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중순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을 때, 충북(忠北) 충주시(忠州市) 풍동(楓洞) 산 45-1 갈비봉(337.1m) 기슭에 자리잡은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의 묘소(충청북도 기념물 제67호)를 찾았다. 묘소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삭풍한설이 몰아치는 북방의 변경을 지켰던 임경업 장군도 눈을 그리워했음일까!
충민공 임경업 장군 묘소
백두대간(白頭大幹) 속리산(俗離山) 천황봉(天皇峰, 1,058m)에서 갈라진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말티고개-구치(九峙)-시루산(482m)-구봉산(九峰山, 515m)-국사봉(國師峰, 589m)-선두산(先頭山, 527m)-선도산(先到山, 547m)-상봉재-상당산성(上黨山城)-좌구산(坐龜山, 657.4m)-칠보산(七寶山, 585m)-보광산(普光山, 531m)-보현산(普賢山, 481m)에 이른다. 보현산에 이른 한남금북정맥은 다시 소속리산(小俗離山, 432m)-마이산(馬耳山, 471.9m)-황색골산(353m)-걸미고개를 지나 칠장산(七長山, 492m) 3정맥 분기점까지 이어진다.
한남금북정맥 보현산 북쪽 600m 지점의 477m봉에서 북동쪽으로 부용지맥(芙蓉枝脈)이 갈라진다. 부용지맥은 사정고개를 지나 부용산(芙蓉山, 645m)에 이르기 전 동남쪽으로 또 하나의 가지를 치는데 이 지맥이 가섭지맥(迦葉枝脈)이다. 가섭지맥은 숫고개-선지봉(565m)-가섭산(迦葉山, 710m)-어래산(御來山, 393m)-모래봉(398m)-쇠실고개-고사리봉(410m)-지봉(258m)- 상봉(492m)-고양봉(顧養峰, 526m)-대간치-풍류산(風流山, 485.2m)-풍류산(風流山, 350m)을 지나 괴산군 불정면 하문리 하소마을에서 달천에서 그 맥을 다한다. 도상거리는 약 34km이다.
가섭지맥의 고사리봉과 지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에서 산줄기 하나가 동쪽으로 뻗어간다. 이 산줄기는 필봉(326.2m)-매돌봉(285m)-갈비봉(337.1m)-생이월산(200.4m)을 지나 충주시 풍동 진비알마을 앞 달천에서 그 꼬리를 감춘다. 임경업 장군의 묘소는 바로 갈비봉 동쪽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임경업 장군 묘소의 봉분은 부인 전주이씨와 합장이다. 묘역에는 원래 묘비(墓碑)와 망주석(望柱石), 석양(石羊)만 있었는데, 1982년 보수를 하면서 상석(床石)과 동자석(童子石), 무관석(武官石), 장명등(長明燈)을 새로 만들어 세웠다. 묘비는 대석(臺石)과 개석(蓋石)을 갖추었으며, 비신(碑身)의 높이는 138cm, 폭은 56cm, 두께는 28cm이다. 풍동마을 입구에는 임경업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신도비는 왕 또는 고관의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망자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신도(神道)는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곧 신령(神靈)의 길을 의미한다
망주석은 무덤 앞의 양쪽 옆에 하나씩 세우는 돌로 만든 기둥이다. 묘주(墓主)의 신분을 나타내며, 무덤의 수호 신앙과 기념적인 기능을 가진 석조물이다. 망두석(望頭石), 망주석표(望柱石表), 석망주(石望柱), (石柱)망주라고도 한다. 석양은 악귀를 내쫓는 벽사(辟邪)의 의미로 봉분 주위에 배치하는 돌로 만든 양이다.
상석(床石)은 묘의 봉분 바로 앞에 설치해 놓은 장방형의 돌로 된 상으로 상돌이라고도 한다. 동자석은 동자(童子)의 형상을 만들어서 무덤 앞 좌우에 나란히 마주보도록 세우는 돌이다.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터를 지키는 지신(地神) 역할을 하는 석물이다. 무관석은 무관의 형상을 만들어서 능묘 앞 좌우에 나란히 마주보도록 세우는 석상으로 묘주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무관석은 본래 왕실의 능묘에서만 세울 수 있었던 석물이다. 무관석을 무석인(武石人), 장군석(將軍石)이라고도 한다. 장명등은 분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운 네모진 등으로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벽사의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 일품(一品) 이상의 벼슬아치만 세울 수 있었던 장명등은 묘주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임경업의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한 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의주부윤(義州府尹),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平安道兵馬水軍節度使), 안주목사(安州牧使) 등을 지낸 임경업은 정묘호란 이후 친명배청정책(親明背淸政策)을 주도한 무장이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혁명군(革命軍)을 진압하는데 참여하여 조선(朝鮮) 왕실에 큰 공을 세웠다. 제2차 조청전쟁(朝淸戰爭, 병자호란) 때에는 의주부윤으로 있으면서 압록강 맞은 편의 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에서 청군을 차단한 뒤 조정에 원병을 요청했으나 친청파 김자점(金自點)의 방해로 결국 남한산성까지 포위되었다. 청군이 그가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에 조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로 나와 청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인조도 치욕스러운 것은 알았는지 신하들에게 '항복'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하성(下城)'이라는 말을 쓸 것을 강요했다. 삼전도 굴욕 소식을 들은 임경업은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임경업은 제2차 조청전쟁이 끝난 뒤 친정파 김자점 등 반대파들의 모함으로 희생되었다. 1706년(숙종 32)이 되어서야 임경업은 복권(復權)되어 충민(忠愍)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충주의 충렬사(忠烈祠)와 선천의 충민사(忠愍祠) 등에 배향되었다. 부인 완산이씨에게도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임경업 장군의 묘소를 떠나면서 당시 조선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생각하다. 조선이 명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주의 외교정책을 버리고 신흥강국 청에 대해 실용주의적인 외교정책을 채택했더라면 제1, 2차 조청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과 치욕적인 삼전도(三田渡)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항복은 하지만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금물이다. 버스가 지나간 다음에 손을 흔들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저녁 하늘에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면서 귀로에 오르다.
2016.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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