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돗토리 사구(鳥取砂丘) 모래 미술관(砂の美術館)을 찾아서 2

林 山 2019. 3. 22. 14:16

'에스코우 성(Egeskov Slot)'은 리투아니아(Lithuania)의 안드리우스 페트쿠스(Andrius Petkus)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덴마크(Denmark) 퓐(Fyn) 섬의 남부 호숫가에 있는 고성 에스코우 성을 표현한 것이다. 조각가 안드리우스 페트쿠스는 리투아니아의 팔랑가(Palanga)에 모래 조각 공원과 박물관을 세웠다. 그는 2016년 5월 27일부터 6월 6일까지 열린 부산 해운대 '세계 모래 조각전'에도 참가하여 '해운대 미디어 파사드'란 작품을 전시한 바 있다. 


안드리우스 페트쿠스(Andrius Petkus, 리투아니아) 작 '에스코우 성(Egeskov Slot)'


에스코우 성은 덴마크 퓐 섬의 남부 호숫가에 있다. 퓐 섬은 서쪽의 윌란(Jylland, 유틀란트) 반도와 동쪽의 셸란(Sjaeland, 질랜드) 섬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셸란 섬과는 스토레벨트(Storebælt)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토레벨트 교(Storebæltsbro, Great Belt Bridge)로 연결되어 있다. 스토레벨트 해협을 대벨트(Great Belt) 해협이라고도 한다. 윌란 반도와는 릴레벨트(Lillebælt) 해협을 사이에 두고 릴레벨트 교(Den Gamle Lillebæltsbro)와 신릴레벨트 교(Den Nye Lillebæltsbro, New Little Belt Bridge) 등 두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릴레벨트 해협을 소벨트(Little Belt) 해협이라고도 한다.


에스코우 성(Egeskov Slot, 출처 위키피디아)


에스코우 성은 1534년 덴마크의 로마 카톨릭 세력과 개신교 세력 사이에 벌어진 백작 전쟁(伯爵戰爭, Grevens fejde, Count 's Feud)의 산물이다. 1533년 4월 10일 덴마크의 왕 프레데리크 1세(Frederick I)가 죽자 루터교도인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 3세(Christian III)가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들과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던 덴마크 의회는 그를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올덴부르크(Oldenburg)의 크리스토페르 백작(Christoffer)은 크리스티안 2세(Christian II)의 국왕 복위를 주장했다. 뤼베크(Lübeck), 셸란 섬, 스코네(Skåne), 쾨벤하운(København, 코펜하겐), 말뫼(Malmö)의 지도자나 귀족들도 크리스토페르 백작을 지지했다. 백작 전쟁은 여기서 유래한 이름이다.  


크리스토페르 백작은 뤼베크 시 병력과 로마 카톨릭 농민군 및 귀족군을 이끌었다. 농민군은 스키페르 클레멘트(Skipper Clement)로 알려진 덴마크의 상인 클레멘 안데르센(Klemen Andersen)이 지휘했다. 윌란 반도 북부에서 거병한 농민군은 루터파 귀족들의 영지를 약탈했다. 1534년 10월 16일 닐스 브로크(Niels Brock), 홀게르 로센크란츠(Holger Rosenkrantz) 등이 이끄는 루터파 귀족군은 스벤스트루프 전투(Svenstrup)에서 크리스토페르 백작 반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크리스티안 3세는 스웨덴(Sweden)의 구스타브 1세 바사(Gustav I Vasa) 국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크리스티안 3세의 충신 요한 란차우(Johan Rantzau)는 스웨덴 군대의 지원을 받아 1534년 12월 18일 전투에서 농민군을 포위 공격해서 패퇴시켰다. 이 전투를 계기로 크리스티안 3세는 1535년 말부터 전세를 역전시켜 윌란 전역에서 발생한 농민반란을 진압했다. 또 왹스네베르크(Øksnebjerg)에서도 크리스토페르 백작의 군대를 격파했다. 크리스티안 3세의 쾨벤하운 봉쇄로 크리스토페르 백작 군대는 결국 1536년 7월 28일 항복하고 말았다. 백작 전쟁 결과 크리스티안 3세는 덴마크 국왕으로 인정받음으로써 군주제가 세습화되었고, 덴마크에 이어 노르웨이(Norway)에서도 종교개혁이 실시되었다. 


백작 전쟁으로 불안해진 덴마크의 귀족들은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요새화된 건물을 지었다. 에스코우 성도 1554년 프란 브로켄후스(Frands Brockenhuus) 백작이 세운 요새화된 건물이다. 프란 브로켄후스 백작은 1만2천여 개의 떡갈나무 말뚝을 호수에 박아서 만든 토대 위에 이 성을 지었다. '에스코우(Egeskov)'는 '떡갈나무 숲'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 성의 유일한 통로는 도개교(跳開橋, Drawbridge)였다. 도개교는 부산의 영도대교처럼 배가 지나갈 때 다리의 한쪽 또는 양쪽을 들어올려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든 다리이다. 


수 맥그루(Sue Mcgrew, 미국) 작 '인형의 집과 북유럽 가구'


'인형의 집과 북유럽 가구'는 미국(USA)의 수 맥그루(Sue Mcgrew)가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오두막, 인형, 작은 가구 등을 표현한 것이다. 수 맥그루는 2009년부터 모래 조각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울 얻었다. 


아름다운 숲과 호수 등이 많은 북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라이프 스타일이 자연 친화적이다. 이런 자연 친화적 라이프 스타일은 어린이들의 장난감이나 놀이 공간에도 스며들어 있다. 북유럽에는 인형과 작은 가구들을 진열하는 돌하우스(dollhouse), 아이들을 위한 작은 수제 오두막 등 어린이들이 놀면서 창의성과 협동성을 기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마리엘 히셀(Marielle Heessels, 네덜란드) 작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The Little Match Girl)>,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La bergere et le ramoneur)>'는 네덜란드(Netherlands)의 마리엘 히셀(Marielle Heessels)이 만들었다. 작가는 '성냥팔이 소녀'에서 밤이 되어 추위에 얼어붙은 소녀가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성냥불을 켜자 거기에 나타난 할머니의 유령을 보고 행복해 하는 장면,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에서 소녀와 청소부가 굴뚝 위에서 다정하게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표현했다. 


마리엘 히셀은 2011년 네덜란드 '잔드보트 (Zandvoort) 모래 조각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바 있다. 그녀는 또 2015년 7월 캐나다(Canada) 브리티시 컬럼비아(British Columbia) 주 파크스빌 해변에서 열린 '캐나디언 오픈 모래 조각 대회'에서 캐나다의 데이빗 듀참(David Ducharme)과 한 조를 이뤄 만든 '나의 더 나은 반쪽(My Better Half)'이란 작품으로 1등을 차지한 바 있다. 


'성냥팔이 소녀'는 덴마크의 동화작가이자 소설가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이 1845년 12월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몹시 가난한 소녀가 밤늦게까지 추위에 떨면서 성냥을 팔다가 결국 얼어죽었다는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새해 아침 소녀는 성냥들을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죽었다. 그러나 소녀가 성냥불로 인해 할머니와 함께 천국에 가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고 끝맺고 있다.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도 안데르센이 1952에 쓴 동화이다. 이 동화는 다소 특이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옛날 어느 아이의 방 천장 한가운데에 염소처럼 생긴 다리에 뿔이 나 있고, 수염을 아주 길게 기른 사나이가 새겨져 있었다. 아이들은 그를 '염소 다리 빌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탁자에는 도자기로 만든 아름다운 양치기 소녀 인형과 중국인 할아버지 인형이 있었다. 소녀의 오른쪽에는 굴뚝 청소부 인형이 있었다. 양치기 소녀를 사랑한 빌리는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그럴 때마다 거절당했다. 왜냐하면 양치기 소녀가 굴뚝 청소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인 할아버지는 양치기 소녀에게 빌리와 결혼하라고 강요했다. 굴뚝 청소부와 양치기 소녀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밤새 탁자에서 내려와 몰래 옷장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 사실을 안 중국인 할아버지는 그들을 찾아 탁자에서 내려오다가 굴러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는 옷장에서 나와 깨진 중국인 할아버지를 다시 붙여 주었다. 그때부터 중국인 할아버지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빌리가 청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지만 중국인 할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는 빌리의 청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빠벨 밀니코프(Pavel Mylnikov, 러시아) 작 '라프족(Lapp people)'


'라프족(Lapp people)'은 러시아의 빠벨 밀니코프(Pavel Mylnikov)가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손록 떼를 방목하는 라프족을 묘사하고 있다. 이들 뒤에는 북유럽의 타이거 삼림지대가 울창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빠벨 밀니코프는 2014년 7월 미국의 '아틀란틱 시티 모래성 월드컵(Atlantic City Sand Sculpting World Cup)'에 참가하여 '공상가 어린 소녀(Daydreaming Little Girl)'를 제작했다. 또, 단체전에서 빠벨 밀니코프와 알렉세이 디아코프(Aleksei Diakov) 팀은 천사의 날개를 배경으로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대상을 차지한 바 있다.  


라프족은 스웨덴의 북부 라플란드(Lappland)와 노르웨이,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 북부, 러시아 연방 북단의 콜라 반도(Kola Peninsula)에 사는 소수민족이다. 라프족을 사미족(Sámi people)이라고도 한다. 라프족은 스스로를 사메(Saame) 또는 사브메(Sabme)로 부른다. 하지만, 주변의 다른 민족은 사미족을 라프라고 부르고, 노르웨이에서는 핀(Finn)이라고 한다. 라프족의 총인구수는 노르웨이 2만 명, 스웨덴 8천5백 명, 핀란드 2천3백 명, 러시아 1천8백 명 등 약 3만 명이다. 


라프족은 노르웨이의 북극 해안에서 정주생활을 하고 있는 어민을 중심으로 한 해안 라프, 스웨덴의 내륙 산지를 이동하는 순록(馴鹿) 유목민인 산지 라프, 스웨덴과 핀란드의 일부, 러시아의 콜라 반도에 살면서 순록 사육 외에 수렵이나 어로도 하는 삼림 라프로 구분된다. 라프어는 우랄어족의 핀우고르어파(語派)에 속하며, 방언은 서부(노르웨이 라프어, 스웨덴 라프어)와 동부(핀란드 라프어, 러시아 라프어)로 크게 나눠진다. 


라프족은 키가 작고, 머리도 작은 편이어서 핀족(Finns)과는 구별된다. 라프족의 사회에서는 모계(母系)가 중요시되며, 형제자매 간의 결속력이 강하다. 여성은 결혼 전의 성교섭과 순록 사육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종교는 일부의 러시아 정교도(正敎徒)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루터파 개신교이다.  


크리스츠 자린쉬(Krists Zarins, 라트비아) 작 '산타 클로스(Santa Claus)'


'산타 클로스(Santa Claus)'는 라트비아의 크리스츠 자린쉬(Krists Zarins)가 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산타 클로스가 순록이 끄는 마차를 타고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러 가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산타 클로스 뒤에는 어린이들에게 나눠 줄 선물 보따리가 실려 있다. 


크리스츠 자린쉬는 1994년 리가 아트 컬리지(Riga Art College)에서 조각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라트비아에서부터 핀란드, 러시아, 스위스, 캐나다, 타이완 등 세계 여러 나라의 모래 조각 축제에 참가했다. 자린쉬는 미국 '버지니아 비치 넵튠 축제(Virginia Beach Neptune Festival)'의 일환으로 2018년 9월 28일부터 10월 7일까지 열린 '넵튠 국제 모래 조각 챔피언쉽(Neptune's International Sand Sculpting Championship)'에도 참가한 바 있다. 


산타 클로스의 기원은 성 니콜라스(St. Nicholas)를 뜻하는 라틴어 상투스 니콜라우스(Sanctus Nicolaus)이다. 서기 280년경 소아시아 리키아(Lycia)의 미라(Myra, 지금의 터키)에서 부유층 아들로 태어난 니콜라스는 매우 관대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상속 받은 재산을 전부 사람들에게 나눠준 니콜라스는 멀리 떠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수도사로 일생을 보내다가 12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니콜라스 수도사가 성인으로 추대된 후에는 12월 6일이 그를 기리는 날이 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지금도 성 니콜라스의 날을 기념하고 있으며, 아이들은 이날 '세인트 닉(Saint Nick)'으로부터 쿠키와 사탕을 받기 위해 신발을 바깥에 내놓는다.


'세인트 닉'의 네덜란드식 애칭은 '신터 클라스(Sinter Klaas)'이다.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정착민이 그들의 전통을 아메리카 대륙에 전파하면서 'Sinter Klass'는 'Santa Claus'가 되었다. 소설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이 그의 소설 '뉴욕의 역사(A History of New York)'에서 성 니콜라스를 뉴욕의 수호성인으로 만들면서 산타 클로스는 더욱 대중화되었다.


1822년 뉴욕의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Clement Clarke Moore)교수는 딸을 위해 '성 니콜라스의 방문(A Visit from St. Nicholas)'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무어 교수는 이 시에서 산타 클로스를 뚱뚱하고 마법을 펼치는 인물로 묘사했다. 1931년에는 코카콜라 광고에 빨간 옷을 입고, 길고 하얀 수염이 풍성한 사람이 등장했다. 빨간 옷은 코카콜라의 로고 색깔, 길고 풍성한 하얀 수염은 거품을 상징하는 것이었다.이후 백화점과 상점에서는 세인트 닉, 즉 산타 클로스의 모습을 이용한 크리스마스(Christmas) 쇼핑에 대한 광고를 하기 시작했다. 1841년에는 필라델피아의 한 상점 주인이 산타 클로스 옷을 입은 남자를 고용해서 상점 굴뚝에 올라가 있도록 했다. 이 광고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881년 정치풍자 만화가였던 토마스 네스트(Thomas Nast)는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 지에 실릴 만화에 산타 클로스를 그리기 위해 무어 교수의 시와 코카콜라의 광고를 차용했다. 그는 흰 수염이 수북한 둥근 얼굴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그렸다. 그 남자는 털이 달린 밝은 빨강색의 옷을 입고 장남감이 가득 든 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산타 클로스의 모습이다. 산타 클로스는 마케팅 전략으로 탄생한 캐릭터임을 알 수 있다. 


산타 클로스의 썰매를 끄는 순록의 유래는 노르웨이 신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썰매를 끄는 순록은 대셔(Dasher), 댄서(Dancer), 프랜서(Prancer), 빅센(Vixen), 코밋(Comet), 큐피드(Cupid), 도너(Donder)블릿젠(Blitzen) 등 8마리이다. 노르웨이의 뇌신(雷神) 토르(Thor)는 그내셔(Gnasher)와 크래커(Cracker)라는 두 마리의 마술염소가 끄는 이륜마차를 타고 폭풍을 뚫고 다녔다. 이 신화의 마술염소가 순록으로 변용된 것이 아닌가 한다. 루돌프(rudolph)는 1939년에 마지막 9번째로 합류한 순록이다. 루돌프는 수줍음을 잘 타서 코가 빨간데, 그 코가 캄캄한 밤길을 밝혀 산타 클로스를 안내해준다. 9마리의 순록 중에서 가장 유명한 순록은 루돌프다. '루돌프 사슴 코'라는 노래도 있으니까 말이다.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만일 내가 봤다면 불 붙는다 했겠지

다른 모든 사슴들 놀려 대며 웃었네 


'루돌프 사슴 코' 가사는 미국의 동화 작가 로버트 메이(Robert May)가 쓴 동화 '붉은 코 사슴 루돌프(Rudolf the Red-nosed reindeer)'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동화를 쓸 당시 로버트 메이는 가난한 삼류작가였고, 병든 아내를 잃은 후 어린 딸을 홀로 기르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들이 엄마 없는 아이라고 놀린다면서 딸이 슬퍼하자, 메이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것'이라며 루돌프 사슴코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었다. 외톨이가 된 딸의 슬픔을 달래주고, 꿈을 주기 위해서였다. 빨간 코 루돌프는 바로 로버트 메이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reindeer'는 '사슴'이 아니라 '순록'이다. 'Rudolf the Red-nosed reindeer'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빨간 코 순록 루돌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빨간'이란 말을 뺐다. 가사도 그렇다. 미국 가사 'Rudolph, the red-nose reindeer, had a very shiny nose. And if you ever saw it, you would even say it glows(루돌프, 빨간 코의 순록은 매우 빛나는 코를 가지고 있었네. 그래서 네가 그걸 보게 되면 아마 빛난다고 말할 걸)'와 일본 가사 'まっ赤なお鼻のトナカイさんは いつもみんなのわらいもの(새빨간 코의 루돌프 사슴은, 언제나 모두의 웃음거리)'에는 '빨간'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가사에는 ‘빨간’이란 말이 빠져 있다. 바로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와 혁명(革命, revolution)에 대한 극도의 반감으로 나타난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분단상황 하에서 반공교육을 시킬 때 '붉은색'을 공산주의나 혁명성을 가리키는 색깔로 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공산주의자를 '빨갱이'로 비하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크리스마스는 12월 24일 해질 때부터 25일 해질 때까지다. 당시 사람들은 하루를 전날의 해질 때부터 다음 날의 해질 때까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크리스마스는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의 탄생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지저스 크라이스트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가 시작된 것은 4세기 무렵이다. 그 이전에는 크리스마스의 날짜가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1월 6일, 3월 21일, 12월 25일 가운데 하루를 선정했다.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로 자리잡은 것은 서기 354년 이후의 일이다.


케빈 크로포드(Kevin Crawford, 호주) 작 '베르겐 시의 구 시가지 브뤼겐 지역'


'베르겐 시의 구 시가지 브뤼겐 지역'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케빈 크로포드(Kevin Crawford)가 만든 작품이다. 케빈 크로포드는 2009년 5월 15일 동해시 망상해수욕장에서 개막된 제1회 '세계 모래 조각 대회'에 네덜란드의 제론 아드보카트(Jeroen Advocaat), 립 페르베르다(Lip Ferwerda), 포르투갈의 호드리고 페레이라(Rodrigo Ferreira)와 함께 참가하여 '숭례문'이란 작품을 공동으로 제작한 바 있다. 


베르겐(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베르겐(Bergen)은 노르웨이 서남부 호르달란 주 해안의 깊숙이 들어간 피오르에 있는 도시이다. 원래는 비외르그빈(Björgvin)이라고 불렀다. 수도 오슬로에서 서북쪽으로 400km 떨어져 있으며, 노르웨이에서 오슬로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주요 항구와 상업 지역은 뷔 피오르에 돌출해 있는 반도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으로 소형 선박이 이용하는 보겐 항(Vågen harbour)과 보겐 만(Vågen bay), 남쪽으로 대형 선박이 이용하는 푸데 피오르, 스토레 룬예고르스반 호와 접한다.


베르겐은 북위 60° 22′의 고위도에 위치하지만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하여 겨울철에도 평균기온이 영상이며, 지형적인 영향을 받아 연평균 강수량이 2,000mm 이상으로 유럽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곳 중 하나이다. 반면에 눈은 노르웨이에서 적게 오는 곳에 속한다.


베르겐 시의 역사는 1070년 노르웨이의 '조용한 왕' 올라프 3세(Olav III Haraldsson)가 건설한 것에서 시작된다. 1100년경 성이 세워진 뒤 상업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12세기에는 교회관구가 세워졌으며, 12∼13세기에는 노르웨이의 수도였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쓴 뒤 영국 선원들이 들어오면서 베르겐은 무역항으로 중요해졌다. 중세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최대의 항구이며 무역의 중심지였다. 


14세기에는 게르만 상인들이 상권을 독점하면서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에도 가세한 베르겐은 스칸디나비아 서해안의 무역을 지배하며 수백년 동안 크게 번창했다. 당시 노르웨이는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게르만 상인들의 영향력은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19세기까지 노르웨이의 최대 도시였던 베르겐은 4차례의 대화재와 크리스티아나(Christiana, 지금의 오슬로)의 발전으로 다소 침체했다가 근현대에 와서 다시 서해안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대화재의 교훈으로 베르겐 시는 1855년 이후 목재 건축을 금지하고 있다. 


베르겐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더불어 1887년에 세워진 노르웨이 서부 응용미술 박물관, 한자 박물관(Hanseatisk Museum) 등 각종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는 문화도시이다. 피오르 해안 관광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한자 동맹 시절의 독특한 목재 건물들이 남아 있는 베르겐 역사 지구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702년 건립된 한자 박물관은 시장 북쪽 브리겐 거리(Bryggen Street)에 자리잡고 있다. 베르겐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예로부터 어업과 해외무역이 발달한 항구도시로서 한자 동맹에 가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이다. 마리아 교회(Mariakirken)는 브리겐 거리 북서쪽에 위치한 베르겐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 안에는 바로크풍의 선교단이 있다. 


트롤하우겐(Troldhaugen)은 노르웨이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의 집이다. 트롤하우겐은 트롤(troll)이 살고 있는 언덕이란 뜻이다. 트롤하우젠에는 그리그가 사용했던 피아노, 악보, 가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그 외에도 베르겐 출신 예술가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올레 불(Ole Bornemann Bull), 조경화가 요한 크리스티안 달(Johan Christian Dahl), 극작가 루드비 홀베르(Ludvig Holberg) 등이 있다.


베르겐 수족관(Bergen Aquarium)은 노르네스 반도(Nordnes peninsula) 서쪽 끝에 있는 노르웨이 최대의 수족관이다. 판토프트 통널 교회(Fantoft Stavkirke)는 베르겐 교외의 판토프트(Fantoft)에 있다. 1150년에 처음 송네 피오르(Sognefjord)에 세워졌던 이 교회는 보존을 위해 1883년 이곳으로 옮겼다. 이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97년 6월 6일 재건축했다. 지붕이 5층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보겐 항 입구에 있는 베르겐후스 요새(Bergenhus Fortress는 베르겐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호콘 4세(Haakon IV) 왕의 명령으로 건축되었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되고 잘 보존된 요새이다. 이 요새에는 호콘 홀(Haakon's Hall), 로센크란츠 탑(Rosenkrantz Tower) 등의 유적이 있다. 로센크란츠 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기간 중 크게 파괴되었다.


메리네이즈 보르가르(Melineige Beauregard, 캐나다) 작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동상'


'안데르센의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 동상'은 캐나다의 메리네이즈 보르가르(Melineige Beauregard)가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덴마크의 수도 쾨벤하운(코펜하겐) 항구 랑겔리니 공원(Langelinie Park) 바닷가에 있는 인어공주 동상을 표현한 것이다. 


메리네이즈 보르가르의 아버지 가이 보르가르(Guy Beauregard)도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각가이다. 메리네이즈 보르가르는 2011년부터 국제 모래 조각 대회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대상을 받았다. 그녀는 에술에 대해 '내 손이 물질에 닿으면 내 마음이 열리며, 나는 우주의 공동 창조자가 된다.'면서 '예술가는 물질을 영성화시키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메리네이즈 보르가르(Melineige Beauregard, 캐나다) 작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마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마녀'는 인어공주가 아름다운 목소리를 희생하는 대신 두 다리를 얻기 위해 마녀와 거래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여기서도 만날 수 있다. 


'인어공주'는 1836년 양성애자였던 안데르센이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던 에르바르드 콜린(Edvard collin)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실감에 빠져서 쓴 동화라고 한다. 모티브는 슬라브 신화(Slavic mythology)에 내려오는 '물의 요정 루살카(water nymph Rusalka)' 전설과 프리드리히 드 라 모테 푸케(Friedrich de la Motte Fouque)의 '운디네(Undine)'에서 빌려 온 것이다. 


'인어공주'는 인간 왕자를 사랑한 소녀 인어가 마녀 우르슬라(Ursula)와 거래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이 되었지만,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는 슬픈 이야기다. 안데르센은 '인어공주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안데르센은 가난한데다가 못생긴 외모를 가진 자신을 반인반어, 즉 상체는 인간이지만 하체는 물고기 지느러미를 가진 인어에 비유했던 것이다. 실연을 당한 작가의 쓰라린 마음이 담겨 있기에 이 동화는 더욱 애절하게 다가온다. 


인어공주 동상(출처 나무위키)


덴마크의 랜드마크인 인어공주 동상은 1913년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 에드바르드 에릭센(Edvard Eriksen)이 유명한 발레리나였던 자신의 부인을 모델로 제작하였다. 이 동상은 크기도 작고 볼품도 없어서 수난을 많이 당했다. 팔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고, 머리도 두 번이나 잘렸다. 페인트를 뒤집어 쓴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2003년에는 폭탄 공격을 당해서 통째로 바닷속에 처박히기도 했다. 아무런 보호막도 없어서 녹이 스는 문제도 있다.


아그네스 루드지테-키릴로바(Agnese Rudzite-Kirillova, 라트비아) 작 '알프레드 노벨과 노벨상'


'알프레드 노벨과 노벨상'은 라트비아 출신의 아그네스 루드지테-키릴로바(Agnese Rudzite-Kirillova)가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노벨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기념 메달, 다이너마이트,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는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표현한 것이다. 


아그네스 키릴로바는 덴마크, 에스토니아, 핀란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리투아니아, 러시아, 스웨덴, 스위스 등 유럽 전역과 쿠웨이트, 미국 등지에서 열린 모래 조각 전시회에 두루 참가했다. 키릴로바는 2011년 스위스 로르샤흐(Rorschach)에서 열린 제13회 '국제 모래 조각 페스티발'에서 1위, 2014년 러시아 페트로자보트스크(Petrozavodsk)에서 열린 '국제 모래 조각 페스티발'에서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알프레드 노벨(출처 위키백과)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은 스웨덴 출신의 과학자이다. 노벨은 고체 폭탄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서 엄청난 명성과 부를 쌓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사람을 죽이는 폭탄으로 사용되는 것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노벨은 1896년 12월 10일 숨을 거두기 전 '재산에서 생기는 이자로 해마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 및 의학, 문학, 평화의 다섯 부문에 걸쳐 공헌이 있는 사람에 상을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계의 평화와 과학의 발달을 염원하는 노벨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산은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에 기부되었다. 노벨의 기부금으로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는 1901년부터 노벨상 제도를 제정하였다.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 의학, 문학, 경제학, 평화 등 6개 부문의 뚜렷한 공로자에게 국적 및 성별에 관계없이 매년 수여하고 있다. 현재 노벨상 상금은 900만 크로나(약 12억7천만 원)이다.


캐런 프랄리치(Karen Fralich, 캐나다) 작 '에드바르 그리그와 <페르 귄트>' 


'에드바르 그리그와 <페르 귄트>'는 캐나다의 캐런 프랄리치(Karen Fralich)의 작품이다. 캐런 프랄리치는 1998년부터 14개국에서 열린 61개의 모래 조각 대회에 참가하여 많은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 중에서 3번은 대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에드바르 그리그의 반신상과 악보, '산속 마왕의 궁전에서(In der Halle des Bergkönigs)'에서 주인공 페르 귄트가 마왕의 딸과 결혼하여 왕이 되려 했지만, 결혼의 조건을 듣자마자 도망쳐 마왕의 부하들에게 쫓기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는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태어났다. 원래 스코틀랜드 출신인 그리그 가문은 그리그의 조부 때 노르웨이로 이주하였다. 그의 아버지 알렉산더 그리그는 베르겐 주재 영국 영사였고, 노르웨이의 중산층 가문 출신의 어머니 게신 하게루프는 함부르크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6세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운 그리그는 1858년 바이올린의 거장 올레 불의 추천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가 멘델스존과 슈만 풍의 음악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1863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간 그리그는 1864년 노르웨이의 젊은 민족주의 음악가 리카르트 노르로크와 교류하였다. 1864~65년 스칸디나비아의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설립한 코펜하겐 음악협회 '외테르프'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1867년 그리그는 그의 사촌 여동생인 니나 하게루프(Nina Hagerup)와 결혼했다. 1865~66년과 1869~70년 그리그는 로마에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에 열광적 찬사를 보낸 페렌츠 리스트(Ferenc Liszt)와 헨리크 입센(Henrik Johan Ibsen)을 처음 만났다. 1866년에는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에 정착하여 1874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885년 베르겐 근방에 '트롤드하우겐'이라는 집을 지었다. 


노르웨이의 민속 전통에 뿌리를 둔 그리그의 음악은 섬세한 서정으로 유명하다. 1867~1901년 사이에 10집으로 된 피아노곡 '서정 소곡집(Lyriske Stykker)'을 작곡했다. 활기찬 리듬은 민요와 연관이 깊으며, 화성법은 후기 낭만주의 양식에서 발전한 새로운 것이었다. 그는 '피아노 협주곡' 작품 16과 '현악 4중주 G단조' 작품 27, 바이올린 소나타와 피아노 소나타 각각 3곡 등 일부 작품에서 자유 소나타 형식을 썼다. 피아노를 위한 '발라드' 작품 24는 노르웨이의 민속 선율에 바탕을 둔 변주곡이다.


가장 사랑받는 곡은 '페르 귄트 모음곡(Peer Gynt Suite)' 작품 23과 '홀베르그 모음곡(Holberg)' 작품 40이다. 노르웨이의 춤과 노래를 편곡한 작품 17, 작품 66과 특히 '노르웨이 농민 춤곡 슬로터' 작품 72는 리듬과 화성에 대한 그리그의 예리한 감각을 보여준다. 성악곡은 A. O. 비녜의 가사에 곡을 붙인 작품 33과 시가 '산의 요정(Haugtussa)' 작품 67이 있는데, 이 작품들에서 그리그는 시의 정서를 그대로 음악으로 표현했다. 


'페르 귄트 모음곡'은 노르웨이의 헨리크 입센의 동명 시극(詩劇)을 위해 만든 23개의 부수음악 '페르 귄트(1874~75)' 중 극의 흐름에 관계없이 4곡을 골라 제1모음곡 작품 46을 만들었고, 이후 다시 4곡을 더 골라 제2모음곡 작품 55를 만들었다. 제1모음곡은 '아침의 기분(Morgenstimmung)', '오제의 죽음(Åses Tod)', '아니트라의 춤(Anitras Tanz)', '산속 마왕의 궁전에서(In der Halle des Bergkönigs)'로 구성되어 있다. 제2모음곡은 '잉글리드의 탄식(Der Bruderoet Ingrids Klage)', '아라비아의 춤(Arabischer Tanz)', '페르 귄트의 귀향(Peer Gynts Heimkehr)', '솔베이그의 노래(Solveig's Song)'로 구성되어 있다. 제1모음곡 중 '아침의 기분'과 제2모음곡 중 '솔베이그의 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그리그는 한평생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로부터 조국이 자유로워지기를 염원했던 노르웨이 국민악파를 상징하는 음악가이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작곡 기법과 독창적인 화음 구성으로 세련미를 더하고, 노르웨이 민요와 민속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노르웨이 국민의 정서를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그리그는 전통과 현대미를 조화시켜 새로운 노르웨이 음악을 창조했다.


질 해리스(Jill Harris, 미국) 작 '셀마 라겔뢰프의 <닐스의 신기한 여행>'


'셀마 라겔뢰프의 <닐스 홀게르손의 신기한 스웨덴 여행(Nils Holgerssons underbara resa genom Sverige)>'은 미국의 질 해리스(Jill Harris)가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닐스가 거위인 모르텐(Morten)을 타고 기러기들과 함께 라플란드를 여행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질 해리스는 2009년 제1회 '망상해수욕장 세계 모래 조각 대회'에 참가한 바 있다. 그녀는 남편이자 동료인 토머스 코트(Thomas Koet)와 한 조를 이뤄 'Share what is inside(안으로부터의 공유)'라는 작품을 만든 바 있다. 


'닐스 홀게르손의 신기한 스웨덴 여행'은 스웨덴의 작가 셀마 라겔뢰프(Selma Ottilia Lovisa Lagelöf, 1858~1940)가 1906년에 쓴 동화이다. '닐스의 신기한 여행', '닐스의 이상한 여행', '닐스의 이상한 모험', '닐스의 신기한 모험', '닐스의 대모험'이라고도 한다. 이 동화는 장난꾸러기 닐스가 여행 중 수많은 동물과 만나면서 점차 훌륭한 소년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를 그린 대작이다. 셀마 라겔뢰프는 이 동화로 1909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또 그녀는 1914년 스웨덴 한림원 회원 자격을 얻은 첫 번째 여성이기도 하다.


'닐스의 신기한 여행'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스웨덴 남부에 사는 소년 닐스 홀게르손(Nils Holgersson)은 장난기가 많아서 가축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일요일 아침 부모가 교회에 간 사이에 닐스는 집에서 요정 톰테(Tomte)를 잡는다. 하지만 요정 톰테는 도리어 마법을 걸어 닐스를 난쟁이로 만든다. 난장이가 되면서 닐스는 동물들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가축들은 난장이가 된 닐스에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복수를 한다. 거위인 모르텐(Morten)은 우연히 지나가는 기러기들로부터 '날지 못하는 새'라고 놀림을 당한다. 분노한 모르텐은 자신을 잡으려던 닐스와 함께 먼 곳으로 떠난다. 닐스와 모르텐은 기러기 대장인 아카(Akka)의 명령을 받고, 기러기들과 함께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의 북부, 러시아 콜라 반도를 포함한 유럽 최북단 지역인 라플란드(Lapland)로 여행을 하게 된다. 일행은 라플란드에서 한여름을 보내게 된다. 


닐스 일행은 가을이 되자 스웨덴 남부 예탈란드(Götaland)의 스코네(Skåne)로 떠난다. 닐스는 기러기들과 여러 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동물들과 만나면서 성장한다. 닐스의 집에 가까이 오게 되자 아카 대장은 모르텐을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르텐은 한발 먼저 닐스의 집으로 돌아온다. 닐스의 부모는 모르텐을 팔기 위해 목을 졸라 도살하기로 한다. 이때 닐스가 모르텐을 도살하면 안 된다고 호소하자 그는 정상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닐스가 장난꾸러기에서 부지런하고 바른 소년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본 그의 부모는 몹시 기뻐한다. 정상인으로 돌아온 닐스는 이제 새의 등에 탈 수도 없고, 동물들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그는 새벽과 함께 하늘을 나는 기러기들에게 이별을 고한다.


토머스 코트(Thomas Koet, 미국) 작 '북유럽의 동물들'


'북유럽의 동물들'은 네덜란드계 미국인 토머스 코트(Thomas Koet)가 만든 작품이다. 토머스 코트는 2009년 제1회 '망상해수욕장 세계 모래 조각 대회'에 참가하여 질 해리스와 한 조를 이뤄 'Share what is inside(안으로부터의 공유)'라는 작품을 만든 바 있다. 토머스 코트와 질 해리스는 부부이자 동료이다. 


작품에는 울창한 삼림을 배경으로 물고기를 잡아먹는 북극곰, 납작한 꼬리가 특징인 비버, 한 쌍의 사슴,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오르는 부엉이, 나무 위로 달아나는 다람쥐, 다람쥐를 쫓는 여우, 버팔로 떼 등이 표현되어 있다.  


기-올리비에 듀보(Guy-Olivier Deveau, 캐나다) 작 '에드바르 뭉크와 <절규>'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와 <절규(The Cry)>'는 캐나다의 기-올리비에 듀보(Guy-Olivier Deveau)의 작품이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상징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 상과 그의 작품 '절규'를 표현했다. 기-올리비에 듀보는 2017년 제13회 '해운대 모래축제 - 모래, 행복을 그리다'에 참가하여 영화 '타이타닉'의 낭만적인 명장면을 통해 행복한 순간을 표현한 '낭만(Romance)'란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뭉크는 노르웨이의 명문가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뭉크의 어머니는 그가 5세 때 결핵으로 죽었다. 10년 뒤 그의 누나도 결핵으로 죽었고, 누이동생은 정신병에 걸렸다. 아버지와 남동생도 뭉크가 어렸을 때 죽었다. 이런 환경에서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 주는 불안에 시달렸다. 이후 평생 그를 따라다닌 불안과 공포는 그의 작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에드바르 뭉크와 <절규>' 앞에서


뭉크가 어렸을 때 받은 죽음에 대한 인상과 공포, 불안이 반영된 작품에는 '병든 아이(The Sick Child, 1888,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 '죽음의 방(The Death Chamber, 1892,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절규(1893)', '죽음의 침상 곁에서(By the Death Bed, 1895, 노르웨이 베르겐의 라스무스 마이어스 컬렉션 소장)', '죽은 어머니(Dead Mother, 1899, 독일 브레멘 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절규'는 다리 위에 서 있는 인물이 주변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귀를 막고 공포에 질려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실존의 고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뭉크는 19세기 자연주의 회화의 경직된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20세기 표현주의의 선구자로서 인간적인 미술을 탄생시켰다.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주제를 강렬하게 다룸으로써 보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그의 기법은 독일 표현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당대의 한 평론가는 그를 두고 '노르웨이 최초의 인상파 화가이자 유일한 인상파 화가'라고 평했다. 


레오나르도 우골리니(Leonardo Ugolini, 이태리) 작 '피오르의 풍경'


'피오르의 풍경'은 이태리의 레오나르도 우골리니(Leonardo Ugolini)의 작품이다. 깎아지른 듯한 피오르를 배경으로 바닷가를 따라서 들어선 항구 도시와 이제 막 출항하는 범선을 표현했다. 레오나르도 우골리니는 2016년에도 모래 미술관의 제9기 '모래로 세계 여행 - 남미 편'에 참가하여 '전설의 황금향 엘도라도(El Dorado)'를 제작한 바 있다. 


피오르(fjord)는 빙하의 침식으로 깎이고 패인 골짜기에 빙하가 사라진 후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형성된 너비가 좁고 긴 U자형 만으로 피오르드, 협만(峽灣)이라고도 한다. 피오르는 과거 빙하의 영향을 받았던 노르웨이, 캐나다, 뉴질랜드, 칠레 등에서 주로 나타나는 지형이다. 노르웨이의 남서 해안선은 약 200만 년 전부터 여러 번 빙하로 뒤덮이면서 침식을 받아 피오르가 발달했다. U자곡 하부는 수면보다 훨씬 아래에 있기 때문에 피오르의 절벽이 수백m에 이르는 곳도 있고, 해안 부근에서는 바다 깊이가 수백m에 이르는 곳도 있다. 노르웨이의 송네 피오르는 길이가 200km가 넘고, 수심이 깊은 곳은 1,300m를 넘는다. 칠레의 카날메시에르 피오르는 수심이 1,270m에 이르는 곳도 있다. 산꼭대기의 눈 녹은 물이 수백m 아래로 쏟아지는 피오르의 폭포는 장관이다. 세계에서 매우 높은 폭포들은 대부분 이러한 유형의 폭포들이다. 


2018.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