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IS) 일명 다에시(Daesh)는 시리아와 이라크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민간인 납치와 인질 살해, 인신매매, 여성들의 성노예화, 역사 유적 파괴, 무차별 테러 등 잔인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 다에시(IS)는 알라의 이름을 내걸고 천인공노할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알라 신을 빙자한 다에시(IS)의 비인도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는 그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알라 신도 용서하지 못할 만행이었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IS) 일명 다에시(Daesh) 대원들
1971년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Abu Bakr al-Baghdadi)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북쪽 사마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이브라힘 이븐 아와드 이븐 이브라힘 이븐 알리 이븐 무하마드 알바드리 알사마라이로 알려져 있다. 알바그다디는 성장해서 바그다드 대학교에서 이슬람학 학사와 석박사 학위를 획득했다. 수니파 주도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al-Majid al-Awja) 정권 시절 알바그다디는 이슬람 신앙을 설교하며 반정부 활동을 전개했다.
다에시(IS)의 유래는 이라크에서 시작되었다. 1999년 수니파 계열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인 '유일신과 성전(JTJ, Jama'at al-Tawhid wal-Jihad)'이 결성되었다. 바로 이 유일신과 성전(JTJ)이 다에시(IS)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JTJ는 2004년 알카에다(al-Qaeda)에 흡수되어 충성을 맹세하고, 이름도 '두 강의 나라 지하드 본부기관(TQJBR, Tanẓīm Qāʻidat al-Jihād fī Bilād al-Rāfidayn)'으로 바꿨다. 이 명칭은 메소포타미아를 기반으로 한 지하드 조직이라는 의미이며, 사실상의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였다.
두 강의 나라 지하드 본부기관(TQJBR)은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 무자헤딘 슈라 위원회, 쟈시 알파티헨, 준드 알샤하바, 카트비얀 안사르 알타위드 왈 수나흐, 제흐 알타이파 알만소라 등 대형 조직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또 수니파 부호들의 막대한 자금 지원도 받았다.
알카에다는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 창시한 극단적 살라프파(Salafism) 무슬림에 의한 국제 무장세력이었다. 이들은 이슬람 원리주의, 또는 과격파 근본주의에 속하는 세력으로 1990년 이전에는 반소비에트연방(소련)을 표방했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반미국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다.
알카에다는 1990년대 이래 주로 미국을 표적으로 테러를 자행했다. 2001년에는 미국을 겨냥한 동시다발 테러를 감행하여 서방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알카에다를 비호하던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다. 알카에다의 과격 테러는 주변 중동국가들마저도 매우 적대적인 입장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이라크전이 발발하자 알바그다디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이라크 전쟁이 고조되면서 TQJBR은 안바르 주, 니나와 주, 키르쿠크 주, 살라딘 주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또, 바빌 주와 디얄라 주, 바그다드 주의 일부분을 점령하면서 TQJBR은 이라크의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TQJBR은 이라크 중동부 디얄라 주의 주도 바쿠바를 수도로 선포하였다.
2005년 알바그다디는 미군에 체포되어 이라크 남부의 부카 기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2006년 1월 TQJBR은 이라크의 소규모 반군 단체들을 합병하여 '무자헤딘 슈라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2006년 10월 12일 무자헤딘 슈라 위원회는 4개의 다른 이라크 반군 세력과 이라크 부족들을 합병시켜 이튿날 이슬람 수니파 테러 조직 ‘이라크 이슬람 국가'(ISI, Islamic State of Iraq)를 결성했다.
이라크전으로 수니파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2007년 이라크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라크는 미국 주도의 총선을 통하여 인구의 약 65%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라크 이슬람 국가(ISI)는 시아파의 권력독점에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ISI는 이후 바그다드를 점령하기 위하여 시아파 이라크 정부군을 공격하면서 이라크 북부 남쿠르디스탄 쿠르드 자치정부(KRG)와도 대치했다.
다에시(IS)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2009년 알바그다디는 부카 기지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후세인 정권이 몰락한 이듬해인 2010년 그는 이라크 내에서 시아파가 득세하자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라크 알카에다(Al-Qaeda in Iraq, AQI)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이슬람국가(ISI)는 사실상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였다. 이후 AQI는 알카에다와 갈라졌다. 2010년 5월 10일부터 알바그다디는 ISI의 수장인 아부 오마르 알바그다디(Abu Omar al-Baghdadi)의 후계자가 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아부 오마르 알바그다디가 2010년 미군 공습으로 사망하면서 알바그다디가 ISI의 수장이 되었다.
2011년 4월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이란을 등에 업은 바샤르 알아사드의 시아파 정권이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시기에 ISI는 시리아로 거점을 옮겼다. 시리아 내전이 계속되면서 ISI는 데이르에조르 주, 라카 주, 알레포 주의 대부분과 홈스 주의 동부를 점령했다. 그해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알바그다디를 체포하거나 사살하는 데 1,000만 달러(116억3,50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는 알카에다 지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에게 건 현상금 2,500만 달러(290억8,750만 원) 다음으로 많은 금액이었다.
2012년 경 알카에다의 세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반대로 ISI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라크전 후반기 연합군의 존재로 인해 세력 확장에 큰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ISI의 세력은 2012년 말 기준 2,500명으로 증가했다.
2013년 ISI는 시리아 정부군에 대항해 싸우는 반군으로 활동하는 한편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들을 흡수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ISI는 같은 수니파 반군 세력인 자유 시리아군(FSA)과는 노선을 달리하였고, 특히 서쿠르디스탄 쿠르드 민주동맹당(PYD)의 군사조직 쿠르드 인민수호부대(YPG)와는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2013년 4월 시리아 일부를 점령한 ISI는 ‘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ISIS, Islamic State in Iraq and Syria)’로 개칭했다. 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ISIS)에는 ‘이라크-알샴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in Iraq and Al-Sham)'라는 의미도 있었다. 알샴(Al-Sham)은 시리아를 중심으로 요르단과 레바논, 팔레스타인 등을 아우르는 지명이다. 알샴의 프랑스식 이름이 레반트(Levant)였다. 여기서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이라크-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란 이라크-알샴을 하나의 이슬람 국가로 만든다는 뜻이었다.
2013년 알자지라에서 유포된 알카에다 지휘관 아이만 알자와히리의 편지와 오디오 녹음에 따르면 ISI 시리아 진영을 해산시켰다고 말했다. 2014년 초부터 ISIS(ISIL)는 다른 반군들과 본격적으로 충돌을 빚기 시작했다. 2014년 2월 알카에다는 8개월 간의 권력 투쟁 끝에 ISIS(ISIL)와 결별을 선언했다. 그해 6월 ISIS(ISIL)는 이라크에서 대규모 공세를 이어나가 이라크 제2의 도시 나나와 주 모술과 인근 유전 지역을 장악하고, 살라딘 주의 행정 중심지인 티크리트를 점령하면서 엄청난 기세로 세력을 확장했다.
ISIS(ISIL)는 재정을 약탈 경제로 충당했다. 이들은 기업에 폭파 협박을 해서 거액을 받아내거나 은행, 귀금속 상점을 약탈하여 재원을 얻기도 했다. 2014년 6월 모술 전투 기간 ISIS(ISIL)는 모술 중앙은행에서 약 4억2,900만 달러를 강탈했다. 같은 기간 금괴도 대량으로 탈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4억2,900만 달러는 ISIS(ISIL)가 1년 간 월급 600달러의 조건으로 6만 명의 병력을 고용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ISIS(ISIL)는 또 인신매매나 도굴 문화재 밀매, 석유 밀거래 등 조직폭력단이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자금을 확보했다.
ISIS(ISIL)는 수니파 국가들로부터도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 총리 누리 알말리키(Nouri Kamel al Maliki)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카타르가 공개적으로 ISIS(ISIL)에 자금을 지원한다고 비난한 바 있다. 수니파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를 비롯해서 이집트, 아랍 에미리트(UAE), 예멘, 아프가니스탄, 튀니지 등이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요르단, 바레인 등 중동 내 미국의 우방국들은 같은 수니파인 ISIS(ISIL)가 절대로 이슬람을 대표할 수 없는 이단이라고 비판하면서 미국과 그 연합국에 동조했다.
2014년 6월 29일 ISIS(ISIL)는 이라크 모술에서 새로운 이슬람 독립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공식 명칭을 ‘이슬람국가(IS, Islamic State)’로 변경했다. 이들은 시리아 북부 알레포에서부터 이라크 동부 디얄라 주에 이르는 지역을 이슬람 지도자 칼리프(Caliph)가 통치하는 영토임을 선언했다. 이슬람국가(IS)는 금화 2종(1, 5 디나르), 은화 3종(1, 5, 10 디르함)으로 구성된 이슬람 디나르라는 자체 화폐도 발행했다.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다에시(IS)의 군사력에 대해 '외국인 자원군 3천 명을 포함하여 이라크에 6천 명, 시리아에 3~5천 명의 병력이 있다. 이 외국인 중 약 천 명이 체첸인이다. 500명에서 그 이상의 병력이 프랑스, 영국 등 기타 유럽 등지에서 유입되었다.'라고 보도했다.
알바그다디는 이슬람국가(IS) 수장인 초대 칼리프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수니파 칼리프 제도를 부활시키는 것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칼리프는 이슬람 제국 주권자의 칭호로서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의 뒤를 이어 이슬람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종교를 수호하며,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모든 일을 관장하는 최고권력자였다. 일바그다디는 신정일치(神政一致) 다에시(IS)의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다. 다에시(IS) 수립 이후 알바그다디는 철저한 보안을 유지한 채 활동하면서 '얼굴 없는 리더'로 불렸다. 그는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온라인 선전전에 집중했다.
다에시(IS)는 테러리즘 단체가 국가를 참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미국, 프랑스 등 서구와 러시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이 부르는 멸칭(蔑稱)이다. 다에시(IS)들은 자신들의 공식 명칭인 이슬람 국가의 약자인 IS로 표기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다른 이슬람 국가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예전 명칭인 ISIS나 ISIL로 칭해 왔다. 그러나 ISIS와 ISIL 모두 이슬람국가라는 표현이 포함돼 있어 논란이 일었다. 납치, 인신매매, 강간, 살해, 역사 유적 파괴, 무차별 테러 등 잔인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무장 집단을 ‘국가’로 표현할 수 없다는 비판이 대두한 것이다.
다에시(Daesh)는 IS의 과거 명칭 '이라크-알샴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of Iraq and al-Sham, ISIS)'의 아랍어 표기인 ‘다울라 이슬라미야 이라크 샴(Dawlat al-Islamiyah f'al-Iraq wa al-Sham)’의 약자이다. IS는 '다에시'라는 말이 '짓밟다'는 뜻의 아랍어 '다샤'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 이름의 사용을 금지했다.
다에시(IS)는 2014년 9월 말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해 수도로 삼을 것을 목표로 바그다드에서 1.61 km 부근까지 진격하기도 하였다. 다에시(IS) 병력은 2014년 10월 기준 최대 50,000명까지 증가했다. 다에시(IS)에는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영국 등 외국 국적을 가진 지하디스트도 다수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에시(IS)는 SNS를 주요 선전 무대로 활용했다. 이들은 다양한 SNS 계정을 통해 7개 국어로 서방 출신 신병을 모집했다. 또, 유튜브에 미국인이나 유럽인 포로의 참수나 화형 장면 등 잔혹한 동영상을 올려 반대 세력에 공포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다에시(IS)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극단주의와 그럴듯한 감언이설에 현혹된 추종자들을 모집해서 훈련시킨 뒤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 등지에서 테러 활동을 벌이게 하면서 서방 세계에 대항했다.
2014년 후반기 다에시(IS)는 극악한 전쟁범죄를 자행하여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2014년 6월 다에시(IS)는 모술 외곽의 교도소에서 600여 명을 집단학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모술 근처의 바두시 교도소 죄수들을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눈 뒤 시아파 죄수들을 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자동소총으로 처형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2014년 8월 초 이집트의 한 웹사이트에 미국이 다에시(IS) 창설을 지원했다는 음모론이 등장했다. 음모론은 미국이 중동의 이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이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 이슬람주의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을 이용해 비밀리에 다에시(IS)의 창설을 도왔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특히 미국 민주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인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6월 중순 출간한 자서전 '어려운 선택들'(Hard Choices)에서 이를 인정한 것이 확실한 증거라는 주장이었다.
이집트 혁명 당시 임시 문화부 장관직을 역임한 이집트의 자비르 아스푸르(Gaber Asfour)는 '클린턴이 2011년 6월 30일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한 이집트 군부 쿠데타를 막기 위해 다에시(IS)를 창설했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베이루트 주재 미국 대사관은 페이스북에 '미국이 다에시(IS)를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다에시(IS) 창설에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레바논에서 확산되고 있는 이와 상반된 주장은 날조된 것'이라며 소문을 부인했다.
2014년 9월 13일 다에시(IS)는 터키 접경 지역인 시리아 북동부 서쿠르디스탄의 코바니 주와 그 주도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 코바니 주는 쿠르드족의 자치정부 북시리아 민주연방체제(Democratic Federal System of Northern Syria) 일명 로자바(Rojava)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10월 2일 다에시(IS)는 코바니 인근의 쿠르드족 마을 350개를 점령했다. 30만 명의 쿠르드족은 국경을 넘어 터키의 샨리우르파 주로 도주했다.
2014년 10월 15일 다에시(IS)는 노예제 부활을 공식 선언했다. 이들은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인신매매를 인정하고 노예제를 공식화했다. 다에시(IS)는 그해 8월 소수민족 야지디족이 거주하는 이라크 신자르를 점령한 후 여성과 어린이들을 전리품으로 전투원들에게 나눠줬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노예제 부활이 노예제를 인정하는 이슬람법에 따른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노예제 부활은 이슬람 경전 꾸란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들의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다에시(IS)는 자신들의 만행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슬람 교리까지도 왜곡했다.
2014년 10월 30일 다에시(IS) 점령지인 이라크 서부 안바르 주 히트 마을과 라마디 북쪽 등 두 곳에서 알부-님르 부족의 시신 220여 구가 집단매장된 장소가 발견됐다. 10월 31일 다에시(IS)는 점령지인 안바르 주 히트 마을에서 전투를 벌이다 사막지대를 가로질러 후퇴하던 알부-님르 부족원 50명을 붙잡아 일렬로 세워놓고 집단학살했다. 2014년 11월 1일까지 다에시(IS)에 학살된 알부-님르 부족원은 최소 300명 이상으로 집계됐다.
다에시(IS)의 포로 참수 장면
2014년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동맹군과 시리아 북동부 서쿠르디스탄의 쿠르드 민병대인 인민수호부대(Yekîneyên Parastina Gel, YPG)가 다에시(IS) 격퇴전에 착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에시(IS)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인질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인질 살해에는 주로 참수라는 끔찍한 방법을 사용했다. 이후 점점 잔혹성이 높아져 화형, 폭파, 익사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다에시(IS)는 인질 살해 동영상을 선전과 대중의 지지 확보, 대원 모집에 이용했다.
다에시(IS)는 인질 살해나 자폭 테러에 어린 소년병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13세 소년병들까지 무기 운반, 경계 근무, 민간인 체포 등에 동원했다. 한국의 10대 소년 김모 군도 터키를 통해 다에시(IS)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져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그는 미국과 요르단 연합군의 라카 공습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에시(IS) 소년병들
2015년 들어서 다에시(IS)는 코바니 점령에 총력을 기울였다. 2015년 1월 다에시(IS)의 집중 공세로 서쿠르디스탄에서 쿠르드족 난민이 대량 발생했다. 이때까지 쿠르드족 난민은 총 40만 명에 달했다. 쿠르드 인민수호부대(YPG)와 자유 시리아군(FSA) 동맹군은 사활을 걸고 코바니를 방어했다. 이라크 남쿠르디스탄 자치정부인 쿠르드 지방정부(KRG)는 페쉬메르가(Peshmerga)를 코바니로 파견했고, 미국과 연합군은 코바니 탈환을 지원하기 위해 공습을 개시했다.
2015년 1월 26일 미국 주도 공습 하에 YPG와 동맹군은 코바니 도시와 마을들을 탈환하기 시작했고, 다에시(IS)를 꾸준히 밀어냈다. 1월 27일 코바니 시는 완전히 탈환되었지만 코바니 주 대부분은 아직도 다에시(IS)의 지배 하에 있었다. YPG와 동맹군은 코바니 교외 지역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2월 2일 다에시(IS)는 코바니로부터 25 km 떨어진 지점까지 철수했다.
2015년 2월 3일 작전 중 격추되어 다에시(IS)의 포로가 된 요르단 공군 전투기 조종사 무아트 알 카사스베흐 중위가 화형을 당하는 끔찍한 동영상이 공개되었다. 철창 속에 갇힌 알카사스베 중위가 불길에 휩싸인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이 여과 없이 그대로 비춰지면서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는 물론 전 세계인들은 다에시(IS)를 규탄했다. 2월 5일 요르단은 '순교자 마즈'라는 작전명 하에 전투기 30대를 동원해 시리아 내 다에시(IS) 군사훈련 시설과 무기고를 공습했다.
2015년 2월 17일 무함마드 알리 알하킴 유엔 주재 이라크 대사는 다에시(IS)가 장기 매매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조사를 요청했다. 그는 다에시(IS)의 대량학살 피해자 시신에서 수술 절개 자국과 일부 장기가 없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모술에서 장기 적출에 동참하지 않는 의사 수십 명이 처형당했다고 주장했다. 포로들에게서 불법 적출한 장기 매매는 인류의 이름으로 규탄받아야 할 비인도적인 전쟁범죄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2월 18일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IS는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테러리스트일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또, 'IS가 10억 이슬람 교도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도 이에 동조하면서 미국과 함께 다에시(IS)에 대한 공습에 나섰다. 러시아와 중국도 이를 지지했다. 이란은 다에시(IS)가 극단적 수니파 극단주의자 또는 이단이라고 규정했지만 미국 등 서방 연합군의 군사행동을 경계하고 있으며, 이들과의 공조도 거부했다.
터키는 본토까지 위협할 수 있는 다에시(IS)에 대하여 국제사회와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시리아 쿠르드 민주동맹당(PYD) 소속의 YPG를 지원하기 위한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KRG) 소속 페쉐메르가의 터키 국경 통과를 승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터키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자국 동남부 북쿠르디스탄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과 그 배후지 서쿠르디스탄의 YPG가 연합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터키는 YPG를 지원하기 위한 터키 내 쿠르드족의 시리아 이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시리아 북동부 국경지대에 30km의 안전지대 설치를 주장하는 터키로서는 다에시(IS)만 정리되면 언제든지 서쿠르디스탄의 YPG를 공격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었다.
서쿠르디스탄 로자바의 군사조직 쿠르드 인민수호부대(YPG)
2015년 전반기에 무엇보다 다에시(IS)가 세계인의 공분을 산 것은 인류의 역사 유적과 문화재의 파괴였다. 2015년 2월 25일 다에시(IS)는 모술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고문서와 희귀 서적을 대량으로 불태웠으며, 다음날에도 모술 박물관의 유물들을 파괴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공개했다. 그러나 모술 박물관에서 파괴한 유물들은 2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모조품으로 확인되었다. 다에시(IS)는 이런 방법으로 빼돌린 유물들을 암시장에 팔아서 자금을 조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에시(IS)는 이라크의 고대 도시 님루드 와 하트라 등의 유적도 파괴했다. '문명의 요람'이라고도 불리는 님루드는 고대국가 아시리아의 두 번째 수도로 기원전 13세기에 세워졌다. 님루드는 유네스코의 잠정적인 등재 대상에 올라 있는 세계유산이었다. 1980년대 님루드의 왕조 무덤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은 20세기 고고학사에서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그러기에 많은 수난을 당했다. 1820년 처음 알려진 이후로 서구의 탐험가와 고고학자들이 님루드의 유물을 약탈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도 파괴되고 약탈됐다.
하트라 유적은 모술 남쪽 110㎞ 지점에 있다. 하트라는 셀레우코스 제국 때부터 발달한 도시로 파르티아 제국의 중요한 요새 도시였다. 2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대 요새 하트라 유적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이었다. 2015년 3월 다에시(IS)는 하트라 유적을 파괴했다. 다에시(IS)는 극단적인 이슬람 해석에 따라 조각상, 우상, 성지가 초창기 이슬람 신앙의 순수성을 오염시키고 배교를 부추긴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큰 유적은 파괴하고 운반이 가능한 문화재는 암시장에 내다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2015년 4월 YPG와 동맹군의 반격으로 다에시(IS)는 코바니 주에서 획득한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하지만 이들은 라카 주 북서부 마을 몇 개를 여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바니 포위전은 다에시(IS) 격퇴전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다.
2015년 10월 1일 YPG 주도로 다에시와 알누스라 전선(JaN)에 대항하는 아랍인,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시리아 투르크멘, 체르케스인, 체첸인 민병대들의 연합조직 시리아 민주군(Syrian Democratic Forces, SDF)이 결성되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다에시(IS)는 서방 국가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하기 시작했다.
다에시(IS) 격퇴전에 나선 시리아 민주군(SDF)
2015년 11월 13일 다에시(IS)는 파리 동시다발 테러를 자행했다. 아바우드가 지휘하는 테러단은 파리 도심 7곳에서 동시다발 테러를 저질러 약 132명이 희생되었다. 프랑스 경찰은 다에시(IS) 테러단 아지트를 급습했다. 아바우드의 사촌 여동생 아이트불라센은 살려달라고 외치면서 인질인 척하다가 경찰이 가까이 오자 폭탄 조끼를 터뜨려 자폭했다. 파리 테러 직후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은 이들을 다에시라 불렀으며,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파리 테러 사건을 언급하며 IS를 다에시라 칭했다.
파리 테러는 프랑스 정부로 하여금 다에시(IS) 격퇴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공습을 강화하는 한편 자국과 미국, 러시아가 서로 협력하여 다에시(IS)를 격퇴하자고 요청했다. 이후 프랑스는 다에시(IS)의 시리아 수도 격인 라카에 대대적인 공습을 가했고, 러시아도 프랑스 정부와의 협력을 목표로 라카를 공습했다.
2016년 3월 22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오전 8시~9시 11분 사이에 다에시(IS)에 의한 세 차례의 연쇄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최초의 폭발은 브뤼셀 공항에서 연이어 두 번 일어났으며, 브뤼셀 시내에 위치한 지하철 말베이크 역에서 2차 테러 공격이 벌어졌다. 이 테러로 적어도 자폭 테러리스트 2명을 포함 34명이 사망하고 250명이 부상했다.
2016년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맞붙은 대선전에서 미국이 다에시(IS) 창설을 지원했다는 음모론이 또다시 등장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 트럼프는 8월10일 플로리다 주 포드 로더데일의 선거 유세에서 '오바마가 다에시(IS)를 창시했으며, 거짓말쟁이 힐러리가 공동 창시자다'라고 주장했다. 힐러리 후보의 패인은 오바마 케어로 세금 부담을 느낀 미 중산층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지만, 다에시(IS) 창설을 지원했다는 음모론도 한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7년부터 시리아, 이라크 정부군과 미국 주도 국제동맹군의 공습, YPG 주도의 SDF, 이슬람 시아파 민병대의 공세로 다에시(IS)는 주요 거점에서 패전과 후퇴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다에시(IS)는 2017년 5월 22일 잉글랜드 맨체스터 아레나에서 폭탄 테러를 자행하였다. 미국 팝가수 아리아나 그란데의 공연이 끝난 직후 밤 10시 33분경 공연장 바로 바깥에서 폭탄이 터져 22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다쳤다.
2017년 7월 다에시(IS)는 마침내 3년 동안 주요 거점이었던 이라크의 모술에서 쫓겨났다. 3개월 뒤인 10월에는 다에시(IS)가 수도라고 자처했던 시리아의 라카마저 함락됨으로써 그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2019년 3월 23일 미국 주도 국제 동맹군과 YPG 주도 SDF가 시리아 내 최후 근거지 바구즈를 탈환하면서 다에시(IS)는 완전히 물리적인 기반을 잃고 와해되기 시작했다.
2019년 10월 26일 다에시 초대 칼리프 알바그다디는 서쿠르디스탄 이들리브 바리샤에서 미군이 포위 공격하자 폭탄조끼를 터뜨려 자폭 사망했다. 이때 다에시(IS) 대변인으로 알려진 아부 알사한 알무하지르도 사망했다. 알바그다디가 죽자 다에시(IS)는 심각한 몰락 국면으로 내몰렸다. 다에시(IS)는 10월 31일 알바그다디의 사망을 공식 인정하고, 후계자로 아부 이브라힘 알하셰미 알쿠라이시를 지명했다.
알쿠라이시는 미국과 싸운 지하드(이슬람 성전) 학자이자 전사, 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알쿠라이시라는 이름으로 볼 때 그가 이슬람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가 속했던 알쿠라이시 부족의 후예일 것으로 추정된다. 다에시(IS)는 알쿠라이시가 무함마드의 혈통이라는 점을 내세워 추종자들에게 칼리프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에시(IS)는 미국 주도 국제연합군의 공격으로 이라크와 시리아 점령지를 모두 잃었지만 칼리프가 이끄는 일종의 유사국가 체제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다에시(IS)는 알바그다디를 제거한 미국을 겨냥해 '미국은 우리 지도부의 죽음을 즐거워하지 말라'며 '우리는 중동에 한정된 조직이 아니며 동서에 걸쳐 건재하다'면서 반드시 보복하겠다고 경고했다. 또 트럼프 미 대통령을 '미친 늙은이'라고 비난하며 '우리 지지자들이 칼리프의 죽음에 대해 보복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초대 칼리프 알바그다디가 가명이듯이 2대 칼리프 알쿠라이시도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 알쿠라이시는 압둘라로 알려진 다에시(IS)의 고위 인물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다에시(IS)의 국제 테러조직을 총괄한 압둘라는 미 국무부가 500만 달러(58억1,750만 원)의 현상금을 내건 인물이다.
자고로 비인도적, 반인륜적 조직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에시(IS)의 장래 운명은 어떻게 될까?
2019.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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