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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대진항을 찾아서

林 山 2016. 4. 12. 16:35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고려 공양왕릉과 궁촌항을 돌아보고 난 뒤 근덕면 동막1리 대진항을 찾았다. 동막1리 대진 일대는 지난 2012년 9월 정부가 부남리와 함께 원자력발전소 건설 예정지로 고시한 지역이다. 동막1리의 삼척방재일반산업단지 부지도 원전 건설 예정지에 들어가 있다. 


정부가 동막1리와 부남리 일대의 317만8292㎡를 원자력발전소 건설 예정지로 고시하자 삼척시민들은 거세게 반발하여 2014년 10월 9일 원전 수용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었다. 주민투표 결과 삼척시민의 85%가 원전 건설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주민투표는 법적 효력이 없다면서 원전 예정지 고시 철회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민투표가 법적 효력이 없다고 우기는 것은 깡패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동막1리의 중심마을인 대진마을은 대진항으로 내려가는 좁은 골짜기 양쪽에 형성되어 있다. 주민들은 폭풍과 파도를 피하기 위해 좁은 골짜기로 올라와 마을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진항으로 내려가는 길도 좁고 가파르다.   


대진항


대진항


대진마을에서 절벽길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대진항이다. 대진항은 작고 한산해서 항구보다는 포구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 대진항은 삼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원도 최북단인 고성군 현내면과 동해시 대진동,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도 있다. 


대진포구


대진항에서 대진마을 성황당으로 가려면 작은 포구를 지나야 한다. 대진항 방파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대진마을 어선들이 이 포구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구 들머리의 바위봉우리 위에는 해안을 방어하는 경비초소가 있다.  


대진마을 성황당


성황당


성황당


성황당 편액


서낭신도


대진마을 성황당은 포구 바로 북쪽 절벽 위에 있다. 성황당 처마에는 흰색 한지를 끼운 금줄을 쳐 놓았다. '城隍堂(성황당)' 편액은 잔 금이 많이 가고 글씨의 칠이 더러 벗겨져 있다. 


성황당은 원래 서낭당이다. 서낭당을 할미당, 천황당, 국사당이라고도 한다. 서낭당은 토지와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신을 모시는 신당으로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세운다. 서낭당을 마을 어귀에 세우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액(厄)이나 질병, 재해, 호환(虎患) 등을 막아준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 서낭신앙이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 문종(文宗)이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최초라고 한다. 고려에서는 각 주부현(州府縣)마다 서낭신을 모시게 했는데, 특히 전주서낭이 유명하였다. 고려 고종(高宗)은 몽골군을 물리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믿고 서낭신에게 신호를 가봉하기도 했다. 동해안 별신굿이나 강릉단오제는 서낭제의 일종이다.


대진마을 성황당 안 정면에는 서낭신도와 그 양쪽에 '思入風雲變態中(사입풍운변태중)', '霆遞乘過無限世(정체승과무한세)'란 글귀가 걸려 있다. 서낭신도에는 사모관대(紗帽冠帶) 차림의 백발노인과 녹의홍상(綠衣紅裳) 차림의 처녀가 교의(交椅)에 나란히 앉아 있고, 그 뒤에는 시녀로 보이는 여인이 과일 그릇을 들고 있다. 백발노인과 젊은 처녀의 결혼식 기념 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백발노인은 영동(嶺東)의 수호신인 범일국사(梵日國師), 처녀는 호랑이가 물어간 정씨녀(鄭氏女)로 추정된다. 


범일국사와 정씨녀는 각각 대관령 정상의 대관령국사성황사(大關嶺國師城隍祠)와 강릉시 홍제동 대관령국사여성황사(大關嶺國師女城隍祠) 서낭신과 여서낭신으로 모셔져 있다. 불교의 고승이 영동지방의 수호 서낭신이 된 것은 무슨 까닭이며, 여서낭신이 젊디 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범일국사에 관한 설화가 전해 온다. 강릉의 학산(鶴山)에 사는 처녀가 햇빛이 비친 물을 마시고 열두 달만에 아들을 낳았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았다는 두려움에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학바위에 갖다 버렸다. 그러자 학들이 날아와 그 아이를 잘 보살피고 길렀다. 아이는 자라서 자신의 탄생 비밀을 알게 되었고, 서라벌에 가서 공부를 하여 신라의 국사가 되었다. 이 이가 곧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闍崛山派)의 개조(開祖) 범일국사이다. 범일국사는 고향에 돌아와 동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를 물리치고, 마을을 지켜 강릉의 수호 서낭신이 된다. 훗날 범일국사는 강릉 단오제의 주신(主神)이 되고, 정씨녀는 국사여서낭신이 되어 매년 음력 4월 15일에서 단오제가 끝나는 날까지 21일 동안 함께 모셔진다. 


정씨녀에 대한 설화도 전해 오고 있다. 조선시대 강릉의 정씨 집안에 시집 갈 나이가 다 된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의 꿈에 대관령 국사서낭신이 나타나 딸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했으나 거절했다. 꿈을 꾸고 난 며칠 뒤 국사서낭신이 보낸 호랑이가 처녀를 업어갔다. 사실은 국사서낭신이 정씨녀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은 것이었다. 정씨녀 부모는 황망하여 마을 사람들과 함께 대관령국사성황사로 찾아가니 딸이 선 채로 죽어서 장승처럼 서 있었다. 정씨 부부는 딸을 국사서낭신의 아내로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화공을 불러 딸의 그림을 그려 붙이자 비로소 정씨녀의 몸이 떨어졌다. 


신랑은 신라시대 사람이고, 신부는 조선시대 사람이니 나이 차이가 많이 날 수 밖에 없다. 범일국사와 정씨녀 설화는 시대를 초월한 보쌈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남서낭신 옆의 '霆遞乘過無限世(정체승과무한세)'란 글귀는 출처를 모르겠다. 여서낭신 옆에 걸린 '思入風雲變態中(사입풍운변태중)'이란 구절은 중국 송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성리학과 양명학 원조 중 한 사람인 정호(程顥)의 칠언절구 '추일우성(秋日偶成)'에 나오는 구절이다. 


萬物靜觀皆自得(만물정관개자득) 고요히 만물을 관하니 모두 스스로 다 갖추었고

四時佳興與人同(사시가흥여인동) 사시의 아름다운 흥취도 사람과 더불어 같도다

道通天地有形外(도통천지유형외) 도는 삼라만상 형체 없는 것에까지 두루 통하고  

思入風雲變態中(사입풍운변태중) 생각은 풍운의 천변만화 속에 들어가는도다


장군신도


성황당 동쪽 벽 한가운데에는 '戶納東西南北財(호납동서남북재)'란 글귀가 걸려 있고, 그 좌우에는 장군신도(將軍神圖)가 걸려 있다. '戶納東西南北財(호납동서남북재)'는 '집집마다 동서남복에서 재물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이 글귀는 춘축(春祝)으로도 써서 입춘(立春) 날 벽이나 문짝 등에 붙이기도 한다. 


서낭당에는 산신(山神), 지신(地神), 용왕(龍王)과 함께 장군신을 모시는 경우가 많다. 안쪽의 장군신도는 백마 뒤에 전립(戰笠)을 쓴 두 사람이 서 있는데, 청색 도포를 입은 사람은 말을 잡고, 적색 도포를 입은 사람은 등에 칼을 차고 있다. 바깥쪽의 장군신도는 하늘색 도포 차림에 전립을 쓴 사람이 왼손에는 활, 등에는 화살통을 메고 있다.      


장군신도


성황당 서쪽 벽 안쪽에는 흰색 도포 차림에 전립을 쓴 백발노인이 초록색 말을 타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고, 바깥쪽에는 '天神之格祈願豊(천신지격기원풍)'이란 글귀를 쓴 액자가 걸려 있다. 백발노인은 전립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군신으로 추정된다. '天神之格祈願豊(천신지격기원풍)'은 한울님에게 풍작과 풍어를 기원하는 것이다. 


장군신도에 등장하는 장군신과 말들의 눈은 비현실적이어서 기괴한 느낌을 준다. 크게 치뜬 노란색 눈에는 형형한 기운마저 감돈다. 이들이 인간이 아니라 신적 존재임을 눈을 통해서 표현한 것이다.    


산신도


용왕도


상황당 문 양쪽 벽에는 산신도(山神圖)와 용왕도(靑龍圖)가 걸려 있다. 호랑이는 산신을 상징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호랑이를 산신으로 숭배해 왔다. 산신도의 호랑이는 다소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어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붉은색 여의주를 입에 물고 승천하는 청용(靑龍)은 동해 용왕(龍王)을 상징한다. 사신(四神)의 하나인 청룡은 동서남북의 네 방위 중 동쪽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용왕은 곧 물의 세계를 관장하는 해신(海神)이자 바람을 다스리는 풍신(風神)으로 여겨진다. 용왕은 무사항해와 풍어를 가져다 주는 존재이기에 뱃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대진마을 성황당 복원 호주 명단


대진마을 성황당 창신문


대진마을 성황당 보수계원 명단


성황당 안에는 성황당 복원에 참여한 호주 명단, 성황당 창신문(創新文), 성황당 복원계 계원 명단을 적은 편액도 걸려 있다. 대진마을 성황당 보수를 위한 복원계는 1966년 4월 8일 결성되었고, 성황당은 2010년 음력 4월 15일에 복원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기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기록들이 모여서 민족사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서낭신에게 몸과 마음이 아픈 모든 이들을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사 하는 기원을 올린 뒤 대진마을 성황당을 떠나다.  


2016.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