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기행차 전라남도 보성에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길에 강천산(剛泉山, 584m)) 강천사(剛泉寺)에 들러서 가기로 했다. 강천산은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와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용산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강천산의 주봉(主峰)은 왕자봉(584m)이고, 최고봉은 산성산(山城山, 연대봉, 603m)이다. 강천산은 경치가 아름다와서 예로부터 '호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알려진 명산이다.
강천산의 원래 이름은 광덕산(光德山)이었다. 조선시대 지리지나 문집에는 강천산보다는 광덕산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등장한다. 지금도 시루봉(505m)과 신선봉(493m) 사이에 광덕산(564m)이 실제로 있다. 지역민들은 광덕산을 광대봉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강천산은 또,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형상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용천산(龍天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강천산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강천사라는 유명한 절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한반도 13정맥의 하나인 호남정맥(湖南正脈)은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갈라져 주화산(珠華山), 만덕산(萬德山), 경각산(鯨角山), 오봉산(五峰山), 내장산(內藏山), 백암산(白岩山), 추월산(秋月山), 용추봉(龍湫峰)을 지나 강천산으로 이어진다. 호남정맥은 강천산 주봉인 왕자봉을 지나지 않고 바로 북쪽의 555m봉과 북서쪽의 575m봉, 서쪽의 505m봉으로 비껴 통과하여 480m봉, 595m봉, 490m봉, 산성산, 문대봉(586m), 북바위(573m), 시루봉, 470m봉을 지나 광덕산에 이른 다음 남쪽으로 서암산을 향해 치달려간다. 서암산을 떠나 설산(雪山), 국수봉(國守峰)을 거쳐 무등산에 이른 호남정맥은 천운산, 두봉산(斗峰山), 용두산, 제암산(帝巖山), 일림산(日林山), 방장산(方丈山), 존제산(尊帝山), 백이산(伯夷山), 조계산, 희아산(戱娥山), 동주리봉을 지나 백운산에 이른다.
강천산계곡
강천산의 북쪽과 서쪽, 남쪽 물줄기는 담양호를 통하여 영산강으로 흐르고, 동쪽은 구림천을 통하여 섬진강으로 흐른다. 강천산에 올라서면 서쪽으로는 내장산, 남쪽으로는 무등산, 동쪽으로는 백두대간 지리산맥이 아스라이 다가온다. 강천산에는 금강계곡(탑상골), 삼인대계곡(황우재골), 선녀계곡(적우재골), 연대계곡(비룡계곡, 승반골), 용대암골(분통골), 지적골(수좌골), 물통골, 우작골, 소목골, 세낭골, 기우제골, 저분제골 등 크고 작은 계곡들이 비경을 자랑하고 있다. 이들 계곡과 골들이 모여 길이 3.5km의 강천산계곡(剛泉山溪谷)을 이룬다.
강천산계곡에는 천연폭포인 비룡폭포와 선녀폭포, 약수폭포, 천우폭포, 용머리폭포, 인공폭포인 구장군(九將軍)폭포와 병풍폭포 등의 폭포, 거라시바위, 병풍바위, 범바위, 어미바위, 아비바위, 송음암, 용바위, 북바위, 호두암, 부처바위, 송낙바위, 금강문 등의 기암괴석, 금강굴, 수좌굴, 형제굴 등 석굴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금강문은 1316년 덕현(德賢)이 강천산의 경치가 금강산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금감문의 높이는 8m, 너비는 4m이다.
강천산은 계곡과 폭포 외에도 봄철의 진달래와 산벚꽃, 가을철의 애기단풍이 아름다와 1981년 1월 7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강천산에는 강천사 오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순창 삼인대(淳昌三印臺,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 금성산성(전라북도 기념물 제52호), 강천사 모과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97호), 광덕정과 흥화정 등의 정자, 계곡을 가로지르는 호남제일의 강천산 현수교 등 볼거리도 많다.
강천산계곡에는 제2주차장 옆에 있는 광덕교(廣德橋), 매표소 지나서 처음 나오는 신선교(神仙橋), 병풍폭포 옆에 있는 항아리 모양의 도선교(道詵橋), 등산로 4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고추 모양의 금강교(錦江橋), 메주 모양의 송음교(松陰橋), 강천사 바로 직전의 극락교(極樂橋), 현수교 올라가는 목책 계단 밑에 있는 십장생교(十長生橋) 등 7개의 다리가 있다. 순창이 고추장 등 장류의 고장이라 다리 모양도 장류를 상징하는 조형물들로 만들어져 있다.
병풍폭포
강천산 관리사무소에서 100m쯤 올라가면 병풍폭포(屛風瀑布)가 나타난다. 이 폭포는 2003년 병풍바위에 만든 인공폭포이다. 높이 약 40m, 폭 약 15m, 낙수량은 분당 5톤에 이른다. 강천산계곡의 6개 폭포 중 첫 번째 폭포이다.
병풍바위는 바위가 편평하다고 해서 편평바위, 볼록한 등에 목을 길게 빼고 있는 모습이 마치 거북을 닮았다고 하여 거북바위라고도 한다. 죄를 지은 사람이 병풍바위 밑을 지날 때면 바위가 자기에게로 넘어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지은 죄를 뉘우치고, 사죄하는 마음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병풍바위 밑을 지나온 사람은 죄를 진 사람도 깨끗해진다는 것이다.
거라시바위
병풍폭포에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거라시바위를 만난다. '거라시'는 '거지'의 전라남도 사투리이다. 옛날 거지들이 이 바위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받아 강천사 승려들에게 시주를 했다고 한다.
강천산계곡
강천사 부도전
우작골 입구를 지나면 냇가 옆 언덕 끝에 강천사 부도전(浮屠殿)이 있다. 강천사 약 300m 못 미친 곳이다. 부도전에는 모두 4기의 부도가 한 줄로 세워져 있다. 부도에 새겨진 조각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풍화되어 알아보기 어렵다.
4기 모두 지대석(址臺石)에 석종(石鐘)과 보주(寶珠)를 올린 석종형(石鍾型) 부도이다. 각각의 부도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서쪽부터 높이 135㎝의 부도에는 ‘이월당(伊月堂)’, 높이 172㎝의 부도에는 ‘월회당(月灰堂)’, 높이 133㎝의 부도에는 ‘금곡당(金谷堂)’, 높이 125㎝의 부도에는 ‘미월당(眉月堂)’이라 새겨져 있다. 하지만 문헌 자료가 없어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설씨부인 권선문비와 순창설씨 송덕비
부도전 바로 옆에는 '부도암중창설씨부인권선문비(浮圖庵重創薛氏夫人勸善文碑)'와 '정부인순창설씨송덕비(貞夫人淳昌薛氏頌德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두 비석은 모두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螭首)를 갖췄지만, 세운 지는 아직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설씨부인권선문첩
설씨부인권선문첩
설씨부인권선문첩
설씨부인권선문첩
설씨부인권선문첩(薛氏夫人勸善文帖, 보물 제728호)은 가로 40cm, 세로 317cm 크기의 조선시대 서화첩이다. 16폭의 이 서화첩은 묵필(墨筆)로 쓴 14폭의 권선문과 2폭의 사찰 채색도로 되어 있는데, 양쪽 표면에는 채색문양이 있는 비단을 붙였다. 뒷면에는 후손들의 집에 전해 내려오던 서간문과 권선문이 실려 있고, '성화 18년(성종 13년 1482) 7월 정부인 설'이라는 연대와 인장이 찍혀 있다.
1455년 세조(世祖)가 무자비한 유혈 쿠데타로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린 신말주(申末舟)는 아내 정부인(貞夫人) 설옥천(薛玉川)의 고향 순창 남산대(南山台)로 내려와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세월을 벗삼아 은둔했다.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인 신말주는 조선조 문종(文宗), 단종, 세조대의 문신으로 대사간(大司諫)까지 지낸 사람이다. 설옥천은 1429년(세종 11년) 순창에서 사직(司直) 설백민(薛伯民)의 딸로 태어났다. 설옥천은 어려서부터 덕이 많고 총명하였으며, 문재가 뛰어났다고 한다.
1482년(성종 13) 봄 어느 날 밤 꿈에 세상을 떠난 친정어머니 형씨(刑氏)가 나타나 설옥천에게 '내일 어떤 사람이 찾아와 너와 함께 선업(善業)을 짓자고 청할 것이니 기쁜 마음으로 따르되 게을리 하지 말아라. 이것이 너의 복을 짓는 큰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과연 지난 밤의 꿈대로 약비(若非)라는 사람이 설옥천을 찾아와 '옛날 광덕산에 신령(信靈) 스님이 초암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폐사가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중조(中照) 스님의 대원은 이 절을 중창하는 것입니다. 소승도 그 아름다운 뜻을 본받아 부도암(浮圖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세워 지키고 있습니다만 이 암자도 초라하여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중조 스님과 뜻을 합하여 새 절을 짓고자 합니다만 역량이 부족하여 부인께 시주를 구하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간밤의 꿈이 신험(神驗)하다고 여긴 설옥천은 두 승려의 원을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절의 중창에 소요되는 재정을 혼자서 감당할 능력도 부족하고, 또 이런 일은 불자 대중들이 힘을 합쳐 선업을 짓게 함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설옥천은 손수 권선문을 짓고, 사찰의 설계도까지 그려 서화첩으로 만들어 악비로 하여금 대중들에게 돌려보게 하여 시주를 구하도록 했다.
신사임당의 작품보다 72년이나 앞선 설씨부인권선문첩은 조선시대 여류문인이 쓴 필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서화첩이며, 사대부 집안의 정부인이 쓴 글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 서화첩은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강천문
물통골 입구를 지나면 곧 강천사 일주문인 강천문(剛泉門)을 만나게 된다. 강천문 편액 왼쪽의 낙성관지(落成款識, 낙관)를 보니 '辛巳仲春(신사중춘, 2001년 음력 2월)'에 남곡(南谷) 김기욱(金基旭)이 쓴 글씨이다.
안양루
2층 누각 강천사 안양루는 경내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안양세계(安養世界)는 곧 극락세계(極樂世界)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이 문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의미가 있다.
강천사 전경
강천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이다. 강천사의 옛 이름은 887년(신라 진성여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복천사(福川寺, 福泉寺)이다. 강천사가 자리잡은 터의 산세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할 형세라 하여 용천사(龍泉寺)라고도 하였다.
1760년(영조 36) 경진판 '옥천군지(玉川郡誌)'에 의하면 '강천사는 전각 3동에 승방이 12동이나 있었다. 본절에 딸린 암자도 명적암(明寂庵), 용대암(龍臺庵), 연대암(蓮臺庵), 왕주암(王住庵), 적지암(積智庵) 등 12개나 되었으며, 당시 500여 수도승이 살던 대거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주암에는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온다. 후삼국(後三國)시대 왕건의 군대는 후백제(後百濟)를 견제하기 위해 후방 요충지인 금성(錦城, 나주)을 점령한 일이 있었다. 그때 왕건이 이 암자에서 머물렀다고 하는데, 이후 이 암자를 왕주암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1316년(고려 충숙왕 3) 덕현(德賢)은 절을 중창하면서 오층석탑과 12개의 암자를 창건하여 사세를 중흥시켰다. 1482년(조선 성종 13)에 작성된 '강천사 모연문(剛泉寺募緣文)'에는 '이 해에 신말주의 부인 설씨의 시주를 받아 중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명과 관련해서는 조선 선조(宣祖)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귀봉(龜峰)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이 이 절에 머물면서 '숙강천사(宿剛泉寺)'라는 제목의 시를 지은 뒤부터 강천사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설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 성종대인 1482년에 작성된 '강천사 모연문'에 이미 강천사라는 사명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1604년(선조 37) 태능(太能)은 강천사를 중창하여 이전의 면모를 되찾았다.
1855년(철종 6) 금용당(金容堂)이 강천사를 중창했으나,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보광전(普光殿)과 칠성각(七星閣), 첨성각(瞻星閣) 등의 전각들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당시 강천사에는 창건자 도선국사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빈찰(貧刹)이 부찰(富刹)로 되고 도량이 정화된다.'는 예언에 따라 주로 비구니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그 후 주지 김장엽이 1959년에 첨성각을 신축한 뒤 1977년에는 관음전, 1978년에는 보광전을 새로 지었다. 1992년에는 보광전을 대웅전(大雄殿)으로 바꾸고, 1997년에는 첨성각을 헐고 다시 복원하였다.
2016년 현재 강천사에는 대웅전, 관음전(觀音殿), 안양루(安養樓), 강천문,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1316년(충숙왕 3)에 건립된 강천사 오층석탑이 있다. 마당 한켠에는 중대석(中臺石)과 보주(寶珠)만 남아 있는 석등(石燈)이 있다. 강천사 바로 앞에는 순창 삼인대, 위에는 강천사 모과나무가 있다.
강천사에는 천 년 묵은 지네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강천사에는 천 년 묵은 지네가 살고 있었는데,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지네는 법당에서 피우는 향내가 너무 독해서 인간이 되지 못했다. 지네는 그 앙갚음으로 요괴로 변하여 매일 밤마다 승려 한 사람씩을 죽였다는 이야기다.
강천사 오층석탑
대웅전 앞마당에는 오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2호)이 세워져 있다. 1316년(고려 충숙왕 3) 덕현이 강천사를 중창할 때 함께 세운 이 석탑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와 상륜부(上輪部)를 올린 아주 소박한 석탑이다.
기단은 사각의 두툼한 단일석으로 되어 있는데, 굄대도 없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의 탑신석(塔身石, 몸돌)과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은 각각 1매의 다른 돌로 치석하였다. 모서리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어 있다. 1층의 우주는 확실히 보이지만, 2층부터는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다. 탑신석의 체감비율로 보아 4층 탑신석은 3층의 탑신석과 뒤바뀐 것이 아닌가 한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3단의 층급받침을 마련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끝에서 약간 올라가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경사가 급한 편이고, 윗면에는 윗층 탑신을 받치기 위한 굄대를 마련하였다. 상륜부는 노반(露盤)·위에 복발(覆鉢), 보주(寶珠) 대신 연뢰(蓮蕾)가 차례로 놓여 있다.
강천사 오층석탑은 모두 12개의 석재로 완성한 초간단 석탑이다. 전체적으로 가늘고 길어서 호리호리한 느낌을 주는 세장형 소형탑으로 고려 중기 이후의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탑은 한국전쟁 당시 기단과 탑신석, 옥개석의 일부가 총탄에 의해 파손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천사 대웅전
강천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익공식(翼工式) 단층 건물이다. 법당의 불단에는 석가모니삼존불을 봉안했고, 그 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다. '大雄殿(대웅전)' 편액 글씨는 고달(古達) 최승활(崔承活)이 썼다.
대웅전 정면 기둥에는 네 개의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절집에 왔으니 주련의 뜻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다. 부처가 최고의 존재라고 찬양하는 내용이다.
天上天下無如佛(천상천하무여불) 천상천하 부처님 같은 분 안 계시고
十方世界亦無比(시방세계역무비) 시방세계 누구도 비길 만한 자 없네
世間所有我盡見(세간소유아진견) 세상의 모든 존재 내가 다 보았지만
一切無有如佛者(일체무유여불자) 그 어떤 존재도 부처님 같은 이 없네
괘불지주
괘불지주
대웅전 바로 앞 좌우에는 석조괘불지주(石造掛佛支柱)가 세워져 있다. 괘불지주에 새겨진 ‘乾隆八歲十五(건륭8세15)’라는 명문으로 보아 1743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대개 사찰 영역의 앞, 괘불지주는 사찰 주불전의 앞에 세운다.
괘불지주와 석등 부재
마당 한켠에는 석조괘불지주와 석등 부재들이 방치된 채 놓여 있다. 괘불지주는 두 쌍이 한 조를 구성한다고 볼 때 한 쌍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은 기단부의 기단과 상대석(上臺石), 화사부(火舍部)의 옥개석, 상륜부의 연뢰만 남아 있다. 석등은 아마도 오층석탑과 대웅전 사이에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강천사 전경
부처바위
강천사 마당에서 북동쪽 산기슭을 바라보면 불두(佛頭)처럼 생긴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이름하여 부처바위 또는 관음바위라고 한다. 머리에 마치 보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관음바위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삼인대
강천사 바로 앞 개울 건너편 삼인대계곡 초입에는 조선시대의 비각인 순창 삼인대(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가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 안에는 높이 157cm, 너비 80cm, 두께 23cm의 삼인대 비가 세워져 있다.
삼인대 비는 1744년(영조 20) 4월에 세운 것으로 홍여통(洪汝通), 윤행겸(尹行謙), 유춘항(遊春恒) 등 순창군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숙종~영조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재(李縡)가 비문을 짓고, 문인 민우수(閔遇洙)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문신 유척기(兪拓基)가 전서(篆書)를 썼다. 이재와 민우수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인 김창협(金昌協)의 문인, 유척기는 노론 계열의 김창즙(金昌緝)과 신임(申銋)의 문인이다. 김창협은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 역시 노론 계열이다.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成大君)을 옹립한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 박원종(朴元宗) 등 반정공신들은 연산군의 매부이자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愼守勤) 일파를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척살했다. 반정공신들은 중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를 폐비시키고, 윤여필(尹汝弼)의 딸 숙의(淑儀)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이게 했다. 새 왕비 장경왕후(章敬王后)는 왕후가 된 지 10년 만에 사망하였다.
장경왕후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유옥(柳沃) 등 세 사람은 비밀리에 강천산 삼인대계곡에 모여서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고,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한 뒤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라 하여 삼인대(三印臺)라 부르게 된 것이다.
1978년에는 삼인대 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한 뒤 오목새김하여 비각 옆에 새 비석을 세웠다. 1994년에는 순창 지역민과 후손들에 의해 삼인문화선양회가 결성되어 1995년부터 매년 8월 삼인문화축제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있다.
강천사 모과나무
삼인대가 바로 앞에 바라보이는 곳에는 수령이 약 300년 된 강천사 모과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97호) 고목이 서 있다. 모과나무의 높이는 약 19m, 수관 폭은 3.1m이다. 이 모과나무는 300여년 전 강천사 승려가 심었다는 설과 조선 후기 순창 출신의 실학자인 신경준(申景濬)이 심었다는 설이 있다. 모과나무 고목의 왼쪽 그루터기에는 단풍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다. 강천사 모과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과나무로 지금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겅천산계곡
강천산 현수교(출처 디지털순창문화대전)
강천산 현수교(剛泉山懸垂橋)는 강천사에서 서남쪽으로 약 400m 거리에 있다. 1980년 8월 2일에 완공된 이 다리는 북동쪽의 강천산 주봉 왕자봉(584m) 능선과 남서쪽의 신선봉(425m) 능선 사이를 연결한다. 신선봉 전망대를 올라가기 위해 가설한 이 다리는 강천산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다리의 길이는 78m, 높이는 50m, 폭은 1m이다. 높은 곳에 위치하다 보니 ‘구름다리’, 흔들린다고 하여 ‘출렁다리’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용머리폭포의 풍광이 장관이다.
구장군폭포
구장군폭포(九將軍瀑布)는 강천사에서 서남쪽으로 약 1.2㎞, 강천산 현수교에서 약 800m 상류에 있는 인공폭포이다. 2005년에 만든 이 폭포는 바위 사이로 두 줄기의 폭포수가 떨어지는 3단폭포이다. 낙차는 약 120m에 이른다. 구장군폭포 상류에는 강천제2호수가 있다.
구장군폭포는 9명의 장군이 결의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삼한시대에 혈맹을 맺은 9명의 장수가 전쟁에서 패한 뒤 이곳에 이르러 자결하려 하였다. 자결하려던 순간, 어차피 죽을 바에는 다시 한번 전쟁터로 나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다시 전쟁터로 나간 9명의 장수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는 전설이다.
수좌굴
구장군폭포에서 북동쪽 바위절벽으로 눈을 돌리면 수좌굴이 보인다. 설담과 뇌암이라는 수도승이 수좌굴에서 10년 동안 용맹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강천사 종혜 스님이 수좌굴에 불상을 모시고 불공을 드리고 있다고 한다.
구장군폭포에서 필자
순창에 강천산 같은 명산, 강천사 같은 명찰이 있는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여행은 영혼을 살찌운다는 말이 꼭 맞다. 순창에 오지 않았다면 내 어찌 강천산, 강천사를 알았으리오! 순창에 와서 '호남의 금강' 강천산을 담아 가노라.
2016.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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