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소설을 쓰는 최용탁 작가가 오랜만에 기개가 살아있는 글을 썼다. 납득할 수 없는 사업을 추진하는 충주시에 대해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쓴소리다. 충주시는 7억 원에 매입한 성내동 243번지 '가구점 골목’의 땅(약 251 평)과 그 땅에 세워진 건물(약 140 평)에 근대화박물관을 만들겠다고 한다. 말만 들어보면 그럴 듯한 사업이다. 과연 그럴까? 최용탁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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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얼마나 아십니까? 성내동을 아시나요?, 잠깐, 충주 생각! 세 개 중 적당한 제목이 뭘까?.....
역사적 사실 하나.
충주 사람은 물론이고 역사에 조금 관심 있는 국민이면 누구나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죽은 신립 장군과 수천 명의 우리 먼 할아버지들을 안다. 그 때도 충주에는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보다는 아주 작아서 성내동 일대 읍성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대략 2천 명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립 장군이 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달천평야에 진을 쳤고 일본군은 세 갈래로 충주로 들어오면서 충주 읍성은 먼저 왜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 안에서, 충주 읍내 성내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때, 1592년 5월, 충주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일본군의 칼날 아래 무참히 도륙당했다. 피에 굶주린 시퍼런 일본도가 날뛰던 충주는 아비규환의 피바다였다……
역사적 사실 둘.
1896년 제천에서 봉기한 을미의병은 충주읍성을 점령하였다. 왜관찰사 김규식을 잡아 목을 베어 북문밖에 걸고 항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20여 일 간의 치열한 전투과정에서 성곽과 관아 그리고 민가가 불타고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되면서 의병전쟁의 도시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일본군과의 거듭되는 전투 끝에 결국은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성내동은 항일의병의 기상과 읍성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역사적 사실 셋.
일제 강점기 동안 충주에서는 끊임없이 일제에 저항하는 투쟁이 벌어졌다. 격렬했던 3.1운동, 농민과 노동자들의 저항, 아나키스트 운동 등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
해방이 되자마자 한 맺힌 충주 시민들은 충주 시내 대표적인 산인 사직산에 있던 일제 신사(神社,역대 일본 천황을 모시던 곳. 옛 여성회관 위쪽에 있었다)를 때려 부수었다. 앞장 선 사람들은 피 끓는 젊은 학생들, 충주 중학교를 비롯한 충주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었다.
지금의 사실 하나.
충주시는 2015년 6월, 충주 시민들이 흔히 ‘가구점 골목’이라고 부르는 성내동 243번지, 약 251 평과 그 땅에 세워진 건물 약 140 평을 7억 원에 매입했다. ‘로얄가구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던 그 건물을 왜 충주시가 사들였을까?
그 건물은 이름도 생소한 옛 ‘조선식산은행’ 건물이었다. 일제가 1933년에 신축하였다. 충주 시민 중 얼마나 ‘가구점 골목’의 ‘로얄가구점’이 옛 조선식산은행 건물인 줄 알았을까?
일본 천황을 모시던 사직산의 ‘신사’가 식민지 조선의 영혼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면 ‘조선식산은행’은 실질적으로 식민지 백성, 충주 백성의 재산을 수탈하는 기관이었다. 본질적으로 두 기관은 전혀 다를 게 없다.
대체 이 건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엽기적이고 음습하다. 신사가 부수어질 때 같이 불탔어야 할, 때려 부수었어야 할, 저 일제 침략과 수탈의 상징이 아닌가?
지금의 사실 둘.
놀라운 것은 지금 충주시에서 벌이는 작태다. 일제 수탈의 상징인 건물을 사들여 근대박물관을 만들겠다는(어두운 역사도 기억해야한다는 거짓말을 보태며) 그들의 정체는, 선거를 앞둔 지방자치단체장과 돈이 제일인 건축·토목업자와, 용역에 목매는 불쌍한 대학교수들의 반역사적 연대일 뿐이다(정말 불쌍한 소위 ‘시민단체’운운하며 이 프로젝트에 가담한 사람들은 논외로 하겠다). 이것이야말로 절대적인, 그 어떤 궤변으로도 포장할 수 없는(당사자는 가슴에 찔릴) 팩트인 것이다.
지금의 사실 셋.
충주 시민들이 모르게 급박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대결하며 조상들이 피를 흘리고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충주시가, 그것도 읍성 내에 향청과 포수청이 있던 역사적인 장소에 세워진 ‘조선식산은행’을 복원한다는 것을 대체 어떤 말로 포장할 수 있을까?
애초에 계획했던 근대박물관도 말이 안 되는데, 최근에는 ‘조선식산은행’을 복원하여 미술관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무르익고 있다. 우리 충주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 미술가들은 과연 조선식산은행에서 자신의 작품을 걸고 싶을까? 그리고 그것이 아무런 시민들과의 공감 없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맺음을 대신하여
난징대학살이 벌어진 장소나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된 아우슈비츠를 보존하고 기념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인류가 이성을 상실하고 인간애가 파탄이 났을 때를 증거하고 다시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반성의 계기로 삼는 실증적 장소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일제 35년 치하에 그들이 근대 건축물을 지었기 때문에 그들이 지은 건축 유산을 보존하자는 주장은, 히틀러로 상징되는 나찌가 머무르거나 관계했던 모든 흔적을 보존하자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무너뜨릴 것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남아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청산은 가차 없되, 보존은 엄중해야 한다. 적어도 충주 식산은행의 보존 내지 리모델링 주장은 반역사적이고 비효율적이고 무가치하다. 충주는 절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는 피어린 역사가 숨 쉬는 도시다! (글쓴이 - 소설가 최용탁)
2017.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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