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全羅南道) 장흥군(長興郡) 유치면(有治面) 봉덕리(鳳德里) 가지산(迦智山) 남서쪽 기슭에 있는 구산선문종찰(九山禪門宗刹) 보림사(寶林寺)를 찾았다. 보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보림사 일주문
장흥호 상류의 탐진천을 따라 세 굽이를 돌아서 올라가면 보림사 일주문(一柱門)이 나온다. 보림사 일주문은 2016년 4월 17일 현판식을 봉행했다. 일주문 앞쪽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에는 ‘九山禪門宗刹迦智山寶林寺(구산선문종찰가지산보림사)’ 편액이 걸려 있고, 뒤쪽에는 ‘平常心是道禪茶一味(평상심시도선차일미)’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 발효차 청태전(靑苔錢)으로 유명한 선차도량의 전통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편액 글씨는 원로 다인이자 서화가인 추전(秋田) 김화수(金禾洙), 조각은 서각가 운산 백부일이 각각 맡았다.
현판은 길이 7m 원목에 글씨를 돋을새김했고, 바닥에는 물결 무늬를 넣어 입체감이 살아나도록 했다. 또, 웅장한 일주문의 위용에 걸맞게 편액 글씨 주위를 칠보단청으로 장엄하였다. 앞쪽 편액 글씨는 북위시대 정도소(鄭道昭)의 웅대하고 강한 필세를 가진 서체, 뒷면 글씨는 후한(後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3년에 새긴 장천비(張遷碑)와 명나라 완백산인(完白山人) 등염(鄧琰)의 필체에서 끌어온 예서체이다. 등염을 보통 등완백(鄧完白)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765) 때 화엄종(華嚴宗) 승려 원표(元表)는 천보년간(天寶年間, 742~756)에 당(唐)나라를 거쳐 인도에 가서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와 759년(경덕왕 18)에 가지산사(迦智山寺)를 세웠다. 보림사 경내에 있는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 보물 제158호)에도 '원표대덕은 법력으로 경덕왕의 정사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경덕왕 18년에 왕이 특별히 명하여 가지산사에 장생표주(長生標株)를 세우도록 했는데, 그 표주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미국 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1457~1464)'가 소장되어 있다. 사적기에는 '인도 보림사를 거쳐 중국 보림사에서 참선하던 원표대덕은 어느 날 고국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신라로 돌아온 원표대덕은 전국의 산세를 두루 살피며 서기가 내린 절터를 찾았다. 어느 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아(仙娥, 선녀)가 나타나 자신이 살고 있는 못에 아홉 마리의 용이 난장판을 치고 있어 살기가 힘들다고 호소해 왔다. 그래서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는데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 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 용 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 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는 내용의 보림사 창건설화가 전한다. 용을 쫓아내고 절을 지었다는 내용은 당시 토착신앙과 불교의 대립, 투쟁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원표로부터 100여 년이 흐른 뒤, 헌안왕(憲安王) 때인 860년경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은 가지산사 터에 보림사를 창건했다. 보림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이었다. 선종(禪宗)을 최초로 도입하여 정착시킨 보림사는 인도 가지산 보림사, 중국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다.
한편 구전 보림사 창건설화는 보조선사가 주인공이다. 구전 창건설화는 '보조선사가 절터를 찾던 중 가지산 아래에서 명당을 발견했다. 하지만 절터에 있는 연못에는 큰 뱀과 이무기, 용들이 살고 있었다. 보조선사는 연못을 메울 한 가지 꾀를 냈다. 보조선사는 도력으로 사람들에게 눈병을 앓게 한 뒤, 흙과 숯을 가져다 가지산 아래 연못에 넣으면 눈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윽고 눈병 환자들이 줄을 이어 흙과 숯을 지고 와서 연못을 메우기 시작했다. 연못은 순식간에 메워졌다. 보조선사는 안 나가려고 버티는 청룡과 백룡을 지팡이로 때려서 내쫓고 절을 지었다. 쫓겨난 두 용은 서로 먼저 하늘로 오르려고 다투다가 백룡이 꼬리를 치는 바람에 산기슭이 패어 용소가 생겼다. 결국 백룡은 승천했지만 청룡은 상처를 입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죽었다.'는 내용이다.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고개가 보림사 남쪽에 있는 피재, 청룡이 죽은 곳은 장평면 청룡리라고 한다. 피재 뒤쪽에는 용두산이 있고, 용소는 보림사 아랫마을 용문리에 있다. 용과 관련된 지명에는 늑룡리도 있다. 이처럼 보림사 주변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선종의 조사는 보리달마(菩提達磨)이다. 달마의 법맥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을 거쳐 6조 혜능(慧能)에게로 이어졌다. 혜능은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한 남종선(南宗禪)의 개창자였다. 혜능의 법맥은 마조(馬祖)를 거쳐 지장(智藏)에게 이어졌다. 신라 도의(道義)는 784년 당(唐)에 들어가서 지장의 선법(禪法)을 전해 받고 돌아와 821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주석했다. 동국선종(東國禪宗) 제1조 도의의 법맥은 2조 염거(廉居, ?~844)를 거쳐 3조 체징이 이어받았다. 체징은 지선(智詵)이라고도 한다.
체징도 선법을 구하기 위해 837년 당나라에 들어갔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840년에 귀국했다. 859년(헌안왕 3) 왕이 궁중으로 초빙하였으나 체징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그 해 겨울 다시 왕이 청하자 체징은 보림사로 거처를 옮겨 가지산파의 선풍을 일으켰다. 860년 제자의 예를 취한 김언경(金彦卿)이 사재(私財)를 희사하여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조하여 안치했고, 861년(경문왕 1)에는 보림사를 중창했다. 당시 보림사는 화순 쌍봉사(雙峰寺), 곡성 태안사(泰安寺)와 함께 손꼽히는 대가람이었다.
880년 체징은 문인들에게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入寂)하였다. 당시 체징의 문하에는 8백여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시호 보조선사(普照禪師), 탑호(塔號) 창성(彰聖), 보림사 사명은 체징의 사후 헌강왕이 내려준 것이다. 체징의 선맥은 고려 말까지 이어져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도 가지산문에 속했던 승려이다.
보림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한때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사찰로 성장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남부군)의 기지로 잠시 이용되었던 보림사는 국군 토벌대의 공격으로 국보 제204호였던 대웅전(大雄殿) 등 대부분의 전각들이 불타고, 천왕문(天王門)과 외호문(外護門)만 남았다. 지금의 전각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중건한 것이다.
보림사 현존 당우에는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웅보전(大雄寶殿), 미타전(彌陀殿), 명부전(冥府殿), 조사전(祖師殿), 삼성각(三聖閣), 범종각(梵鐘閣), 동국선원(東國禪院), 일주문, 사천문(四天門), 외호문(外護門), 요사채 등이 있다. 보림사 경내에는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南北三層石塔石燈, 국보 제44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국보 제117호), 동승탑(東僧塔, 보물 제155호), 서승탑(西僧塔, 보물 제156호), 보조선사창성탑(普照禪師彰聖塔, 보물 제157호), 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제158호), 목조사천왕상(木造四天王像, 보물 제1254호), 장흥 전의상암지 석불입상(長興傳義湘庵址石佛立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사천왕상복장경전불서(四天王像腹藏經典佛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5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보림사 외호문
선종대가람 외호문 편액
외호문 정면 처마에는 '迦智山寶林寺(가지산보림사)', 문 안 뒤쪽 창방에는 '外護門(외호문)', 평방에는 '禪宗大伽藍(선종대가람)' 편액이 걸려 있다. '선종대가람' 편액에는 '順治十四年八月禮曹守禦廳兩司帖額 雍正四年三月施行(순치 14년 8월 예조 수어청 양사첩액 옹정 4년 3월 시행)'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순치 14년(1657) 8월에 편액을 받고 옹정 4년(1726) 3월에 시행했다는 뜻이다.
‘선종대가람’이라는 편액에서 구산선문 중 제일 먼저 문을 연 가지산문 종찰 보림사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도의, 염거, 체징을 중심으로 당나라에서 갓들어온 신사상 선종을 받아들인 보림사에는 당시 수많은 불교 수행자들이 모여들어 선풍을 드날렸다.
보림사 사천문
남방증장천왕과 동방지국천왕
서방광목천왕과 북방다문천왕
보림사 사천문은 사천왕문(四天王門)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낮은 단층 기단에 원형의 초석(礎石)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두공(枓栱)은 초익공식(初翼工式)으로 창방을 돌리고, 평방은 생략한 채 주두(柱頭) 위에 장여와 도리를 얹었다. 사천문의 중앙칸은 통로로 되어 있고, 그 좌우 양칸에는 4구의 목조사천왕상(보물 제1254호)을 안치하였다. 사천문도 사천왕상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왕상의 복장품은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되었다.
‘보림사천왕금강중신공덕기(寶林寺天王金剛重新功德記)’와 ‘보림사중창불사기록(寶林寺重創佛事記錄)’에는 목조사천왕상이 1515년(중종 10)에 조성되었고, 그 뒤 1668년(현종 9)과 1777년(정조 1)에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미산(須彌山)에 거주하면서 동서남북 사천국을 다스린다는 사천왕은 불설장아함경(佛說長阿含經)에 나오는 인도의 고유신으로 불법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인도에서는 귀족상,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갑옷과 무기를 갖춘 무인상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 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봉안하고 있다.
사천문 입구 왼쪽에는 동방지국천왕상(東方持國天王像)과 남방증장천왕상(南方增長天王像), 오른쪽에는 서방광목천왕상(西方廣目天王像)과 북방다문천왕상(北方多聞天王像)을 안치하였다. 사천왕상은 따로 조각한 신체 각 부를 이어붙여 만든 상에 부분적으로 표면에 천을 붙이고, 회를 칠한 뒤 채색하였다. 4구 모두 건장한 체구에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갑옷과 천의(天衣)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높이는 3.2m, 너비는 2.9m이다.
동방지국천왕상은 오른손으로 칼의 손잡이, 왼손으로 칼끝을 받쳐 들고 있다. 남방증장천왕상은 창 대신 비파들 들고 있는 모습이 다소 특이하다. 부드러운 눈썹과 긴 턱수염을 가진 다소 온화한 선비형의 얼굴이다. 고통스러운 표정의 악귀가 왼쪽 다리를 받쳐들고 있다. 서방광목천왕상도 용 또는 여의주를 들고 있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달리 오른손에 칼, 왼손에 두 갈래로 갈라진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북방다문천왕상은 당(幢)을 세워서 들고 있다. 왼손에는 보탑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상은 4구 모두 두 눈을 부릅뜨고 있으나 무섭지는 않고, 오히려 다소 해학적이다. 눈은 갈색의 마노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이 작품의 우수성은 화려하고 현란한 천의 자락과 심하게 말려 위쪽으로 올라간 팔꿈치 대의에 잘 나타나 있다. 작가는 가슴과 배 부분에 비해 팔뚝과 다리의 질량감을 강조함으로써 강건한 신체를 표현했다. 신체의 형태는 모두 거의 같고,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만 서로 다르다.
다리는 4구 모두 오른쪽 다리를 수직으로 내리고 왼쪽 다리는 들고 있는데, 남방증장천왕만 악귀가 바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악귀는 모두 4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방지국천왕과 서방광목천왕 앞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각각 하나씩 있다. 금강역사는 탑이나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으로 인왕역사(仁王力士)라고도 한다.
1995년 2월 보림사 사천왕상을 해체할 때 무릎과 발 등에서 고려 말~조선 초의 월인석보(月印釋譜) 제25권 등 국보급 희귀본을 포함한 전적류 250여 권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칭 사천왕상복장경전불서(전남 유형문화재 제205호)라고 한다. 이들 불서는 대부분 '금강경(金剛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경전류가 주종을 이룬다. 경전류 불서는 대부분 전라도에 소재한 사찰에서 간행된 것이다.
보림사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일전쟁(朝日戰爭, 1592~1598)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한 작품이다. 제작 기법이 세밀하고, 각 부의 조각이 화려하며, 작품성이 뛰어나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모본이 되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보림사 사천왕상은 영광 불갑사(佛甲寺) 사천왕상과 친연성이 있다. 이는 보림사상이 불갑사상의 모본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보림사 전경
괘불지주
괘불지주
보림사 삼층석탑과 석등
보림사 삼층석탑과 석등
세월의 두께처럼 돌이끼가 덕지덕지 내려앉아 있는 석조괘불지주(石造掛佛支柱) 뒤로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과 석등(국보 제44호), 대적광전이 세워져 있다. 삼층석탑의 높이는 남탑 5.4m, 북탑 5.9m이며, 석등의 높이는 3.12m이다. 이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인 870년(경문왕 10)에 조성되었다.
1934년 가을 삼층석탑을 해체 복원할 때 초층탑신 상면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합(舍利盒)과 자기류(磁器類), 목판(木版), 비단, 사리, 구슬 등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탑의 조성 연대 및 중건 사실이 기록된 탑지(塔誌)가 발견되었다. 탑지에 따르면 이 석탑은 870년 신라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세운 원탑(願塔)임을 알 수 있다. 이후 891년(진성여왕 5)에 사리 7매가 봉안되었고, 조선시대에 세 차례(1478년, 1535년, 1684년)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음도 확인되었다.
삼층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를 올리고, 그 위에 상륜부(相輪部)를 얹은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양식이다. 남북탑 양쪽 앞에는 각각 1좌의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다. 배례석은 정면에 3구, 측면에 1구의 안상을 오목새김하였다. 이는 신라시대 배례석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지대석(地臺石)은 여러 장의 장대석(長臺石)을 결구하여 마련하였다. 면석(面石)과 갑석을 같은 돌로 치석한 하층기단(下層基壇)의 하단에는 높직한 굽을 돌린 위에 1단의 얇은 굄대를 조출하였고,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모각(模刻)하였다. 하대갑석(下臺甲石)의 상면에는 굄대를 마련하지 않고 상층기단(上層基壇)을 올렸다. 상층기단 면석의 각 면에도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협소한 하층기단에 비해 상층기단은 매우 큰 편이다. 상대갑석(上臺甲石) 아랫면에는 얕은 부연(副椽, 쇠시리)을 조출하였다. 상하대갑석은 얇아서 평판적인 느낌을 준다. 상대갑석의 약간 경사진 상면 중앙에 원호(圓弧)와 각형(角形)의 2단 굄대를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치도록 하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을 각각 다른 돌을 치석하여 쌓았다. 2, 3층 탑신석은 초층 탑신석에 비해 급격히 줄어드는 체감비례를 보인다. 탑신석에는 탱주는 생략되고 우주만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각 층의 층급받침이 5단이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낮은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옥개석의 처마와 추녀도 상하대갑석처럼 얇고, 네 귀퉁이 합각부(合閣部) 전각(轉角)도 반전(反轉)되어 있어 갸날프고 날씬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 낙수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다.
상륜부는 남북탑 모두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보주(寶珠)를 완전하게 갖추고 있다. 앙화석까지는 남북탑이 같은 양식이지만 보륜은 남탑이 삼륜(三輪), 북탑이 오륜(五輪)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때문에 남북탑의 높이 차이가 생겨났다.
석등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석등의 구조는 기단부, 화사부(火舍部),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부는 맨 아래에 사각형으로 지복석(地覆石)을 깔고, 그 위에 지대석(地臺石)과 하대석(下臺石), 간주석(竿柱石), 상대석(上臺石)을 올렸다. 8각의 하대석은 기대받침과 하대하단석, 하대상단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하단석 기대면(基臺面)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하대상단석에는 모퉁이를 향해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는데, 꽃잎 끝이 말려서 작은 귀꽃이 되었다. 간주석은 8각이며, 표면에 아무런 조각도 하지 않았다. 상대석(上臺石)은 밑에 3단의 받침을 마련하고, 꽃잎 속을 화형(花形)으로 장식한 단판중엽(單瓣重葉)의 앙련(仰蓮)을 새겼다.
화사부는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사석은 8각형으로 네 면에 화창(火窓)을 뚫었으며, 화창 주위에는 얕은 턱을 파고 작은 구멍이 돌아가면서 뚫려 있다. 옥개석 낙수면의 합각부 전각은 살짝 반전되어 있으며, 우동(隅棟)의 끝을 귀꽃으로 장식하였다. 옥개석의 상면 정상부에는 빙 돌아가면서 복련을 장식한 연화관(蓮花冠)이 있다.
상륜부는 굄대 위에 보륜과 보개, 보주를 차례로 올렸다. 굄대에는 복련을 조각했고, 보륜은 편구형(扁球形)이다. 보개는 옥개석을 축소시켜 놓은 것 같다. 보개 안쪽에는 특이하게도 중판연화(重瓣蓮華)가 조각되어 있다. 맨 꼭대기에는 앙련이 받치고 있는 화염보주를 얹어서 마무리했다. 석등도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인 870년(경문왕 10)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과 석등은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삼층석탑은 탑 속에서 발견된 탑지에 의해 확실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건립 연대를 추정하는 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어 다른 석탑을 복원할 때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림사 대적광전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주로 화엄종(華嚴宗) 사찰에서 본전으로 세우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으로 모시는 전각이다. 주불전이 아닐 경우 화엄전(華嚴殿), 비로전(毘盧殿)이라고 한다. 대적광전이 보림사의 주불전임을 알 수 있다. 비로자나불이 주재하는 연화장(蓮華藏) 세계는 장엄하고 진리의 빛이 가득한 대적정의 세계라 하여 전각 이름을 대적광전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의 수인은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를 감싸쥔 지권인(智券印)이다. 지권인은 이(理)와 지(智), 중생(衆生)과 부처(佛), 어리석음(迷)와 깨달음(悟)이 본래 하나라는 것을 상징한다.
대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여 연화장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원래 삼신불은 법신(法身) 비로자나불, 보신(報身) 아미타불(阿彌陀佛), 화신(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모시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선종(禪宗)의 영향으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 등 삼신불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비로자나불의 좌우에는 보통 지혜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덕행의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협시불로 모신다. 경우에 따라서는 삼존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배치하여 5불을 모시기도 한다.
보림사 대적광전은 1968년에 중건한 것이다. 대적광전 전면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주련이 들려주는 깨달음의 소리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佛身普放大光明(불신보광대광명) 부처님의 광명은 온 세상에 비치매
色相無邊極淸淨(색상무변극청정) 색과 모양 끝없어 지극히 청정하네
如雲充滿一切土(여운충만일체토) 구름이 온 세상 위를 가득히 덮듯이
處處稱揚佛功德(처처칭양불공덕) 곳곳에서 부처님의 공덕 찬양하네
光明所照咸歡喜(광명소조함환희) 광명이 비치는 곳 환희 함께 넘치고
衆生有苦悉除滅(중생유고실제멸) 중생의 고통 씻은 듯 다 사라지도다
전에는 대적광전 기둥에 다른 내용의 주련이 걸려 있었던가 보다. 전에 보림사를 다녀간 사람들이 보았던 주련은 다음과 같다. '대예참문(大禮懺文)'에 나오는 구절인 것 같다.
蟭螟眼睫起皇州(초명안첩기황주) 초명이 모기 속눈썹에 나라를 세우니
玉帛諸侯次第投(옥백제후차제투) 제후들이 옥과 비단을 차례로 바치네
天子臨軒論土廣(천자임헌논토광) 초명이 황제 되어 나라 큼을 자랑하나
太虛猶是一浮漚(태허유시일부구) 태허도 오히려 하나의 물거품인 것을
초명(蟭螟)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와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강과 개천 가에 사는 초명은 떼를 지어 날아가 모기의 속눈썹 위에 앉아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작디 작은 날벌레다. 초명이 얼마나 작은지 모기의 눈썹속에서 집을 짓고 새끼를 까고 살아도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성찰할 줄 모르는 인간들, 자신이 초명 같은 존재인 줄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장자와 열자의 우화(寓話)이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대적광전 중앙 불단에는 높이 2.73m, 무릎 너비 l.97m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이 봉안되어 있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모두 사라지고 불신만 남아 있다. 불상의 왼쪽 어깨에는 8행의 조상명(造像銘)이 오목새김되어 있다. 명문에는 '858년(헌안왕 2) 7월 17일 무주(武州, 광주) 장사(長沙, 장흥)의 부관(副官) 김수종(金遂宗)이 발원하여 불상을 주성(鑄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보조선사창성탑비에는 '859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2,500근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두 기록을 종합하면 이 불상은 858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859년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정수리에는 육계(肉髻)가 큼직하게 솟아 있어 불신에 비해 두상이 꽤 커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은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大邱桐華寺毘盧庵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244호)과 비슷하다. 얼굴은 달걀형으로 살집이 풍만하다. 이마에는 백호가 표현되어 있고, 약간 치켜 올라간 눈은 선정에 든 듯 반쯤 감고 있다. 길고 각이 져 오똑한 코는 콧등이 매부리코처럼 약간 휘었고, 입은 작지만 입술은 도톰하다. 귓볼은 길게 늘어져 있고, 턱은 이중턱이 져 있어 통통하게 보인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어깨와 가슴은 당당하다. 불의는 통견(通肩)으로 양쪽 어깨 위에서 가슴 앞으로 V자형을 이루며 내려와 두 팔을 거쳐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 결가부좌한 다리 위로 흘러내리고 있다. 손에 비해 다리가 지나치게 크게 표현되어 있어 균형을 잃은 모습이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에서 나타난 추상화 경향, 8세기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상에 비해 감소된 긴장감과 탄력성 등은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퇴보하고 도식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이러한 양식은 더욱 발전하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到彼岸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63호)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奉化鷲棲寺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995호) 같은 9세기 후기의 조각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철조불상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유행하였다. 이 시기 철불이 유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9세기 중엽 통일신라의 중앙권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호족들이 값비싼 금대신 쉽게 구할 수 있고 저렴한 철을 이용해서 불상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이전보다 양감이 떨어지는 불상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그 중에서도 대작으로 당시의 조법(彫法)이 잘 나타나 있는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특히 이 철불좌상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로 그 조성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 계보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로자나불좌상 뒤에는 붉은색을 주조로 그린 법신 비로자나불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비로자나불탱화는 지권인의 수인을 취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그 좌우 중단부와 하단부 양쪽에 5명 또는 7명씩의 보살성중(菩薩聖衆)이 배치된다. 본존 뒤에는 키 모양의 큼직한 광배가 있다. 문수, 보현 외에 법혜(法慧), 공덕림(功德林), 금강당(金剛幢), 금강장(金剛藏) 보살 및 기타 여러 보살도 묘사된다. 상단부에는 성문(聲聞)들이 묘사되고, 양 끝에는 천왕(天王) 및 화엄신중을 배치하기도 한다. 이때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이나 팔부중(八部衆)은 넣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대적광전에 삼신불을 봉안했다면 후불탱화로는 삼신탱화(三身幀畵) 한 폭을 걸거나 법신탱, 보신탱, 화신탱을 각각 따로 걸기도 한다. 삼신탱화는 대적광전 외에 문수전(文殊殿)에도 봉안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엄경(華嚴經)에 근거하여 비로자나불탱화, 노사나불탱화, 석가모니불탱화를 각각 따로 그려서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수전에 봉안되는 삼신탱화는 한 장으로 전체를 묘사하게 된다. 삼신불 좌우에는 사천왕이 첨가되고, 협시보살도 더 큼직하게 묘사된다. 삼신탱화는 선운사(禪雲寺), 해인사(海印寺), 통도사(通度寺), 대흥사(大興寺)에 봉안되어 있는 작품이 유명하다.
노사나불탱화는 비로자나불탱화의 왼쪽에 배치된다. 중앙에는 보신불 노사나불이 결가부좌 자세로 두 손을 들어 설법인(說法印)을 짓고 있다. 노사나불은 보관을 쓴 보살의 형상인데, 이는 비로자나불의 절대 우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협시보살이라는 지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노사나불의 좌우 양쪽에는 여러 보살과 지국천왕, 증장천왕 등이 배치된다. 이것은 화신불 석가모니불탱화에 배치되는 광목천왕, 다문천왕과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석가모니불탱화는 비로자나불탱화의 오른쪽에 배치된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결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여러 보살과 광목천왕, 다문천왕 등이 배치된다.
신중탱화
대적광전 한쪽 벽에는 신중탱화(神衆幀畵)가 걸려 있다. 이 탱화는 동진보살(童眞菩薩)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제석천(帝釋天)과 대범천(大梵天), 그리고 그 주위에 천신과 신장들을 배치하였다.
삼성각
삼성각 법당
동선을 따라가다 보니 대웅전보다 삼성각에 먼저 들렀다.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전각이다. 법당 정면 중앙 불단에는 칠성탱화(七星幀畵), 그 좌우에는 산신탱화(山神幀畵)와 독성탱화(獨聖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보림사 대웅보전
외호문에서 사천문, 삼층석탑과 석등, 대적광전이 남동-서북을 잇는 종축선상에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면, 대웅보전은 대적광전과 직각을 이루는 동북방에 자리잡고 있다. 보림사의 주요 공간이 대적광전 앞마당이라고 본다면, 대웅보전은 필요에 의해 후대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세워진 원래의 대웅전은 국보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남부군을 토벌하던 국군에 의해 불에 타버렸다. 대웅전에 봉안했던 비로자나불은 대적광전으로 옮겼다. 지금의 대웅보전은 원래의 주춧돌 위에 옛 건물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서남향으로 앉아 있는 보림사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에 겹처마 중층팔작지붕을 올린 다포식(多包式) 건물이다. 대웅보전 앞에는 석조괘불지주가 세워져 있다. 대웅보전 내부는 2층까지 통털어서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고, 법당 정면의 불단에는 석가모니삼존불좌상(釋迦牟尼三尊佛坐像)과 자비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지혜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등 4구의 협시보살을 봉안하였다.
대웅전 삼존불은 보통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약사불(藥師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협시불로 봉안한다. 또, 현세불인 석가모니불 좌우에 과거불인 연등불(燃燈佛)과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을 모시기도 한다. 불국사(佛國寺) 대웅전처럼 연등불 대신 갈라보살(竭羅菩薩)을 모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미륵불은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된다. 보살이 협시할 때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지혜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만행(萬行)의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봉안된다. 종종 석가모니의 수제자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협시보살로 모셔지기도 하고,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봉안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불교의 교주가 석가모니이기 때문이다.
보림사 대웅보전의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도 음미해보는 것도 좋다. 오랜 세월 왔다 간 수많은 고승대덕들도 결국 저 주련 한 구절을 남기고 간 것이 아니겠는가!
塵墨劫前早成佛(진묵겁전조성불) 아득히 오랜 옛날에 이미 성불하셨건만
爲度衆生現世間(위도중생현세간) 중생제도 위해 현세간에 몸을 나투시니
蘶蘶德相月輪滿(위위덕상월륜만) 위대한 상호 둥근 달처럼 원만하시어라
於三界中作導師(어삼계중작도사) 삼계 중 중생을 바로 이끄는 스승이시니
佛身元來無背相(불신원래무배상) 부처의 몸은 원래 아무도 외면하지 않아
十方來衆皆對面(시방래중개대면) 시방세계에서 모인 중생 모두 바라보네
보림사 동국선원 불이문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불이문(不二門) 안쪽은 동국선원 영역이다. 동국선원은 선승들의 수행 공간이기에 일반인들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불이문 밖에서 가지산문의 선풍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보림사 미타전
장흥 전 의상암지 석불입상
대웅전 뒤편에 있는 미타전은 정면 3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익공식의 아담한 전각이다. 미타전은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전각으로 극락전(極樂殿), 극락보전(極樂寶殿), 무량수전(無量壽殿), 수광전(壽光殿)이라고도 한다.
보림사 미타전에는 장흥 전의상암지 석불입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91호)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 장흥군 장흥읍 금산리 제암산(帝岩山) 중턱의 의상암지에 있던 이 불상은 1975년 장흥읍 원도리 장흥교도소 정문 앞으로 옮겨졌다가 1994년 다시 보림사로 옮겨졌다. 광배가 일부 파손되고, 깨진 목 부분을 보수하였을 뿐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대좌가 있었던 듯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정수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상호에 비해 육계가 다소 높은 편이다. 상호는 달걀형으로 원만한 모습이며, 이마 위 중앙에는 백호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눈은 선정에 든 듯 반개하였고, 눈꼬리가 약간 치솟았다. 입은 작지만 입술은 도톰하다. 입술에는 새빨간색이 칠해져 있어 원초적인 느낌을 준다. 귀는 어깨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목 부분이 깨져 삼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두 줄의 선 흔적으로 보아 원래는 삼도가 표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의는 통견으로 옷자락이 가슴 위에서 U자형을 이루면서 발목까지 흘러내렸다. 왼쪽 어깨 위로는 옷주름이 겹쳐서 넘어가고 있다. 양쪽 팔목에 걸쳐진 불의 자락은 무릎 아래까지 파상문(波狀紋)을 이루면서 길게 늘어졌다. 옷자락 하단 밑으로는 두발이 표현되었다. 왼손이 파손되어 수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엄지와 검지를 맞댄 것으로 보아 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을 결한 것으로 짐작된다. 수인이 아미타정인이라면 이 석불은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크다.
장흥 전의상암지 석불입상은 원만한 상호, 높고 큼직한 육계, 당당한 어깨선, 상체의 옷주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석조문화재는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보림사 조사전
보림사 역대 조사 진영
대웅전 뒤쪽 산발치에는 보림사 조사전이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사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고 아담한 전각이다. 원형의 주춧돌 위에 민흘림 원형 기둥을 세우고 초익공을 결구한 뒤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조사전 법당 정면 중앙에는 가지산문 1조 도의선사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2조 염거선사와 3조 보조국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좌측 벽에는 보우화상(普愚和尙), 우측 벽에는 매화보살(梅花菩薩)의 진영이 걸려 있다.
매화보살은 원표선사의 보림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바로 그 선아이다. 가지산이 좋아 그 기슭에 머물고 있던 금강산 산신의 딸 선아는 원표선사가 자신을 괴롭히던 용들을 쫓아내자 보림사의 수호신이 되겠다고 자청해서 매화보살로 남았다. 이런 인연으로 보림사는 해마다 매화보살을 추모하는 재를 지내고 있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
보림사 조사전 옆에는 보조선사창성탑(보물 제157호)과 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제158호)가 있다. 보조선사창성탑 바로 옆에는 석불입상 한 기가 목과 다리가 잘린 채 세워져 있다.
보조선사창성탑은 보조선사 체징의 사리탑으로 지대석부터 옥개석까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이 사리탑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에 사리구(舍利具)를 도난당하면서 무너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보조선사창성탑 팔각형의 지대석 윗면에는 얕은 1단의 굄대가 마련되어 있고, 그 위에는 하대석이 2중으로 놓여 있다. 하대석은 손상이 심한 편이다. 중대받침과 탑신, 상대석, 옥개석도 팔각형이다. 구름무늬를 입체적으로 조각한 중대받침을 놓고, 그 위에 배흘림으로 치석한 뒤 안상을 새긴 중대석과 8대엽의 앙련을 새긴 상대석, 탑신석을 차례로 올렸다. 탑신석의 앞면과 뒷면에는 문비형(門扉形), 그 양쪽 옆에는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두텁게 치석한 옥개석 밑면에는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파여 있다. 옥개석은 사리탑의 나머지 부재와 재질이 달라서 다소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복발과 보륜, 보주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보조선사창성탑은 전체적으로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사리탑이다. 이 사리탑은 보조선사가 입적한 지 4년 뒤인 884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보조선사창성탑비는 884년 보조선사창성탑과 함께 세워진 것이다.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이 탑비에는 보조선사의 행적과 보림사의 유래가 새겨져 있다.
보조선사창성탑비 이수(螭首)의 제액(題額)에는 '迦智山普照禪師碑銘(가지산보조선사비명)'이 3행으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나라 빈공과 벼슬인 조청랑수정변부사마사비어대(朝淸郞守定邊府司馬賜緋魚袋)와 수금성군태수(守錦城郡太守)를 지낸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수무주곤미현령(守武州昆湄縣令) 김원(金薳)과 장사부수(長沙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썼다. 첫 줄에서 일곱 번째 줄 ‘선(禪)’자까지는 구양순체(歐陽詢體)의 해서(楷書)로 김원이 썼고, ‘사(師)’자 이하는 왕희지체(王羲之體)의 행서(行書)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비문을 쓰다가 죽자 그의 제자 김언경이 이어서 쓴 것으로 짐작된다.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예창치(葉昌熾)는 이 탑비에 대해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이라고 평한 바 있다. 금성군은 지금의 나주시, 곤미현은 지금의 영암군 시종면, 장사는 지금의 장흥이다.
보조선사창성탑비는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일반형 석비이다. 높이는 3.46m이다. 귀부는 얼굴이 용두(龍頭)처럼 생긴데다가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사나운 느낌을 준다. 육각형 귀갑문(龜甲紋)으로 뒤덮힌 등의 한가운데에는 구름무늬와 연꽃을 돌린 비좌(碑座)를 설치하여 비신을 받게 하였다. 이수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새기고, 제액의 좌우에는 반룡(蟠龍)을 대칭으로 조각하였다.
매우 뛰어난 기법으로 조각된 보조선사창성탑비는 통일신라 말기의 석비 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탑비는 당시 조성된 석비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보림사 석불입상
보조선사창성탑 바로 옆에는 목과 다리 부분이 잘려나간 석불입상이 세워져 있다. 우선 신체 주위로 표현된 광배로 보아 두신광배(頭身光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만 남아 있는 법의 옷깃은 상당히 특이하다. 오른쪽에서 내려온 옷깃의 매듭을 지어 왼쪽 옷깃 고리에 걸도록 되어 있다. 석불상에서 이런 옷깃 표현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불상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매자락과 옷자락은 상당히 두텁게 표현되어 있어 둔중한 느낌을 준다. 옷주름의 표현도 도식적이다. 수인도 특이하다. 1, 2, 5지는 펴고, 3, 4지는 구부린 채 손바닥을 가슴에 대고 있다. 혹시 보조선사상은 아니었을까?
요사채 쪽문
보림사 요사채로 통하는 쪽문은 소박하고 운치가 있다. 담벽을 무성하게 덮은 담쟁이덩굴이 쪽문 지붕 위에까지 올라가 있다. 보림사가 한창 번창했을 때는 천 명이 넘는 승려들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보림사 명부전
보림사에 가면 대웅전 뒤 명부전의 지붕을 꼭 봐야 한다. 명부전 지붕 용마루에는 용 두 마리가 머리를 서로 반대쪽으로 향하고 있고, 한가운데에는 보주가 놓여 있다. 상당히 아름답고 멋진 지붕이다.
보림사 범종각
범종각은 지은 지 아직 얼마 안되는 듯 단청이 선명하다. 2층 난간에는 '영산대제 및 명상치유 산사음악회' 현수막이 걸려 있다. 보림사는 매년 봄과 가을에 세계선차대회와 명상치유 산사음악회를 연다고 한다.
보림약수
보림사 마당 한켠에는 약수가 솟아나고 있다. 이른바 보림약수이다. 자연보호중앙협의회에서는 보림약수를 한국의 명수로 선정한 바 있다. 보림약수는 예로부터 물이 맑고 약효가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 지역 주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최근에는 보림약수에 게르마늄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위장병과 피부병 등의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보림사 동부도전
보림사 동부도전은 보림사에서 동쪽으로 300~4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산기슭에 계단식으로 조성한 부도전에는 꽤 여러 기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 동부도전 맨 위에는 보물 제155호인 보림사 동승탑이 있다.
보림사 동승탑
보림사 동승탑은 동부도전의 부도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높이는 3.6m이고, 형태는 팔각원당형이다. 팔각형으로 치석한 넓은 지대석 위에 다소 높은 팔각의 굄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반구형에 가까운 하대석을 올렸다. 굄대 각면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는데, 두 개씩의 뿔이 안상의 끝머리 좌우에서 안으로 뻗어 있다. 하대석에는 8대엽의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고, 모서리의 연판(蓮瓣)에는 귀꽃이 새겨져 있다.
중대석은 가늘고 낮은 팔각 돌기둥으로 표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으며, 윗면에는 낮은 3단의 굄대를 마련하였다. 중대석이 작고 가늘어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하대석처럼 반구형에 가까운 상대석에는 8대엽의 앙련이 새겨져 있고, 귀꽃은 조식되지 않았다. 상대석 윗면에는 높은 2단의 탑신 굄대가 마련되어 있다.
탑신은 중대석보다 다소 굵은 팔각의 돌기둥으로 치석했는데, 한 면에 문비형 조각이 얕게 새겨져 있다. 팔각의 옥개석은 다른 부재보다 비교적 좁고 낮은 편이다. 옥개석의 아랫면에는 3단의 쇠시리를 마련했고, 옥개석 윗면에는 높은 우동(隅棟)이 조식되었다. 수평으로 평박한 추녀 밑에는 넓은 낙수홈이 패여 있다.
온전하게 남아 있는 상륜부는 둥근 간석(竿石) 위에 보륜과 보개,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다. 보개는 추녀의 모퉁이가 약간 위를 향해 반전되어 있고, 우동의 끝에는 귀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보주는 활짝 핀 이중연판(二重蓮瓣) 위에 얹혀 있다.
보림사 동승탑은 세련된 조각 기법에도 불구하고, 각 부재의 너비가 좁아져서 전체적으로 밋밋하고 가냘픈 느낌을 준다. 입체감도 다소 떨어진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부도 양식을 이어받은 위에 고려 전기의 특징도 보여주는 이 승탑은 고려시대 부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부도전 부도
동부도전 부도
동부도전 부도
동부도전 부도
동부도전 부도
보림사 동부도전에는 동승탑 말고도 석종에 옥개석과 상륜부만 얹은 단순한 형태로부터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를 제대로 갖춘 부도까지 다양한 형태의 부도들이 세워져 있다.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부도들이다.
보림사 서승탑 남부도(출처 문화재청)
보림사 서승탑 북부도(출처 문화재청)
보림사 서부도전은 보림사 경내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서부도전에는 두 기의 서승탑(보물 제156호)이 남쪽과 북쪽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높이는 약 3m이다. 두 기 모두 사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팔각 기단부를 놓고, 팔각의 탑신과 옥개석, 상륜부를 차례로 올린 팔각원당형 부도로 그 기본 형태는 같지만, 장식 수법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서승탑 남부도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굄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하대석을 올렸다. 하대석에는 특이한 8엽 복련문이 새겨져 있다. 복련문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心(심)'자를 나타내는 고사리 모양의 장식 무늬인 여의두문(如意頭文)을 연상케 한다. 하대석 윗면에는 몰딩(moulding) 처리를 한 뒤 1단의 굄대를 마련하였다.
중대석은 팔각 모서리에 연주형(連珠形)의 우주를 모각했고, 각 면에는 사각의 테두리 안에 4곡(曲)의 둥근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에는 단판팔엽(單瓣八葉)의 앙련을 조각했고, 꽃잎에는 타원형의 테두리 안에 4화형(四花形)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상대석 윗면에는 1단의 굄대가 마련되어 있다.
탑신은 팔각의 원주형이다. 탑신 앞쪽 한 면에는 3단의 사각형 테두리 안에 문비형을 모각했다. 팔각의 옥개석은 다소 좁은 편이다. 옥개석 아랫면에는 1단의 쇠시리를 조식했고, 추녀 밑은 직선이다. 낙수면은 경사가 급하며, 처마는 우동의 전각(轉角)에 이르러 살짝 반전되어 있다. 처마 끝에 귀꽃은 없다. 상륜부는 낮은 굄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낮은 편구형(扁球形)의 복발, 보륜, 연잎과 앙련에 싸인 이중의 보주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보림사 서승탑 북부도는 지대석과 기단부가 남부도와 비슷하다. 다만 중대석에 아무런 장식이 없고, 상대석이 남부도보다 얇고 넓다는 점이 다르다. 탑신의 한쪽 면에는 문비형이 새겨져 있다. 옥개석은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고, 우동은 남부도보다 굵고 높다. 추녀 끝에는 귀꽃을 조식했다. 상륜부는 낮은 굄대 위에 복발과 보륜, 보개,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다. 보개는 옥개석의 축소판 같다.
보림사 사승탑은 1941년 사리장치가 도굴되어 1944년에 다시 만들어 놓았다.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남부도는 가냘픈 조각 수법에도 불구하고 장식이 아름답다. 북부도는 장식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우아한 모습을 간직한 승탑이다. 두 기 모두 조각 수법이 같으며, 조성 시기는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보림사는 국보 2점, 보물 5점, 지방 유형문화재 2점을 보유하고 있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다음에 오게 되면 보림사 뒤 비자림 숲길을 걸어보고 싶다. 보림사를 가슴에 담은 채 귀로에 오르다.
2016.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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