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다이콘시마(大根島) '모란(牡丹)의 집' 유시엔(由志園)을 거닐다

林 山 2019. 1. 5. 14:23

돗토리 현(鳥取県) 사카이미나토 시(境港市) 요나고 공항(米子空港)에 내려서 처음 들른 곳은 시마네 현(島根) 야쓰카 초(八束町) 다이콘시마(大根島)에 있는 일명 '모란꽃 정원'으로 유명한 유시엔(由志園)이다. 입장료는 대인 800엔, 20명 이상 단체는 650엔이다. 고등학생은 400엔, 중학생은 300엔, 초등학생은 200엔이다. 


나카우미 호(中海湖)라는 큰 호수 한가운데에 떠 있는 화산섬 다이콘시마는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부터 이어져 온 모란과 고려인삼의 산지로 유명하다. 일본 전국의 신(神)들이 모인다는 이즈모(出雲) 지역은 '운슈(雲州)'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여기서 생산되는 고려인삼은 '운슈인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차를 사랑한 영주로도 유명한 마쓰에 번(松江藩) 7대 번주인 마쓰다이라 하루사토(松平治郷, 1751~1818), 일명 후마이공(不昧公)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다이콘시마에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후 '운슈인삼'은 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마네 현의 현화(県花)로 지정된 다이콘시마의 모란(牡丹)은 약 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유시엔(由志園) 나가야몬(長屋門, ながやもん) 


시마네 현은 혼슈(本州) 남서부에 있는 현이며, 현청 소재지는 마쓰에 시(松江市)다. 마쓰에 시는 신지코(肉道湖)와 덴진가와(天神川)에 면해 있다. 시마네 현은 일본에서 독도(獨島)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2005년 시마네 현 지방정부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TV 광고를 시작하고, 시마네 현 의회도 '다케시마(竹島, 독도의 일본 명칭)의 날'을 지정하는 조례 제정을 추진하면서 한때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기도 했다. 


유시엔 입구 건물은 1813년 이래 200년 동안 복원해 온 헤이세이(平成)의 인삼관청 나가야몬(長屋門, ながやもん)이다. 나가야몬 안으로 들어가면 고려인삼 뮤지엄을 비롯해서 다이콘시마 지역과 유시엔 오리지널 기념품 매점인 '야마보시(山法師)', 커피숍 '이치보(一望)', 모란을 테마로 한 상품 직판장, 인삼차 시음 코너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식당은 일식당 '쇼부(菖蒲, 수용인원 140명)', 전통식당 '모미지(紅葉, 수용인원 280명)', '젠(膳, 수용인원 180명)' 등 세 곳이나 있다.    


유시엔(由志園) 한가운데 있는 연못


'모란(牡丹)과 고려인삼(高麗人蔘)의 마을' 유시엔은 '사계절 꽃 피는 모란의 집, 자양이 풍부한 향토요리'라는 홍보 문구로 손님을 끌어모으고 있다. 유시엔은 가이유우시키테이엔(遊式庭園, circuit style garden)이다. 가이유우시키테이엔(회유식 정원)을 치센가이유우시키테이엔(池泉回遊式庭園)이라고도 하며, 주로 에도시대에 발달했다. 치센식(池泉式) 정원은 큰 연못을 가운데에 두고 넓은 경치를 압축하는 슛케이식(縮景式) 수법을 활용하여 암석, 수목 등으로 조영한 정원이다. 치센은 정원 못을 가리킨다. 치센가이유우시키테이엔(지천회유식 정원)은 길을 따라 돌면서 연못 주위에 배치한 つきやま(築山, 츠키야마)-석가산(石假山), 나무와 꽃, 시냇물, 다리, 석등 등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든 정원이다. 본관이나 별당, 차테이(茶庭) 등 각 건물에서 정원을 바라볼 수 있도록 건물을 중심으로 정원 구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의 3대 정원은 이바라키 현(茨城) 미토(水戶)에 있는 가이라쿠엔(偕楽園), 이시카와 현(石川県) 가나자와(金澤)에 있는 겐로쿠엔(兼六園), 오카야마 현(岡山) 오카야마에 있는 코라쿠엔(後楽園)이다. 이들은 모두 회유식 정원들이다.


연못으로 흘러드는 개울


유시엔 모란관은 세계적인 정원 디자이너 이시하라 가즈유키(石原和幸)가 설계했다. 이시하라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으로부터 '녹음(綠陰)의 마술사'라는 칭송을 받은 바 있다. 유시엔에는 약 250 종류의 모란과 사계절 다양한 꽃을 감상할 수 있다. 넓은 연못과 숲, 폭포 등이 갖춰져 있는 유시엔에서는 1년 내내 지지 않는 모란꽃을 볼 수 있다. 유시엔은 푸르른 숲과 사계절 피어나는 모란, 화려한 동백, 설경 등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독특한 정원이다. 해마다 모란꽃이 활짝 피는 4~5월에는 유시엔에서 모란축제가 열린다. 축제 기간 중에는 약 3만 송이의 모란꽃을 연못에 띄워 환상적인 장관을 연출한다.


안내문에는 '유시엔은 이즈모(出雲) 지방의 풍요로운 지형을 응축시킨 미니어처 가든으로서 야마타노 오로치(八岐大蛇, 八俣遠呂智, 八俣遠呂知, ヤマタノオロチ) 전설이 살아 숨쉬는 오쿠이즈모 대계곡(奥出雲大溪谷)과 히이카와(斐伊川)와 신지 호(宍道湖), 나카우미 호(中海湖), 일본해(日本海, Sea of Japan)의 아름다운 풍경까지도 느낄 수 있는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 일본 정원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동쪽으로 일본의 도호쿠(東北) 지방, 홋카이도(北海道)와 러시아의 사할린 섬(Ostrov Sakhalin), 서쪽으로 한반도의 동해안 전체, 제주특별자치도, 남쪽으로 일본의 혼슈(本州),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Primorsky Krai, 沿海地方)에 둘러싸여 있는 바다를 한국에서는 동해(東海, East Sea), 일본에서는 일본해라고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는 조선동해(朝鮮東海), 르몽드 세계지도책에서는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고 있다. 


야마타노 오로치(八岐大蛇)는 일본의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괴물이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야마타노 오로치가 '八岐大蛇', '고지키(古史記)'에는 '八俣遠呂智'라고 표기되어 있다. 야마타노 오로치는 여덟 개의 머리와 여덟 개의 꼬리를 가졌고, 눈은 꽈리처럼 새빨간 색이며, 등에서는 이끼와 나무가 자란다. 배는 피로 미끈거리며, 여덟 골짜기와 여덟 봉우리에 걸쳐 있을 정도로 거대하다.


다카마가하라(高天原)에서 추방된 스사노오(素戔嗚, スサノオ)는 이즈모노쿠니(出雲国)의 가이카와 상류의 도리가미(鳥髪)라는 곳에 당도하였다. 하천 위에서 젓가락이 흘러내려온 것을 본 스사노오는 강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갔다. 거기서 스사노오는 울고 있는 노부부를 만났다. 노부부는 오야마쓰미(大山積尊)의 자식인 아시나즈치(脚摩乳)와 데나즈치(手摩乳)였다. 노부부에게는 8명의 딸이 있었는데, 해마다 고시(古志)라는 곳에서 야마타노 오로치가 와서 자기 딸을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올해에도 오로치가 올 때가 되어 막내 딸인 구시나다히메(奇稲田姫, 櫛名田姫, くしなだひめ, クシイナダヒメ)도 잡아먹힐 것이라면서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스사노오는 구시나다히메를 아내로 삼게 해줄 것을 조건으로 야마타노 오로치의 퇴치에 나섰다. 스사노오는 구시나다히메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빗으로 둔갑시켜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꽂았다. 그리고 아시나즈치와 데나즈치에게 독한 술을 빚어 담을 쌓고 8개의 문을 만들어 문마다 술을 가득 채운 술통을 올려놓도록 했다.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자 야마타노 오로치가 나타났다. 오로치는 8개의 머리를 각각의 술통에 집어넣고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오로치가 취해 그 자리에서 잠들자 스사노오는 칼을 뽑아 8개의 머리를 모두 베었다. 마지막으로 꼬리를 베는 순간 칼날이 부러졌다. 검으로 꼬리를 찢자 거대한 칼이 솟아올랐다. 이를 불가사의하게 여긴 스사노오는 거대한 칼을 아마테라스(天照らす)에게 헌상하였다. 이것이 훗날 구사나기의 검(草薙剣,くさなぎのつるぎ)이라고 불리는 삼종신기(三種の神器, 산슈노진기, 미쿠사노카무다가라) 중 하나인 덴소운켄(天叢雲剣, あめのむらくものつるぎ)이다.


유시엔(由志園)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개울


정원에는 푸르른 이끼가 지면을 가득 덮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끼를 정원의 소재로 잘 활용하기로 유명하다. 이끼를 입히면 자연미와 한적한 느낌을 한껏 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끼는 습기가 많은 땅 위나 바위, 나무 줄기 등에 붙어 자란다. 따라서 강수량과 습기가 많은 일본의 환경에 아주 적합한 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 다이콘시마는 양잠업이 성했다. 양잠업이 쇠퇴하자 다이콘시마 여성들은 섬을 떠나 모란 묘목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다. 여자와 그릇은 밖으로 내돌리면 안된다는 말이 있듯이..... 모란 묘목을 팔러 떠났다가 외지 남자와 눈이 맞아 섬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여성들이 많았다. 파탄 가정이 늘어가자 카도와키 사카에는 여성들이 섬을 나가지 않아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도록 다이콘시마에 '모란꽃 정원' 유시엔을 창업했다. 이후 유시엔이 명소가 되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자 다이콘시마 여성들은 외지로 돈을 벌러 가지 않아도 되었다.             


동백꽃


12월 말인데도 유시엔에는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동북아시아가 원산지인 동백은 특히 엄동설한에도 붉은 꽃이 피어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대나무와 소나무, 매화나무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듯이 한겨울에 피는 동백꽃을 추운 겨울에도 정답게 만날 수 있는 벗에 비유하여 세한지우(歲寒之友)라 부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17세기 무렵 정원식물로 동백나무를 심는 것이 유행하면서 많은 품종 개량이 이뤄졌다. 그 무렵 유럽에도 전해져 19세기에는 원예용 식물로 인기를 끌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의 원작 소설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춘희(椿姬, La Dame aux camélias, 동백꽃 아가씨)'에서도 동백꽃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춘희'의 주인공 마르그리트는 동백꽃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마르그리트는 한 달 가운데 25일은 흰 동백꽃, 5일은 빨간 동백꽃을 가슴에 달고 사교계에 나타남으로써 ‘동백꽃을 든 귀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5일 동안 가슴에 달았던 빨간 동백꽃의 의미는 무엇일까? 소설을 읽어본 사람은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동백꽃은 꽃이 질 때, 꽃 전체가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특징은 특유의 선명한 붉은색과 어우러져 처연한 느낌을 준다. 이런 이유로 예로부터 동백꽃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나 깊은 사랑에 비유되곤 했다. 옛날 한국에서는 혼례식 때 동백나무를 대나무와 함께 자기 항아리에 꽂아 부부가 함께 오래 살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동백꽃을 '사무라이의 꽃'이라고 한다. 통째로 지는 모습이 사람의 목이 잘려 떨어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그래서 사무라이들은 집에 동백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동백꽃은 불길한 꽃이라고 여겨지기에 병문안 등에는 가져가지 않는 것이 좋다. 


화단의 모란꽃


화단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모란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 일본에 와서 보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살고 있는 충주는 위도가 북위 약 37°로 대(溫帶), 시마네 현은 북위 약 34°로 난대(暖帶)에 속하기 때문이다. 


화단의 모란꽃


모란(牡丹)은 중국 중서부가 원산지다. 종자를 생산하지만 굵은 뿌리 위에서 새싹이 돋아나므로 수컷의 형상이라 하여 '모(牡)', 꽃 색이 붉기 때문에 '란(丹)'이라 한다. 목단(牧丹), 부귀화(富貴花)라고도 한다. 모란은 작약과 작약속의 낙엽 활엽 떨기나무(관목)다. 키는 보통 1m 남짓 자란다. 잎은 3~5개의 작은 잎이 같이 붙어 있는 겹잎이며, 끝이 깊게 갈라진다. 열매는 골돌(蓇葖)이며 별모양을 이룬다.


모란꽃은 붉은 자줏빛의 꽃잎이 5~8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접시 크기의 큰 꽃이 가지 끝에 피는데 일주일쯤 간다. 꽃의 색깔은 붉은색 계통이 가장 많고, 여러 원예품종이 있다. 꽃이 풍성하고 아름다워 '화중지왕(花中之王)', '국색천향(國色天香)'으로도 불렸다.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는 모란을 오래전부터 관상용이나 한약재로 쓰기 위해 많이 심었다. 


모란의 뿌리껍질을 한약명 목단피(牡丹皮)라고 한다. 목단피의 성질은 약간 차지만 독이 없고, 맛은 쓰고 맵다. 경락은 심경(心經)과 간경(肝經), 신경(腎經)으로 들어간다. 체열과 혈열을 내리고(淸熱凉血), 피를 잘 돌게 할 뿐만 아니라 어혈(瘀血)을 헤치고 부종을 잘 삭히는 효능(活血散瘀)이 있어 온독(溫毒)으로 반진(斑疹)이 돋는 온독발반(溫毒發斑), 식도정맥류 파열, 위나 십이지장 궤양 등의 질환으로 피를 토하는 증상(吐血, hematemesis), 코피(衄血), 밤에는 열이 나고 아침에는 추위를 타는 증상(夜熱早凉), 땀이 나지 않고 뼈에서 열이 나는 증상(無汗骨蒸), 월경 출혈이 없으면서 월경통(月經痛)이 나타나는 경폐통경(經閉痛經), 종기가 곪아 터진 뒤 오래도록 낫지 않아 부스럼이 되는 옹종창독(癰腫瘡毒), 넘어지거나 부딪쳐서 상하고 멍이 들거나 통증이 있는 질박상통(跌撲傷痛) 등을 치료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목단피는 '어혈을 없애고 여자의 월경이 없는 것과 피가 몰린 것, 요통을 낫게 하며, 유산시키고 태반을 나오게 하며, 해산 후의 여러 가지 병을 낫게 한다. 고름을 빨아내고 타박상의 어혈을 삭게 한다'고 나와 있다.      


온실의 모란꽃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였던 당나라의 測天武后(츠티엔우허우, 624~705)와 모란에 얽힌 유명한 전설이 있다. 츠티엔우허우는 어느 해 겨울 정원의 꽃나무들에게 당장 꽃을 피우라고 명을 내렸다. 다른 꽃들은 모두 명을 따라 꽃을 피웠으나 모란만은 꽃을 피우지 않았다. 불을 때서라도 억지로 꽃을 피우게 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츠티엔우허우 모란을 모두 뽑아서 洛阳(뤄양)으로 추방시켰다. 이후 모란은 '洛阳花(뤄양화)'로 불렸고, 불을 땔 때 연기에 그을린 탓에 지금도 모란 줄기가 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온실의 모란꽃


중국인들은 楊貴妃(양꾸이페이)를 모란에 비유했으며, 양꾸이페이처럼 풍만한 육체와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여인을 富貴牡丹(푸꾸이무단)이라고 했다. 당나라 이후 모란은 시와 그림의 소재로도 많이 쓰였다.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모란은 꽃 중의 화왕(花王)으로 자리잡으면서 청나라 이후 중국의 국화로 대접받았다. 1929년 蔣介石(짱제스)는 국화를 매화(梅花)로 바꾸었으나 毛澤東(마오쩌뚱)이 이끄는 中国人民解放军(쭝궈렌민지에팡쥔)에 쫓겨 國民黨(꿔민당) 정부가 臺灣(타이완)으로 망명한 뒤 아직 중국 共産党(꿍찬당) 정부는 국화를 정하지 않고 있다.


온실의 백모란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모란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 ~ 632) 때 신라에 들어왔다. 당나라 황제는 이때 모란 그림 1폭과 모란 씨 3되를 신라에 보내왔다고 한다. '삼국유사' 선덕여왕(善德女王) 1년(632) 조의 기록에 '진평왕 때 당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얻어 덕만(德曼, 선덕여왕의 공주 시절 아명)에게 보인 적이 있다. 덕만은 "이 꽃은 곱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웃으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라고 묻자 그녀는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기에 이를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국색(國色)을 갖추고 있으면 남자가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는 법입니다. 이 꽃이 무척 고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틀림없이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씨앗을 심었는데, 과연 그녀가 말한 것과 같았다. 그녀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은 이와 같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덕만 공주나 김부식, 일연은 중국의 문화와 모란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모란꽃은 실제로 향이 매우 진한 꽃이다. 향기가 있기에 벌과 나비도 날아든다. 


중국에서 그림에 나비를 그리면 축수(祝壽)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모란꽃 그림에는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는다. 왜일까? 중국어 '나비'를 뜻하는 '蝶(띠에)'는 '70~80세 노인'을 뜻하는 '耋(띠에)'와 발음이 똑같다. 그래서, 부귀화인 모란꽃 그림에 나비를 함께 그리면 '70~80살까지만 부귀하게 사세요'라는 뜻이 된다. 천년 만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리고 싶은데, 70~80년까지만 누리라는 것은 오히려 욕이나 저주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란은 신라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신문왕(神文王, 681~691) 때 설총(薛聰, 655~?)은 우화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총신(寵臣, 장미)을 배제하고 충신(할미꽃)을 잘 가려서 쓰는 것을 지도자의 덕목으로 삼도록 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모란은 미인을 상징하고 부귀영화를 염원하는 꽃으로 상류사회의 사랑을 받았다. 12세기 청자상감모란문항(靑磁象嵌牡丹文缸, 국보 제98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려청자 상감과 여러 생활도구에도 모란꽃 무늬가 등장한다. 고려 고종(高宗, 1213~1259)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들이 지은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에도 '홍모란, 백모란, 정홍모란(丁紅牡丹)'이 나온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모란에 대한 일화는 많이 있다. 1406년(태종 6) 중국 사신은 황후가 쓸 것이라고 하며 황모란를 요구하였다. 이에 조정은 황모란을 세 화분에 나누어 심어서 보냈다. '조선왕조실록' 1646년(인조 23) 조에는 일본 사신이 와서 모란을 청, 황, 흑, 백, 적모란 등 색깔별로 요구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후기에 널리 유행한 민화에는 모란이 가장 많이 그려졌다. 전통 혼례복이나 신방의 병풍에도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은 빠지지 않았다.


개울에 가로놓인 나무다리


연못으로 흘러드는 계류에는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를 건너서 가운데의 섬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피에르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 등과 함께 1800년대 새로운 예술 운동인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를 탄생시킨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일본식 정원을 동경했다.


박명희 가이드는 '요즘 한류(韓流) 열풍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일본은 이미 19세기에 일류(日流) 열풍을 유럽 전역에 일으키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맞는 이야기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는 일본 열풍이 불고 있었다. 당시 파리 사교계는 기모노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일본식 가구로 장식하고 일본 도자기를 감상하며, 일본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파리 화단에도 일본 문화와 목판화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가장 동경하는 나라는 바로 일본이었다. 당시 유럽 화단에서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화가는 거의 없었다.

 

연못


모네는 기모노를 입고 일본 부채를 든 자기 부인을 모델로 인물화를 그려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또 '지베르니의 일본식 다리(Japanese Bridge at Giverny)'라는 작품을 남겼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아예 일본의 우끼요에(浮世繪, 풍속화) 작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1797~1858)의 목판화를 그대로 베낀 유화를 그리기도 했다. 세잔도 일본 문화를 동경하여 액상프로방스(Aix-en-Provence) 화실에 일본 부채, 옻칠과 나전의 머리빗, 일본 직물 소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연못


르누와르의 '목욕하는 여인(Baigneuse)',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Marie-Raymonde de Toulouse-Lautrec-Monfa, 1864~1901)의 '물랭루즈에서 춤추는 두 여인',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かつしか ほくさい, 1760~1849)의 '후가쿠 36경(富嶽三十六景)' 이미지를 차용한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의 '칼라 리도그라피(Color Lithography)',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부채와 함께 있는 여인', 제임스 티솟(James Tissot, 1836~1902)의 '일본 잠옷을 걸친 여인상' 등도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숲과 개울


모네는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1797~1858)가 죽기 직전에 에도 풍경을 그린 목판화 '메이쇼 에도 햐케이(名所江戶百景)' 중 하나인 '가메이도(亀戸)의 물 위에 핀 등나무꽃'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히로시게의 그림 같은 일본식 정원을 만들어 수련(睡蓮)도 키우고 무지개다리도 만들고 싶었던 모네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75km 떨어진 지베르니(Giverny) 마을 자신의 집 아래쪽 철길 근처 목초지 7500㎡(약 2,268평)를 구입한 뒤 작은 수로를 내 연못을 파고 무지개다리를 놓았다. 연못가에는 보라색 꽃이 피는 등나무와 버드나무, 대나무를 심었다. 연못가 자투리땅에는 꽃밭을 조성하고, 남은 터에는 일본의 전통정원처럼 잔디를 깔고 군데군데 섬돌을 놓았다. 모네는 연못과 수련만 담당하는 정원사를 따로 두었다. 일본 문화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모네는 이처럼 프랑스 시골 지베르니에 완벽한 일본식 정원을 만들어 놓고 이를 감상했다.  


오솔길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수련을 즐겨 그렸다. 특히 1905년~1908년 사이에 가장 왕성하게 수련을 그렸다. 1909년 모네는 뒤랑-뤼엘 갤러리에서 수련화 그림 48점을 공개했다. 이 전시는 호평을 얻었고 작품 판매도 잘 되어 당시 전시된 작품들이 세계 곳곳에 소장돼 있다. 모네가 1905년에 그린 '수련(캔버스에 유화, 89.5×99.5cm)'은 2012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미화 43,762,500달러(한화 459억 1000만 원)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참고로 '수련'의 '수'는 '물 수(水)'가 아니라 '잠잘 수(睡)'를 쓴다. 수련은 꽃이 6~7월 긴 화경 끝에 흰색으로 피는데, 밤에는 꽃잎이 잠을 자듯이 접히므로 수련이라고 한다. 꽃은 3일 동안 피었다 닫혔다 한다. 꽃은 백색 외에도 노란색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꽃말은 '청순한 마음'이다. 수련의 학명은 Nymphaea tetragona Georgi인데, 속명 님파이아(Nymphaea)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물의 여신 님프(Nymph)에서 유래되었다.


카레산스이식(枯山水式) 정원


유시엔 한쪽에는 카레산스이식(枯山水式)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모래밭은 물, 바위는 섬을 상징한다. 산과 물이 표현되지만, 말라 있기 때문에 '카레(枯)'라는 말을 쓴다. 일본의 정원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제8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일어난 '오닌의 난(應仁の亂, 1467~1477)' 이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오닌의 난' 때 귀족들이 배를 타고 즐기던 큰 연못을 갖춘 정원들이 잿더미가 되면서 쿄토(京都)의 사찰을 중심으로 연못이 없는 카레산스이식 정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초기의 카레산스이식 정원은 쿄토 사이호지(西芳寺) 정원처럼 보통 경사지에 암석을 배치하였으며, 후기로 오면서 점차 모래와 바위를 사용하여 정원을 조성했다.  


모란관음보살(牡丹觀音菩薩) 입상(立像)


모란관음보살연기(牡丹觀音菩薩緣起)


정원 한쪽에는 모란관음보살상(牡丹觀音菩薩像)이 세워져 있다. 모란관음보살은 일본에 와서 처음 본다.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니, 모란관음보살은 부귀를 가져다 주는 보살인가? 모란관음보살까지 생각해내다니 일본인들의 상상력은 정말 대단하다. 모란관음보살상 앞에는 모란관음보살연기(牡丹觀音菩薩緣起)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부귀화향염(富貴花響艶)' - 나카지마 치나미(中島千波), 1731x3537cm, 1997.


'백모란도(白牡丹圖)' - 나카지마 치나미(中島千波), 1731x3537cm, 1995.


유시엔 중앙건물 로비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벚꽃 화가 나카지마 치나미(中島千波)의 대작 '부귀화향염(富貴花響艶)'과 '백모란도(白牡丹圖)'가 걸려 있었다. 벚꽃 그림의 대가 나카지마 치나미는 '꽃을 그리기 보다 가지를 그린다. 벚꽃의 표정은 꽃보다 가지에 참된 본모습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나가노 현(長野県)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오부세(小布施)에는 나카지마 치나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오부세 뮤지엄(おぶせミュージアム)이 있다.  


다이콘시마(大根島)와 에시마(江島) 모형도


로비에는 나카우미 호에 떠 있는 다이콘시마와 에시마(江島) 모형도가 있다. 두 섬은 시마네 현에 속한다. 동해에 접한 만이 사주의 발달로 인해 호수가 된 석호(潟湖)인 나카우미 호는 시마네 현 동부의 마쓰에 시, 야스기 시(安来市), 야쓰카 군(八束郡) 히가시이즈모 정(東出雲町)과 돗토리 현 서부의 사카이미나토 시, 요나고 시(米子市)에 걸쳐 있다. 유미가하마 반도(弓ヶ浜半島)와 시마네 반도(島根半島)로 둘러싸인 이 호수는 일본에서 5번째로 크다. 동쪽으로는 미호 만(美保湾)에 붙어 있고, 서쪽으로는 오하시 강(大橋川)으로 신지 호(宍道湖)와 연결되어 있다. 에시마와 돗토리 현의 사카이미나토 시는 에시마 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바다와 수로로 연결된 나카우미 호는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 있는 기수호(汽水湖, blackish water lake)로 해수어(海水魚)와 담수어(淡水魚)가 함께 분포하는 특이한 호수다. 염도는 해수의 약 절반 정도이다. 나카우미 호는 물고기가 풍부하여 기러기, 고니, 오리류 등 많은 조류가 찾아온다. 기러기, 오리류는 매년 7만 천여 마리 이상, 고니는 매년 1천여 마리 이상 찾아오고 있다. 철새 집단서식지의 남방한계에 해당하는 나카우미 호는 1974년 11월 1일 국가지정 나카우미 조수보호구로 지정되었다. 또, 2005년 11월 8일에는 람사르 협약(the Ramsar Convention)에 등록되었다.


일본 전통 레스토랑 '모미지(紅葉)'에서 바라본 유시엔


유시엔을 한바퀴 돌아오니 점심때가 다 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박명희 가이드의 안내로 일본 전통식당 '모미지(紅葉)'에 자리를 잡았다. '모미지'에서 유시엔 정원을 감상하면서 인삼 나베(鍋) 일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레스토랑 평가를 하자면 중상 정도 되겠다. 식사를 하면서 사케(酒, sake)도 한잔 곁들였다. 


유시엔 내 일본 전통 레스토랑의 인삼나베(鍋)정식


안내문에는 유시엔 인삼 나베 요리는 시마네 현에서 나는 식재료를 사용한 특제 일정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요나고의 명물인 인삼이 들어간 냄비요리다. 나베(鍋)란 냄비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전골, 찌개와 같은 요리로 가을이나 겨울철의 단골 메뉴다. 냄비 요리는 밥과 고기, 해산물, 야채 등을 한 자리에서 섭취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뜨끈뜨끈한 탕이나 찌개는 특히 날씨가 쌀쌀할 때 먹으면 몸과 마음이 훈훈해진다. 보골보골 끓는 냄비만 바라보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다. 


유시엔(由志園)에서 필자


유시엔 연못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여행을 다녀와서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사진을 들여다보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여행 당시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한다.  


2018.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