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으로 봄나들이를 하러 길을 떠났다. 삼척시내를 관통하는 오십천변(五十川邊)의 벚꽃나무들이 꽃망울을 마구 터뜨리고 있었다. 오십천의 봄은 이제 막 절정에 이르기 직전이었다.
삼척시내를 관통하는 오십천
오십천변 벚꽃길
오십천변 벚꽃길
오십천변 벚꽃길을 걸으면서 춘심(春心)에 젖다. 중궈(中國)의 이미자(李美子) 덩리쥔 (鄧麗筠)이 아련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티엔미미(甛蜜蜜)'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밤이었다면 아마 천커신(陳可辛)이 감독하고 리밍(黎明)과 장만위(張曼玉)가 주연한 영화 '티엔미미(甛蜜蜜)'의 OST '예라이샹(夜來香)'을 듣고 싶었을 거다.
오십천은 강원도 삼척시와 태백시 경계인 백병산(白屛山, 1,259m)에서 발원하여 미인폭포를 거쳐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도계읍 심포리에서 북북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며, 삼척시 마평동에서 동쪽으로 꺾여 오분동 고성산(古城山, 97m) 북쪽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오십천은 삼척도호부에서 물의 근원까지 47번을 건너야 하므로 대충 헤아려서 오십천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십천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오십천의 동쪽은 백병산과 육백산, 도마재로 이어지는 연봉, 서쪽은 갈마봉과 구봉산, 덕항산으로 이어지는 연봉이 분수령을 이룬다. 석회암층이 분포하고 있어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한 오십천 중류 유역에는 환선굴, 관음굴, 제암풍혈, 양터목세굴, 큰재세굴, 덕발세굴 등이 분포한 대이리동굴지대(천연기념물 제178호)를 비롯해 연화상굴, 연화하굴 등 많은 석회동굴이 있다. 하류인 삼척시 성내동 오십천변에는 관동팔경 중 제1루인 죽서루(竹西樓, 보물 213호)가 있다. 삼척에서는 1969년부터 오십천에 연어 치어 방류를 시작하여 연어잡이가 이루어지고 있다.
삼척 벚꽃동산 봉황산
오십천 건너편 정라동(汀羅洞)의 벚꽃동산 봉황산(鳳凰山, 149m)에도 벚꽃이 한창 피고 있었다. 봉황산 전체가 한창 울긋불긋 화려한 꽃대궐로 변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라동은 1986년에 삼척읍이 삼척시로 승격되면서 정상동(汀上洞)과 정하동(汀下洞)을 합쳐서 만든 동이다. 봉황산은 허목(許穆, 1595~1682)이 1662년(현종 3)에 쓴 척주지(陟州誌)에 그 기록이 보인다. 옛날에는 봉황산을 호악(虎岳)이라고 했다. 오십천이 휘돌아치면서 큰 소를 이룬 곳을 봉황지(鳳凰池) 또는 봉황담(鳳凰潭)이라고 했으며, 정상부에는 봉황대(鳳凰臺)라는 옛터가 남아 있다. 봉황산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봉황산 북쪽에는 승병산벼락바위(僧屛山霹靂岩)가 있다. 옛날 봉황산 북쪽에 동대지(東臺池)라는 연못이 있었고, 동대지 서북쪽 골짜기 가사곡(袈裟谷) 지금의 정라초등학교 자리에는 호대사(虎大寺)란 절이 있었다. 호대사 승려들은 동대지 가에 있는 우물에서 늘 쌀을 씻었다. 쌀을 씻을 때면 쌀뜨물을 먹으려고 연못의 잉어들이 몰려들곤 했다. 시간이 흐르자 잉어들도 승려들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때부터인지 승려들 사이에는 큼직한 잉어들을 잡아먹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승려들은 잉어 몇 마리를 건져 올려 바위틈에 숨어서 불에 굽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벼락소리와 함께 산이 무너저 내려 잉어를 굽던 승려들은 돌더미에 깔려 죽고 말았다. 살생하지 말라(不殺生)는 오계를 범하자 승려들에게 천벌이 내린 것이다.
삼척 시외버스 터미널 쪽에서 봉황산을 오르다 보면 정상부를 바라보는 석조미륵삼불좌상(石造彌勒三佛坐像)이 있다. 조선시대 동해안의 해상방어를 총괄하던 삼척포진(三陟浦鎭) 뒤편 언덕에는 죄수들을 처형하던 사형장이 있었다. 지금의 동두고개 즉 정라진에서 남양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너머 정라동사무소 맞은편 언덕이 조선시대의 사형장이었다. 사형장에서 처형을 당한 죄수들의 귀신이 봉황산 자락을 타고 내려와 읍내에 재앙이 자주 발생한다고 생각한 삼척부사(三陟府使) 이규헌(李奎憲)은 1835년에 미륵불 3구를 만들어 봉황산 정상을 바라보도록 세웠다. 이후 미륵삼불은 삼척읍내로 내려오는 사형수들의 사악한 기운을 막았다고 전한다.
그런데, 삼척포진의 군사들이 미륵삼불을 오십천에 빠뜨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삼척의 백성들은 큰 고통을 받았다. 이때 한 노인의 꿈에 미륵보살이 나타나 '나를 건져 주면 비를 내려 주겠다'는 현몽을 얻었다. 삼척부사가 선량 오십 명을 동원해서 미륵삼불을 건져내자 곧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내렸다고 한다. 1857년 주민들은 미륵삼불을 다시 지금의 남양동 백조아파트 뒤쪽으로 옮겼다. 미륵삼불은 조선시대 삼척의 석공이 삼척의 석재를 깎아서 만든 작품이기에 향토문화재로서 매우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봉황산의 북쪽에는 광진산(廣津山, 137.5m)이 있다. 광진산은 삼척시 교동에 있는 산이다. 척주지에 '광진산은 북정산 동쪽에 있는데 그 정상에는 연대(烟臺)가 있다. 삼척 진영(鎭營)의 주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삼척부 동쪽 6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강릉 우계현(지금의 동해시 옥계면) 어달산(於達山, 185m)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양야산(陽野山, 200m)과 응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481년(성종 12) 동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감시하기 위해 광진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했다. 봉수대에서는 삼척시와 동해가 한눈에 바라보인다.
봉황산의 동쪽 정상동에는 육향산(六香山)이 있다. 삼척군지인 진주지(眞珠誌)에는 '예전에 죽관도(竹串島)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육향산은 죽관도의 육향대(六香臺)에서 유래하였다. 지금은 육향산, 육향대 등으로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삼척포진이 있었다. 육향산은 원래 정라진(汀羅津) 앞바다에 있던 섬이었는데, 삼척항을 만들면서 육지와 연결되고, 이름도 육향산으로 바뀌었다.
육향산 정상에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와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육향정(六香亭)이 있다. 척주동해비는 1662년 삼척부사 허목이 당시 조수(潮水)를 물리치기 위해 세운 퇴조비(退潮碑)이다. 허목은 이황(李滉)과 정구(鄭逑)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李瀷)에게 물려줌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자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된 성리학자이다. 효종의 초상 때 모후의 복상기간 논쟁이 벌어지자 서인 송시열 등의 기년설을 반대하여 남인의 선두에서 삼년설을 주장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당시 삼척은 파도가 심하여 조수가 읍내까지 올라오고, 홍수 때는 오십천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허목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독창적인 고전자체로 써서 정라진 앞의 만리도(萬里島)에 척주동해비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졌다. 여지도서 부도에는 만리도,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와 대동여지도에는 만노봉(萬弩峰)으로 표기되어 있다. 정라진에 있으므로 정라도(汀羅島)라 하기도 했다.
그후 비석이 파손되어 조수가 다시 밀려오자 1709년(숙종 35)에 삼척부사 홍만기(洪萬紀)가 모사한 비석을 다음 해에 삼척부사 박내정(朴來貞)이 죽관도에 세워 조수를 막았다고 한다. 문장이 신비롭다고 평가받는 이 비석은 전서체에서 동방제일의 필치라 일컫는 허목의 기묘한 서체로도 유명하다.
평수토찬비는 척주동해비와 같이 세운 것이다. 비문은 중국 형산(衡山)의 우제(禹帝)가 썼다는 전자비(篆字碑)에서 48자를 선택하여 목판에 새겼다. 삼척군청에 보관하던 것을 1904년에 칙사 강흥대와 삼척군수 정운석 등이 석각하여 세운 것이다.
삼척의 역사도 흐르고, 오십천의 강물도 흐른다. 봉황산의 벚꽃동산을 뒤로 하고 오십천을 떠나다. 오십천의 봄을 남겨 두고.....
2016.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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