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진 장흥 토요시장에 이어 보성읍 보성리 경전선 보성역(寶城驛)을 찾았다. 보성역은 1930년 12월 25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2013년 9월 27일부터는 보성역에서 남도해양열차가 정차하기 시작했다.
보성역
보성역은 현재 무궁화호와 남도해양열차가 정차한다. 역무실에서는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 보성역에서 임성리역까지 연결되는 철도가 완공되면 목포역과 연결되는 거리가 짧아진다. 보성역 구내에는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에 쓰던 급수탑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급수탑은 한국철도공사 선정 준철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보성역 광장
고 백남기 농민 분향소
고 백남기 농민 영정
고 백남기 농민 분향소에서 필자
보성역 광장에는 고 백남기(白南基,1947년 10월 8일 ~ 2016년 9월 25일) 농민의 분향소가 차려져 있었다.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 부춘마을에서 태어난 고 백남기 농민은 1968년 중앙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한 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 독재정권 치하에서 2번이나 제적을 당했다. 이후 그는 가톨릭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다.
고 백남기 농민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중앙대학교에 복학해 총학생회 부회장을 맡아 1980년 5월 초까지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는 전두환을 수괴로 한 신군부의 5.17 군사반란으로 비상계엄령이 확대되면서 계엄군에 체포되는 신세가 되었다.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는 중앙대학교에서도 제적을 당했다.
고 백남기 농민은 가석방된 뒤 고향인 보성으로 돌아와 1986년에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1992년~1993년에는 카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2015년 11월 14일 '1차 민중총궐기' 시위에 참가한고 백남기 농민은 차벽을 뚫기 위해 다른 집회 참가자들과 함께 버스에 묶인 밧줄을 잡아당기던 중 서울의 종로 르메이에르빌딩 앞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뇌출혈로 쓰러졌다. 오후 7시 30분 구급차에 실려간 그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4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그는 9월 25일 오후 2시 15분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박정희 독재정권 치하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고 백남기 농민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대학에서도 제적이 되는 등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는 결국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자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 사이비정권 치하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망했다. 박정희, 박근혜 부녀가 2대에 걸쳐 민주화운동가 고 백남기 농민을 죽인 것이다.
분향소에 들러 고 백남기 농민의 명복을 빌어주다.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를 기원하면서 보성역을 떠나다.
2016.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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