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단월동 조선시대(朝鮮時代) 존명반청(尊明反淸)의 상징적 인물인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
1594∼1646
) 장군의 사당(祠堂) 충렬사(忠烈祠,
대한민국 사적 제189호
)를 참배한 뒤 유물전시관을 찾았다. 임충민공 유물전시관은 충렬사 외삼문 밖 동남쪽에 서향으로 앉아 있다.
충렬사 유물전시관
유물전시관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멘트 기둥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식 단층 건물이다. 사찰 건물처럼 유물전시관도 목조로 지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시멘트로 지은 내외삼문, 충렬사 건물도 마찬가지다.
추련도
임경업 장군이 평상시 보호용으로 지니고 있던 추련도(秋蓮刀)는 충북유형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추련도의 총길이는 101.4cm이고, 폭 6cm, 칼날 길이 86.7cm이다. 추련도는 칼과 칼집이 모두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도신(刀身)은 쇠, 칼집과 손잡이는 목재, 목재를 고정시키는 장식은 황동(黃銅)과 구리로 되어 있다. 칼코는 방짜 철판 위에 주석과 납 합금으로 도금하였다.
추련도 양날에는 7언절구 검명시(劒銘詩)가 새겨져 있다. 칼날의 검명시 싯구에서 도명(刀名)을 따왔음을 알 수 있다.
時呼時來否在來(시호시래부재래) 시절이여 때가 오면 다시 오지 않나니
一生一死都在筵(일생일사도재연) 한번 나고 죽는 것이 모두 여기 있노라
平生丈夫報國心(평생장부보국심) 대장부 한평생 나라 위한 마음 뿐이니
三尺秋蓮磨十年(삼척추련마십년) 석 자 추련검 십 년 동안 갈고 갈았노라
'林物合有時□□'이란 구절도 있는데, 두 글자는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다. 두 글자의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추련(秋蓮)은 가을 연꽃이다. 연꽃은 원래 7~8월에 핀다. 다른 연꽃이 피지 않을 때 의연하게 핀 추련은 곧 지조가 있는 대장부를 상징하는 것이다. 검명시에는 임충민공의 기개와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잘 나타나 있다.
충렬사에는 원래 추련도와 함께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던 용천검(龍川劍)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용천검은 한국전쟁 때 분실되었다고도 하고,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때 일본인이 훔쳐갔다는 설도 있다.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紀, 1890) 권1의 유문(遺文)에는 한 수의 7언절구 검명시가 기록되어 있다. 추련도 검명시와 좋은 비교가 된다.
三尺龍泉萬卷書(삼척용천만권서) 석 자 길이 용천 명검과 일만 권의 책
皇天生我意何如(황천생아의하여) 하느님 날 내신 뜻 이에 있지 않은가
山東宰相山西將(산동재상산서장) 산동의 재상들과 산서의 장군들이여
彼丈夫兮我丈夫(피장부혜아장부) 그대들이 장부라면 나 또한 장부일세
하늘이 낸 대장부임을 천명한 검명시다. 진한(秦漢) 이래 중국의 산둥(山東) 지방에서는 정승이 많이 나고, 산시(山西) 지방에서는 장수가 많이 났다고 한다. 이 검명시에는 중국 대륙의 영웅호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사나이 대장부로서의 포부가 담겨 있다.
이경선이 쓴 '임경업의 인물 유적 전설의 조사연구(1984), 충주시에서 간행한 '충주의 구비문학(2002)에는 용천검과 추련검에 얽힌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경업이 평안도 철산(鐵山)의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으로 있을 때 하루는 용천(龍泉)이라는 연못가를 거닐고 있었다. 바로 그때 연못 속에서 커다란 용이 입에 검을 물고 나타나 임경업에게 떨어뜨리고 사라졌다. 이 검이 바로 용천검이다. 또, 임경업이 의주(義州) 부윤(府尹)으로 있을 때 청천강(淸川江) 속에서 물개 한 마리가 보검을 물고 나와 바쳤다. 이 검이 바로 추련도이다. 용천검과 추련도를 받은 뒤부터 임경업은 무인으로서 명성을 더욱 떨쳤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임경업이 용천에서 용천검, 청천강에서 추련검을 얻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임경업은 출생 과정에서 용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물과 관련이 매우 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두 검에 얽힌 전설은 장차 임경업이 나라에 큰 일을 할 것이라는 예언적인 암시가 되고 있다.
교지
숭정(崇禎) 6년 2월 2일에 임경업을 가선대부(嘉善大夫) 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事)로 임명한다는 교지(敎旨0이다. 숭정은 명(明) 의종(毅宗)의 연호이다. 숭정 6년은 1633년(인조 11)이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 종이품(從二品)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종이품의 하계(下階)로서 가정대부(嘉靖大夫)와 가의대부(嘉義大夫)보다 아래 자리이다. 영변대도호부사로 임명된 임경업은 평안북도(平安北道) 피현군(枇峴郡)의 백마산(白馬山)에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수축(修築)하고 국방을 강화했다.
교지
숭정 7년(1634년, 인조 12) 7월 13일 임경업의 부인 숙부인 이씨(淑夫人李氏)를 정부인(貞夫人)으로 임명한다는 교지이다. 숙부인은 조선시대 외명부(外命婦)인 문무관의 처에게 내린 정3품 당상 작호(爵號)이다. 문무관 정3품의 당상관(堂上官)인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절충장군(折衝將軍)의 적처(嫡妻)에게 내렸다. 정부인은 외명부의 제2위 봉작(封爵)이다. 정종 2품 문·무관의 처에게 남편의 품계에 따라 주던 봉작으로, 왕세자의 적출녀(嫡出女)인 군주(郡主), 종친의 처인 현부인(縣夫人)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
교지
숭정 9년(1636년, 인조 14) 임경업을 가선대부 의주부(義州府) 부윤(府尹)으로 임명하는 교지이다. 의주 부윤과 청북방어사를 겸임하던 임경업은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고 1634년 파직되었다가 1636년에 무혐의로 복직되었다. 부윤은 조선시대 지방관청인 부(府)의 우두머리이다. 종2품 문관의 외관직(外官職)이며, 관찰사와 동격이다. 경상도 경주부(慶州府),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함경도 영흥부(永興府:뒤에 咸興府), 평안도 평양부(平壤府), 의주부(義州府)에 두었다. 한성부, 수원부, 광주부(廣州府), 개성부, 강화부의 장은 부윤이라 하지 않고 판윤(判尹) 또는 유수(留守)라 하였으며, 외관직이 아닌 경관직(京官職)이었다. 부윤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광역시장 정도 되지 않을까 한다.
의주 부윤 임경업은 압록강 맞은 편의 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백마산성에서 청군을 차단한 뒤 조정에 원병을 요청했으나 친청파 김자점 (金自點)의 방해로 결국 남한산성까지 포위되고 말았다.
교지
숭정 9년(1636년, 인조 14) 4월 16일 임경업을 가의대부(嘉義大夫) 의주부 부윤으로 임명한다는 교지이다. 가의대부는 조선시대 종이품 동서반(東西班)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이다. 종이품의 상계(上階)로서 가선대부보다 상위 자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가정대부(嘉靖大夫)였으나 1522년(중종 17)에 명 세종이 연호를 가정(嘉靖)으로 정하자 휘(諱)를 피해서 가의대부로 개칭하였다. 경국대전 이후로 문무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교지
숭덕(崇德) 3년 9월 19일 임경업을 자헌대부(資憲大夫)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平安道兵馬水軍節度使)로 임명한 교지이다. 숭덕은 청(淸) 태종(太宗) 홍타이지의 두 번째 연호로 1636∼1643년간이다. 조선 인조(仁祖) 14∼21년에 해당한다. 홍타이지는 1636년에 국명을 후금(後金)에서 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한 뒤 연호도 천총(天聰)에서 숭덕으로 바꿨다. 제1, 2차 조청전쟁(朝淸戰爭,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홍타이지다. 숭덕 3년이면 1638년(인조 16)이다.
자헌대부는 조선시대 문신 정2품 하계의 품계명이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산계(文散階)의 품계인 정헌대부(正憲大夫)와 자헌대부가 제정되었다. 병마수군절도사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겸직이다. 수군절도사는 정3품 당상관으로 수군(水軍)을 통솔하였으며, 수사(水使)라고도 불렀다. 평안도에는 수군절도사를 두 명 두게 되어 있었다. 수군절도사 1명은 관찰사(觀察使), 다른 1명은 병마절도사가 겸임했다.
병마절도사는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종2품 무관직으로 병사(兵使)라고도 한다. 평안도와 충청도, 경상좌우도, 전라도, 함경남북도에는 각각 1명씩의 병마절도사가 임명되었는데, 이를 단병사(單兵使)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 감영의 관찰사가 겸직하는 겸병사(兼兵使)가 8도에 1명씩 있었다.
교지
기묘년(己卯年) 4월 임경업의 부인 숙부인 이씨를 정부인으로 임명한다는 교지이다. 기묘년이면 1639년(인조17)이다. 숭정 7년(1634년, 인조 12) 7월 13일에 숙부인 이씨를 정부인으로 임명한 바 있는데, 5년 뒤에 다시 같은 작위를 준 이유를 모르겠다.
교지
기묘년(1639년, 인조17) 10월 25일 임경업을 정헌대부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로 임명한다는 교지이다. 지헌대부로 임명한 지 1년만에 정헌대부로 승진한 것이다. 정헌대부는 조선시대 정이품 동서반 문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다. 정이품의 상계로서 자헌대부보다 상위 자리이다.
교지
가운데 걸려 있는 교지는 강희(康熙) 37년 3월 13일 임경업을 정헌대부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강희(康熙, 만주어 얼허 타이핀, Elhe Taifin)는 청 성조(聖祖) 강희제(康熙帝)의 연호로 1662년~1722년까지 61년간 쓰였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 쓰인 연호이다. 강희 37년은 1698년(숙종 24)에 해당한다. 강희제는 섭정 구왈기야 오보이(오배)의 반란, 오삼계(吳三桂)와 상가희(尙可喜), 경중명(耿仲明) 등이 일으킨 삼번의 난(三藩之亂)을 진압하고, 타이완(台灣)을 정복했으며, 몽골과 티베트에 원정군을 보내는 등 중국 역대 왕조 중 마지막 전성기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왼쪽에 걸려 있는 교지는 병술년(丙戌年) 4월 정헌대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임경업에게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세자이사(世子貳師)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莩摠管)을 증직(贈職)하고, 충민공(忠愍公)이란 시호를 내린다는 내용이다. 병술년은 1706년(숙종 32)에 해당한다. 1697년(숙종 23) 임중번(林重蕃)이 부친 임경업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8년만에 비로소 신원
(伸冤)
, 복관(復官)된 것이다.
숭정대부는 종일품 문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다. 종일품의 하계로 숭록대부(崇祿大夫)보다 아래 자리이다. 경국대전 이후 문무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에서는 종친과 의빈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지중추부사는
조선시대 일정한 직무가 없는 당상관들을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한 중추부(中樞府)의 정2품 관직이다. 좌찬성은 의정부의 종1품직으로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과 외교 등을 맡아서 보는 벼슬이다. 삼고(三孤)의 하나이다. 판의금부사는 의금부의 으뜸 벼슬인 판사(判事)로 종일품, 세자이사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종1품 벼슬, 지훈련원사는 무재 시험(武才試驗)과 무예훈련(武藝訓鍊)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훈련원의 정2품 무관 벼슬, 도총관은 오위도총부의 정2품 무관직
이다.
오른쪽에 걸려 있는 교지는 건륭(乾隆) 21년 2월 4일 정부인 이씨에게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작호를 내린다는 내용이다. 건륭은 청 고종(高宗) 건륭제(乾隆帝)의 연호로 1736년~1795년까지 60년간 쓰였다. 건륭제는 강희제의 손자로 청의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 황제이다. 건륭제를 끝으로 청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건륭 21년은 1756년(영조 32)에 해당한다.
정경부인은 조선시대 외명부인 문무관의 처에게 내린 정종1품의 작호이다. 문무관의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 적처(嫡妻)와 종1품 숭록대부, 숭정대부의 적처가 이에 해당한다. 정경부인은 문무관의 처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 만인의 존경을 받던 지위였다.
소설 '임장군전' 판목
판목(版木)은 인쇄를 하기 위해 글씨를 새긴 나무이다. 소설 '임장군전(林將軍傳)'은 임경업이라는 실존인물의 정사(正史)에 기초해서 쓴 소설이기에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紀)'와도 상당한 일치를 보인다. 임경업은 제1차 조청전쟁(정묘호란) 때 가장 적극적으로 청군에 대항한 장군이다.
가상의 여걸 박씨를 등장시켜 청에 통쾌한 복수를 시도한 소설 '박씨전'에서도 임경업은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소설 속 임경업은 박씨의 남편 이시백(李時白)과 함께 남경(南京)에 사신으로 가서 위기에 처한 명나라를 구하기도 하고, 박씨에게 대패하고 후퇴하는 타타라 잉굴다이(英俄尔岱, 龍骨大)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기도 한다.
임경업은 1636년(인조 14) 제2차 조청전쟁(병자호란) 당시 자신의 부임지인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지켰다. 이에 청군은 백마산성을 포기하고 바로 한양으로 진격하여 인조가 도망쳐 들어간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조청전쟁 이후에도 임경업은 계속 명군(明軍)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청군을 곤경에 빠뜨리는 데 앞장서서 청에서는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1643년(인조 21) 임경업은 명에서 4만 군사를 이끌었으나 이듬해 베이징(北京)을 함락한 청군에게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임경업의 처리를 놓고 고심하던 청은 1646년 6월 사은사(謝恩使) 이경석(李景奭)의 귀국 길에 그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청은 조선에서 임경업을 대신 처리해 줄 것을 바랐던 것이다. 친청파(親淸派) 김자점(金自點) 등은 임경업이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에 연루되었음을 주장하였다. 임경업은 투옥되어 고문 끝에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임경업을 숭모한 백성들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민간에서는 그의 화상(畵像)을 신당에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에 관한 비극적인 설화들도 백성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임장군전'이 인기를 끌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이처럼 '임정군전'에는 현실에서는 비록 청에 패했지만 영웅 임경업이 영원히 살아서 청을 물리쳐 주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민중들은 소설이라는 공간 속에서 임경업이라는 영웅을 통해 청에 무참하게 짓밟힌 자존심을 위로받고 울분을 삭힐 수 있었던 것이다.
제1차 조청전쟁(정묘호란)과 제2차 조청전쟁(병자호란)은 당시 국제정세에 어둡고 무능한 조선의 인조와 명분과 의리론에 얽매인 존명반청파 벼슬아치들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당시 명은 망해가는 나라, 청은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이었다. 청이 친하게 지내자고 손을 내미는데도 이를 뿌리친 조선의 지배층들을 보면 수레 앞에 버티고 선 사마귀가 떠오른다.
지배층이 무능하면 백성들만 죽어난다는 교훈을 제1, 2차 조일전쟁과 제1, 2차 조청전쟁,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한국전쟁에서 깨달아야만 한다. 지배층은 언제나 백성들이야 죽든 말든 나라야 망하든 말든 자기들 살길만 찾는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만고의 진리다.
압록강연변방위도
영남연해형편도
부산진도
압록강연변방위도(鴨綠江沿邊方位圖)는 의주의 압록강 연변을 지도로 제작한 것이다. 의주 부윤 당시 임경업의 손때가 묻어 있는 유물이다. 영남연해형편도(嶺南沿海形便圖)는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지도로 영남과 호남을 포함한 남해안의 해로를 표식한 군사적 목적을 지닌 관방지도(關防地圖)이다.
부산진도(釜山鎭圖)는 동래부 부산포 주변의 해안지대를 묘사한 지도이다. 압록강연변방위도와 영남연해형편도, 부산진도는
오래전부터 충렬사에 보존되어 오다가 한동안
분실되었다. 세림문화재단(이사장 임경순)은
근래에 이 세 지도를 입수하여 1982년 5월 30일 충렬사에 기증하였다.
임장군 편지
임장군 편지
임장군 편지는 1642년(인조 20) 12월 4일 이대장(李大將) 편에 받은 편지를 보고 답장으로 보낸 서간문이다. 임경업 장군의 유필 간찰(簡札)로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卽者 李大將之來 傳於惠札 憑審至寒 經履增吉 慰沃欣瀉 何可量也 慶業 以女奴之病 出避他舍 昨始還入舊寓矣 歲聿行且盡 庭闈之變慾不自堪 奈何奈何 示人譽云云 殊可笑 設有之 是吾時英 數勉頻戒之效矣 第此 必無源水之盈溝 幾何期不涸也 惟乞 時加好言海隅終免於多口也 齋記 北歸前 可以副之 何相俟也 近數次看近思 不知處漸多 將待時英一來奉叩耳 頃送新書 於李大將 使之傳致 其果見耶 餘不宣 狀末
壬午臘月初四日 林慶業 拜手
이대장 편에 보낸 편지를 보니, 엄동설한에도 건강하고 평안하다고 하니 위로가 되고 넘치는 기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경업(慶業)은 여종이 병이 들어 다른 집으로 나가 피해 있다가 어제서야 옛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세밑에 부모님에 대한 도리를 다해야 함을 생각하면 차마 견디기 어려우니 이를 어찌하리오. 보여준 사람들이 칭찬한다고 한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나 이는 우리 시영(時英)이 자주 권면하고 자주 깨우쳐 준 결과입니다. 이는 마치 수원지가 없는 물이 개울에 넘치는 것과 같아서 그 마르지 않음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바라건대, 여기 먼 바다 끝에 좋은 말씀을 종종 보내주셔서 쓸데없는 말하는 것을 면하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재기문(齋記文)은 북쪽으로 돌아가기 전에 부칠 수 있으니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근래 수차례 근사록(近思錄)를 읽었지만 모르는 곳이 많아 시영(時英)께서 한번 오시기를 기다려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새 책은 방금 이대장이 부리는 사람 편에 전하도록 하였는데 받아 보셨는지요.
1642년(인조 20) 12월 4일 임경업 배상
임충민공실기
임충민공실기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記)는 1791년(정조 15) 왕명에 따라 좌승지(左承旨) 윤행임(尹行任)이 임경업의 유문(遺文)과 행적에 관한 글들을 모아 간행한 책이다. 1890년(고종 27) 후손 임순헌(林淳憲)은 초간본을 보충하여 활자본 8권 4책으로 중간하였다. 권두에는 송병선(宋秉璿), 이재돈(李載敦), 이필용(李弼容)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민두호(閔斗鎬), 이재극(李載克)의 발문이 있다.
1, 2권에는 유문(遺文) 6편, 충렬사비(忠烈祠碑) 1편, 윤음(綸音) 1편, 사제문(賜祭文) 10편이 실려 있다. 유문의 '검명(劒銘)'은 대장부의 기개와 포부를 표현한 글이다. 유문 중 여류림서(與柳琳書)는 1636년 임경업이 의주 부윤으로 있을 때 5천 병력만 주면 여진(女眞)의 본거지에 쳐들어가 섬멸하겠다는 내용이다. 진만상편의급군무소(陳灣上便宜及軍務疏)는 1638년 역시 의주 부윤으로 있을 때 국방대책을 상주(上奏)한 것이다. 임경업은 이 소에서 백마산성 등의 수축과 군대 보충, 군대 재배치, 쇄마(刷馬)의 폐단 제거 등 6개항의 적침대비책(敵侵對備策)과 폐단 제거를 강조한 뒤 군율을 엄하게 할 것(嚴軍律), 장수를 가려서 쓸 것(擇將帥), 병사들의 훈련을 간편하게 할 것(簡士卒), 기계를 정비할 것(整器械),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할 것(伸寃抑昔者), 하늘의 재앙을 조심할 것(敬天災) 등 6개항의 군비대책을 설명하였다.
3, 4권에는 전(傳) 3편, 후서발부(後敍跋附) 1편, 임충민공사적(林忠愍公事蹟) 1편, 시 19수, 대명충의임공전(大明忠義林公傳) 1편이 수록되어 있다. 5, 6권에는 연보 2편만 실려 있다. 7, 8권에는 행장, 신도비, 묘갈명, 제문, 청액소(請額疏), 영건통문(營建通文), 상언(上言), 현충사건치록(顯忠祠建置錄), 현령록(顯靈錄), 현충지개간소이사록(顯忠誌開刊所異事錄)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대명충의임공전은 임경업의 일생을 적은 것이고, 연보는 임경업을 연령별로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임충민공실기는 전기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김기풍 이현묵 파견문
왼쪽은 이현묵(李顯默) 파견문이다. 건륭 57년(1792년 정조16) 3월 27일 왕명으로 예조좌랑(禮曺佐郞) 이현묵을 파견하여 임경업의 제사를 논하게 했다는 문서다. 이현묵에 대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오른쪽은 김기풍(金基豊) 파견문이다. 숭정 189년 9월 11일 왕명으로 충주목사(忠州牧使) 김기풍을 파견하여 임경업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문서다. 숭정 연호는 명의 멸망과 함께 17년으로 끝났는데 이 문서에서는 여전히 숭정 연호를 쓰고 있다. 조선 지배층들의 명에 대한 사대주의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청이 조선을 괘씸하게 여길 만도 했겠다. 숭정 189년은 1816년(순조 16)에 해당한다.
정경부인 전주이씨 충렬쌍성정려문
충렬쌍성정려문(忠烈雙成旌閭文)은 임경업의 후손들이 정경부인 전주이씨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적은 글이다. 1642년 청의 명으로 조선 군사에게 압송되던 임경업은 승려로 변장하고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한 뒤 회암사(檜巖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이를 빌미로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 내 반청세력에 대한 일제 소탕령을 내리는 한편 임경업의 부인을 잡아 만주 선양(瀋陽)으로 보내게 하여 고문했다. 임경업은 조선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자 1643년 명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고, 그의 부인은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 없다며 1643년 (인조 21) 9월 26일 선양의 감옥에서 자결했다. 이에 감복한 청은 부인의 시신을 정중하게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각조홀기초록
각조홀기(各條笏記)는 선전관청(宣傳官廳)의 각종표식이나 호령, 동작 등 의식 절차를 적은 책이다. 선전관은 조선시대 왕을 위한 조하의식(朝賀儀式, 하례식)에서 백관의 전문(箋文, 축하장)을 읽어 바치는 집사관(執事官)이다. 선전관청 각조홀기는 조하의식에서 발생한 사례들을 21개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초록(抄錄)은 필요한 부분만을 뽑아서 기록한 것이다.
충렬사홀기초록
충렬사홀기(忠烈祠笏記)는 충렬사의 제사 의식의 절차를 적은 책이다. 충렬사 제향은 봄과 가을에 두 번 올렸다. 이 책에는 축문, 제물의 진설 방법, 제사의 절차 등을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제사를 지낼 때는 먼저 알자(謁者), 찬인(贊引), 초헌관(初獻官)이 전폐례(奠幣禮)를 행한 다음 초헌례(初獻禮), 그리고 축문(祝文)을 낭독하고 아헌관(亞獻官)이 아헌례(亞獻禮)를 행한다. 변두(籩豆)를 걷는 예와 망예례(望瘞禮)를 끝으로 제사는 끝난다.
충렬사원지
충렬사원지(忠烈祠院誌)는 충렬사의 연혁을 적은 책으로 임보영(林輔榮)이 지었다. 충렬사원지에는 임경업 장군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사적도 기록되어 있다.
계하사목
계하사목(啓下事目)은 1834년에 임경업 장군의 후손이 충훈부(忠勳部)에 등급사절(謄給事節)을 올린 문서이다. 계하(啓下)는 중앙관청이 왕에게 어떠한 사안에 대한 보고를 올려(啓), 그 내용에 대한 임금의 재결을 내려받은(下) 것이다. 사목(事目)은 어떠한 사안에 대해 왕의 결재를 받는 규정을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떠한 사안(事)의 시행과 관련한 규정들의 조목(目)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왕에게 올린 사목이 왕의 결재를 얻었다면 계하사목으로 승격이 되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통령령에 해당한다.
충훈부 조선시대에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이나 그 자손을 대우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관청이다. 등급(謄給)은 조선시대 관부(官府)로부터 발급받는 소송전말(訴訟顚末)의 등급서를 말한다. 소송자가 승소판결의 제사(題辭, 처분, 판결문)나 입안(立案)을 잃어버렸을 경우, 또는 승소사실을 증거로 보존할 목적으로 관부에 신청하여 발급받게 된다. 따라서 등급에는 곳곳에 발급관부의 관인을 찍었다. 사절(事節)은 어떤 사안에 대한 항목이란 뜻이다.
주로 공신의 자손이 조상의 공덕으로 잡역이나 세금 등을 면제받기 위해 충훈부에 청원서를 올리고, 그 청원서가 편전(便殿)에 전달되어 왕이 윤허하면 이것이 바로 계하사목이다. 계하사목을 받으면 그 자체가 큰 영예가 된다. 따라서 이것을 받은 가문에서는 계하사목이라는 표제로 책자를 만들어 대대손손 보관하기도 한다.
어제비문
어제달천충렬사비 탁본
아제비문(御製碑文)은 1791년(정조 15) 정조가 글을 친히 지어 비석에 새겨 세우도록 내린 어제달천충렬사비문(御製達川忠烈祠碑文)을 적은 책이다. 어제비문 옆에는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 충렬사비)와 정부인완산이씨정렬비
(貞夫人完山李氏貞烈碑, 정렬비) 탁본도 전시되어 있다.
충렬사비와 정렬비는 충렬사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 한쪽에 나란히 서 있다. 충렬사비는 비좌개석(碑座蓋石)의 형태이며, 비의 크기에 비해 화강암 대석(臺石)의 규모가 다소 크다. 비신(碑身)은 높이 183㎝, 너비 71㎝, 두께 42㎝이고, 개석은 지붕돌의 형태이다.
충렬사비의 앞면과 뒷면 상단에 좌횡으로 음각(陰刻)된 전서체(篆書體) 비제(碑題) '御製達川(어제달천)’과 '忠烈祠碑(충렬사비)'는 이조판서 윤동섬(尹東暹)이 쓴 것이다. 비문은 정조가 짓고, 비문 글씨는 예조판서 이병모(李秉模)가 썼다. 앞면과 뒷면의 글자는 총 1,420여 자이다.
정렬비는 1697년(숙종 23)에 내린 정려가 화재로 불탄 뒤 후손들이 복구하지 못하자 1745년(영조 21)에 충주목사 한덕필(韓德弼)이 비용을 내어 비석을 세우고 그 전말을 기록하였다. 비좌규수(碑座圭首)의 형태로 대리석으로 조성하였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215㎝, 너비 83㎝, 두께 27㎝이며, 대석은 충렬사비보다 낮다. 앞면의 비제는 해서체(楷書體)로 ‘大明忠臣林將軍慶業妻貞夫人完山李氏貞烈碑(대명충신임장군경업처정부인완산이씨정렬비)’라 음각되어 있는데, 글씨를 붉은색으로 칠했다. 뒷면의 음기(陰記)는 정려를 내린 과정과 화재 이후 복원해서 건립한 내용을 새겼다. 음기의 글은 자헌대부지중추부사 이세필이 짓고, 글씨는 진사 이정하가 썼다.
수결 세필 글씨
행목사(行牧使)의 '一心(일심)' 수결(手決)이 있는 문서다. 세필 글씨로 쓴 문서 맨 끝에 수결이 되어 있다. 수결은 '一心' 두 글자를 변형해서 만든 것으로 그 형태가 매우 특이하다. 이를 일심결(一心決)이라고도 한다.
수결은 조선시대 관직에 있는 사람들만 쓰던 서명(署名) 즉 싸인(Signature)이었다. 수결은 직함 밑에 ‘一心’ 두 글자를 쓰도록 되어 있었다. ‘一心’을 쓴 것은 어떤 사안(事案)의 결재에 있어서 오직 '한마음(一心)'으로 하늘에 맹세코 추호의 사심을 버리고 공심(公心)으로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수결법은 ‘一’자를 길게 긋고, 그 위아래에 점이나 원을 더하여 '一心' 두 자가 내포되도록 하면 된다.
조선시대의 수결 문서는 직함만 쓰고 이름은 없기에 수결만 보고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수결의 주인공을 알려면 사서(史書)를 뒤져 그 당시 누가 그 직(職)에 있었는지 찾아봐야 한다.
충렬사 충렬사강당 편액
충렬사 편액
충렬사강당 편액
'忠烈祠(충렬사)' 편액(扁額)은 사액현판(賜額縣板)으로 1727년(영조 3)에 사액되었다. '숭정기원후정미년(崇禎紀元後丁未年)' 하단의 패인 부분은 영조(英祖)의 낙관(落款)이 있었던 자리로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일본들이 훼손했다고 한다. 최근 충렬사 처마에 걸려 있는 일본군 장교 출신 독재자 박정희가 쓴 편액을 떼어내고 이 편액을 다시 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여론도 일어나고 있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는 숭정년간(1628~1644년)이 아니라 그 후대의 연대이다. '숭정기원후정미년'은 숭정 연호를 쓴 이후에 돌아온 정미년을 말한다. 숭정연간 이후 정미년은 1667년과 1727년 두 번 돌아왔다. 충렬사 편액은 1727년에 사액되었으니 여기서 정미년은 숭정기원후 두 번째 정미년이 되는 것이다. 명이 망했음에도 망한 나라의 연호를 계속 쏙 있는 것은 대단한 사대주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물전시관에는 '忠烈祠講堂(충렬사강당)' 편액도 걸려 있다. 편액을 쓴 때는 '崇禎紀元後三壬寅季秋下(숭정기원후삼임인계추하)'는 숭정기원후 3번째 임인년(壬寅年) 늦가을(季秋)이다. 숭정기원후 임인년은 1662년, 1722년, 1782년, 1842년에 돌아왔으니 3번째 임인년은 1782년이 되겠다. 계추(季秋) 또는 만추(晩秋)는 음력 9월로 늦가을이다. 그러니까 충렬사강당 편액은 1782년(정조 6) 음력 9월에 쓴 것이다.
정조는 1791년에도 충렬사 비문을 친히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며, 임충민공실기를 간행케 하여 임경업의 행적을 기렸다. 정조가 임경업에 대해 얼마나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무를 숭상했던 정조는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들을 기리고 예우했다. 정조는 특히 이순신
(李舜臣)
과 임경업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충렬사강당 편액 글씨는 한선이란 사람이 쓴 것이다. 한선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충렬사강당 편액도 이것으로 바꿔서 거는 것이 어떨까?
2016.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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