불(金色成就如來佛), 북두 제4성 천권성(天權星)은 문곡성군(文曲星君) 최승길상여래불(最勝吉祥如來佛), 북두 제5성 옥위성(玉衛星)은 염정성군(廉貞星君) 광달지변여래불(廣達智辯如來佛), 북두 제6성 개양성(開陽星)은 무곡성군(武曲星君) 법해유희여래불(法海遊戱如來佛), 북두 제7성 요광성(搖光星)은 파군성군(破軍星君) 약사유리광여래불(藥師琉璃光如來佛)이다.


삼태성(三台星)은 큰곰자리에 속한 별로 자미성(紫微星)을 지키는 상태성(上台星), 중태성(中台星), 하태성(下台星)을 말한다. 삼태성은 자식을 점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육성(六星)은 궁수자리에 속한 여섯 개의 별로 남두육성(南斗六星, 南斗)이라고도 한다. 도교에서 남두는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신격화한 남극장생대제(南極長生大帝)의 통치 아래에 6부가 있는 큰 관청으로 여겨진다. 주로 인간의 수명과 운명을 관장한다는 별이다.


하단 신중에는 호계신(護戒神), 토지신(土地神), 도량신(道場神), 가람신(伽藍神), 방위신(方位神), 산신(山身), 강신(江神), 몽신(夢神), 목신(木神), 축신(畜神) 등이 묘사된다. 호계신은 부처의 계율을 지키는 선신이다. 삼귀의(三歸依)를 받은 사람은 36부(部)의 선신이 지키고, 오계(五戒)에도 각각 다섯 신이 있어 오계를 받은 사람을 지킨다고 한다. 토지신은 절의 경내를 지키는 신이다. 도량신은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의 도량을 지키는 정장엄당도량신(淨莊嚴幢道場神), 수미보광도량신(須彌寶光道場神), 뢰음당상도량신(雷音幢相道場神), 우화묘안도량신(雨華妙眼道場神), 화영광계도량신(華纓光髻道場神), 우보장엄도량신(雨寶莊嚴道場神), 용맹향안도량신(勇猛香眼道場神), 금강채운도량신(金剛彩雲道場神), 연화광명도량신(蓮華光明道場神), 묘광조요도량신(妙光照曜道場神) 등 10위의 신을 가리킨다.


가람신은 호가람신(護伽藍神), 수가람신(守伽藍神), 사신(寺神)이라고도 한다. 중국 당송(唐宋) 시대의 선사(禪寺)에서 유래한 신이다. 칠불팔보살다라니신주경(七佛八菩薩陀羅尼神呪經)에는 18가람신이 나온다. 가람신의 상은 도인의 복장을 하고 있어,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방위신은 오방을 지키는 오방신장(五方神將)으로 동방청제(東方靑帝), 서방백제(西方白帝), 남방적제(南方赤帝), 북방흑제(北方黑帝), 중앙황제(中央黃帝)를 말한다. 산신은 산, 강신은 강, 몽신은 꿈, 목신은 나무, 축신은 짐승을 각각 수호한다.


무량수전 범종


무량수전 출입문 곁에는 '大圓梵鐘(대원범종)'이란 명문이 새겨진 작은 범종이 하나 종틀에 걸려 있다. 범종의 꼭대기 장식인 용뉴(龍鈕)는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종신(鍾身)의 상대(上帶)와 하대(下帶)는 당초문(唐草紋)으로 장식했다. 상대 바로 밑 동서남북 사방에는 4좌의 유곽(乳廓), 유곽 아래에는 4좌의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어 있다. 당초문으로 장식한 유곽 안에는 각각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유두가 연꽃봉오리 형태일 때는 연뢰(蓮蕾), 유곽을 연곽(蓮廓)이라고 한다. '大圓梵鐘(대원범종)'이란 명문 바로 밑에는 당목(撞木)이 닿는 연화문(蓮花文) 당좌(撞座)가 자리잡고 있다.  


대원사 극락전


대원사 무량수전 남쪽 바로 뒤편에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렸다. '極樂殿(극락전)' 편액 글씨도 낙관이 없어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없다. 극락전은 무량수전의 다른 이름인데 굳이 아미타불전을 또 만든 것은 무슨 까닭일까? 대원사가 서방정토 극락세계임을 강조한 것일까? 


극락전 정면 기둥에도 화엄경 게송이 주련으로 걸려 있다. 사찰의 주련은 대개 불교의 핵심 사상이나 교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한번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世尊坐道場(세존좌도량) 부처님 도량에 좌정하시매   

淸淨大光明(청정대광명) 청정한 대광명을 발하시네  

譬如千日出(비여천일출) 마치 수많은 해가 떠오른 듯 

普照虛空界(보조허공계) 온 세상을 골고루 비추시네 

  

극락전 철불여래좌상


극락전 철불여래좌상


극락전 철불여래좌상


극락전 철불여래좌상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대원사 극락전 불단에는 보물 제98호로 지정된 철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무량수전과 극락전의 주불은 아마타불임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백운암 철불, 단호사(丹湖寺) 철불(보물 제512호)과 함께 충주 3대 철불에 속하는 대원사 철불은 높이 98cm로 중간 크기의 불상이다. 백운암 철불보다 11cm 크고, 단호사 철불보다 32cm 작다. 머리는 뾰족한 나발(螺髮)이 촘촘히 박혀 있고, 정수리에는 둥글고 큼직한 육계(肉髻)가 있다. 


상호는 이마가 넓고 턱이 좁아서 양 볼살이 빠져 보이므로 풍만한 인상은 아니다. 이마에는 직경 2.5cm의 백호공(白毫孔)이 있고, 반쯤 감은 눈은 길고 깊으면서도 넓게 퍼지도록 표현했다. 눈꼬리는 길게 치켜 올라갔다. 입은 도톰하게 '八(팔)'자형으로 각이 져 있어 백운암 철불보다 인상이 좀더 강한 편이다. 코는 작고 인중이 짧은 편이며, 귀는 길게 내려와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어깨는 넓고, 가슴은 당당하며 부피감이 느껴진다. 불의(佛衣)는 백운암 철불이 편단우견(偏袒右肩)인데 비해 대원사 철불은 좌우대칭의 통견(通肩)으로 되어 있다. 목 아래로 U자형 옷주름이 돌려 있고, 가슴에는 군의(裙衣)의 결대(結帶, 매듭)가 표현되어 있다. 옷주름의 표현은 다소 형식화되어 있다.


원래의 수인은 두 손이 모두 결실되어 확인할 수 없다. 지금의 두 손은 새로 주조하여 끼워 넣은 것이다. 백운암 철불의 수인이 좌수 아미타정인 중 중품중생인, 우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비해 대원사 철불은 전형적인 아미타정인 중 중품중생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무릎 부분이 동체에 비하여 넓어 안정감을 준다.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에 올려 놓은 결가부좌(結跏趺坐) 자세와 무릎 아래에 깔린 부채꼴 옷주름은 백운암 철불 양식과 거의 같다. 


대원사 철불은 원만하고 성스러운 모습이라기보다 근엄하면서도 다소 신비스러운 모습을 띠고 있다. 고려 초기에 유행한 밀교(密敎)의 영향이 반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대원사 철불은 단호사 철불과 그 양식이 거의 같다. 하지만 대원사 철불이 좀더 거친 느낌을 준다. 대원사 철불은 조각 수법으로 보아 1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찰고기(寺刹古記)에 의하면 고려 중기인 1145년(인종 23)에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백운암 철불은 청양 장곡사(長谷寺)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제58호), 영암 도갑사(道岬寺)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평택 만기사(萬奇寺)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67호), 개성 적조사지(寂照寺址) 철조여래좌상, 포천 출토 철조여래좌상 등과 그 양식이 유사하다. 특히 그 양식이 유사한 것은 10세기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이다. 이것으로 보아 백운암 철불은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의 양식을 계승하고, 충주의 지역적인 특색이 더해져 만들어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운암 철불은 장곡사 불상보다 다소 늦은 고려시대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전반기 각 지역에서는 같은 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불들이 지역적 특색이 강한 유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백운암 철불(87cm고려 전기)은 대원사 철불(98cm, 고려 중기)이나 단호사 철불(130cm, 고려 후기)로 이행되기 전 단계의 양식적 특징을 보인다. 이는 백운암 철불이 충주 지역의 불상유파를 형성하는 초기 양식임을 시사한다.  


대원사 철불을 비롯해서 백운암, 단호사 철불 등은 당시 충주 지역에 철불을 제작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과 문화적 수준을 갖춘 호족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려 준다. 또한, 세 철불은 철의 산지였던 충주의 지역적인 특징과 함께 불상 제작 양식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발견된 20여개의 철불 중 충주에 3구가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이 철의 산지라는 증거가 된다.   


대원사 철불은 그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다. 단호사 철불처럼 이 철불도 원래 어디에 봉안되었던 불상인지는 알 수 없다. 대원사 철불은 충주공업고등학교(옛 충주공업전문학교) 정구장 부근의 광불(狂佛)거리 또는 미친부처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방치된 탓으로 광배(光背)와 대좌(臺座), 두 손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들이 보호각을 짓고 철불을 봉안하였는데, 보호각에 화재가 나거나 향불을 피우고 예불을 올리면 괴질이 유행하므로 이 불상을 광불 또는 미친부처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원사 철불은 1922년에 충주관아(옛 중원군청)으로 옮겨졌다가 1937년에는 성남동(城南洞)의 마하사(摩訶寺), 1959년에는 다시 대원사 앞뜰로 옮겨졌다. 대원사로 옮겨진 뒤에도 철불은 별도의 전각 없이 마당에 안치되어 있다가 1982년 중원문화권개발사업의 하나로 충주시의 보조를 받아 본전의 오른쪽 마당에 보호각을 짓고 봉안하게 되었다. 이때 유실된 두 손도 나무로 만들어 끼웠다. 1994년 대원사 대웅전의 화재로 인해 보호각이 불에 타자 철불을 충주시립박물관으로 옮겼다가 1998년에 극락전을 새로 지은 뒤 다시 대원사로 옮겨 봉안했다. 


1770년(영조 46) 무렵에 나온 '약전원수기'에는 '633년 절을 창건한 후 높이 3척 2촌 5푼의 철조석가좌상(鐵造釋迦坐像)을 조성하여, 염해평 서쪽에 서쪽을 향하도록 봉안하고 그 뒤로 수 백 년을 내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염해평 서쪽은 지금의 충주공업고등학교와 성남초등학교 부지 일대로 충주시내에서 마즈막재로 통하는 안림로(安林路) 오른쪽 길가에 해당한다. 대원사 철불이 석가좌상이었다면 원래의 수인은 아마도 오른손으로 무릎을 짚고 손가락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이 아니었을까?  


충주는 우리나라 3대 철산지였기 때문에 철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충주에서는 보물로 지정된 3구의 철불 외에도 더 많은 불상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3구 중 대원사 철불과 단호사 철불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불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 충주 지역에는 특유의 불상유파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조여래좌상 뒤편의 후불탱화는 극락회상도 중 아미타설법도를 봉안했다. 보살이 10위, 호법신중이 2위이므로 아미타설법도 중에서도 군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극락전 천불상


극락전 천불상


극락전에도 철조여래좌상 좌우 불단에 천불상을 봉안했다. 불상의 왼손은 선정인(禪定印),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석가모니불이 아닌가 한다. 


몇 십 년만에 대원사에 와보니 감회가 새롭다. 아미타불을 생각하면서 대원사를 떠나다. 나무아미타불(南無我彌陀佛)~! 


2016. 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