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흩날리는 날 충주시(忠州市) 단월동(丹月洞)에 있는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의 사당(祠堂) 충렬사(忠烈祠, 대한민국 사적 제189호)를 찾았다. 충민공과는 같은 임씨(林氏)로서 종씨(宗氏)이기에 진작부터 충렬사를 참배하려고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이제서야 오게 된 것이다.
조선(朝鮮) 친명배청파(親明排淸派)의 상징적 인물 충민공 임경업 장군의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이다. 그는 1594년 음력 6월 20일(양력 8월 1일) 강원도(江原道) 원주시(原州市) 부론면(富論面) 손곡리(蓀谷里) 평촌(平村)에서 임황(林篁)의 3남으로 태어났다. 충주 풍동(楓洞)이나 평안도(平安道) 개천(价川) 출생설도 있으나 임씨 문중과 충북도지(忠北道誌), 평촌 마을의 전설, 현지 주민들은 그가 원주 태생임을 밝히고 있다. 임황이 원주 관아에 근무할 때 평촌 마을에서 출생했다는 것이다. 당상관인 절충장군(折衝將軍)까지 올랐던 임황은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 이후 여러 번의 귀양살이 끝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임경업은 어릴 때부터 기상이 용맹하여 말 타고 활 쏘는 것으로 나날을 보냈으며, 전쟁놀이를 좋아하였다. 또 학문에도 능하여 글재주가 좋았다. 1618년(광해군 10) 24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그는 1620년에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 1622년에는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그는 당시 조선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이괄(李适)의 혁명군(革命軍)이 봉기하자 정충신(鄭忠信) 휘하의 관군으로 출전했다. 이괄의 혁명군을 맞아 안현전투(鞍峴戰鬪)에서 전공을 세운 그는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봉해진 뒤 3품 벼슬인 방답진첨절제사(防踏鎭僉節制使), 2품 벼슬인 우림위장(羽林衛將) 등을 지냈다.
임경업은 무인으로서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명장 관우(關羽)를 흠모했다. 관우를 그리워하면서 쓴 그의 시조 한 수가 전한다.
발산력(拔山力) 개세기(蓋世氣)는 초패왕(楚霸王)의 버금이요
추상절(秋霜節) 열일충(烈日忠)은 오자서(伍子胥)의 우히로다
천고산(千古山) 늠름장부(凜凜丈夫)는 수정후(壽亭候)인가 하노라
초패왕은 항우(項羽), 오자서(伍子胥)는 춘추전국시대의 풍운아, 수정후는 관우이다. 위(魏)의 조조(曹操)가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했기에 그를 수정후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관우는 결국 조조를 떠나 유비(劉備)에게로 돌아갔다.
1626년 임경업이 낙안군수(樂安郡守)로 임명된 1627년에 제1차 조청전쟁(朝淸戰爭,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명과 청에 대한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펼쳤던 광해군(光海君)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인조는 무능하고 국제정세에도 어두웠다. 인조는 다 망해가는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킨답시고 어리석게도 친명반청정책을 써서 청의 침략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인조를 앞세워 쿠데타를 주도한 서인(西人)들도 국제정세에 어둡고 무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청군이 침략하자 임경업은 전라병사(全羅兵使) 신경인(申景禋)의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로 나아갔으나 조정은 이미 청과 형제의 의(義)를 맺은 뒤였다. 1629년 김육(金堉)의 발탁으로 평양중군(平壤中軍)에 이어 1631년 검산산성방어사(劒山山城防禦使)가 된 그는 평안도 선천(宣川)의 검산성(劒山城)과 용골성(龍骨城)을 쌓는 한편 가도(椵島)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劉興治)의 군사를 감시하였다.
1632년 임경업은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있으면서 탄핵을 받았다가 바로 풀려났다. 1633년(인조 11)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 겸 영변부사(寧邊府使)로 부임한 그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쌓은 평안북도(平安北道) 피현군(枇峴郡) 백마산(白馬山)의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쌓는 일을 감독하는 한편 명에 반기를 들고 청에 투항한 공유덕(孔有德)을 토벌한 공으로 명 황제로부터 총병(摠兵)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명성은 명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1634년 의주부윤(義州府尹)과 청북방어사를 겸임한 그는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636년 무혐의로 복직되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면서 제2차 조청전쟁(병자호란)이 발발했다. 당시 국제정세는 만주(滿州) 대륙을 통일한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가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였다. 누르하치는 곧 1636년 건국한 청 태조(太祖) 천명제(天命帝)이다. 청은 세력이 커지자 명과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임경업은 조일전쟁 당시 군대를 보내 조선을 도와 준 명을 은인의 나라로 여겨서 청을 배격하는 것이 명에 대한 보은이라고 생각했다.
의주부윤으로 복직된 임경업은 압록강 맞은 편의 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백마산성에서 청군을 차단한 뒤 조정에 원병을 요청했으나 친청파 김자점(金自點)의 방해로 결국 남한산성까지 포위되었다. 청군이 그가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에 조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로 나와 청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인조도 치욕스러운 것은 알았는지 신하들에게 '항복'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하성(下城)'이라는 말을 쓸 것을 강요했다. 삼전도 굴욕 소식을 들은 임경업은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1638년(인조 16) 임경업은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平安道兵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병마수군절도사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겸직이다. 수군절도사는 각도의 수군(水軍), 병마절도사는 각도의 육군(陸軍)을 지휘하는 직책이었다.
인조의 항복을 받은 청이 명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임경업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단도(緞島)로 출병하여 명군과 싸워야만 했다. 그는 사자를 보내 명군을 공격하는 것이 자신의 본심이 아님을 알림과 동시에 조선군의 작전계획을 누설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했다.
1640년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있던 임경업은 청의 요청으로 주사상장(舟師上將)에 임명되어 금주위(錦州衛)의 명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했다. 그러나 그는 척후장(斥候將) 김여기(金礪器)를 몰래 대릉하(大凌河) 앞 석성도(石城島) 근처로 보내 명군 부총병(副總兵) 심세괴(沈世魁)에게 조선의 형세를 알리고 명군(明軍)과 협력하여 청군을 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1641년 가도 주둔 명군 도독 홍승주(洪承疇)가 청에 투항하면서 이 사실이 드러났다. 임경업은 명군과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체포되었다.
1642년 청의 명으로 조선 군사에게 압송되던 임경업에게 정승 심기원(沈器遠)은 몰래 은전 700냥과 승복, 머리 깎을 칼을 보내 주었다. 그가 승려로 변장하고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한 뒤 회암사(檜巖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이를 빌미로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 내 반청세력에 대한 일제 소탕령을 내렸다. 청은 조선으로 하여금 그의 부인을 잡아 만주 선양(瀋陽)으로 보내게 하여 고문했다. 조선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 그는 1643년 명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의 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는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 없다면서 1643년 (인조 21) 9월 26일 선양의 감옥에서 자결했다. 이에 감복한 청은 부인의 시신을 정중하게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김자점의 종 우금의 도움으로 배 한 척을 얻어 1643년 5월 26일 태안(일설에는 마포)에서 황해로 빠져 중국 제남부(濟南府)의 해풍도(海豊島)에 도착한 임경업에게 명은 평로장군(平虜將軍) 벼슬을 제수하였다. 이어 그는 명나라 등주도독(登州都督) 황종예(黃宗裔)의 총병(總兵) 마등고(馬騰高)로부터 4만 명의 군사를 받았다. 그러나 청군이 베이징(北京)을 함락하고, 청 태종이 산해관(山海關)에 입성하자 황종예는 겁을 먹고 도주했다.
황종예가 도망치자 임경업은 중군장(中軍將) 마등홍(馬登紅)이 통솔하는 명군과 함께 석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1644년에 명 숭정제(崇禎帝)가 목을 매어 자결하고, 천도한 난징(南京)마저 함락되자 마등홍은 청에 항복하면서 임경업을 청에 바쳐 공을 세우려고 하였다. 임경업은 도망가려 했으나 명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잡혀 청의 수도 선양으로 압송되었다. 청 세조(世祖) 순치제(順治帝)는 임경업을 설득하여 자신의 장수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는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는 임경업이 좌의정(左議政) 심기원의 역모사건(逆謨事件)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심기원이 심문을 받다가 그를 도망시킨 사실을 자백한 것이다. 보고를 받은 인조는 1646년 청의 순치제에게 임경업을 조선으로 압송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순치제는 조선이 반청인사인 그를 처단해주기를 바라던 터라 이를 승인하고, 사은사(謝恩使) 이경석(李景奭)에게 그를 내주었다.
조선으로 압송된 임경업은 한양의 감옥에 갇힌 채 피와 살이 튀는 문초를 받았다. 1646년 6월 17일 인조의 친국(親鞫) 과정에서 그가 심기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김자점은 '나라를 배신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위반했다'면서 형리들을 시켜 임경업을 장살(杖殺)시켜 버렸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임경업을 죽인 것은 결국 친청파 김자점과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조였다.
임경업의 사후 그를 모함하여 죽게 한 김자점도 역모사건으로 사형을 당하고, 북벌론(北伐論)을 주장하던 서인(西人)의 거두 송시열(宋時烈), 남인(南人)으로 송시열의 정적인 윤휴(尹鑴) 등이 집권하였으나 청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이 두려워 그의 신원(伸寃)과 복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697년(숙종 23) 아들 임중번(林重蕃)이 아비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는 비로소 신원, 복관(復官)되어 1706년(숙종 32)에 충민(忠愍)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충주의 충렬사와 선천의 충민사(忠愍祠) 등에 배향되었다. 부인 완산이씨에게도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726년(영조 2)에 충주 사람들이 임경업의 유상(遺像)을 그려 달천의 옛 집터에 사당을 세우자 이듬해 조정에서는 충렬사 사액(賜額) 현판을 내리고, 향전(鄕田)을 나누어 주었으며,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1791년(정조 15)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 충렬사비)이다. 정조는 또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記)를 간행하여 그의 행적을 기렸다. 1870년 충렬사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유지된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임충민공을 모시는 사당은 충주 충렬사 외에도 낙안(樂安)의 충민사(忠愍祠), 의주(義州)의 현충사(顯忠祠)에도 세워졌다. 순천(順天) 낙안읍성(樂安邑城) 동문 밖 향교 입구의 충민사에도 임경업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낙안읍성 안에는 임경업장군비각(林慶業將軍碑閣)이 세워져 있다. 의주 현충사는 현황을 알 수가 없다. 서산 황금산(黃金山) 정상의 황금산사(黃金山祠)에도 산신령과 함께 임경업 장군의 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지역 어부들은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기 전에 황금산사에서 풍어제를 올렸다고 한다.
충렬사는 원래 3칸에 맞배지붕을 올린 목조건물이었고, 충렬사강당은 10칸에 팔작지붕을 올린 목조건물로 단청이 되어 있었으나 너무 퇴락하자 1978년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새롭게 단장하면서 성역화되었다. 같은 해 원주문화원은 고증을 거쳐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생가터에 임경업 장군의 뜻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영웅적인 인물의 억울한 죽음은 그에 대한 민중들의 보상심리로 그의 죽음을 부정하는 역사인식이 반영되어 전설이나 설화, 민담 등으로 부활하거나 신격화되기 마련이다. 고려 말의 최영(崔瑩) 장군처럼 임경업 장군도 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최영은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기에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개성 사람들은 그의 혼백을 신당에 모시고 제를 지냈다. 민족신앙에서는 억울한 죽음, 한 많은 죽음을 당한 인물을 신격화하는 경우가 많다. 한을 품고 죽었으니 사람들의 한을 더 잘 풀어주리란 믿음 때문일 것이다.
임경업장군신도
임경업장군신
민족신앙에서 임경업장군신(林慶業將軍神)은 여자 무당(巫堂), 만신(萬神)들의 수호신으로 잡귀를 쫓아내고, 병을 낫게 하며,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가져다 주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의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남자 무당인 박수는 신당(神堂)에 임경업장군신을 그린 무신도(武神圖)를 봉안하며, 만신은 임경업장군신을 상징하는 고비전을 모시기도 한다. 고비전은 종이를 오려 사람의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임경업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로도 나왔다. 한문소설 '임장군전(林將軍傳)'과 한글소설 '임경업전(林慶業傳)'은 인조 때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임경업 장군의 영웅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삶을 그렸다.
대소인원하마비
충원대로변에 있는 달천동주민센터 맞으편 길로 조금 들어가면 곧 충렬사가 나온다. 충렬사 입구에는 '대소인원하마비(大小人員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대소(大小)'는 '남녀노소(南女老少)', '인(人)'은 '벼슬이 없는 사람', '원(員)'은 '벼슬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옛날에는 충렬사를 찾는 사람은 여기서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야 했다.
충렬사 전경
임충민공유적정화기념비
충렬사 외삼문(外三門) 앞마당 서쪽편에는 임충민공유적정화기념비(林忠愍公遺蹟淨化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충렬사를 성역화하면서 경내를 새로 단장하고 1978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갈성문
갈성문(竭誠門)은 외삼문이다. 외삼문은 바깥담에 세 칸으로 세운 문을 말한다. 갈성문은 콘크리트 기둥에 맞배지붕을 올리고 문 세 칸을 달았다. '竭誠'은 '정성을 다하다'라는 뜻이다. '갈성진경(竭誠盡敬)'이란 말이 있다. '정성과 공경을 다하다'란 뜻이다.
충렬사강당
정성을 다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외삼문과 내삼문(內三門)인 진무문(振武門) 사이의 공간이 나타난다. 이 공간 서쪽에는 충렬사강당(忠烈祠講堂)이 자리잡고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목조 기둥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식(柱心包式) 건물로 단청을 칠했다.
어제달천충렬사비각과 완산이씨정부인정렬비각
어제달천충렬사비 앞면
어제달천충렬사비 뒷면
정부인완산이씨정렬비 앞면
정부인완산이씨정렬비 뒷면
이은상의 달천충렬사비
동쪽에는 충렬사비와 정부인완산이씨정렬비(貞夫人完山李氏貞烈碑, 정렬비)와 비각(碑閣)이 나란히 서 있다. 충렬사비각은 네 개의 나무 기둥 위에 겹처마 팔작지붕, 정렬비는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리고 목책을 둘렀다.
충렬사비는 친명배금(親明排金) 노선을 걸었던 임경업의 행적과 절의를 기리는 비석으로 1791년(정조 15)에 세웠다. 비석은 비좌개석(碑座蓋石)의 형태이며, 비의 크기에 비해 화강암 대석(臺石)의 규모가 다소 크다. 비신(碑身)은 높이 183㎝, 너비 71㎝, 두께 42㎝이고, 개석은 지붕돌의 형태이다.
충렬사비의 앞면과 뒷면 상단에 좌횡으로 음각(陰刻)된 전서체(篆書體) 비제(碑題) '御製達川(어제달천)’과 '忠烈祠碑(충렬사비)'는 이조판서 윤동섬(尹東暹)이 쓴 것이다. 비문은 정조가 짓고, 비문 글씨는 예조판서 이병모(李秉模)가 썼다. 앞면과 뒷면의 글자는 총 1,420여 자이다.
정렬비는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 없다면서 청의 수도 선양의 감옥에서 자결한 부인 완산이씨의 정렬을 기린 비이다. 1697년(숙종 23)에 내린 정려가 화재로 불탄 뒤 후손들이 복구하지 못하자 1745년(영조 21)에 충주목사 한덕필(韓德弼)이 비용을 내어 비석을 세우고 그 전말을 기록하였다.
정렬비는 비좌규수(碑座圭首)의 형태로 대리석으로 조성하였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215㎝, 너비 83㎝, 두께 27㎝이며, 대석은 충렬사비보다 낮다. 앞면의 비제는 해서체(楷書體)로 ‘大明忠臣林將軍慶業妻貞夫人完山李氏貞烈碑(대명충신임장군경업처정부인완산이씨정렬비)’라 음각되어 있는데, 글씨를 붉은색으로 칠했다. 뒷면의 음기(陰記)는 정려를 내린 과정과 화재 이후 복원해서 건립한 내용을 새겼다. 음기의 글은 자헌대부지중추부사 이세필이 짓고, 글씨는 진사 이정하가 썼다.
정렬비각 바로 옆에는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쓴 달천충렬사비(達川忠烈祠碑)가 세워져 있다. 달천충렬사비는 1979년 7월 이은상이 글을 짓고, 이상복이 글씨를 썼다. 비문은 어제충렬사비에 대한 설명과 임경업에 대한 행적, 절의를 기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진무문
내삼문인 진무문(振武門)은 콘크리트 기둥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이다. '振武(진무)'는 '무위(武威)를 떨친다'는 뜻이다. '진무'는 아마도 임경업이 이괄의 혁명군을 진압한 공으로 받은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까 '진무문'은 '진무원종공신의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도 되겠다.
충렬사
진무문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중요한 건물 충렬사가 나타난다. 충렬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전퇴칸(前退間)을 두고, 콘크리트 기둥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렸다. 정면 처마에 걸린 '忠烈祠' 현판 글씨는 일본군 장교 출신의 독재자 박정희(朴正熙)가 쓴 것이다. 갈성문과 진무문, 충렬사를 시멘트로 짓지 말고 사찰 건축처럼 목조로 지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시멘트 건축은 세월이 흘러도 문화재가 되기 어렵다.
제사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두 차례 행하고 있다. 사당 출입문 바로 앞 전퇴칸에는 참배객들이 향을 올리고 방명록에 서명할 수 있도록 제단도 마련되어 있다.
임충민공 영정(충렬사)
임충민공 영정(국립박물관)
임충민공 영정(충주시 살미면 세성리 150-11)
임충민공의 또 다른 초상
사당 안에는 임경업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다. 그의 초상화는 충렬사를 비롯해서 국립박물관과 살미면 세성리 150-11번지 등 세 곳에 있다.
충주시 살미면 세성리 평택임씨(平澤林氏) 충민공파(忠愍公派) 종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임경업의 초상화(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9호)는 크기가 세로 160cm, 가로 90cm이다. 오른쪽 상단에는 '忠民公林將軍遺像(충민공임장군유상)'이라고 쓴 화제(畵題)가 보인다.
17세기 초 일반적인 조선의 초상화들과 달리 명나라풍으로 그려져 있다. 임충민공고적(林忠愍公故蹟)에 따르면 1640년 6월 임경업의 나이 47세 때 명의 장수가 황제에게 그의 모습을 보여 주려고 화원(畵員)을 보내서 초상화 2벌을 그린 다음 1벌은 가져가고 1벌은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임경업의 초상화가 명의 풍격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초상화 주인공은 호피(虎皮)를 두른 교의자(交椅子)에 정면관(正面觀)의 자세로 앉아 있다. 호피는 신발 바닥면에까지 깔려 있다. 머리에는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견본채색(絹本彩色) 바탕에 운보문(雲寶紋)이 있는 단령(團領)을 입었다. 허리에는 삽금대(鈒金帶)를 둘렀다. 가슴에는 조선시대 나라에 공이 큰 무신에게 내렸던 서운문(瑞雲文) 위주로 도식화된 특이한 흉배(胸背)가 있다.
얼굴은 크고 긴 편인데, 특히 턱이 매우 길다. 콧수염은 입술을 덮었고, 턱수염은 흉배까지 내려와 있다. 이마와 인중에는 얽은 자국과 작은 점까지 묘사하였다.
교의자 뒤 왼쪽 배경에 높은 향궤(香櫃)를 배치한 것은 매우 특이하다. 향궤 위에는 가요(哥窯) 화병과 황금색 연화대좌에 해태상 향로가 올려져 있고, 화병에는 송죽매(松竹梅) 세한삼우(歲寒三友)가 꽂혀 있다. 향로에서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향궤 윗부분에는 용, 아랫부분에는 인물산수와 새, 나뭇가지 등을 그려져 있다. 이런 특징들은 모두 17세기 조선의 초상화와는 다른 명나라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전하는 초상화는 18세기에 다시 그려진 조선의 초상화로 추정된다. 오사모의 날개를 극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한 점이나 단령의 운보문 주변에 작은 장식 문양들을 복잡하게 첨가하여 장식 취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명나라나 17세기 조선의 초상화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18세기 이후의 조선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들이기 때문이다.
평택임씨 종중 소장본 초상화는 전 폭에 걸쳐 비단이 꺾이고 박락된 데다가 때가 많이 타서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다. 특히 하반부는 퇴락이 심한 편이다. 1984년 유리 액자로 개장하면서 족자 상태의 원형을 잃었으며, 이때 훼손이 심한 부분을 조악하게 보채(補彩)하였다.
이 초상화와 동일한 도상(圖像)이 국립중앙박물관에 1벌 소장되어 있다. 국립박물관 소장본이 보존 상태도 매우 좋고, 화법도 더 우수한 편이다. 임경업의 영정은 조선 중기에 명나라의 초상화 양식이 전래된 뒤 그것이 조선 후기에 다시 그려지면서 부분적으로 조선식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매우 독특한 초상화이다.
충렬사에 현재 봉안되어 있는 임경업 초상은 금방 그린 듯 색감이 선명하다. 이 초상은 평택임씨 종중 소장 임경업 영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경업 초상과 비슷한 크기로 동일한 원본에서 유래한 모사본이다.
유물전시관
유물전시관은 외삼문 담장 밖에 따로 세워져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임경업의 유상과 교지, 유필, 추련도, 충렬사 사액 현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다룰 것이다.
임충민공의 사당 충렬사에 왔으니 평택임씨(平澤林氏)에 대해서 좀 알아보기로 한다. 한국의 족보는 대부분 가짜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조상에 대해서 무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족보의 진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족의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의 모든 임씨(林氏)의 조상은 중국 상(商)의 왕자 비간(比干)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들어서 그렇게 알고 있었다. 나는 종종 내 몸속에 중국 황족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긍지로 여겼다. 비간이 내 진짜 조상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상의 28대 타이쩡띠(太丁帝) 원딩(文丁)의 아들로 태어난 비간은 그러니까 띠신(帝辛) 저우(紂)의 숙부(叔父)이다. 이름은 비(比)이고, 간(干)이라는 나라에 봉(封)해져 비간(比干)이라고 불린다. 자(子)성이므로 쯔비(子比)라고도 한다. 중국 사람들은 그를 글과 재물을 관장하는 문곡성(文曲星)의 화신(化身)으로 숭배하여 문곡성군(文曲星君)으로 부르기도 하고, 중국의 다른 전설적 인물들과 함께 재물을 관장하는 재신(財神)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저우왕(紂王)은 자신의 총명과 용맹을 과신하여 신하와 형제들의 충고를 무시했다. 그는 허난성(河南省) 남부의 호족 유소씨(有蘇氏)를 토벌하고, 그 가문의 절세미녀 다지(妲己)를 얻었다. 다지를 총애한 저우왕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점점 광폭해져 갔다. 저우왕이 다지를 멀리 하라고 간언하는 신하들을 처형하자 조정의 충신들은 다 떠나고 간신의 무리들만 요직에 임명되었다.
비간의 죽음에 대한 중국의 민간 설화가 전한다. 비간은 산시성(山西省) 린펀현(臨汾縣) 시허(西河)에서 조카 저우왕에게 다지에게서 헤어나 정사를 제대로 돌볼 것을 간언했다. 이에 저우왕은 화를 내며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겠다'면서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게 함으로써 삼촌을 참혹하게 죽였다는 것이다.
BC 1046년 저우왕이 저우(周)의 우왕(武王)과 벌인 목야전투(牧野戰鬪)에서 패하고 자살함으로써 상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저우왕 폭군설은 상 왕조를 멸망시킨 저우의 우왕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날조한 것일 수도 있다. 역사는 승리한 자들이 쓰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역사서를 보면 대개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은 천하의 폭군(暴君) 또는 암군(暗君), 새 왕조를 연 사람은 천하의 성군(聖君) 또는 명군(明君)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저우왕의 아들 우긍(武庚)은 저우의 우왕에 의해 상의 옛 도읍지 웨이(衛)에 봉해졌다. 우왕 사후 우긍은 우왕의 형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해 주살당했다. 저우왕의 서형(庶兄)이자 우긍의 백부인 웨이쯔치(微子啓)가 송(宋)에 봉해져 상 왕조의 제사를 계속했다.
비간의 묘역은 허난성 북부의 신샹시(新乡市) 웨이후이(衛輝)에 있다. 묘역은 상 후기 만들어졌고, 저우의 우왕이 봉묘(封墓)하고 중건하였다. 콩쯔(孔子)도 비간(比干)의 묘역을 찾아 비석을 세우고, 인(殷)의 비간이 이곳에 잠들었다는 '인비간모(殷比干莫)'이라는 글을 남겼다. 콩쯔 이후 총 64개의 비석이 만들어 졌는데, 친(秦), 한(漢), 탕(唐), 송(宋) 등 중국의 모든 왕조는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베이웨이(北魏)의 샤오원띠(孝文帝)는 비간의 사당을 건립하고 '황제조은비간묘문'을 만들었다.
탕의 타이종(太宗)은 비간을 인의 태사로 봉하고, 제사 제문 내용을 담은 '봉은태사비간소', '제은태사비간문'을 만들어 묘역에 조성하였다. 위안(元)의 런종(仁宗)조 몽골 유민들은 비간의 동상과 '사수비간묘비' 등의 비석을 만들었다. 밍(明)의 홍쯔띠(弘治帝)는 사당에 건축 양식을 추가로 중건였다. 칭(淸)의 치엔룽띠(乾隆帝)는 '과은태사묘유작'을 지어 사당의 비석에 해서체로 새겨 넣었다. 웨이후이시는 1993년부터 매년 비간기념회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비간이 죽은 뒤 그의 부인은 허난성 안양(安養) 피신하는 가운데 아들을 낳자, 린(林) 성을 주었다고 한다. 비간의 아들 지엔(堅)은 장린샨(長林山)에 은거하면서 성을 린(林)으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저우(周)의 원왕(文王)이 비간 묘역을 중건하면서 비간 부인 아들에게 린성(林姓)을 주었다는 설도 있다. 지엔이 안양의 지명에서 자신의 성을 땄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지 않나 생각한다.
저우(周)의 허난성, 허베이성(河北省), 저장성(浙江省), 광둥성(廣東省), 뤄양(洛陽)의 숑누(匈奴), 중국의 소수민족 야오덩족(姚鐙瘯), 리족(黎族), 쉐족(畲族), 타이완(台湾) 원주민, 한국 등으로 퍼져 나갔다. 이민족까지 포함하면 7~8가지 계통이 더 있다. 중국에서 린씨(林氏)는 10위 안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래도 대성(大姓)에 속한다.
임씨(林氏) 국제적인 성씨다. 임씨로서 명성을 드날린 인물에는 중국 공산당 제2인자였던 린뱌오(林彪), 타이완의 세계적인 석학 린위탕(林語堂), 조선시대 풍운의 혁명가 임거정(林巨正), 인조 때 숭명배청의 명장 임경업 등이 있다.
한국 임씨(林氏)의 도시조(都始祖)는 탕(唐) 원쫑(文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8학사의 한 사람인 린빠지(林八及)로 알려져 있다. 린빠지는 정치적인 화를 피해 신라에 망명해서팽성(彭城) 즉 지금의 경기도 평택(平澤) 용주방(龍珠防)에 자리를 잡고 세거(世居)하였다. 이런 연유로 린빠지의 후손들은 본관을 평택(平澤)으로 삼았다.
린빠지 이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평택 임씨는 두 계통이 있다. 고려 말 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을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중시조(中始祖) 1세로 하는 평택임씨가 있고, 역시 고려 말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위(太尉) 찬성사(贊成事)와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진 임언수(林彦修)를 중시조 1세로 하는 평택임씨가 있다.
한국의 임씨는 나주임씨(羅州林氏)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택임씨에서 분관했다. 나주임씨는 고려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임비(林庇)를 시조로 하고 있다. 평택임씨는 세월이 흐르면서 부안(扶安), 예천(醴泉), 조양(兆陽), 경주(慶州), 익산(益山), 은진(恩津), 진천(縝川), 안동(安東), 순창(淳昌), 장흥(長興), 옥야(沃揶), 안의(安薏), 울진(蔚珍) 등으로 분적(分籍)되어 세계(世係)를 이어왔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모든 임씨(林氏)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자손이란 관념을 가지고 있다.
평택임씨는 고려 때 특히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지만 조선에 들어와서도 크게 융성하였다. 임세춘의 아들 자(子)는 예의판서(禮儀判書)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고, 증손 임정(林整)은 조선 태종 때 예조판서와 서북도병마절도사, 평양부윤을 지냈으며, 성종 때는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임정의 아들 임인산(林仁山)과 임명산(林命山)은 형제가 차례로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가문을 중흥시켰다.
임인산의 묘는 풍수에서 종을 엎어 놓은 것 같은 복종형(伏鍾形)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돌혈(突穴) 명당으로 정문백회혈(頂門百會穴) 또는 천풍혈(天風穴)이라고도 불린다. 임세춘의 12세손이자 임명산의 7세손, 임황의 4남이 바로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다. 그의 형 임형업(林亨業)도 병자호란 때 모친상으로 피난을 가지 못해 청군에게 붙잡혔으나, 그들도 '효자는 해칠 수 없다'고 찬탄할 정도로 효성이 뛰어나 경기도 평택에 충효정문이 세워졌다.
2016.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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