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는 최북단 고성에서 속초-양양-강릉-동해-삼척 해변을 잇는 240㎞의 낭만가도(浪漫街道, Romantic Road of Korea)가 있다. 낭만가도는 동해안을 따라 펼쳐진 시원한 바다와 멋진 해안 풍경을 바라보면서 달릴 수 있는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다.
낭만가도 공양왕릉길 전망대
삼척시 근덕면 광태리에서 낭만가도를 따라 남쪽으로 부남리, 동막리를 지나 궁촌리 공양왕릉(恭讓王陵, 강원도기념물 제71호)으로 향했다. 궁촌리 산구비를 돌아가는 언덕 위에는 정자를 세워 놓았다. 공양왕릉은 궁촌리 마을 바로 뒷산 기슭에 있었다.
공양왕(1345. 3. 9 ~ 1394. 5. 17)은 34대로 끝난 고려(高麗)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왕(王), 이름은 요(瑤)다. 고려 제20대 왕인 신종(神宗)의 차남 양양공(襄陽公)의 7대손이며,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왕균(王鈞)과 충렬왕(忠烈王)의 서장자(庶長子)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의 손녀 국대비(國大妃) 왕씨의 차남으로 어려서 정창군(定昌君)에 봉해졌다. 부계와 모계 모두 고려 왕실이다. 외가로는 충렬왕의 4대손이다. 왕비는 교하(交河) 본관의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노진(盧稹)의 딸인 순비(順妃)다.
1388년(우왕 14) 명(明)이 철령 이북의 반환을 요구하자 랴오둥(遼東)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군사반란을 일으켜 고려 왕권을 찬탈한 뒤 우왕(禑王)을 폐위시키고, 우왕의 아들 창왕(昌王)을 제33대 고려왕으로 세웠다.
1389년(창왕 1) 친명파 신진 사대부인 이성계와 정몽주, 심덕부(沈德符) 일파는 역모 혐의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제34대 고려왕으로 세웠다. 정창군은 이성계 일파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할 것이 뻔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 차례 고사하였으나 강압에 의해 억지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허수아비 왕이나 다름없었던 공양왕은 이성계의 지령에 따라 대신들을 파직시키거나 유배를 보내야 했으며, 이성계의 위협으로 우왕과 창왕을 죽이는데 동의해야만 했다. 결국 우왕은 강릉, 창왕은 강화에서 각각 살해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辛旽)의 아들과 손자로 몰아 군사반란을 합리화하였다.
이성계가 정창군을 공양왕으로 세운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정창군의 형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아들 이방번(李旁蕃)과 결혼하여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계 일파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명분으로 정창군을 고려 제34대 왕으로 세운 것이다. 공양왕은 이성계 일파의 집권 기반과 물적 토대 마련을 위해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를 개편했다. 요즘 말하는 개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집권층에서 입만 열면 떠드는 개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잘 따져봐야 한다.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정책을 쓰면서도 가증스럽게 개혁이라는 말을 하는 인간들에게 속아서는 안된다.
공양왕을 보필하여 고려를 재건하려고 한 정몽주, 이색(李穡), 길재(吉再) 등 온건개혁파들과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신왕조를 세우려고 한 이성계, 정도전(鄭道傳), 이방원(李芳遠) 등 역성혁명파(易姓革命) 사이에 치열한 권력쟁탈전이 벌어졌다. 이성계의 5남 이방원(조선 태종)이 온건개혁파의 중심 인물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이자 온건개혁파들의 응집력은 급격하게 와해되었다. 온건개혁파들은 목숨을 걸고 나라를 빼앗으려는 역성혁명파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공양왕이 재위한 1389년부터 392년까지는 이성계가 실권을 잡고 왕처럼 군림했다. 1392년(공양왕 4) 이성계가 이방원, 정도전, 조준(趙浚), 남은(南誾) 등의 도움을 받아 공양왕을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결국 고려는 34대 47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고려의 멸망과 함께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불교였다. 이성계와 친명파 신진사대부들은 배불숭유론(排佛崇儒論)에 따라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실시하여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게 하고, 불교의식을 금지시켰다. 조선 왕조는 오교양종(五敎兩宗)을 없애고, 출가 승려들을 환속시켜 군사로 징집하거나 집으로 돌려 보냈다. 권력자들은 불교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여 부정축재를 일삼았다.
공양왕은 7월 11일 왕자 왕석(王奭), 왕우(王瑀)와 함께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그래도 불안했던지 공양왕의 유배지를 강원도 간성으로 옮겼다. 이로 인해 공양왕에게는 간성왕(杆城王)이라는 호가 붙여졌다. 1394년(조선 태조 3) 3월 14일 이성계는 공양왕의 유배지를 다시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로 옮겼다. 후환이 두려웠던 이성계는 자객을 보내 4월 17일 궁촌리 고돌산(지금의 대왕산) 사래재(살해재)에서 두 아들과 함께 공양왕을 참수했다. 혹은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설도 있다. 공양왕의 나이 45세였다. 죽임을 당한 지 22년만에 공양왕은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
고려의 왕가(王家)였던 왕씨들도 이성계 일파에 의해 거의 멸족을 당하다시피 했다. 강화도로 집결하라는 이성계의 명을 받고 강화도로 건너가던 중 배를 침몰시켜 많은 왕씨들이 수장되었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전(全), 옥(玉), 금(琴), 전(田)씨로 변성(變姓)하고 산간벽지로 도망하여 목숨을 구하였다. 예로부터 권력지향형 인간들은 이성계처럼 잔인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공양왕릉 전경
공양왕릉 전경
공양왕릉
1416년(태종 16) 이방원은 공양군을 다시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두 곳에 있다. 고려의 왕릉들은 대부분 북한에 있다. 남한에는 강화도에 있는 21대 희종(熙宗)의 능인 석릉(碩陵)과 23대 고종의 능인 홍릉(洪陵), 삼척과 고양의 공양왕릉 밖에 없다.
고양의 고릉(高陵, 사적 제191호)에는 공양왕과 순비 노씨가 합장되어 있다. 쌍릉 형식의 능역에는 상석 1, 장명등 1기와 두 쌍의 석인, 석호 및 묘표석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고릉은 왕릉치고는 궁색한 느낌이 드는 왕릉이다. 조선의 왕릉들에서 볼 수 있는 홍살문과 사당, 비각, 참도(參道)는 아예 없고, 석인의 키도 1m가 채 안될 정도로 작고 옹색하다.
언덕 한켠에는 아름드리 낙락장송이 홀로 서 있고, 석축을 쌓아올려 조성한 궁촌리 공양왕릉 능역에는 4기의 봉분이 있다. 언쯧 보아도 남쪽의 가장 큰 봉분은 공양왕릉임이 분명하지만 나머지 3기의 봉분은 그 주인공을 알 수 없다. 2기는 왕자의 무덤, 나머지 1기는 왕의 빈,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 전한다. 공양왕릉 앞에는 길이 107cm, 너비 63cm의 상석 하나만 달랑 놓여 있어 왕릉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성계의 부하들이 공양왕을 죽였다는 살해재
사래재(殺害峙)는 대왕산(186.5m) 북쪽 기슭의 7번 국도상에 있다. 살해치는 공양왕과 그 추종자들의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들이 이 고개에서 살해되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살해재->사래재가 된 것이다. 궁촌(宮村)이라는 지명은 공양왕이 유배를 와서 머물던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지금은 궁촌해변과 삼척해양레일바이크 종착지로 유명하다. 공양왕의 장남 왕석이 살았다는 궁터, 말을 매던 마리방이라는 지명도 전한다.
삼척 궁촌리의 공양왕릉이 공양왕과 그 일족의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1662년(현종 3)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쓴 척주지(陟州誌)와 1855년(철종 6) 김구혁(金九赫)이 쓴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는 이곳이 공양왕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척의 주민들도 이곳을 공양왕릉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 당국은 세종실록의 '안성군 청룡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초상을 고양군의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의 고릉을 공양왕릉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공양왕이 살해된 뒤 삼척에 묻혔다가 조선 태종 때의 복위를 전후하여 고양으로 이전된 뒤 봉분을 그대로 남겨둔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공양왕을 죽인 관리들이 사형 집행의 증거로 목을 잘라 상부에 보인 뒤 고양에 묻고, 남은 시신은 삼척에 남겨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삼척의 묘는 처음 묻힌 곳이고, 고양의 고릉은 이성계가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에 묻은 곳이라는 설도 있다. 한 사람의 무덤이 두 군데나 있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다. 한 사람 두 무덤은 곧 두 동강난 공양왕의 시신처럼 고려 왕실의 멸망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망국의 왕과는 달리 새로운 왕조를 세운 사람의 조상은 왕으로까지 추존된다. 자손이 잘 되면 조상이 빛난다는 말이 맞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는 이성계의 고조부(高祖父) 목조(穆祖)가 살던 집터와 현조부(玄祖父) 이양무(李陽茂)의 무덤인 준경묘(濬慶墓)가 있고, 준경묘에서 4km 떨어진 하사전리에는 현조모의 무덤인 영경묘(永慶墓)가 있다. 아름드리 적송림(赤松林)의 울창한 숲 속에 잘 관리되고 있는 준경묘와 영경묘에는 홍살문과 사당, 비각까지 세워져 있어 그 흔한 망주석(望柱石)조차 하나 없는 공양왕릉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활기리(活耆里)는 황제가 나올 터라는 뜻의 황기(皇基)가 변한 것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공양왕릉이 퇴락하자 1837년(현종 3) 가을에 삼척부사 이규헌(李圭憲)이 개축하였고, 1942년 3월 20일 근덕면장 김기덕(金基悳)과 지역의 인사들이 다시 개축하였다. 최근에는 1977년 6월 근덕면장 최문갑(崔文甲)이 허물어진 봉분을 다시 쌓았다. 태조실록(太祖實錄)과 양촌집(陽村集) 등에는 1395년(태조 4)에 고려 왕조의 왕씨들을 위해 삼척과 강화, 거제 등지에서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근덕면 궁촌리에서는 3년마다 어룡제(漁龍祭)를 지내는데, 제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공양왕릉에서 먼저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비석 하나 없는 공양왕릉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무리 나라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왕이라지만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고려 망국의 비극적인 말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양왕릉을 떠나 궁촌해변으로 향하다.
2016. 4. 3.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척 대진항을 찾아서 (0) | 2016.04.12 |
---|---|
삼척 궁촌항을 찾아서 (0) | 2016.04.09 |
오십천의 봄 (0) | 2016.04.06 |
천마산 야생화를 찾아서 (0) | 2016.04.01 |
충민공 임경업 장군의 묘소를 찾아서 (0) | 2016.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