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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Kurd) 비운의 역사 - 영국과 미국, 러시아의 배신

林 山 2019. 11. 15. 00:31

쿠르드족 그 비극적인 역사


쿠르드족은 강대국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이 미국이 처음은 아니다. 명운이 걸린 결정적인 시기마다 배신을 당해 온 쿠르드족의 역사는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쿠르드족 그 비극적인 역사는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쿠르드족은 인구가 최대 약 4,000만 명 규모임에도 독자적인 민족국가를 수립하지 못했다. 쿠르드족은 인도·스리랑카·말레이시아 등에 거주하는 타밀족(7,800만 명), 파키스탄의 신드족(4,000만 명), 나이지리아의 요류바족(3,500만 명), 남아프리카공화국·레소토·짐바브웨·스와질랜드에 사는 줄루족(1,215만 명), 파키스탄·인도·아프가니스탄에 사는 발루치족(1,000만 명)과 함께 인구 1000만 명이 넘는데도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한 민족의 하나다. 


쿠르드족


쿠르드족은 중동에서 아랍인, 터키인, 페르시아인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종교는 대부분 이슬람교 수니파에 속하고, 그 밖에 수피파, 야지디파 등이 있다. 쿠르드족은 7세기 경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언어는 인도유럽어족 이란어파에 속하는 쿠르드어, 키루다시어를 독자 언어로 사용한다. 전통적으로 쿠르드족은 메소포타미아 평원, 터키와 이란의 고원지대에서 양과 염소를 치는 유목민으로서 생활을 해왔고, 농사는 최소한으로 이루어졌다.


쿠르드족의 유사 이전 시대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쿠르드족은 4,000여 년 전 현재의 이란, 이라크 국경지대에 있는 자그로스 산악지대에 살던 고대 민족 구티(쿠티)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문헌에 등장하는 수메르의 구투(Gutu, Guti, Gutian people)나 그리스-로마 기록의 퀴르트(Cyrtians) 혹은 카르두키(Charduchi) 등에서 쿠르드족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메소포타미아 제국 초기의 기록들을 보면 쿠르드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산악부족들이 자주 언급된다. BC 401년 지금의 터키 국경 바로 남쪽 이라크 자후 근처에서 크세노폰과 텐사우전드를 공격했던 카르두초이족은 쿠르드족으로 추정된다.


쿠르드족은 기원전 3세기부터 중동 일대에서 고유의 언어와 생활양식을 지키며 살아왔다. 하지만 쿠르드족은 파르티아나 사산왕조 시대까지는 여러 이란계 부족 중 하나 정도로 취급되어 왔다. 중세 아랍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 이란이 아랍 제국에 복속된 뒤 옛 이란의 서부 변경 지역(캅카스-아제르바이잔-구 메디아 일대)에서 이란계, 아르메니아계, 아랍계, 튀르크계 등이 뒤섞이며 단순한 이란계 종족이 아닌 독자적인 종족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쿠르드족이다. 


중세 쿠르드족의 세 왕국 샤다드, 하산와이히, 미르완 왕조


샤다드 왕조(951~1174)는 트란스카프카스 지역의 아니 지방과 간자 지방에서 주로 아르메니아인을 다스렸다. 디나바르의 하산와이히 왕조(959~1015)는 케르만샤 지역을 통치했다. 


쿠르드족 아부 슈자 바드흐 이븐 두스타크는 본래 목동이었다. 10세기 중반 메소포타미아와 이란 일대에서는 부와이 왕조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983년 이라크의 통치자 아브드 알 다울라가 죽고 부와이 왕조가 쇠퇴하자 이븐 두스타크는 독립을 선포하였다. 지역 강국이었던 함단 왕조마저 동로마 제국의 공세로 쇠퇴하자, 이븐 두스타크는 세력의 공백을 틈타 디야르바크르에서 반 호 북안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하였고 종종 동로마령 아르메니아도 공격하였다. 


쿠르드족 최초의 독립국가인 미르완 왕조는 990 ~ 1085년에 걸쳐 북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 서남부, 디야르바크르와 반 호수 일대 등 쿠르디스탄 북부를 다스렸다. 미르완 왕조를 아랍과 쿠르드의 혼합 왕조로 보기도 한다. 미르완 왕국의 동남부 국경은 현재 터키-시리아/이라크/이란 국경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미르완 왕조는 셀주크 튀르크 제국에게 복속되었다가 결국 합병당하여 1085년 멸망했다.   


쿠르드족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  


쿠르드족은 예로부터 군사적 용맹성으로 유명했다. 1169년 쿠르드족 미르완 왕조 출신 장군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는 이집트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의 시조가 되었다. 이븐 아이유브는 유럽에서 살라딘으로 알려졌다. 살라딘의 조상들은 원래 아랍계 부족이었는데, 아르메니아로 이주해 와서 살다가 점차 쿠르드화된 경우다. 살라딘은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에서 태어났다. 살라딘은 당시 이슬람군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의 군대에 쿠르드, 아랍, 투르크족과 자유민을 기용하고 여기에 노예군단을 더 추가시켰다.


살라딘


아이유브 왕조는 12세기 말~13세기 초 오늘날의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라크 북부,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예멘을 통치했다. 살라딘의 아버지 아이유브(나즘 앗 딘 아이유브 이븐 샤지)는 12세기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셀주크 투르크의 통치자 밑에서 활동했던 쿠르드족 용병 가문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에서 왕조의 이름이 유래했다.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 총독에 임명되자 그의 형제 시르쿠와 함께 십자군과의 전쟁에 대비해 시리아를 통일했다. 1173년 아이유브가 죽자 살라딘은 시아파의 파티마 왕조를 축출하고 나아가 이슬람교도들을 동원해 십자군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했으며, 이집트를 당대 세계 최강의 이슬람 국가로 만들었다. 


다마스쿠스의 살라딘 동상


살라딘은 1187년 십자군이 88년 동안이나 점령했던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슬람 세계의 영웅이었다.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성채 입구에는 살라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동상은 1993년 시리아 독재자 하페즈 알아사드가 세운 것이다. 


아이유브 왕조를 멸망시킨 맘루크 왕조


1193년 살라딘이 죽은 이후 그의 친척과 가신들이 각자의 속주에서 자치적 성격의 내정을 시행함으로써 아이유브 왕조는 가문연합체로 변모했다. 살라딘의 형제인 알 아딜과 조카인 알 카밀의 통치기에 프랑크 왕국과 아이유브 왕국의 긴장관계는 다소 완화되었다. 예루살렘은 다시 기독교의 수중에 들어갔다. 


맘루크 기병


1238년 알 카밀이 사망하면서 오랜 아이유브 가문의 분쟁이 재연되었다. 1250년 정변이 일어나 알 무잠 투란 샤가 살해되고, 아이뷰브 왕조의 술탄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났다. 투르크족 맘루크 출신의 아이바크는 아이유브 왕조의 후계자를 죽이고 술탄이 되면서 아이유브 왕조는 완전히 몰락했다. 이후 250여 년 간 시리아와 이집트는 맘루크와 그 자손들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의 등장과 쿠르드 민족주의 태동


13세기 말 동로마 제국과 룸 셀주쿠의 국경 지대인 아나톨리아 서북부에 등장한 유목 부족장 오스만 1세가 인솔한 군사 집단에 기원하는 오스만 제국은 15세기 말까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의 거의 모든 땅을 평정하고, 흑해 북해안과 에게 해의 섬들까지 세력권에 두었다. 


오스만 1세


1512년 오스만 제국을 계승한 셀림 1세는 동로마 제국에 이어 맘루크 왕조까지 멸망시켜 이집트, 이라크 지역까지 지배 영역을 확대하였다. 셀림 1세는 맘루크 왕조가 소유하고 있던 이슬람교의 2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권마저 장악하여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 군림하였다. 쿠르드족도 오스만 제국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영역


19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쿠르드족도 민족주의 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쿠르드족이 세운 여러 개의 공국은 19세기 전반까지 살아남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터키에 있었던 보탄, 하카리, 바디난, 소란, 바반 공국과 페르시아에 있었던 무크리, 아르델란 공국이 크게 번창했다. 쿠르디스탄은 서아시아의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정치적으로 통합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1897년 최초의 쿠르드족 신문이 창간되어 가끔씩 발행되다가 1902년에 폐간되었다. 1908년 최초의 쿠르드족 정치 단체가 결성되자 이스탄불에서 쿠르드족 신문이 복간되었다. 이 신문은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카이로에서도 복간되었다. 


쿠르드족의 거주지인 쿠르디스탄은 중세부터 근대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유지한 오스만 제국 내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쿠르드족은 독립국가를 만들어 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연합국 편에 가담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에 가담한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자 쿠르드족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 약속을 받아냈다. 


1918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의회에서 민족자결주의가 담긴 14개조 원칙을 발표했다. 14개 조항에서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지만 튀르크인이 아닌 민족은 '자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보장받아야 한다'고 한 데 용기를 얻은 쿠르드족 민족주의자들은 언젠가는 쿠르디스탄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 되었다.


세브르 조약에 따른 아나톨리아 분할


1920년 8월 20일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었다. 세브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고, 터키 외의 영토는 모두 승전국이 점령했다. 지중해 동부의 중근동 지역은 오랫동안 눈독을 들여온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해 위임통치령으로 삼았다. 이라크와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위임통치하게 되었다. 


이스탄불 주변의 유럽 영토인 동트라키아의 대부분, 아나톨리아 반도(터키 본토) 서부의 스미르나(오늘날의 이즈미르)는 그리스에 할양되었다. 터키 동북부는 아르메니아에 할양하고, 동남부 쿠르디스탄은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국을 위한 땅으로 남겨졌다.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 제국에 매우 가혹하고 굴욕적인 패전조약이었지만 쿠르드족에게는 독립국가 건설의 희망을 안겨 주었다.


미국, 로잔 조약 지지로 쿠르드족 첫 번째 배신 


하지만 더 많은 영토를 원한 그리스가 터키를 침공했다가 1922년 패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터키 군부는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터키 공화국을 수립했다. 터키 청년 장교들은 굴욕적인 세브르 조약을 거세게 반대했다. 터키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그리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연합국과 재협상해 세브르 조약을 무효화하고 로잔 조약으로 바꾸었다. 로잔 조약은 아랍 국가들의 수립을 승인한다는 조항은 재확인했지만, 아르메니아와 쿠르디스탄에 관한 조항은 삭제했다. 타협안에서 배제된 모술의 장래 문제는 국제연맹에 위임되었다. 


로잔 조약에 따른 터키, 그리스, 불가리아 국경


로잔 조약으로 터키는 1894년 당시 소유했던 동트라키아와 스미르나는 물론 아르메니아와 쿠르드족에게 주기로 했던 동남부 영토도 돌려받았다. 미국은 로잔 조약을 지지했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첫 번째 사례다. ​


영국 로잔 조약에서 쿠르드족 배신


영국은 로잔 조약에서 쿠르드족의 독립을 무산시켰다. 영국은 쿠르드족에게 주기로 한 이라크 북서부 지역에서 대규모 유전을 발견했다. 당시 석유 확보에 사활을 걸었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쿠르디스탄을 영국령 이라크로 편입시켰다. 쿠르드족은 제 잇속만 챙기려는 영국에게 쓰라린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처칠은 영국인에게 위인일지 모르지만 쿠르드인들에게는 저주의 대상이었다.


쿠르디스탄 왕국 영토


이라크 쿠르드족은 1922년 6월 독립을 요구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영국은 무력으로 개입하여 쿠르드족 봉기를 진압하였다. 1922년 9월 쿠르드족은 영국이 위임통치하던 이라크 중동부에 쿠르디스탄 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영국은 1924년 7월 무력으로 쿠르디스탄 왕국을 무너뜨렸다. 국제연맹은 1925년 모술을 이라크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926년 영국과 터키, 이라크가 조인한 앙카라 조약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아라라트 산


1927년 10월 쿠르드족은 터키 동부 아라라트 산 일대에 아라라트 쿠르드 공화국(Republic of Ararat)을 선포했다. 1930년 6월에도 이란과 터키 국경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두 나라에 의해 진압되었다. 1930년 9월 터키가 아라라트 산 일대를 다시 점령하면서 아라라트 쿠르드 공화국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군은 터키의 아라라트 산 일대 재점령을 수수방관했다. 쿠르드족은 1931년에도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932년 4월에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영국군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중동의 쿠르드족 지역(노란색)


세브르 조약과 로잔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멋대로 정한 국경선에 의해 쿠르디스탄은 갈가리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다. 이로 인해 쿠르드족 전체 인구의 45%는 터키, 24%는 이란, 18%는 이라크, 6%는 시리아에 거주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각 나라가 국경을 강화하자 계절적인 유목생활이 가로막힌 쿠르드족은 대부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포기하고 정착해서 농경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머지 쿠르드족은 새로운 직업을 갖거나 외국으로 떠나갔다. 


구 소련(소비에트연방) 이란에서 쿠르드족 배신


1939년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쿠르드족에게는 또 한번 독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1946년 쿠르드족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란을 점령했던 구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지원을 받아 이란 북부에 사회주의 국가인 마하바드 공화국(Republic of Mahabad)을 세웠다. 그러나 이란군은 서방의 지원을 받아 마하바드 공화국을 공격해 들어왔다. 쿠르드족의 다급한 지원 요청에도 소련은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 


마하바드공화국


쿠르드 공화국은 수립한 지 1년도 안돼 궤멸당하고 말았다. 소련이 쿠르드 공화국을 세우게 한 것은 이란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음이 드러났다. 소련은 이용만 하고 나서 쿠르드족의 등에 칼을 꽂았다. 쿠르드족은 소련으로부터도 배신을 당했던 것이다. 


미국 존 F 케네디 행정부의 두 번째 배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중동에서 제국주의 영국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라크 내 쿠르드족에게 무기를 공급해서 무장시키고 이라크 중앙정부에 맞서도록 도왔다. 1932년 영국이 세웠던 이라크 왕국은 1958년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고 반영주의자 압둘카림 카심이 총리 겸 국방장관을 맡아 서방에 맞섰다. 


압둘카림 카심


1963년 이라크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아랍사회주의부흥당(바트당)의 군사 쿠데타가 발생해 카심이 제거되자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 지원은 즉각 중단됐다. 미국은 이라크의 새 정부에 네이팜탄 등 군수물자를 지원했으며, 바트당 군사정권은 이를 쿠르드족 학살에 사용했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두 번째 사례다. ​ 


미국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세 번째 배신


1970년 이라크 바트당 정부는 쿠르드족에게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쿠르드족의 소망이던 자치 확대와 쿠르드어 지위 향상, 사회보장 혜택, 공정한 개발정책 등은 기대난망이었다. 1972년 쿠르드족은 미국과 이란의 지원을 받아 이라크 내 쿠르드 자치정부 수립을 위해 이라크군과 3년 동안 싸웠다. 당시 이란 팔레비 왕조와 결탁한 미국은 이란과 국경 분쟁을 벌이는 이라크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쿠르드족에 무기와 자금을 댔다. 그러나 이란과 이라크가 협상을 통해 국경 분쟁에 합의하면서 쿠르드 독립의 꿈은 또다시 무산되고 말았다. 미국과 이란은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미련없이 쿠르드족을 배신했다. 


이란 팔레비 2세 샤한샤 대관식


1979년 이라크에 들어선 이슬람 수니파 중심의 사담 후세인 군사정권은 친소정책을 펼쳤다. 이에 미국은 이라크 쿠르드족을 다시 무장시켜 중앙정부에 맞서게 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당시 친미 국가였던 이란을 통해 이라크의 쿠르드족에게 무기를 공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란은 이를 반대했다. 쿠르드족이 이라크 중앙정부를 상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두면 독립을 추진하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이란의 쿠르드족도 독립국가 건설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쿠르드족에 대한 무기 공급을 중단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는 것을 방관했다. 후세인은 협정에 서명한 직후 북부의 쿠르드족 거주지역에 군대를 보내 쿠르드족 수천 명을 학살했다. 미국은 한때 동맹이던 쿠르드족을 또다시 배신했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세 번째 사례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헨리 키신저는 이라크의 쿠르드족 인종학살에 대해 눈을 감았다. 키신저는 의회에서 이 문제를 따지자 '은밀한 활동을 선교 활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라고 잘라 말했다. 키신저는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수상자였다. ​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네 번째 배신 


1979년 이란은 이슬람 혁명으로 친미 팔레비 왕조를 몰아내고 민주주의와 이슬람 시아파 율법학자들의 감독체제가 결합된 신정체제가 들어섰다. 이란 혁명정부는 중동지역에 반미 이슬람 혁명의 확산을 선동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벌어지면서 이란발 반미 이슬람 혁명의 중동지역 확산이 주춤해졌다. 미국으로서는 이라크가 고마운 존재였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 견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라크를 지원했다.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 중 후세인 독재정권은 쿠르드족이 이란 편에 서는 것을 우려해 쿠르드 자치구에서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쿠르드족 대량학살 중 대표적인것은 후세인 정권이 1988년 3월 국제사회가 금지하는 화학무기인 사린, VX 등 신경독가스로 이란 국경에서 가까운 할라브자 쿠르드족 마을을 공격해서 하루만에 5,000명을 학살하고, 1만여 명에게 신체 손상을 입힌 전쟁범죄 사건이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유태인을 절멸시키려고 했던 것처럼 후세인 정권의 만행으로 할라브자 쿠르드족 마을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국제기구는 후세인 정권 통치 24년 동안 쿠르드족 30만 명 이상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할라브자 공동묘지에는 화학무기에 희생된 쿠르드족 1,500명이 묻혀 있다. 


학살된 쿠르드족이 묻힌 할라브자 묘지


미 레이건 행정부는 후세인 정권이 화학무기를 사용해서 쿠르드족을 대량학살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레이건 뿐만 아니라 미국의 책임 있는 당국자 누구도 사담 후세인의 쿠르드족에 대한 인종학살을 비난하지 않았다. 감탄고토(甘呑苦吐)의 달인 미국은 또다시 쿠르드족의 등에 칼을 꽂은 것이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네 번째 사례다.


미국 조지 H W 부시 행정부의 다섯 번째 배신


1990년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석유를 노리고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른바 걸프전이 벌어졌다. 미국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서방국가들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국가 연합군을 조직해 이라크 격퇴전, 이른바 '사막의 폭풍 작전'을 전개했다.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격퇴한 후 부시는 '이라크 군대와 국민이 스스로 나서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호소했다. 후세인 축출을 겨냥해 이라크 내부의 봉기를 촉구한 것이다. 


사막의 폭풍 작전


이슬람 수니파 중심의 후세인 정권에 맞서던 시아파는 이라크 남부, 쿠르드족은 이라크 북부에서 부시의 호소에 호응해 봉기했다. 하지만 이라크군이 시아파와 쿠르드족에 대한 무차별 진압작전에 나섰음에도 미국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방관하고, 끝내 이들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하지 않았다. 부시는 쿠르드족을 이용만 하고 토사구팽한 것이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다섯 번째 사례다.  


부시는 이라크에 민간정부가 아니라 독재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원했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독재자는 그만큼 다루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이 원한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이라크에 후세인이 아닌 다른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민주화 운동가들도 지원하지 않았다. 미국의 배은망덕하고 파렴치한 행동에 세계 여론이 악화되면서 부시 행정부도 뭔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이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보호에 나서자 미국은 이를 지원했다.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의 여섯 번째 배신


1993년 들어선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쿠르드족에 대한 두 가지 시선이 동시에 존재했다.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미국의 적인 후세인 정권의 박해를 받기 때문에 '좋은 쿠르드족'이었다. 반면에 터키 동부의 쿠르드족은 터키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분리독립을 원하면서 미국의 나토 동맹국인 터키를 성가시게 했기 때문에 '나쁜 쿠르드족'이었다. 터키는 미국의 주요 무기 수입국이었다. 클린턴은 터키에 대량의 무기를 공급했으며, 터키는 이를 사용해 수만 명의 쿠르드족을 학살하고 수천 개의 마을을 불태웠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여섯 번째 사례다. 


1993~1994년에는 쿠르드족과 아시리아계 주민 3,200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 학살은 터키 군부와 연계된 살해단의 소행으로 추정되지만 그 진상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다.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에 저항해 온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터키 정부 편에 서서 쿠르드족을 공격하고 주요 인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일곱 번째 배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민병대인 페슈메르가(Peshmerga)는 미국 편에서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군에 맞서 싸웠다. 이라크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사담 후세인은 미군에 체포되었다. 후세인 정권이 몰락하자 이라크의 쿠르드족 자치구 남쿠르디스탄 주민들은 독립의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2007년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을 우려한 터키는 이라크 내 쿠르드족 자치구를 폭격했다. 이라크 점령국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터키의 이라크 내 쿠르드족 폭격을 승인했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일곱 번째 사례다.


미군에 체포된 사담 후세인


오랜 세월 잔혹한 탄압과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은 민족주의 정치 세력을 중심으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해 왔다. 하지만, 쿠르드족이 거주하고 있는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 4개국은 모두 이러한 요구를 철저하게 탄압하고, 심지어 쿠르드족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까지 자행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쿠르드족 토사구팽 여덟 번째 배신 


2014년부터 쿠르드족은 미국과 동맹을 맺고 중동 지역에서 미군과 함께 다에시(IS)와 싸웠다. 다에시(IS)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미국이 쿠르드족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쿠르드족 민병대인 인민수호군(YPG)과 YPG  주측의 시리아 민주군(SDF)는 지상전에서 총알받이 역할을 하며 2018년까지 4년 동안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에시(IS) 대원들


그러나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2019년 10월 7일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미군 철수를 선언하고 '터키가 오래 준비한 시리아 북부 군사작전을 곧 추진할 것인데, 미군은 그 작전에 지원도 개입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그는 '쿠르드족은 우리와 함께 싸웠지만 이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돈과 장비를 지급받았다'며 '이제 이 말도 안 되는 끝없는 전쟁에서 벗어나 우리 군인들을 집으로 데려올 때'라고 말했다. 미군 철수 선언은 터키의 시리아 내 쿠르드족에 대한 공격을 묵인한다는 메시지였다. 


이어 트럼프는 시리아 북동부 국경지대 쿠르드족에 대한 터키의 공격을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다에시(IS) 격퇴전의 동맹 쿠르드족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팽개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쿠르드족을 철저하게 배신했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여덟 번째 사례다. '친구가 아니라 산을 벗하라'는 쿠르드족의 속담이 있다. 배반의 역사 속에 살아왔던 쿠르드족의 쓰라린 교훈이 녹아든 속담이다.     ​


쿠르드족에 등을 돌린 러시아의 푸틴 


트럼프의 미군 철수 선언 이틀 뒤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은 터키군과 친터키 시리아 반군 시리아국가군(SNA)이 시리아 북동부에서 YPG를 몰아내기 위한 ‘평화의 샘(Peace Spring)’ 작전을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터키는 미군 철수 선언 이틀 만에 쿠르드족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시리아 쿠르드 민병대 인민수호부대(YPG)


시리아 쿠르드족 자치정부와 YPG는 터키군과 터키군 지원 자유시리아군(FSA)의 공격을 받고 있다. 터키는 자국 내 북쿠르디스탄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반정부 분리독립 무장투쟁 단체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의 배후지를 차단하기 위해 시리아 북동부 국경지대 서쿠르디스탄에 30km의 안전지대를 설치한다는 목표로 '평화의 샘'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터키군의 '평화의 샘' 작전


시리아 북동부 지역의 미군 철수로 방패막을 잃은 쿠르드족은 러시아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바드란 지아 쿠르드 시리아 쿠르드 자치정부의 고위 관리는 '미군이 전면 철수하면 안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시리아 정부나 러시아와 대화할 수 있다'며 '러시아가 시리아 정부와의 대화에서 지지자와 보증자로서의 역할을 맡아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시리아 내전에서 쿠르드족의 적이었던 시리아 정부와의 중재를 러시아 측에 요청했다. 미국의 배신에 쿠르드족은 미국의 적 러시아와 시리아 알 아사드 정부 편으로 돌아섰다. 쿠르드족은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문제는 쿠르드족이 이번에도 배신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지난 10월 9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과 전화 통화를 하고, 터키의 시리아 북동부 지역 군사 작전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러시아 크렘린궁 역시 터키의 시리아 내 쿠르드족 공습 작전에 앞서 사전 교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러시아와 터키는 시리아의 영토적 통합성을 유지하고 주권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공감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는 쿠르드족이 내민 손을 뿌리치고 이미 터키 편으로 돌아섰음을 알 수 있다.


쿠르드족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배신과 토사구팽을 당해 온 민족이다. 이들의 꿈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쿠르디스탄에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쿠르드족의 염원이 과연 이루어질지 전세계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쿠르드족의 예에서 보듯이 국제관계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 힘이 없으면 강대국의 논리에 굴종할 수밖에 없다. 약소국들은 자력갱생만이 유일한 활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공짜로 도와주는 법은 절대로 없다. 강대국과 동맹을 맺거나 우방국이 되려면 막대한 돈과 자원, 이권을 갖다 바쳐야 한다.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처럼.....


2019. 11. 15.